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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연모와 음모 (10) (85/181)

85. 연모와 음모 (10)2021.05.22.

협약서, 혹은 협정서. 뱀파이어들은 내키는 대로 불러댔지만 어쨌든 그건 아주 중요한 약속이었다. 혹은 유명무실한 약속이기도 했다. 고대마법이란 것이 아주 위협적인 힘이긴 했지만, 대관절 언제 그것이 뱀파이어들을 그리 위협했단 말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 슈토넨 후작인 아서 모드릭 헴피온을 비롯해 몇몇 순혈 뱀파이어들이 펄쩍 뛸 것이다.

16606120281833.jpg‘대마법사가 뱀파이어들을 얼마나 많이 살해했는데!’

  하지만 그때도 뱀파이어들이 서명한 협정서는 발동하지 않았다. 대마법사는 뱀파이어들을 일부러 살해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순혈 뱀파이어들이 주장하는 과거의 전적은 억지다. 협정서는 그저 그들이 마법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공포심을 상징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마법을 질투하고, 가지고 싶어 했으며, 동시에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 협정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앨리스 루이즈 칼리에르, 1대 칼리에르 공이 만들었다.

16606120281838.jpg‘소인배들.’

로렌스 오블리앙, 발레시나스 공작은 도대체 왜 연락이 안 되냐고 성질을 내는 슈토넨 후작의 편지를 벽난로에 던져버렸다. 아직까지 여름이 완전히 찾아오지 않아 서늘한 기운이 남아있는 저택에서, 벽난로는 언제나 충실한 난방기구이자 소각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16606120281843.jpg“아버지.”

16606120281838.jpg“응, 그래.”

그는 딸의 부름에는 언제나 다정하고 성실하게 대답했다. 샤를렌은 자신이 피를 흘리고 있을 때 가차 없이 어머니에게 달려들었던 아버지를, 그녀에게 피를 주지 않아 사실 완전히 남이나 다름없는 아버지를 보았다.

16606120281843.jpg“……오빠새…….”

16606120281838.jpg“부디 그 호칭에 ‘새끼’라든가 ‘놈’ 같은 저급한 단어는 붙이지 않아줬으면 좋겠구나.”

16606120281843.jpg“그럼 걔가요.”

16606120281838.jpg“샤를렌.”

16606120281843.jpg“아, 알았어요. 오빠가, 아무튼 돌아오면 말이에요.”

16606120281838.jpg“그래.”

로렌스는 그제야 호칭에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20281843.jpg“……아버지 손주가…….”

로렌스는 끼고 있던 안경 너머로 딸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16606120281838.jpg“너 도대체 요즘 무슨 고객들을 만나고 다니길래 그런 상상을 하니?”

16606120281843.jpg“이건 변호사로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있을 수 있는 경우의 수를 꼽은 것뿐이거든요!”

16606120281838.jpg“아니, 전혀 객관적이지 않아. 네 오빠는 사람 목은 따고 다닐지 몰라도 대학 가는 게 소원인 어린 아가씨 임신시키는 짓은 안 해.”

16606120281843.jpg“……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로렌스는 딸의 질문에 잠시 미간을 좁히며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16606120281838.jpg“……손주를 볼 거라고 예상한 시점이 조금 당겨지긴 하겠지만.”

16606120281843.jpg“그게 문제라고요. 공주님이 아직 한참 어린데 둘이 냅다 별장으로 간 걸 보면 분명히……. 아, 우리 공주님 어떡하면 좋지……. 우리 오빠놈에게 걸려서…….”

샤를렌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쉬었다.

16606120281838.jpg“그래도 항상 앞에 ‘우리’가 붙는구나.”

딸이 쩔쩔매는 걸 보던 아버지는 허허 웃으면서 책을 집어 들었다.

16606120281838.jpg“좀 봐줘라. 오죽 좋으면 그랬겠냐.”

16606120281843.jpg“지가 좋은 거랑 공주님 나이랑 뭐가 더 중요한지 생각을 해야죠.”

16606120281838.jpg“선을 제대로 넘지는 않을 거다. 너는 그렇게 라이킨을 못 믿니?”

16606120281843.jpg“여자 문제에서는 아무도 믿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로렌스는 그 말에 턱을 긁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16606120281838.jpg“그래, 맞는 말이긴 하다만. 나는 그 녀석이 누군가를 그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 봐서 말이다.”

16606120281843.jpg“저도 그건 신기해요. 세상에, 취향이 그런 쪽이었다니. 밖에 나가서 아는 척하지 말라고 해야지.”

16606120281838.jpg“왜, 사랑스럽고 예쁘잖니.”

샤를렌은 한숨을 쉬었다.

16606120281843.jpg“아버지, 여태까지 오빠가 ‘예쁘다’라고 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 줄 아세요?”

