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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불꽃놀이 (2) (87/181)

87. 불꽃놀이 (2)2021.05.29.

귀족들은 발레시나스며 나람바, 세위드 같은 휴양도시나 항구도시로 몰려들었다. 루벤 실베스터는 방계라서 본가의 우두머리가 소환해 어쩔 수 없이 끌려온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16606120461927.jpg‘아, 정말 엮이고 싶지 않은데.’

그는 이미 에설론 백작이 엘펜하임에게 당한 것 같다는 소식을 슬쩍 칼리에르 공에게 찌른 상태였다. 한마디로 에설론 백작 입장에서는 배신자다. 하지만 도대체 어느 뱀파이어가 성기사들에게 낙인찍힌 뱀파이어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겠냐는 말이다. 몸이 성기사에게 구속되는 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는데! 그래도 루벤 실베스터는 발레시나스에 왔다. 핑계라도 대고 오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건 위험부담이 있었다. 게다가 루벤은 에설론 백작을 칼리에르 공이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6606120461927.jpg‘구경은 제대로 해야지.’

아, 발레시나스의 날씨는 언제나 그랬듯 오늘도 청명하고 아름다웠다.

16606120461927.jpg“넌 벌써 바쁘네.”

루벤은 한가롭게 늘어진 채 에설론 백작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을 보며 말을 건넸다.

16606120461943.jpg“넌 참 게으르네.”

루드밀라는 가만히 듣지만 않고 곧장 받아쳤다.

16606120461927.jpg“나야 뭐 늘 그렇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루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루드밀라의 눈 밖에 나는 것 따위는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눈 밖에 났으면 좋겠다.

16606120461927.jpg“게다가 여긴 휴양지잖아, 루드밀라. 너도 좀 쉴 필요가 있어.”

16606120461943.jpg“쉬는 건 백칠십 년간 충분히 했어.”

16606120461927.jpg“아, 그래.”

루드밀라는 먹잇감을, 정확하게는 칼리에르 공비를 노리고 있다. 혹은 그 자리를 노리고 있을 뿐이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토끼는 안중에도 없을 수도 있다.

16606120461927.jpg“어떻게 할 건데?”

루벤이 슬쩍 찔러보듯 물었다. 루드밀라는 열어보고 있던 온갖 초대장들을 들어 올렸다.

16606120461927.jpg“아, 마주치려고?”

저 초대장들에 빠짐없이 화답하여 행사란 행사는 모조리 참석하겠다는 이야기다.

16606120461927.jpg“칼리에르 공은 잘 안 다니는 걸로 유명한데.”

16606120461943.jpg“여긴 휴양지야, 루벤.”

넌 그것도 모르니. 루드밀라는 성가시다는 투로 대답했다. 어쨌든 그녀가 그를 억지로 불러놨으니, 이 정도는 대답해줘야 했다.

16606120461943.jpg“이것저것 특이한 건 다 해보고 싶은 곳이라고. 제임스가 다니지 않는다고 해도 그 여자애는 어리다며.”

어린애가 여기저기 쏘다니고 싶어 할 법하지.

16606120461927.jpg“걘 좀 겁이 많은데.”

16606120461943.jpg“토끼인데 당연하겠지.”

그 정도는 나도 이미 파악했다며 루드밀라가 대꾸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계속하는 루벤이 무척 지루하기만 했다. 그녀에게는 새로운 정보와 신선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특히 펠릭스 이드리스의 딸에 관한 정보라면 더더욱 좋았다. 성기사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제공해준 정보들은 성에 차지 않았다. 루드밀라는 소렐 이드리스가 참석할 것 같은 행사들을 쏙쏙 뽑아보았다. 아무리 겁 많은 토끼라 해도, 어리고 천진난만하다는데 여기저기 가보고 싶겠지.

16606120461943.jpg‘어린애야 간단하지.’

파악하는 것도 간단했고, 또 죽이는 것도 간단하다. 루드밀라는 이 청명하고 아름다운 발레시나스와 영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했다. * 발레시나스는 1년 내내 화창하고, 여름에는 덥지만 그저 아름답기만 한 휴양지였다. 라이킨은 아버지가 이런 곳에서 사는 특이한 뱀파이어라 그리 성격이 온화하고, 그의 어머니 같은 여자도 사랑할 줄 아는 관대한 마음을 갖춘 건가, 하고 생각했다.

16606120465424.jpg“그건 아니야.”

