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연모와 음모 (7)2021.05.12.
제롬은 라이킨을 가장 가까이에서 경호하고 따르는 수하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래도 라이킨이 그를 직접 공비전하를 경호하도록 할 정도로 실력은 뛰어났다. 오늘도 혼자 사냥별장에 잠시 남으신 공비전하를 경호하게 되었는데 말이다.
‘……저러셔도 괜찮을까?’
공비전하는 일찍 주무시라는 마스터의 부탁은 전혀 듣지 않으셨다. 그녀는 자려는 듯하다가, 기어코 꼬물꼬물 침대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곤 모든 경호하는 뱀파이어들이 난감해할 짓을 벌이기 시작했다. 타박타박 걸어가더니, 오늘 저녁에 라이킨과 맛만 보았던 산딸기 술단지를 슬쩍 꺼내 온 것이다.
“……조금만 먹어야지.”
끄트머리는 연한 분홍빛인데 안은 새빨갛다. 소렐은 국자로 산딸기술을 조금씩 퍼서 마시기 시작했다. 사실 술은 너무 달아서, 술을 마시는 것 같지 않았다.
“맛있다.”
라이킨 몰래 마시는 거라 그런지 너무 맛있었다. 그녀는 헤실헤실 웃어가며 술을 마치 주스 마시듯 마셨다.
‘저거 누가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뱀파이어들끼리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누가 말릴 건데?’
아무도 나설 수가 없다. 조슈아가 있다면 말렸을지도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공비전하는 라이킨이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전부 직접 돌보았다. 라이킨이 술을 마시지 말라고 따로 말한 것도 아니니 알아서 자중하시지 않을까? 게다가 소렐이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건 아니었다. 그저 딱 기분 좋을 정도로만, 아니, 그 정도에도 못 미치는 양이 아닌가.
“으응……?”
그게 아닌가? 제롬은 소렐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흔들고 눈을 깜빡이며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걸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술단지가 하나가 아니라 세 개로 보이는 지경까지 가신 거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빨리? 고작 저 정도만 마시고? 그러다 제롬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악!”
소렐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게 뭐야! 그녀를 경호하기 위해 남겨진 뱀파이어들이 우왕좌왕했다.
“오…….”
그러다 소렐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뜻 모를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더니 이번엔 헤헤헤 웃으면서 손을 휘젓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더라아……?”
목소리가 유난히 이상했다. 아무래도 혀가 꼬인 것 같다. 제롬이 다시 형님이며 누님들을 불안하게 쳐다보며 어떻게 좀 해보라고 눈짓을 열심히 하려는데, 소렐이 마법을 마구 부리기 시작했다. 술단지가 둥둥 뜨더니, 갑자기 허공에서 꽃잎이 눈처럼 날리질 않나, 산딸기 술도 단지 안에서 휘리릭 솟구쳐서 소렐에게 다가왔다.
“아니, 아니야.”
소렐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엄마가 먹을 거 가지고는 마법 부리면 안 된댔어. 이거 아니야. 안 돼.”
빨간 술이 다시 술단지 안으로 얌전히 들어갔다. 그쯤에서 난리가 난 뱀파이어들은 어서 마스터를 모셔오라며 제롬을 보냈다. 산을 헤매다 보면 분명히 라이킨을 찾을 수 있을 거다. 공비전하는 허공에 뿌려지는 꽃잎을 보며 헤실헤실 웃고만 계셨다. 꽃잎뿐만 아니라 반짝거리는 반딧불이 같은 빛도 떠다녔다.
“예쁘다, 라이킨한테도 보여줘야지!”
그리고 그녀가 벌떡 일어나는 순간, 상반신이 젖은 라이킨이, 뱀파이어들이 그렇게 속으로 비명을 질러대며 불렀던 그들의 마스터가 사냥별장에 나타났다. 정확하게는 꽃잎과 둥둥 떠다니는 빛 사이에 나타났다.
“라이킨!”
황금색 실, 그들만 볼 수 있는 그들 사이의 결합점이 훨씬 더 많이 늘어났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며 소렐의 주변에 늘어져 있었다. 라이킨은 이를 악물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예쁜 것들 사이에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소렐을 지금 보아선 안 되는 거였다. 그녀는 그를 불러서는 안 되는 거였다. 라이킨은 피를 보아서 난폭해진 이성을 잡아챘다.