16606120281838.jpg“글쎄다. 너한테는 하지 않든?”

16606120281843.jpg“그거야 예쁘다는 말을 안 하면 죽이겠다고 했으니까 하는 거죠.”

하하하하, 웃는 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채웠지만 샤를렌은 웃지 않았다.

16606120281843.jpg“오빠가 예쁘다고 하는 건 아주 드물어요. 정말 예뻐도 자기 눈에 안 차면 예쁘단 말은 입 밖에도 안 냈는데…….”

16606120281838.jpg“그런데?”

16606120281843.jpg“그 말을 공주님께는 참 남발하더라고요. 경호 붙은 뱀파이어 애들이 희게 질려서 못 들은 척하고 있어요.”

16606120281838.jpg“좋은 일이지.”

16606120281843.jpg“공주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것만 빼면요.”

샤를렌은 한숨을 쉬었다.

16606120281838.jpg“그래, 나도 공주님 얼굴을 보면 라이킨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어진다만, 그래도 그렇게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 얼마나 다행이니.”

로렌스는 미소를 짓다가 말았다.

16606120281838.jpg“공주님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으련만.”

아직 아가라 라이킨에게 휘둘리는 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라이킨 혼자서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소렐 역시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늙으면 걱정이 많아지는 모양인가. 로렌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

16606120295911.jpg“다음에 또 올까요?”

라이킨은 잔뜩 부어오른 소렐의 입술을 살살 어루만지며 물었다. 한 번 입술을 붙였다 하면 시간이 가는 줄 몰라서, 그녀의 입술이 상당히 통통해졌다.

16606120295911.jpg“아니, 다음에는 다른 곳으로 단둘이. 어떻습니까?”

소렐이 싫다고 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아주 용감한 토끼라, 어찌 보면 라이킨보다 더 솔직했다.

16606120295919.jpg“좋아요.”

그녀는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20295911.jpg“……무섭지는 않으십니까?”

16606120295919.jpg“가자면서요. 싫어요?”

16606120295911.jpg“……저는 가끔 공주님께서 절 무서워하시진 않은지 걱정이 됩니다.”

그게 토끼로서 당연한 본능이긴 했다. 혹은 라이킨이 지나치게 강한 뱀파이어라 작은 토끼를 겁먹게 하기에 딱 좋았다. 그의 아버지 로렌스가 평소처럼 다니다가 소렐을 깜짝 놀라게 하지 않았나. 라이킨도 늘 소렐 앞에서는 조금 더 뱀파이어 특유의 싸늘하고 살벌한 기운을 숨기고, 살기는 특히 더 죽이려고 애썼다. 피를 마셨다는 것도 티 내지 않다가 이번에 소렐이 불러와서 졸지에 들킨 게 처음이었다.

16606120295919.jpg“그건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그도 사실 기가 막혀서 메리 헬레인 공주에게 여러 번 물었다. ‘정말로’ 토끼와 뱀파이어가 결혼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냐고. 그때마다 메리 헬레인 공주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사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라이킨은 반은 무관심해졌고, 반은 포기한 심정으로 소렐을 한참이 지나 만났다. 그리고 이젠 다른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16606120295919.jpg“라이킨은 여태까지 날 겁먹게 한 적이 없었어요.”

소렐은 고개를 흔들며 그를 안도시켰다.

16606120295919.jpg“한 번도 없었어요.”

그는 자신의 존재가 소렐을 겁나게 할까 봐 늘 걱정이었다. 소렐이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거나, 환하게 웃어주면 마음이 놓이면서도, 결국 걱정이 불쑥 치민다. 그는 방싯 웃는 소렐을 결국 들어서 뺨에 입을 맞췄다.

16606120295911.jpg“앞으로도 더 주의하겠습니다.”

소렐은 이젠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수줍게 그에게 안겨서 웃을 뿐이다. 그들은 엔버네스 역에서 내렸다. 며칠간의 외출을 끝내고, 다시 공작저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16606120295911.jpg“피곤하십니까?”

16606120295919.jpg“아뇨, 괜찮아요.”

16606120295911.jpg“그럼 조금 더 꾸물거리다 집으로 돌아갈까요?”

꾸물거리다니? 소렐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웃었다. 라이킨도 그녀를 마주 보며 웃었다.

16606120295919.jpg“좋아요.”

조금 더 단둘이 있을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라이킨은 그녀의 손을 잡고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16606120295911.jpg“여름에 사용하실 물건을 좀 사드리고 싶습니다. 양산도 더 필요할 것 같고, 꽃도 더 사드리지요. 슬슬 계절이 바뀌어서 소재를 바꾸셔야 할 텐데, 가지고 싶으신 옷은 없으십니까?”