로렌스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16606120465424.jpg“발레시나스가 아주 아름다운 곳이긴 하다만 기후가 사람을 만드는 거였으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다 성격이 온화하고 따뜻하기만 하겠니?”

16606120465434.jpg“그냥 생각해본 겁니다.”

16606120465424.jpg“너는 내가 네 어머니를 왜 사랑하는지 이해를 하고 싶지 않은 거지.”

라이킨이 소렐에게 푹 빠지면 빠질수록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렐 이드리스를 보라. 그녀는 그저 작고 연약하지만, 씩씩하고 놀라울 정도로 용감하며 사랑스럽지 않나. 로렌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16606120465424.jpg“네 어머니도 나와 있을 때는 다른 모습이었어.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면모가 있는 거야. 결국에는…….”

그는 몸을 일으켜 책을 밀어두고 찻잔을 끌어당겼다.

16606120465424.jpg“그게 다 합쳐져서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 결론을 내려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머니가 죽은 후로 백칠십여 년이 지났다. 대단히 오랜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자간에 꺼내기 어려운 문제였다.

16606120465424.jpg“신경 쓸 거 없다. 네게는 그런 면모를 전혀 보여주지 않았던 사람이야.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16606120465434.jpg“……그건 알고 있습니다.”

16606120465424.jpg“네가 공주님과 함께 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드는가 보구나.”

로렌스는 웃었다. 그가 웃을 때 주름이 따라서 잡혔다. 뱀파이어는 많이 늙었다.

16606120465424.jpg“사랑을 한다는 건 좋은 거지.”

사랑, 사랑이라. 사랑인가? 라이킨은 소렐을 향한 자신의 복잡하고도 무거운 마음을 생각해보았다.

16606120465434.jpg“……지나치게 무거운 감정입니다.”

16606120465424.jpg“그렇지. 마냥 아름답지 못해. 그럴 수가 없어. 사람은 추악하니까.”

추악한 존재를, 혹은 추악한 존재가 사랑하는 게 얼마나 어렵겠나.

16606120465424.jpg“하지만 아껴주고, 표현은 어렵더라도 꼭 해야 해.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그건 아버지의 경험담처럼 들렸다.

16606120465424.jpg“대화라도 많이 해야지.”

16606120465434.jpg“다른 방법을 사용하실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라이킨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의 손으로 소렐을 죽인다는 상상은 하기도 싫은데, 그토록 그 여자를 사랑한 아버지는 마음이 어땠을까.

16606120465424.jpg“아니,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로렌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16606120465424.jpg“내가 사랑하는 여자였지만, 앨리스는 계속 살아 있으면 안 돼.”

뜻밖의 말에 라이킨은 고개를 들었다. 로렌스는 아주 엄격한 표정으로 두텁게 쌓인 세월과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그 누구도 흔들지 못할 판결을 내렸다.

16606120465424.jpg“계속 살아 있어 봤자 혼자서만 행복하고 여러 사람을 괴롭게 만들었을 거다.”

살아 있어선 안 될 사람이었다.

16606120465434.jpg“아버지는…….”

라이킨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미간을 한참 찌푸렸다가 물었다.

16606120465434.jpg“아직까지도 사랑하시면서, 어떻게 그렇게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셨습니까?”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 그는 차라리 소렐과 함께 타락하길 선택할 것 같은데.

16606120465424.jpg“너희가 있었잖니.”

뱀파이어치고 공작들의 결혼생활은 짧았다. 칼리에르 남매가 전부 다 성인이 되어버리고, 어느 정도 앨리스 루이즈와 타협을 해가며 거리를 벌린 지 오래라 처음에는 그저 남매와 어머니 사이가 서먹한 줄로만 알았다. 그게 아니란 걸 눈치채고 나고부터는 문제가 시작되었다.

16606120465424.jpg“너도, 샤를렌도 너무 어려. 그런 건 어른이 행동하고 결정해야 하는 거다.”

로렌스는 파이프를 물었다. 라이킨은 그에게 불을 건넸다.

16606120465424.jpg“고맙구나. 나는 후회하지는 않아. 무척 그립지만, 동시에 그리워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알고 있지.”

16606120465434.jpg“나이가 들면 현명해지고 견딜 수 있어지는 겁니까?”

16606120465424.jpg“아니, 나이가 들어가면 어리석어질 뿐이야.”

로렌스는 고개를 저었다.

16606120465424.jpg“내게는 젊은 너희들이 있으니 너희를 통해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거지. 혼자 있었다면 과거만 곱씹었을 거다.”

