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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불꽃놀이 (6) (91/181)

91. 불꽃놀이 (6)2021.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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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6120716482.jpg“그건 우리 쪽도 이미 확인한 사안이야.”

카메론 셀레스트는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 고귀한 에설론 백작에게 감히 대놓고 말했다.

16606120716482.jpg“소렐 이드리스와 칼리에르 공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따로 있어. 그래서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법을 부리는 건 사실이야. 그게 뭐? 딱히 새로운 것도 아닌데.”

카메론은 성마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16606120716482.jpg“시간 낭비하게 하지 마, 백작. 우리도 한가롭게 앉아서 노닥거릴 형편이 아니야.”

엘펜하임 본부에서 애써 숨겨두고 있던 봉인은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커다랗게 벌어진 금 사이로 마지막 헬레인 국왕, 레너드 3세가 피를 토해가며 했던 예언 내용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엘펜하임 기사단은 자신들의 멸망을 예언하는 그 내용이 대놓고 보이는 걸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흙과 모래를 다져 부어 넣어도, 오히려 더 틈을 벌려놓는 꼴밖에 안 된다고 하니 모두가 신경이 곤두서서 화를 터트릴 지경이었다.

16606120716493.jpg“그럼 움직이든가.”

루드밀라는 눈을 사납게 치뜨고 웃으면서 카메론을 긁어댔다.

16606120716493.jpg“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그쪽도 어차피 매달릴 곳이 나밖에 없는 거 아냐?”

물론 카메론 셀레스트는 성기사이자 뱀파이어에게 가차 없는 인간이었던지라, 루드밀라는 그 즉시 비명을 질러대며 끔찍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16606120716482.jpg“시간이 없어, 백작. 시간이 없다고.”

그건 카메론이 늘 상부로부터 듣는 말이었다. 그는 이래저래 독촉에 시달리고 있어서 상당히 신경이 예민해졌다. 같이 술을 마시면서 신경을 늘어뜨릴 좋은 술친구는 엔버네스에서 쫓겨나서, 그의 곁에는 지금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아무도 없기에 인생을 헛산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엘펜하임의 멸망이 목전에 다가온 이 마당에.

16606120716482.jpg“빨리 움직여.”

엘펜하임에게 시간이 없다면, 성기사의 낙인이 찍힌 루드밀라에게도 시간이 없다. 그래서 그녀 역시 급히 움직여야 했다. 카메론 셀레스트는 일단 붙잡아 놓은 에설론 백작을 혹독하게 밀어붙이면서도, 좀 짜증스러웠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지금 저 여자 말고는 딱히 뾰족한 수가 없다. 그만큼 소렐 이드리스는 철통 같은 경호를 받고 있었고,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제 아내에게 접근하는 모든 수상한 것들을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잡아서 도로 쳐내고 있었다. 어쩐지 불가능한 일을 바라는 것 같아, 카메론은 한숨이 나왔다. * 라이킨은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늘 여유가 없었다. 그는 치열하게 투쟁하면서 살아왔고, 여유보다는 권태에 젖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유가 없었다. 소렐 이드리스가 제멋대로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를 구성하는 잡다하고 진부하며 고루한 것들을 뒷발로 걷어차고 앞발로 때려 부순 뒤 마음 전체를 독차지해버렸을 때부터 그랬다.

16606120716508.jpg“슈토넨 후작이 계속 바쁘게 다니면서 뱀파이어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협정서에 서명을 받으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16606120716512.jpg“……그놈의 협정서 찢어발겨 불을 싸질러버리든가 해야지.”

조슈아는 전쟁에서나 들었던 상스러운 말이 라이킨 입에서 다시 터져 나오는 것을 들으며 요즘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스터의 신경이 안 좋은 쪽으로 계속 곤두서고 있다.

16606120716512.jpg“진심이야, 조슈아. 진심이야.”

라이킨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데뷔 선물로 받은 별장에 와서 소렐은 너무나 행복해하고 있는데, 여기저기에서 짜증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뱀파이어들이며 엘펜하임이 스멀거린다. 겨우, 겨우 소렐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참이었다. 누군가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좋아한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행복한 거 아니겠냐고 할 수 있지만, 라이킨에게는 간신히 들은 고백이었다. 그만큼 그의 마음이 소렐 앞에서는 급하고,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16606120716512.jpg“진심으로 말하는데 그놈의 협정서를 태워버릴 거야.”

16606120716508.jpg“그래봤자 슈토넨 후작 머릿속에 협정서 내용이 다 있을 텐데요. 분명히 다 외워버렸을 겁니다.”

16606120716512.jpg“그러니까 그 머리까지 포함해서 불 지르겠다고.”