그는 그녀에게 뭐라도 더 안기지 못해 안달이었다.

16606120295919.jpg“가지고 싶은 거는요.”

16606120295911.jpg“예.”

라이킨은 웃으며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20295919.jpg“언제나 너무 많아서 문제예요.”

소렐은 한숨을 쉬었고, 라이킨은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16606120295919.jpg“엄마 아빠가 물려주신 유산을 아주 현명하게 잘 사용해야 할 텐데,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겁이 나요. 흥청망청 써버리다가 몰락한 귀족은 안 되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통속소설에서 본 여러 몰락 귀족들이 눈앞에 아른거려, 소렐은 고개를 흔들어 그들을 떨쳐냈다.

16606120295911.jpg“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공주님께서 사고 싶으신 것은 제가 다 사드릴 테니, 나중에 제가 빈털터리가 되면 그때는 외면하지 마시고 공주님께서 저를 데리고 사시는 겁니다.”

16606120295919.jpg“저기, 남편을 파산시키면 어떡해요……?”

16606120295911.jpg“저를 데리고 살아주시기만 하면 된다니까요.”

라이킨은 즐겁게 웃으며 이제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엔버네스 번화가를 바라보았다.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기만 한 공주님이자 아내에게 뭘 또 사줄까. 솔직히 그는 백화점을 통째로 사다 주어도 성에 차지 않았다.

16606120295911.jpg“자, 내리시지요.”

소렐은 라이킨의 손을 잡지 않고 폴짝 뛰어내리려다가 그에게 붙들려 얌전히 내려졌다.

16606120295919.jpg“괜찮다니까요.”

16606120295911.jpg“위험하다니까요.”

그녀를 허공에서 붙잡아 얼른 내려놓은 그는 손을 내밀었다.

16606120295911.jpg“가셔서 공주님께서 가지고 싶으신 건 다 사세요.”

16606120295919.jpg“라이킨이 가지고 싶은 건 없어요? 내가 다 사줄 수 있어요!”

남편만큼 부유한 아내는 순진한 얼굴로 참된 진실만을 말했다. 라이킨은 그저 슬쩍 웃으면서 그녀와 함께 걸어갔다. 한적한 별장에서 둘이 오붓하게 있다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엔버네스로 오니, 소렐은 그의 곁에 붙어 있지 않으면 이리저리 치이기 일쑤였다.

16606120295919.jpg“실례합니다.”

166061203048.jpg“어머, 죄송해요.”

166061203048.jpg“아유,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담?”

166061203048.jpg“거기 조심해요! 마차 지나간다고!”

166061203048.jpg“이런, 아가씨, 이쪽은 위험해요.”

작은 아가씨가 걷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저마다 한마디씩 해댔다. 그녀는 말도 못 하고 부딪칠 뻔했다. 소렐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뜨다가, 라이킨이 그녀를 얼른 끌어당겨준 덕에 부딪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팔을 꼭 안았다.

16606120295919.jpg“엔버네스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시끌시끌한 와중에도 그녀가 말하는 소리는 기가 막히게 다 듣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20295911.jpg“예. 그리고 공기도 탁하지요.”

한창 사교계 시즌 와중에서 몇몇이 약혼을 발표할 때라 더 정신이 없었다. 부인들은 혼수품을 사고, 신사들은 부인들을 쫓아다니면서 진땀을 흘려댔다.

16606120295911.jpg“공주님.”

그리고 예리한 라이킨의 눈이 누군가를 먼저 발견한 건 그때였다. 그는 한 번의 실수로 족했기에, 그의 팔을 꼭 안고 있는 소렐을 잠시 떼어냈다.

16606120295911.jpg“실례하겠습니다.”

무슨 실례?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꼭 껴안고 품 안에 넣다시피 하는 라이킨에게 폭 들어갔다.

16606120295911.jpg“이쪽이 더 낫군요.”

16606120295919.jpg“카, 칼리에르 공이 대낮에 망측한 짓을 벌였다고 소문나요……!”

소렐이 놀라 바동거렸다.

16606120295911.jpg“벌써 그런 것까지 아셨습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시선이 느껴지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웃었다.

16606120295911.jpg“게다가 저는 인간이 아니잖습니까. 오래 산 뱀파이어가 처음 맞이한 아내가 너무 좋아서 그러나 보다, 하겠지요.”

라이킨은 눈이 휘어지도록 소렐을 보며 웃은 뒤 보란 듯이 계단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등 뒤에 사나운 시선이 따라붙는다. 그랬다. 이 부유한 거리에 에설론 백작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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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6120295911.jpg‘깨어났다고 하더니 곧장 올라왔군.’