“공주님, 피 냄새가 납니다.”
자그마한 토끼가 놀라 도망갈 만한 냄새였다. 피를 보고, 살을 찢고, 뼈를 부순 잔인한 사냥의 냄새가 물씬 났다. 게다가 라이킨은 머리부터 푹 젖어 있었다.
“괜찮아요.”
소렐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하다가, 약간 미간을 찡그렸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도 라이킨은 뒤로 물러나려 했다. 갑자기 그를 왜 부른 건가. 그런데 왜 위에서 꽃잎이 떨어지고 있지? 주변을 한 번 보며 물러나려던 그는 소렐에게 붙잡혔다. 그녀에게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공주님, 술 드셨습니까?”
“쪼끔…….”
소렐은 아주 조금이라고 말했지만, 어쩐지 라이킨은 믿어주지 않는 것 같아 슬펐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녀는 손을 뻗었고, 생각대로 라이킨이 마지못해서라도 몸을 숙여주자 단번에 그의 뺨을 잡고 배시시 웃었다.
“예뻐요.”
“……공주님은 예쁘시지요.”
아니, 그거 말고. 소렐은 그의 젖은 얼굴을 아랑곳하지 않고 코를 마주대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찔한 향이 물씬 풍긴다. 라이킨은 누군가에게 제발 그의 뒤통수를 때려서 이곳에서 끌어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눈치 빠른 뱀파이어들은 모든 걸 그에게 맡긴 뒤 사라져버렸다.
“아니, 나 말고 지금.”
지금 이 순간 예뻤다. 소렐이 코를 맞대고 발갛게 웃는 순간 라이킨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를 움켜쥐었다. 코가 닿아 있으니, 입술을 맞대는 것도 그저 간격만 좀 더 좁히면 될 일이다. 산딸기술 맛이 강하게 느껴지는 입술을 기어코 삼켜버렸다. 이미 피를 보고 불려온 그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입술을 파고들었다. 그의 심장이 가파르게 뛰며 머리를 쾅쾅 내리치고 있었다.
“라이…….”
살짝 숨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벌어지자마자 이름을 불러댄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서 그는 그녀를 안고 더 깊숙이 마냥 파고들기만 했다. 자그마한 머리를 감싸 어디도 도망가지 못하게 잡아놨다. 정신을 차려서 천천히 하려 해도 이젠 정신이란 걸 차릴 수가 없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라이킨은 멀어져가는 이성을 그냥 던져버렸다. 감각이란 걸 다시 되찾은 기분이었다.
“……어?”
소렐은 갑자기 휙 떨어지는 느낌에 당황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그가 그녀를 놓치지 않고 바로 감아올렸다. 그녀의 모든 호흡은 그가 조절하고 있었다. 소렐은 저도 모르게 라이킨의 목을 감아 꼭 끌어안았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을 맛보는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던 라이킨이 겨우 입술을 뗐다.
“……필사적으로 피했는데.”
“으응?”
“술 취한 토끼 덮치는 파렴치한이 될 줄이야.”
피하다가 더한 일을 벌인 기분이다.
“안 취했는데!”
라이킨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그래요, 이 주정뱅이 공주님. 입술 벌리세요.”
술 취한 토끼는 영문도 모르고 입술을 또 내줘야 했다. 말은 또 얼마나 잘 듣는지 하라는 대로 재깍 해서, 시킨 사람의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조금 더 거칠게, 고개가 꺾일 듯이 집요하게 굴어도 끙끙대며 따라온다. 빨갛게 물든 토끼는 술기운에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 만지면 부드럽고 따뜻하다. 환장할 지경이라 라이킨은 그녀의 입술이며 뺨에 제 체취를 잔뜩 묻혔다. 턱을 핥고, 본능적으로 더 내려가려다 이를 악물었다. 아니, 여긴 안 된다. 두 사람의 눈이 그때 마주쳤다.
“……아니.”
안 됩니다. 라이킨은 헤실헤실 웃는 소렐의 표정에 숨이 턱 막혔다.
“취하셨습니다.”
그는 애타게 말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침을 삼켰다.
