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연모와 음모 (8)2021.05.15.
소렐은 간신히 눈을 떴다. 머리가 아프고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으…….”
끙끙 앓는 소리를 내자 곁에서 내내 지켜보고 있던 이가 그녀를 살살 일으켰다.
“공주님, 물부터 드십시오.”
어르고 달래며 일으키고, 입가에 물을 대주었다. 소렐은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일단 물을 급하게 마셨다.
“천천히.”
등을 쓸어주니 천천히 꼴깍꼴깍 마신다. 소렐은 얼굴을 말도 못하게 찌푸렸다.
“머리가 아프십니까?”
“으……, 네.”
“일단 다 드세요. 속이 편해질 겁니다.”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하니 라이킨은 한 팔로 그녀를 쑥 들어다 제 품 안에 앉혀놓고 뭔가를 자꾸 입에 대주었다. 소렐은 그게 뭔지도 모르고 일단 주니 받아마셨다.
“잘하셨습니다.”
그냥 마셨을 뿐인데도 잘했다고 칭찬을 받았다. 소렐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기댔다. 머리가 아팠다. 이렇게 아픈 건 또 처음이었다.
“술을 잘 하지 못하시면서 뭘 그리 많이 드셨습니까?”
“……나 많이 마셨어요?”
그랬을 리가 없는데?
“공주님께는 많은 양이었습니다. 두어 잔 정도 드셨더군요. 그것도 작은 잔으로.”
라이킨은 웃었다.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아. 토끼 공주님의 얼굴이 뒤늦게 빨갛게 물들었다.
“미, 미안해요, 내가 실수를…….”
“저는 좋았는데 왜 사과하십니까?”
씩 웃는 라이킨은 엉망인 그녀와는 달리 아주 말끔하고 근사했다. 피부에 닿아도 부드럽기만 한 셔츠를 입고, 깨끗하게 머리를 넘긴 채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잘생긴 입술에 호선이 그려졌다.
“공주님께서는 싫으셨습니까?”
그는 짓궂은 구석이 있었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공주님에게서 기어이 어젯밤에 대한 말을 듣고 싶은 게 틀림없었다.
“내, 내가 방해해서…….”
“예. 위험한 순간에 부르시긴 했지요.”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조그맣게 미안해요, 라고 오물대니 라이킨은 웃으며 숙취에 시달리는 얼굴에 입을 맞췄다.
“미안하시긴요. 제가 죄송하다 사과드려야지요.”
라이킨이 왜? 소렐은 간신히 가라앉기 시작한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어제 무척 기뻤으니까요. 예쁜 걸 제게 보여주시고 싶으셨나 봅니다.”
그건 아니었다. 그녀의 생각에 라이킨이 예쁜 광경 안에 있어야 모든 것이 완성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를 부른 거다. 하지만 어쩐지 말하기가 민망해서 소렐은 고개를 푹 숙였다.
“속상하셨으면, 어젯밤 일은 없던 걸로 할까요?”
슬쩍 묻는 말에 소렐은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다 말고 머리를 붙잡았다.
“아우으으으…….”
“조심하셔야지요.”
아직 골이 흔들릴 지경일 텐데 머리를 그렇게 급히 들면 어쩌나. 라이킨은 그녀를 안고 토닥였다.
“저도 없던 일로 하기는 싫습니다. 공주님과 더 가까워지면 가까워졌지, 멀리 떨어질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군요.”
“나, 좀 씻고…….”
“예, 씻으셔야지요.”
“술 냄새 나요…….”
“아닌데요.”
라이킨은 고개를 저었다.
“달콤한 냄새밖에 안 나십니다.”
“으…….”
소렐은 얼굴을 가렸다.
“예쁘시고.”
그는 얼굴을 가린 손에 입을 맞췄다.
“아름다우십니다.”
“라, 라이킨 안 바빠요?”
얼마나 당황했는지 ‘요’에서 목소리가 삐끗했다. 소렐은 또 울상을 지었지만 라이킨은 웃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바쁘지 않습니다. 모처럼 한가한 날이군요.”
그는 소렐을 그대로 들어다가 욕실에 데려다주었다. 소렐은 한참 씻는 중에서야 오늘 왕세자와의 사냥 약속을 떠올렸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마저 씻고 나와서 그것부터 물었다.
“오늘 사냥하러 가기로 했잖아요.”
그래놓고 시계를 보니 세상에, 벌써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렇게나 잤단 말이야? 산딸기술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아주 무시무시한 거였다!
“어떡해요? 나 때문이에요?”
그녀가 나오자마자 입을 맞추려고 벼르고 있었던 라이킨은 입술을 말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
“아뇨, 공주님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뚫어져라 소렐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했어요? 내가 술병 나서 못 간다고 했어요? 어떡해…….”
“제 말을 전혀 듣지 않고 계시는군요. 잡을 늑대가 없으니 사냥을 나가봤자 소용없습니다.”
“……늑대가 없어요?”
“이제야 들으시는군요.”
라이킨은 만족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하지요?”