그러곤 싱긋 웃었다.

16606120465424.jpg“나는 후회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너는 괜히 미안해하지 말려무나. 네가 내게 미안할 게 뭐가 있니.”

앨리스 루이즈 칼리에르가 죽고 나서 뱀파이어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칼리에르 남매와 발레시나스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엄연히 장성하고 나서 새아버지를 얻었으니, 사실 그들을 연결하는 앨리스가 사라졌으니 저 가족도 깨진 게 아닌가? 하지만 로렌스 오블리앙은 아주 당당하게 남매를 자식이라 말했다. 그가 없다면 ‘어린아이들’이 고아가 될 텐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궁금해하는 이들을 질색했다. 저 남매를 고아로 만들면 다들 좋아 죽을 건가? 나쁜 사람들 같으니.

16606120465424.jpg“네가 자꾸 그런다면 내가 섭섭할 거다. 애비가 되어서 당연한 일을 했는데 그걸 미안해하는 자식이 어디 있니?”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는 노신사의 머리 위로 담배 연기가 훅 날렸다.

16606120465424.jpg“가보렴.”

라이킨은 여자 둘이서 해변에서 꺄르륵대며 웃으며 바다에 들어가는 걸 아까부터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그가 사랑하는 가족이다.

16606120465424.jpg“공주님이 오늘은 참 병아리 같구나.”

16606120465434.jpg“예. 그렇습니다.”

  * 소렐은 샤를렌의 손을 잡고 두 다리를 열심히 파닥거렸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가라앉아서, 몹시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16606120474666.jpg“이제 시작인데 벌써 그러면 어떡해요?”

아이고, 예뻐라. 샤를렌은 소렐의 머리를 넘겨주며 웃었다.

16606120474669.jpg“제가, 욕심이, 많아서, 그래요.”

소렐은 쌕쌕대며 말을 끊어서 완성했다.

16606120474669.jpg“얼른 잘하고 싶어요!”

16606120474666.jpg“그러려면 새카맣게 탈 정도로 이곳에서 오래 있어야 할걸요.”

샤를렌은 소렐을 이끌고 바다에서 나왔다. 흠뻑 젖은 그녀에게 모자를 씌워주고, 혹시 추울까 봐 커다란 수건까지 둘러준 뒤 그늘에 앉혀놓았다.

16606120474666.jpg“어디 뭐 먹을 거 없나?”

이쯤이면 별장에서 누가 먹을 것을 가지고 올 때가 되었다. 샤를렌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하얀 별장 쪽을 바라보았다.

16606120474666.jpg“……드디어 오시네.”

16606120474669.jpg“응? 누가요?”

16606120474666.jpg“공주님의 수영복 차림을 너무 보고 싶었지만 체면이란 게 있다고 참았던 바보 멍청이요. 자기가 체면이란 게 있는 줄 아나?”

소렐은 킥킥 웃었다. 사실 라이킨이 그들을 먼저 보내놓고 잠시 로렌스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건 두 사람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샤를렌은 그저 오빠를 적당히, 여동생답게 짜증스러운 애정으로 대할 뿐인 거다.

16606120474669.jpg“오빠한테 그런 말 하는 건 샤를렌도 똑같네요.”

16606120474666.jpg“왜요, 누가 또 그런 말을 해요?”

16606120474669.jpg“내 친구 조슬린이요. 오빠가 있는데 맨날 바보 취급해요.”

16606120474666.jpg“멋진 오빠란 있을 수가 없는 존재인가 봐.”

샤를렌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뒤 머리를 묶은 소렐을 내려다보았다.

16606120474666.jpg“공주님은 노란색이 참 잘 어울리네요. 병아리 같고 귀엽다.”

칭찬해주면 소렐은 배시시 웃는다. 오빠 놈이 이 말랑말랑한 얼굴을 참 자주 쪼물딱대던데 왜 그럴까? 샤를렌은 손을 뻗어 소렐의 뺨을 폭 감싸고 만져보았다. 보이는 그대로의 촉감이다. 말랑말랑하고 쫀득하다. 아, 이래서 쪼물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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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6120465434.jpg“그만 만져.”

16606120474666.jpg“아, 깜짝이야! 좀!”

갑자기 지척에서 들린 오빠의 목소리에 샤를렌은 화들짝 놀라 짜증을 냈다.

16606120474666.jpg“소리 내고 다녀!”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이 짜증스럽고 퉁명스러웠다.

16606120465434.jpg“무슨 상관이야, 오는 거 봤잖아.”