“알아요.”
취했다는 걸 아는 게 아니라, 그가 뭘 바라는지 알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정말 아는 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빌어먹을 흡혈 욕구와 말간 소렐의 표정 때문에 라이킨은 미칠 지경이었다. 소렐은 천진난만하게 그의 머리를 끌어다 제 목덜미를 내어주었다. 그가 늘 얼굴을 파묻었던 곳이다. 그의 자리였다. 뱀파이어는 결국 이를 세웠다. 황금빛을 담은 까만 눈이 아릿하게 이지러졌다. 소렐은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고 매달렸다. 순진한 아가씨를 유혹한 뱀파이어는 흡혈할 때마저 엄청난 쾌감을 선사했다.
“라이, 으…….”
뭐가 뭔지 구분도 못 하고 그를 애타게 부르던 목소리가 또다시 멈췄다. 그의 허리를 감았다가 곧게 뻗어진 하얀 발이 바르르 떨렸다. 라이킨은 그녀의 다리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며 제 허리에 더 가까이 붙였다. 소렐은 자신이 언제 벽에 기대고, 라이킨의 탄탄한 허벅지 위에 앉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신음하며 그에게 매달릴 뿐이었다. 눈앞이 아득하다. 그의, 뱀파이어의 위험한 체취가 그녀를 휘감은 지 오래였다. 옴짝달싹못하고 갇혀버렸다. 너무 좋아서 덜컥 겁이 났다.
“……공주님.”
새파란 눈이 그녀를 겨냥하고, 살갗 위에서 긁듯이 그녀를 불렀다. 소렐은 뒤늦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가장 향기롭고 혀를 매끄럽게 감는 피를 마신 뱀파이어는 눈빛서부터 달랐다. 토끼는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연약한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뱀파이어에게 완전히 압도당했다. 가장 아름답고 잔인한 존재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핥고 있었다. 소렐은 후회하지 않았다.
“……무서우십니까?”
그는 그녀가 무섭다는 것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았다. 소렐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무섭지 않았다.
“라이킨.”
“예, 공주님.”
대답할 때마다 입을 맞춰준다. 만족할 만큼 흡혈한 뱀파이어는 따끈따끈하고 말랑말랑한 제 아내를 아주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더 안 마셔도 괜찮아요?”
어쩐지 눈이 자꾸 감긴다. 소렐은 눈을 똑바로 뜨기 위해 애쓰며 물었다.
“충분합니다.”
그는 웃으며 부드러운 눈가 아래에 입을 맞췄다. 눈꺼풀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소렐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주무셔야지요.”
“싫어어…….”
고개를 흔드니 라이킨의 입이 귀에 걸렸다.
“안 좋은 건 다 하시는군요. 주량도 약하시면서 술은 드시고, 저를 부르시지 않았어야 하는데 부르시고, 이젠 주무시지도 않겠다고 하십니까?”
“겨우 불렀는데 왜 자……?”
섭섭하다는 듯 말끄러미 올려다보는 눈에 그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소렐은 입술이 조금 나와서 그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순식간에 바짝 마르고, 타버린 목소리가 꾹 깨물렸다.
“어떻게 참지 말란 말만 골라서 해?”
피 맛을 본 것도 모자라 한구석에 열이 몰려 터질 지경인 뱀파이어는 잡아먹듯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소렐은 솔직했다. 부끄러워하지도, 내숭을 떨지도 않았다. 좋으면 좋다고 끊임없이 말하며 그를 붙잡는 손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는 소렐을 벽에 기대게 해놓고 몰아붙였다. 허락을 받은 그녀의 뽀얀 목덜미에 기어이 새빨간 흔적들이 잔뜩 남았다. 그리고 정신없이 소렐에게 열중하던 그의 머리에, 소렐의 얼굴이 툭 닿았다.
“……공주님?”
라이킨은 고개를 들었다.
“공주님?”
까만 눈이 닫혔다. 긴 속눈썹이 늘어져서 다시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가 한참 입에 담고 있었던 붉은 입술은 살짝 부은 채 벌어졌다.
“주무십니까?”
설마.