그 말에 소렐은 창밖을 쳐다보았다. 내내 요란했던 늑대의 울음소리며 개가 짖는 소리, 혹은 총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네…….”
소렐은 너무나 평온한 바깥을 보며 멍하니 대답했다.
“늑대들을…….”
그녀는 라이킨을 돌아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어제 다 잡은 거예요?”
두려운 포식자다.
“그렇습니다.”
“그걸 왕세자전하도 알아요?”
“짐작은 하겠지요.”
라이킨은 일종의 힘을 과시한 셈이었다. 수컷끼리의 경쟁이란 게 꼭 그렇게 유치하고 야만스럽다. 네가 잡지 못한 늑대들을 내가 한밤에 다 잡아버렸으니, 사냥 핑계대고 내 아내를 볼 생각하지 말고 꺼져. 무능한 놈이 어디서 감히 누굴 넘보냐는 뜻이었다. 왕세자는 분명히 알아들었을 거다.
“자, 이제 다른 남자 생각은 그만하시고 절 봐주세요, 공주님. 섭섭합니다.”
“나는 라이킨을 걱정한 거지 왕세자전하가 안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요.”
노골적인 남편에 아주 솔직한 아내다. 라이킨은 그만 또 입이 귀에 걸리고 말았다.
“어, 좋아한다.”
그리고 소렐은 눈치가 무척 빨랐다. 그녀는 단숨에 그에게 뽀르르 다가가서, 발꿈치를 들어가며 그의 표정을 더 가까이에서 보려 애썼다.
“좋아하는 거 맞죠? 그렇죠?”
라이킨은 결국 몸을 숙여 그녀에게 잠식당하고 말았다.
“예, 좋아하고 있는 거 맞습니다. 좋아서 죽을 지경이군요.”
펠릭스가 그를 그렇게 경계한 이유가 있었다. 라이킨은 예절과 법도를 중요시하며, 기사도를 반드시 지키는 남자였지만 소렐 앞에서는 그런 게 방해가 된다면 기꺼이 버릴 위인이었다. 결국 이렇게 된 걸 보면 그도 딱히 자제력이 강하거나, 양심이란 게 있는 건 아닌 거다. 펠릭스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소렐과 만났다면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들은 죄다 차단하는 것부터 시작했을 터였다.
“공주님, 뭘 좀 드셔서 속을 가라앉히셔야 할 텐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말랑한 뺨을 만지작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늦게 시작할수록 뭐든 무섭게 빠져들게 되는 건가. 중독성이 무서운 마약에도 감흥이 없었고, 술을 마셔도 잘 취하지 않았으며, 여자에게도 이 정도로 빠져본 적이 없었던 라이킨은 소렐에게서 도무지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속이 쓰리거나 아프시진 않습니까?”
“조금, 그런데…….”
소렐이 까르르 웃다가 그의 목에 버릇처럼 매달려서 키스를 받았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벌써 삼십 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마저도 라이킨이 안 된다며 간신히 떨어졌기 때문에 겨우 정신을 차린 거였다.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지났지이……?”
소렐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라이킨은 괜히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그녀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걸어갔다. 시끄러운 늑대도 없고, 왕세자도 사라졌다. 이제야 좀 제대로 된 휴가가 시작될 모양이다. *
“무늬만 협정서군.”
설명을 들어보니 딱히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카메론 셀레스트는 루드밀라의 설명에 처음에는 콧방귀를 뀌었더랬다.
“칼리에르 공이 공비를 죽인다고 서명을 하지도 않을뿐더러, 만약에 서명했다 해도.”
카메론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안 죽이면 그만 아니야?”
“뱀파이어 전체를 혼자 적으로 돌리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지.”
이 애송이야. 루드밀라는 차분하게 스스로를 가라앉혀가며 카메론에게 설명했다.
“만일 제임스가 협정을 위반한다면, 칼리에르 휘하에 있는 뱀파이어들도 그를 죽일 의무가 있어.”
카메론의 귀에는 성기사 역할을 대신할 뱀파이어들이 더 늘어난다는 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그는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에설론 백작, 당신은 제임스 칼리에르를 딱히 죽이고 싶어 하지 않잖아?”
“글래스턴 지부장, 당신은 고대마법의 계승자를 죽이고 싶어 하지 않잖아?”
만일 라이킨이 협정에 서명한 상태에서 협정을 위반한다면 뱀파이어들은 라이킨을 죽이고, 소렐 역시 죽일 거다. ‘협정을 위반’한다는 건, 반드시 소렐이 뱀파이어들에게 해악을 끼쳤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니까.
“그런 사태가 벌어졌을 때 내가 계승자를 빼돌릴 테니, 당신은 제임스의 목숨을 보장하라는 게 내 조건이야. 더불어.”
카메론이 뭐라 말하려는 것을 막은 루드밀라는 계속 말했다.
“네놈이 찍어놓은 낙인까지 지워.”
하지만 글래스턴에서 성기사로서 라이킨을 상대해왔던 카메론은 아주 신중하고, 또 회의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조건이 그렇게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질까?”
