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불꽃놀이 (4)2021.06.05.
에설론 백작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은 첫눈에 소렐 이드리스가 애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여자애는 핏덩이야. 별거 없어. 이제 막 데뷔한 데뷔탕트인걸. 자네가 충분히 한입에 털어먹을 수 있을 거네.’
슈토넨 후작, 아서 모드릭 헴피온이 소렐을 평가한 것과 그녀가 받은 인상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냥 좀 예쁘게 생긴, 아직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애였다. 그래서 루드밀라는 딱히 분노하거나 짜증이 나지는 않았다. 애를 상대로 진지하게 화를 낼 만큼 그녀는 유치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리네. 어려서 유감이고.’
더구나 그 분노는 소렐 이드리스를 향한 일차원적인 분노가 아니었다. 그녀는 엄연히 한 약혼을 끝내 무시하고 결혼한 라이킨에게 짜증이 났고, 그녀의 지위였어야 할 칼리에르 공비 자리를 빼앗겼다는 게 화가 치밀 정도로 자존심이 상할 뿐이었다.
‘빼앗긴 건 되찾으면 되는 거고.’
그저 차가운 머리로 생각하고, 아무런 자비 없이 실행하면 되는 것이다. 루드밀라는 소렐 이드리스를 ‘치워내기로’ 했다. 그건 전부 다 전략이고 정치적 암투였다. 힘을 얻고, 정략결혼을 성사시키고, 가문을 빛내며, 나아가 더 큰 권세를 얻는 건 언제나 그녀의 목표이자 철학이었다.
‘일단 봤으니 됐어.’
루드밀라는 목표를 죽이기 전에 확실하게 확인하고, 주변을 탐색하며, 빈틈을 찾은 뒤 그대로 물어 죽였다. 오늘 소렐 이드리스를 본 건 그녀가 루드밀라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치우기 전에 얼굴을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어떻습니까?”
라이킨은 소렐에게 물었다.
“야외무도회가 마음에 드십니까?”
소렐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시나스의 유지 에스페소 씨가 주최한 야외무도회는 해변에서 열렸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음악과 기가 막히게 어우러지고, 곳곳에 꽃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서로 어울리며 달콤한 술을 기울였다. 이곳은 엔버네스 같은 대도시가 아닌 휴양지라서 그런지, 벌써부터 보타이를 풀어 내리고 흐트러진 신사들도 여럿이었다.
“내가 상상한 그대로예요.”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한 바퀴를 빙 돌면 라이킨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새파란 눈빛은 그녀를 볼 때마다 온기가 돌았다. 그저 부드럽고 다정하기만 하다.
“라이킨이 있으니까, 음.”
응. 소렐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숨겨버린 말은 조금 부끄러워서 할 수가 없었다.
“제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모든 생각을 알고 싶은 라이킨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소렐이 여기서 얼버무려봤자 그가 집요하게 캐물을 거다. 소렐은 그를 보다가, 발뒤꿈치를 한 번 들어보았다. 귓속말을 할 정도로 가까워지지는 못한다. 라이킨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의 손을 다 잡고 한 번 더 뒤꿈치를 들자 그가 얼른 몸을 숙여주었다.
“라이킨이 있어서 다 완성되었다고요. 음, 그렇다고요.”
재빨리 속삭이곤 부끄러워서 다시 쏙 내려가 버렸다. 라이킨은 손을 꽉 잡아 그녀가 도망치게 두지 않았다. 그러곤 웃으면서, 얼굴이 다 허물어지도록 웃으면서 그녀에게 닿을 때까지 몸을 숙였다.
“저는 공주님이 계셔서 매순간이 특별해집니다.”
이곳은 발레시나스. 엔버네스에서 통용되는 딱딱한 예법도 조금은 느슨해지고, 별빛이 내려 아름다운 해변과 식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열기에 모두가 좀 더 자유로워지는 곳이다. 어쩐지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글래스턴 공작, 칼리에르 공이 사람들이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제 아내에게 웃으며 이마를 맞댔다. 보기 드문 일이었다.
‘봤으니 됐어.’
루드밀라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녀는 잠시 잊고 싶었던 과거를 라이킨의 표정을 보며 생각해냈다.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은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를 사랑했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힘, 권력, 부를 모두 가지고 있는 유일한 뱀파이어였다. 그녀는 권력을 사랑했기에 당연히 권력의 상징이자 정점인 저 남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사술까지 알아볼 때, 얼마나 절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썼던가. 그 감정들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 루벤 실베스터는 솔직히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남의 일을 구경하는 건 재미있는 법이다. 특히 그게 사랑싸움이라면 더더욱 재미있다. 뭐, 그리 볼만한 구경거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은 발레시나스 산 와인과 나쁘지 않은 음악,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에 양념처럼 깃들여진 사랑 싸움이라면 꽤 괜찮았다.