라이킨은 내놓았던 탁자 위에 쟁반을 내려놓은 뒤, 손을 뻗어 소렐의 무릎 위에도 새 수건을 덮어주었다.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봐 걱정이 된다.

16606120465434.jpg“공주님.”

진득한 목소리에 샤를렌은 짜증을 이었다.

16606120474666.jpg“아, 보는 앞에서 하지 마라, 진짜.”

16606120465434.jpg“오늘 아주 예쁘시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라이킨은 소렐에게 과일을 잘라 쌓은 유리그릇을 따로 내밀며 웃었다. 하지만 소렐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햇볕에 발갛게 익은 건지, 얼굴이 빨개져서 대답도 제대로 못 했다. 공주님께서 왜 이러시나. 라이킨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16606120465434.jpg“공주님?”

샤를렌은 자신 몫의 유리그릇과 숟가락을 휙 들고 자리에 앉았다. 오빠가 염병을 떠는 건 짜증나지만, 공주님이 수줍어하는 건 귀엽고 보기 좋았다. 그녀는 달고 시원한 과일을 설탕물에 절여 둔 디저트를 퍼먹으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16606120474669.jpg“라, 라이킨, 더워요?”

16606120465434.jpg“좀 덥군요.”

그는 소렐의 곁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20474669.jpg“수영도 할 거예요?”

어쩔 줄 몰라 하며 묻는 질문에 또 고개를 끄덕인다.

16606120465434.jpg“예. 공주님도 하시는데 저도 곁에 있어야지요.”

16606120474669.jpg“괜찮은데…….”

아, 까였다. 샤를렌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16606120465434.jpg“제가 곁에 있는 게 싫으십니까?”

16606120474669.jpg“아니, 그건 아니고요……!”

소렐의 목소리가 확 튀었다. 지금 라이킨은 너무 멋있었다. 언제나 멋있었지만 눈부신 해변에 아주 잘 어울렸다. 그는 수영복을 입고, 상체는 당연히 탈의를 한 뒤 아주 얇은 흰 셔츠만 대충 팔을 꿰어입은 상태였다. 멋있었지만 똑바로 쳐다보기가 민망했다. 계속 뚫어져라, 눈도 깜빡이지 않고 쳐다볼 것 같아서였다.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16606120465434.jpg“아니고?”

아이고, 옘병. 샤를렌은 재미있어하며 공주님 곁으로 더 가까이 붙는 오빠를 보곤 헛구역질을 하는 시늉을 했다. 라이킨은 지금 두터운 팔뚝과 고도로 발달한 상체 근육부터, 하체로 이어지는 근사하고도 은밀한 근육까지 전부 다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게 다 저 병아리 같은 아기토끼를 유혹하기 위함이다. 오빠지만 진짜 양심 없는 새끼다.

16606120474669.jpg“그, 으, 그……. 너무 부끄러워요.”

16606120465434.jpg“제가요?”

샤를렌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눈을 대놓고 굴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바다로 들어갔다. 수영이나 하겠다는 거다. 자리를 피해주면 라이킨이야 고마웠다.

16606120474669.jpg“아니, 라이킨이 부끄럽다는 게 아니라!”

혹시 오해를 할까 봐 소렐은 황급히 손을 파닥파닥 내저었다.

16606120465434.jpg“아니라?”

16606120474669.jpg“제, 제가 부끄러워요.”

16606120465434.jpg“공주님이 부끄러우실 게 뭐가 있습니까.”

16606120474669.jpg“……지금 알면서 놀리는 거죠.”

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하는 말은 묻는 게 아니라 확신이었다. 소렐도 어느 정도 라이킨을 알게 된 탓이다.

16606120465434.jpg“절 보는 게 부끄러우시다는 뜻이지요.”

라이킨은 웃었다.

16606120465434.jpg“그냥 보십시오, 공주님. 공주님께서 보시고 즐기시라고 벗고 나온 건데 봐주시지 않으면 제가 무척 서럽습니다.”

섭섭한 것도 아니고 서럽단다. 그게 서럽기까지 할 일인가. 소렐은 어이가 없어서 라이킨을 눈만 쏙 빼놓고 쳐다보았다. 라이킨은 그 눈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여자를 죽이고 자식들을 돌보길 택했다. 그건 로렌스 오블리앙이라 가능한 일이다. 그 여자의 피가 섞인 그는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소렐을 죽여야 한다면, 그는 죽여야 할 이유를 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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