그럴 수가 있을까?
“애초에 제임스 칼리에르가 서명을 할 리가 없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루드밀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카메론을 쳐다보았다.
“하지 않는다면 하게 만들어야지. 그런 조건들이 맞아떨어질 리가 없다면 억지로라도 맞추면 되는 거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하늘만 보고 있으니까 아무것도 안 되는 거야. 흙바닥을 기어서라도 필사적으로 움직여야지.”
“차였다고 백 년 넘게 잠들었던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닌데.”
“잠들었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더 일찍 일어나서 그 ‘년’이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와 결혼하기 전에 막았어야 했는데. 루드밀라는 빠르게 움직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흙바닥이라도 기겠다고?”
카메론 셀레스트는 그런 말이 루드밀라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무척 신기했다.
“이미 기어가고 있어.”
루드밀라는 카메론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 왕세자는 산더미처럼 쌓인 늑대시체에 미간을 찌푸렸다. 난다 긴다 하는 사냥꾼들마저 그 시체들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도대체……, 뭘로 죽인 걸까? 칼로 찢었다고 하기엔 단면이 지나치게 울퉁불퉁한데.”
“말 그대로 찢은 거지.”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귀족들과 그들을 이끄는 왕세자 대신 제대로 된 ‘일’을 하러 나왔던 사냥꾼이 중얼거렸다.
“찢어버린 거지, 뭐.”
웬만한 날붙이는 저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늑대들에겐 피가 거의 없었다. 누가 죽였는지 노골적으로 보이도록 남겨둔 증거이기도 했다. 피가 없고, 엄청난 힘으로 저 거대한 늑대들을 찢어발길 수 있는 존재가 누구겠는가.
“뱀파이어들이 정말 빠르고 대단하구만.”
사냥꾼은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주 똑똑한 늑대들이었는데…….”
사람에게 해를 끼쳐서 문제였지, 사냥을 오래한 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아까운 놈들이었다. 우두머리가 무척 영리하고, 그 부하들도 영리해서 좀처럼 뒤를 밟히지도 않고 추적하는 이들을 약올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리 허망하게 시신으로 발견되다니.
“이거 우두머리 아닙니까? 이 녀석 가죽은 아주 깨끗한데요? 따로 가져가셔도 되겠습니다.”
왕세자는 누군가의 말에 미간을 더 깊게 찌푸렸다. 가장 사납고 용맹해서 우두머리가 된 늑대의 시신이 비교적 온전하고, 가죽이 아주 깔끔하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제일 잡기 힘든 녀석을 일부러 깨끗하게 가죽을 건질 수 있도록 놔뒀다는 이야기다. 나머지는 그저 성질대로, 혹은 왕세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대로 죽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뱀파이어 몇이 달려들어야 이 정도가 될까요?”
“거야 모르지. 너덧이 달려들 수도 있고, 강대한 뱀파이어는 혼자서도 가능할 수도 있고.”
늙은 사냥꾼은 그나마 시신을 온전하게 보존한 우두머리 늑대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뒤 고개를 들어 물었다.
“이거, 가죽을 벗길깝쇼?”
물론 결정은 그에게 돈을 주는 높으신 분들께서 해주는 거다. 그의 눈에는 전부 애송이나 다름없었지만, 돈은 주니 사냥꾼은 적당히 공손하게 굴었다. 왕세자는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사실 왕세자는 말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벗기시게.”
귀족 하나가 왕세자의 말을 대신 전했다.
“예, 그럽지요. 깨끗하게 벗기겠습니다요.”
사냥꾼은 가죽으로 만든 도구함을 꺼내 펼쳤다. 그러면서도 아무렇게나 쌓인 늑대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살 떨리는 시신들은 처음 본단 말이야. 인간보다 훨씬 강인한 녀석들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뱀파이어가 겉으로는 우아한 척, 사람인 척하고 있을 거다.
“……대충 마무리 하고 엔버네스로 돌아가지.”
왕세자가 겨우 입을 열었다.
“예, 전하.”
무기력하게 쌓인 늑대들을 잡으려 나흘을 산을 헤집고 돌아다니고, 사람들을 풀어 사전정보를 잔뜩 긁어모았다. 그를 비웃기만 하던 늑대들이 무기력하게 쌓여 있었다. 왕세자는 그 앞에서 그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힘과 교활한 지혜의 압도적인 차이를 느꼈다. 보란 듯이 쌓아놓고, 칼리에르 공은 약속했던 사냥을 취소했다. 요컨대, 칼리에르 공은 왕세자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공은 일부 귀족들과는 다르군.’
아내와 남편이 다른 누군가와 놀아나도 신경 쓰지 않고 신나게 바람을 피우는 이들과는 다르다는 이야기인가. 왕세자는 짜증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아버지인 국왕은 무척 유감이겠지만, 후계자인 그가 칼리에르 공의 지지를 얻는 건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뭐, 딱히 왕세자도 그의 지지를 바라지는 않았다. 왕이 될 사람이라고 떠받들어 키워진 그의 자존심이 무참히 박살났다. 그는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