‘나름 표정관리를 잘하고 있는걸.’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은 아주 강철 같은 여자다. 다시 말해 무슨 말을 해도, 그녀의 쇠 같이 단단한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폴리아나 그린과는 또 다르다. 폴리아나 그린이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노력하는 건 포기한 채 불같은 감정을 그대로 표시하는 편이라면, 에설론 백작 루드밀라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모든 걸 자신의 마음대로 무섭게 밀고 나갔다. 그게 가끔은 소름 끼칠 정도로 앨리스 루이즈 칼리에르와 비슷했다.
“샴페인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지나가던 시종이 쟁반을 내밀자, 루벤은 거절하지 않았다. 삼삼오오 모인 이들은 가끔 세련되게 차려입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여왕 같은 루드밀라와, 저 멀리 한구석에서 서로 속삭이느라 여념이 없는 칼리에르 공 부부를 힐끔거렸다.
“오늘은 뱀파이어들이 꽤 있네요. 아주 드문 일이에요.”
발레시나스 공작에 그 자식들까지 다 왔으니, 드문 일임은 분명했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다들 아주 외모들이 화사하신 게, 보는 사람들이 참 즐겁다니까요.”
이들은 인간들이 대부분이라, 백칠십 여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른다. 아는 사람만 흥미진진할 뿐이다.
“저분은 에설론 백작이라면서요?”
“너무 아름답네요.”
“칼리에르 공비전하도 오셨대요.”
“아, 그 귀여운.”
“작달막하죠?”
보통 그 작달막하고 귀여운 아가씨, 로 통하는 소렐 이드리스는 딱 한 사람에게는 귀엽다는 말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재미없으십니까?”
라이킨은 소렐이 약간 뚱한 표정을 짓자 웃으며 물어보았다.
“아뇨…….”
또로로록, 소렐의 눈은 잘 훈련된 시종들이 들고 다니는 쟁반 위 술잔을 자꾸만 따라다녔다.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는 샴페인을 그녀도 한 번 맛만, 딱 맛만 보고 싶은데 말이다.
“공주님.”
하지만 라이킨은 못 마시게 한다. 그는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쟁반 쪽으로 손을 뻗으려던 걸 자연스럽게 막고 이쪽으로 데리고 왔다.
“한 잔을 하시면 여기에서 온갖 마법은 다 부리실 겁니다.”
“저는 언제나 마법에 대한 탐구와 호기심이 가득해요.”
“예,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사람들이 혼비백산할 겁니다.”
아차, 그건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
“예.”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법뿐만 아니라 매사에 탐구정신이 강하신 건 언제나 훌륭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탐구정신을 제게도 좀 나눠주시지요.”
그는 잡고 있던 소렐의 손을 솜씨 좋게 끌어 당겨 그녀가 빙그르르 돌아 그의 품에 폭 안기게 만들었다. 어째 오늘 내내 그녀의 관심을 구걸 중이다. 태어난 이래로 외모에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본 역사가 없거늘, 더 신경 써야 하나? 더 잘생기고 더 소렐의 취향에 맞아야 관심을 오롯이 받을 수 있을까?
“요즘 들어 자꾸 제 시선을 피하시는 것 같습니다.”
또 시선이 또로록 내려간다. 이번에는 또 뭔가? 샴페인? 황금색 쟁반? 아니면 저 멀리에서 재미있어 죽겠어서 계속 구경 중인 루벤 실베스터? 공주님이 아직까지 그놈을 발견하지는 못하셨을 텐데? 아니면 샤를렌?
“그게 아니고…….”
아니면? 라이킨은 눈으로 물었다. 소렐은 간신히 대답했다.
“부끄럽단 말이에요.”
그는 픽 웃었다.
“뭐가 부끄러우십니까?”
숙녀는 첫사랑이 간질거리고,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다가도 지나치게 잘생긴 남편과 눈을 마주치게 되면 부끄럽고 수줍기만 하다. 라이킨의 표정을 읽기엔 그녀가 아직 어려서 자신이 없다. 그도 그녀만큼 떨리고 설렐까? 괜히 딴청을 하면서도 온통 그에게만 신경이 쏠리는 걸 다 알고 있을까? 다 알고 있겠지. 그래서 더 부끄러웠고, 그래서 더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다 알면서 괜히 물어봐…….”