16606120716508.jpg“아, 역시 마스터께서 그런 점을 간과하실 리가 없지요.”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20716508.jpg“하지만 신중히 움직이셔야 합니다. 국왕이 눈을 치뜨고 있습니다.”

16606120716512.jpg“뱀파이어의 일은 뱀파이어들끼리 해결하겠다고 이미 말해뒀어.”

16606120716508.jpg“슈토넨 후작이 그냥 뱀파이어라고 하기엔 비중이 상당히 크지요.”

16606120716512.jpg“할 일 없으니 정치나 들쑤시고 다니는 성가신 노인네.”

나오는 말마다 다 험악하다.

16606120716512.jpg“왜 웃어?”

라이킨은 조슈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16606120716508.jpg“옛날 생각이 나서 웃었습니다.”

16606120716512.jpg“옛날 언제?”

16606120716508.jpg“마스터는 항상 작전이 꼬이거나 진군해야 할 때 진군하지 못하면 그렇게 화를 내셨지요.”

16606120716512.jpg“윗선에서 멍청한 짓을 하면 짜증이 나잖아.”

16606120716508.jpg“일단은 군대에서 그렇게까지 대놓고 화를 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16606120716512.jpg“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16606120716508.jpg“그때가 가끔은 그립다, 이거지요.”

‘당신 성격이 나쁘다 못해 더럽다’라는 말은 대놓고 할 수 없잖나.

16606120716512.jpg“그립긴 뭐가……. 진흙탕 밟아가며 행군하고, 먹을 게 없어서 사자를 사냥해 먹어야 했던 게 그리워?”

라이킨은 그때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긴 신혼의 단꿈에 푹 빠진 그에게는 지금이 가장 소중할지도 모른다.

16606120716508.jpg“그래도 그나마 자유로웠잖습니까.”

아무리 어머니가 내몰아서 간 전장이었고, 그곳에서도 어머니의 첩자에게 감시를 받아야 했으며, 그의 뜻이 아닌 윗선의 뜻에 복종하며 움직였어야 한다 할지라도.

16606120716512.jpg“……그건 그랬지.”

어머니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샤를렌에게 죄책감이 들 만큼 자유롭고 몸이 가벼웠다. 아무리 진창과 피웅덩이를 구른다 해도 공작저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전쟁터에 남는 게 더 좋았다.

16606120716512.jpg“그런데 그때 이야기를 하니 말인데, 조슈아.”

16606120716508.jpg“예, 마스터?”

조슈아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라이킨은 삐딱하게 고개를 꺾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16606120716512.jpg“그때에 비하면 내가 참 물러 터졌지?”

16606120716508.jpg“……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들으셨습니까?”

16606120716512.jpg“내 안에서 그런 소리가 들리는데.”

조슈아는 입술을 말았다. 칼리에르 공의 수족 노릇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16606120716512.jpg“이딴 개소리를 하며 짖는 새끼들은 전부 다 즉결 처형했는데.”

추억이라는 말을 했다가 조슈아는 반강제적으로 예전에, 더 혹독하던 시대에 보고 겪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전쟁 중에 라이킨의 검에 목이 날아간 장교며 사병이 얼마던가. 탈영을 한다거나, 아니면 여인을 건드렸거나, 민간인의 재산에 손댔던 놈들은 전부 다 라이킨이 직접 죽였다. 포로들이나 민간인을 건드리는 건 그가 철저히 금했던 일이다. 갑자기 쳐들어온 뱀파이어들에 의해 온 영지가 쑥대밭이 되는 걸 보아야만 했던 농민의 아들은 수하들이 그런 짓을 하는 건 그냥 둘 수가 없었다.

16606120716512.jpg“내가 너무 얌전히 있었나 봐.”

16606120716508.jpg‘얌전히 있었긴요. 긴 세월 동안 아주 한결 같으십니다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미친개가 피바다를……. 아니,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잘못하다간 입 밖으로 나올 수 있지.’

조슈아는 현명하게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미친개가 피바다를 만들고 있다는 건 뱀파이어들이나 엘펜하임 성기사들 사이에서 라이킨의 성질머리로 인한 결과를 가리킬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적군이나 아군이나 똑같은 표현을 쓴다는 건 참 흥미로운 점이다.

16606120716512.jpg“아, 그래. 얌전히 있었지.”

조슈아는 ‘얌전히’라는 단어가 라이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지만, 그의 안전이 더 중요했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뱀파이어였다.

16606120716512.jpg“슈토넨 후작과 손을 잡는 놈들은 확인하는 대로 나한테 이름을 가지고 와. 하나씩 없애지.”