돈 많은 사람들이 돈을 물 쓰듯 쓰는 곳이니 에설론 백작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녀는 오래 살았고, 그만큼 많은 재산까지 들고 있었으니 사교계 시즌이면 이런 곳에 꼭 들렀다. 라이킨은 에설론 백작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무척이나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16606120295919.jpg“가을이 시작되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하니까…….”

16606120295911.jpg“그전에 곧 별장으로 놀러 가셔야지요. 이젠 날이 제법 더워졌습니다.”

16606120295919.jpg“그러네요. 매일 여기저기 새로운 곳을 가게 되어서 기뻐요.”

에설론 백작은 칼리에르 남매보다 훨씬 더 전대 칼리에르 공과 닮았다. 그녀의 모든 기준은 철저히 순혈 뱀파이어들이었으며, 나머지는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도대체 순혈이란 게 뭔가. 그저 몇몇 가문들을 ‘순혈’이라는 이름으로 정해놓고 그들만 치켜세워주는 웃기는 방식인 것을. 에설론 백작은 자신이 ‘순혈’ 뱀파이어들끼리의 결합으로 태어난 뱀파이어이기에 순혈이 맞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칼리에르 공이 순혈들의 방식으로 칼리에르 남매를 뱀파이어로 만들었기에 그 또한 순혈이 맞다고 주장한다.

16606120295911.jpg‘혈통인지, 아니면 뱀파이어들의 방식대로인지, 기준부터 정리했어야지.’

라이킨은 속으로 빈정거리면서도 소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그녀가 하는 이런저런 엉뚱한 말에도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었다. 소렐의 왼손 약지에는 반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라이킨 역시 항상 결혼반지를 떼어놓지 않았다. 그들은 부부고, 라이킨은 소렐을 최선을 다해 보호해야 했다.

16606120295919.jpg“다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16606120295911.jpg“단둘이 아니라요?”

라이킨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16606120295919.jpg“네. 아버님이 주신 별장이니까, 다 같이……. 재미있을 거예요.”

16606120295911.jpg“나는 하도 봐서 딱히 재미있는 건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온몸으로 단둘이 가고 싶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지만, 소렐이 웃기만 해도 금방 져줄 게 분명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는 자신의 가족들을 무척 사랑하고 아꼈다.

16606120295919.jpg“재미있을 거예요.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수영도 하고, 체스도 두고.”

16606120295911.jpg“이번에는 저와 한 편이 되어주셔야 합니다. 아버지 말고요.”

16606120295919.jpg“약속할게요.”

소렐은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16606120295919.jpg“그리고…….”

그녀는 라이킨의 소매를 살살 잡아끌었다. 그는 얼른 허리를 굽혀 귀를 대주었다.

16606120295919.jpg“밤에 바닷가를 같이 산책해요. 우리 둘이. 별이 쏟아질 것처럼 예쁘대요.”

그게 하고 싶은 거구나. 라이킨은 얼굴이 무너질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20295911.jpg“물론이지요. 기대됩니다.”

소렐의 피를 마신 이후로 그의 오감은 더 날카롭고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렐에게 무슨 짓이든 할 뱀파이어가 나타났으니, 그 역시 무슨 짓을 해서라도 소렐을 지킬 거다. 다른 건 몰라도 에설론 백작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대처해야 했다. 엘펜하임 수뇌부가 지금 완전히 구석에 몰렸다고 합니다. 그는 소렐과 별장에서 오붓하게 지내는 와중에도 정보를 긁어모으고, 엘펜하임이 하는 짓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걸 잊지 않았다. 소렐을 노리는 놈들이 엔버네스에도 어슬렁거리고 있다.

16606120295919.jpg“모래를 맨발로 밟으면 까슬까슬하고 보드랍다고 했어요.”

16606120295911.jpg“예. 신발을 신으면 오히려 신발 안으로 모래가 들어와서 짜증이 나고 거슬릴 지경이지요.”

라이킨은 신중하게 현재 엘펜하임의 저력을 평가했다. 결코 얕봐서는 안 된다. 한꺼번에 수뇌부가 몰살당하는 일이 있다면야 엘펜하임은 곧장 무너지겠지만, 저 조직은 수백 년간 이어진 탄탄한 조직이다. 라이킨 역시 큰 피해를 입을 것을 각오하고 싸움에 임해야 했다.

16606120295911.jpg‘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해야지.’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다. 라이킨은 가장 최대한의 피해를 줄 수 있는 방법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그게 설령 그에게도 피해를 입힌다 해도, 소렐 이드리스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감수할 수 있었다.

16606120295919.jpg“곧 가겠네요. 기대된다.”

16606120295911.jpg“예.”

라이킨도 웃었다.

16606120295911.jpg“저도 기대됩니다.”

저들도 움직일 것이다. 아니,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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