물론 라이킨은 다 알았다. 살아온 세월이 몇인데, 첫사랑에 푹 빠진 소녀의 마음 하나 모르겠는가.
“그래도 절 봐주셔야지요, 공주님. 똑바로 봐주시고, 공주님 거구나, 하고 생각해주셔야지요.”
“노, 노력하는 중이에요.”
“예. 그러니 불안해하지도 마세요.”
거봐. 다 알고 있잖아. 소렐은 조금 뾰로통해졌다. 그녀도 그의 속을 알고 싶었다. 샤를렌이나 폴리아나처럼, 경험이 많은 멋진 여성이 되고 싶었다. 그렇다면 더 라이킨과, 아는 것도 많고 대학교수인 라이킨과 잘 어울릴 수 있을 텐데. 소렐은 더 멋있어지고 싶었다.
“난 가끔 라이킨 속을 모르겠어요. 내가 어려서 그렇겠지만…….”
‘모르셔야지.’
라이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딱히 좋은 게 들어 있지는 않았다.
“저는 참 단순한 사람이라, 공주님의 관심을 받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러므로 토끼 공주님은 헬레인 종족답게 눈치가 아주 빠르고, 또 지나치게 감이 좋았다. 생존에는 특화되어 있다. 그는 지금 펠릭스 이드리스가 알았다간 머리를 터트려버릴 생각들을 꾹꾹 눌러 참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나중에 생길 귀여운 토끼와 뱀파이어 혼혈들을 상대로 라이킨이 하는 생각을 똑같이 하는 놈들이 있다면, 그 역시 그놈들의 머리를 성심성의껏 터트릴 거지만 말이다.
“술은 집에 돌아가서 둘이서 마셔볼까요?”
라이킨은 그렇게 말하며 소렐이 눈치채지 못하게 주변을 살폈다. 에설론 백작에게 붙은 성기사들은 일단 이곳에는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여기까지 쫓아오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에설론 백작은 분명히 그에게 인사를 할 것이다. 그 역시 백작에게 인사는 해야 했다. 그게 사교계의 예법이자, 일종의 규칙이니까. 라이킨은 적당히 사교적인 게 여러 모로 편리하다는 걸 일찌감치 터득했다.
“아뇨, 괜찮아요. 나는 그냥……, 라이킨이랑 같이 있는 지금이 좋아요. 지금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거예요.”
대놓고 적의를 표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라이킨은 지나가던 시종의 쟁반에서 샴페인 한 잔을 휙 들었다.
“맛만 보십시오.”
“안 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제가 이렇게 공주님께 약합니다.”
흥, 그러면 누가 사양할 줄 알고? 소렐은 용감하게 그가 내미는 샴페인 잔을 받아 마셨다. 그러곤 잠시 후, 오만상을 찡그리며 샴페인을 바라보았다.
“이거 써요. 이상해요. 맛없어.”
“보통 술이란 게 그렇습니다.”
“산딸기 술은 맛있던데……!”
“산딸기로 아주 달콤하게 만들었으니까요.”
라이킨은 소렐의 손에서 샴페인 잔을 다시 받아들었다.
“공주님께는 특별히 단 술만 드려야겠습니다.”
“언젠간 뭐든 잘 마실 수 있을 거예요.”
“글쎄요. 단것을 좋아하는 건 취향의 문제이지, 나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공주님.”
그는 그러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손을 다시 꼭 잡았다. 아주 소중한 것을 감싸듯 폭 감싸서 그의 손 안에 완전히 집어넣었다.
“단것을 좋아하시는 건 취향이니, 굳이 싫어하시는 것까지 드시려고 하지 마십시오.”
라이킨은 빙긋 웃어준 뒤 다가오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천천히 걸어가며 해변을 감상하는 무리에 에설론 백작, 루드밀라가 섞여 있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서로를 소개시켜주고, 또 인사를 나누었다. 소렐은 라이킨과 지나치게 붙어 있지도 않고, 그저 적당히 누가 봐도 부부사이로 보일 만큼의 간격을 유지한 채 에설론 백작과 마주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리처드, 이쪽은 내 질녀예요.”
“맥밀란 양, 이쪽은 주디스 개럿 부인입니다.”
서로서로 인사를 하고 소개를 한 뒤, 담소가 이어지는 그 틈바구니에서 에설론 백작 루드밀라는 어렵지 않게, 아주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제임스.”