동족을 도륙내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말에는 어떠한 반박도 달아서는 안 된다.

16606120716508.jpg“예, 마스터.”

마스터의 짜증이 분노로 변하기 전에, 부디 모든 일이 해결되길. 조슈아는 그렇게 빌었으나 사실 그럴 눈치가 있는 뱀파이어가 별로 없다는 절망적인 현실도 잘 알고 있었다. 태생이 귀했고, 지금도 귀하게 떠받들리고 있는 그들은 누군가의 눈치 따위, 절대 보지 않는다. * 루벤은 소렐 이드리스를 야외무도회 때 보고도 인사를 하지 못해 약간 아쉬웠다. 여기저기 다리를 걸쳐 놓을 수밖에 없는 방계로서는 당연한 거였지만, 그것 말고도 어쨌든 소렐은 구면이다.

16606120745208.jpg‘그냥 인사를 했다면 좋았을 텐데.’

별거 아닌 평범한 인사. 야외무도회는 재미있냐, 라든가, 오늘 입은 드레스가 참 예쁘다, 라고 여름밤에 걸맞은 잡담 정도는 한두 마디 정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루벤은 문득 생각했다.

16606120745208.jpg‘난 외롭나?’

모든 뱀파이어가 다 외롭다. 딱히 특별하지 않다.

16606120745208.jpg‘아니면 신난 건가?’

아, 그래. 그런 건가 보다. 모두가 치열하게 생존하고, 머리를 굴려대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보통 신입생 같은 애를 만났다. 딱 스무 살, 그 나이처럼 생각하고 그 나이답게 구는 애다.

16606120745208.jpg‘그래서 사비나 로체가 걔를 좋아하나 보다.’

뱀파이어 사이에서 경계할 필요도 없고, 진심 어린 친구가 될 수 있는 존재는 드물었다. 루벤 실베스터는 답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20716493.jpg“루벤?”

루벤은 부르는 소리에 모습을 감춰버렸다. 아아, 성가시다. 이미 칼리에르 공에게 루드밀라가 깨어났고, 성기사와 연관되었다는 말을 찌른 이상 그는 루드밀라에게서 멀어져야만 했고, 또 그러고 싶었다.

16606120716493.jpg“얜 어디로 간 거야?”

루드밀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루벤은 없다. 야외무도회에서 술이라도 마시고 뻗었나?

16606120716493.jpg“게으르기는.”

루드밀라는 카메론에게 시달려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더구나 야외무도회에서 소렐을 보고 난 이후라 자존심은 잔뜩 생채기가 나서 뚝 부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녀는 그러나 아주 강하고, 고집이 강했으며,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16606120716493.jpg“……개가 필요한데.”

개가 필요했다. 아주 잘 무는 사냥개. 잠시 생각하던 루드밀라는 보이지 않는 루벤 대신 그녀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줄 이를 찾아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무척 초조해 보였다. 늘 그랬지만, 시간이 없었다. * 암살자들이 움직였다. 칼리에르 공이 키우는 암살자들은 슈토넨 후작, 아서 모드릭 헴피온의 뒤를 밟아 명부에 이름을 적었다. 모든 암살은 티가 나지 않게, 도대체 누가 배후인지도 모르도록 이루어지는 법. 암살이 이루어지는 때는 그들의 마스터가 정한다.

16606120716512.jpg“델루테.”

협정서에 서명한 이름 하나가 전달되었다. 암살자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는 만큼 그들의 표적 역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암살자들의 표적이 된 자에게도 원하는 표적이 또 있다. 그렇게 맞물리고 또 맞물려서 걷잡을 수 없이 커다래진 바퀴는 엉망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각각의 표적이 모여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16606120749865.jpg“라이킨?”

강대한 이의 가장 소중하며 태어났을 때 붙여졌던 이름을 마음껏 부를 수 있는 존재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들어와도 괜찮다고 늘 말해두지만, 저건 그녀가 물려받은 본능인지 항상 먼저 얼굴만 내밀어 확인부터 했다. 그런 다음에 그가 웃으며 바라보면 뛰어와서 폭 안긴다. 예전엔 조심스럽게 걸어오더니, 대담해진 토끼는 그녀가 마구 안겨도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라이킨은 아주 단단하고 체구가 큰 사람이라, 그녀가 아무리 달려와 안겨도 아무렇지도 않게 답삭 받아 안아주었다.

16606120716512.jpg“예, 공주님.”

16606120749865.jpg“바빠요?”

16606120716512.jpg“그럴 리가요.”

16606120749865.jpg“이상하다, 라이킨은 늘 바쁜 것 같은데, 항상 바쁘지 않다고 하네.”