사람들은 ‘역시 뱀파이어들은 서로 다 아는 사이구나!’라는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나 소렐은 주변 분위기는 읽지 못한 채, 그저 루드밀라를 보고 속으로 감탄하고 있을 뿐이었다. 루드밀라에게서는 언뜻 샤를렌과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혼자 당당하고, 거리낄 것 없으며, 아주 우아한 태도와 깔끔하고 깨끗한 외모, 그리고 말투마저 사람을 사로잡는 것 같았다. 아무리 사술을 사용한 사람이라지만, 루드밀라는 대단히 매력적이고 겉보기엔 멋있었다. 멋진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 않습니까?”
그 태도는 소렐이 꼭 가지고 싶고, 본받고 싶은 태도이기도 했다. 우아한 몸짓, 곧은 자세, 키가 커서 더 아름다워 보이는 모습은 뱀파이어들이나 가지고 있는 것이지, 작달막한 토끼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렐은 그런 생각을 하느라 라이킨이 뭐라고 대꾸하는지도 잘 듣지 못했다.
“늘 그렇지요.”
루드밀라가 라이킨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도 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쪽은 내 아내, 소렐 이드리스입니다.”
아차. 소렐은 얼른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서늘한 눈이 그녀에게 와 닿았다. 라이킨을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싸늘하고 차가운 눈빛이다. 라이킨은 그때 어떻게든 웃어주면서 소렐이 겁을 먹지 않게 하려고 애썼지만, 루드밀라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소렐에게 친절하지 않은 또 다른 뱀파이어다. 아름다운 은발에 싸늘한 자색 눈을 가진, 두렵고 무서운 뱀파이어가 라이킨과 한때 약혼을 했었다.
“안녕하세요.”
소렐보다 한참 키가 큰 루드밀라는 작은 토끼를 내려다보며 입술만 움직였다. 픽 웃는 것도 아니고, 무감한 눈이다. 살기는 느껴지지 않지만 소렐은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나를 사냥감으로 보고 있어.’
동등한 사람이 아니라 잡아먹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찮은 존재로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하얀 귀가 퐁하고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루드밀라는 그녀의 기세를 잘 갈무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세를 풀어놨다 해도 소렐은 무섭지 않았다. 뱀파이어들에게는 익숙해졌거니와, 그녀는 루드밀라보다 훨씬 더 무서운 뱀파이어를 알았다. 기세로 따지자면 루드밀라보다 훨씬 두려운 뱀파이어는 지금 소렐의 곁에 서서 루드밀라를 대신 내려봐주고 있었다. 그래서 루드밀라는 어쩔 수 없이 계속 다물고 싶었던 입을 움직여야 했다.
“듣던 중 가장 놀라운 소식이네요. 당신이 이 숙녀분과 결혼을 했다니.”
루드밀라는 묘한 말을 하는 데 능했다. 라이킨은 딱 질색인, 돌려 말하는 화법이었다. 귀족들끼리 말을 우아하게 한답시고 돌려서 헐뜯는 방식이다. 위선과 권위가 가득했지만, 동시에 품격 또한 갖춰야 했다. ‘당신’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 아니면 ‘이 숙녀분’인가, 혹은 ‘결혼’인가. 어느 쪽이든 묘하게 소렐이 기분이 나쁠 말이었다.
“그게 가장 놀랍다니 에설론 백작다운 말이군요.”
물론 라이킨은 그런 화법이 질색이라고 해서 안 하는 건 아니었다. 온화한 발레시나스 공 로렌스 오블리앙은 언제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개차반에 지랄 맞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성질머리를 가졌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라이킨은 웃으며 욕설을 퍼붓거나, 재떨이를 머리에 집어 던지거나, 우아하게 상대방을 잡아 뜯어버렸다. 그의 성격은 앨리스 루이즈 칼리에르가 죽은 후에 좀 더 온화해졌으나 그건 주변 사람들에 한정되었다. 소렐 이드리스는 아예 예외이니 논할 이유가 없다.
‘네가 그런 소리 할 줄 알았다.’
라이킨은 딱 그런 표정으로 루드밀라를 보고 있었다. 너는 그런 말밖에 할 줄 모르지, 라는 경멸이 푸른 눈에 떠돌았다. 루드밀라는 갑자기 백칠십 년 전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녀는 저 눈을 알았다. 아름다워서 사랑했지만, 언제나 그녀를 경멸하던 눈이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루드밀라와 함께 제 어머니도 저 눈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