16606120716512.jpg“공주님께서 오시면 전혀 바쁘지 않습니다.”

그 말에 또 좋다고 얼굴을 비비적거린다. 그러다가 그녀는 책상 위를 문득 바라보았다.

16606120749865.jpg“재떨이가 바뀌었네요.”

여름 별장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재떨이도 새것일 텐데.

16606120716512.jpg“예, 제가 떨어트려서.”

16606120749865.jpg“보통 떨어트렸다고 해서 망가지진 않잖아요.”

아주 아주 무거운 건데? 소렐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라이킨을 쳐다보았다.

16606120716512.jpg“그러게나 말입니다. 잘못 만들어진 물건이었나 봅니다.”

그는 태연하게 말하며 소렐을 안은 채 그대로 걸어갔다.

16606120749865.jpg“라이킨, 있잖아요. 아버님이 말씀해주신 건데, 축제가 열린대요.”

16606120716512.jpg“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20716512.jpg“포도를 수확할 때가 되었으니 축제가 열리는 거군요. 예.”

16606120749865.jpg“그때 소싸움도 하고, 불꽃놀이도 한다고 했어요.”

16606120716512.jpg“재미있겠군요.”

16606120749865.jpg“구경하고 싶어요.”

라이킨은 쓴웃음을 지으며 소렐을 내려다보았다.

16606120716512.jpg“공주님, 제가 공주님보다 훨씬 오래 살긴 했지만, 그런 걸 일일이 제게 허락을 받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공주님께서 가고 싶으시다 하시면 함께 갈 거니까요.”

16606120749865.jpg“그런 건 알아요. 허락받는 게 아니잖아요.”

그것도 몰라?

16606120749865.jpg“같이 가자는 거지. 바빠요?”

16606120716512.jpg“바쁘지 않다니까요.”

그는 언제나 바쁘지 않을 거고, 언제나 그녀와 함께 다닐 것이다.

16606120716512.jpg“공주님과 보내는 첫 여름 아닙니까. 어디든 함께 가고, 뭐든 함께해야지요.”

라이킨은 그녀를 안고 자리에 앉았다. 졸지에 그의 다리 위에 앉게 된 소렐이 고개를 들었다.

16606120716512.jpg“공주님이야말로 이제 점점 바빠지실 겁니다. 시험이다 뭐다 해서 저보다 더 바빠지시면, 그땐 이 남편에게 관심이 뚝 떨어지시겠지요.”

소렐은 그가 스스로를 ‘남편’이라 지칭하는 게 새삼스럽게 부끄러우면서도 간질거리게 좋았다.

16606120749865.jpg“아니, 아니에요…….”

16606120716512.jpg“대학이 얼마나 바쁜데요. 공주님께서는 밀려드는 과제와 시험에 저는 까맣게 잊으실 겁니다.”

16606120749865.jpg“교수님이 더 바쁘지 않을까요?”

16606120716512.jpg“학생이 더 힘들지요.”

그는 소렐의 머리카락을 훑어 내리며 웃었다. 그래, 우리 공주님께서 축제에 가시고 싶으시단 말이지. 수영도 배우고, 승마도 하고, 요즘 들어 부쩍 건강해진 소렐의 뺨이 조금 홀쭉해진 것 같다. 아니, 그저 젖살이 빠진 건지도 모르겠다.

16606120716512.jpg“그래도 보람되고 즐거우실 겁니다. 많이 배우시고, 많이 즐기십시오. 4년간 우리가 함께 갈 곳도 무척 많습니다. 겨울에는 또 겨울 별장으로, 봄에는 꽃구경도 가고요.”

그리고 자주 그의 무릎 위에 앉아만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16606120716512.jpg“그러다가 졸업하시면, 그때는 꼭 결혼식을 올리도록 하지요.”

16606120749865.jpg“그때?”

16606120716512.jpg“예, 그때.”

16606120749865.jpg“왜 그때예요?”

라이킨은 순진하게 물어보는 소렐이 결혼식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걸 바로 알아차리곤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언제 해도 상관이 없는 거다. 아니,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거다. 하긴 그녀에겐 결혼이란 건 이미 했어도 어쩐지 남의 이야기 같을 테니까.

16606120716512.jpg“졸업이라도 하셔야지요.”

아직까지는 너무 어리다는 이야기다. 혹은, 라이킨이 더 기다리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16606120749865.jpg“너무 먼 미래 같아요.”

16606120716512.jpg“……예. 그러실 겁니다.”

그도 지금 너무나 까마득해서 기다리느라 미칠 것 같으니까. 부디 그때까지 소렐이 그에게 싫증 내지 않고 그저 즐겁고 행복하기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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