“공주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라이킨은 다른 의미로 환장하겠다는 듯, 소렐을 고쳐 안으면서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시선을 내려 그가 물었던 흔적을 쓰다듬었다. 뱀파이어에게 물렸던 흔적은 순식간에 아물기 시작했다. 소렐은 물렸다 해서 뱀파이어가 되지 않을 예정이었다.
‘……펠릭스가 날 죽이려고 하겠는데.’
졸리면 픽 쓰러져 자는 아기 토끼를 기어코 잡아먹었으니 죽이는 게 당연하겠지. 라이킨은 씩씩하고 용감한 토끼를 보듬어 안았다. 이제부턴 공주님을 좀 더 잘 먹여야겠다. 이 작은 체구에서 피를 빼갔다는 게 미안할 지경이라, 그는 안 그래도 신경을 쓰고 있었으면서 더 신경 쓰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푹 젖어 있던 라이킨의 몸에서 묻어난 물기에 소렐의 잠옷도 젖었다. 입을 맞췄다고 해서 벌써 잠옷을 갈아입힐 정도의 사이는 아니다. 그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꽃잎과, 가라앉아 깜빡거리다 사라져가는 빛무리를 보다가 픽 웃었다. 공주님의 세상은 저렇게 예쁘고 반짝거리는 것들로만 가득한가.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아직까지는 그를 만났다 해서 안 좋은 영향을 받은 건 아닌가 보다.
‘……나쁜 건 보여주지 말아야 할 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뱀파이어다. 헬레인 토끼들이 무섭게 으르렁대며 보호할 아기 토끼와는 상극이었다. 하지만 헬레인 토끼들은 이제 지상에서 사라졌고, 유감스럽게도 아기 토끼에겐 그밖에 남지 않았다. 내내 예쁘고 좋은 것만 봐야 할 텐데, 그런 걸 보여주기엔 그가 늑대들의 피를 보고 온 사람이다. 라이킨은 두터운 모포를 집어 들어 소렐을 감쌌다.
“좋은 꿈꾸세요, 공주님.”
웅얼웅얼 대답이 들려오는 듯하다가 뚝 멈췄다. 토끼들은 예민하기로 이름이 높았는데, 소렐은 걸핏하면 이 무시무시한 뱀파이어 앞에서도 겁도 없이 기절하듯 잠들어서 아침까지 깨어나지 않았다. 심신이 매우 튼튼한 토끼라 그러나?
‘그나저나…….’
라이킨은 주변을 돌아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 공주님 술버릇이 마법을 남발하는 거였나 보다. 그가 곧장 입을 막았으니 못했을 뿐이지, 혀가 꼬여서 종알종알 태연하게 말도 많이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앞으로는 혼자 두면 안 되겠어.’
스무 살이라 제법 큰 줄 알고 혼자 잘 자라고 뒀더니 이런 사고를 쳤다. 라이킨은 그의 어깨에 기대 곤히 자고 있는 소렐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일 숙취가 심하면 어쩌나.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산딸기술은 멀리 치워버리기로 했다. 소렐의 손에 닿으면 안 되는 물건이기도 했거니와, 그가 소렐에게 술을 몇 잔 먹이고픈 유혹도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딸이 다 크기 전에는 어림도 없어, 이 산적 같은 놈아! 아, 귀에 펠릭스 이드리스의 고함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 때문에 그는 내내 펠릭스에게 날강도이자 양심 없는 도둑놈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땐 좀 짜증이 났었는데, 따끈따끈한 공주님이 그의 품에 안겨 있으니 그래, 도둑놈 취급을 받아도 당연한 거였다.
‘그런데 이 정도면 다 큰 거 아닌가……?’
생각해보자. 나이도 스물에 성인이고, 키도 이만하면 됐고, 어쨌든 자랄 만큼 다 자라지 않았나. 아, 키가 좀 작기는 하지만 원래 작은 여성들도 많으니 괜찮다.
‘술을 마실 만큼 자랐으면 다 자란 거지.’
라이킨은 소렐의 뽀얗고 말랑한 뺨이며, 그의 옷깃을 꼭 움켜쥔 작은 주먹 같은 건 전부 다 무시했다. 그리고 엄연히 그녀가 그를 부른 거다. 분명히 부르지 말아야 할 상태라는 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괜찮다고 부른 거다. 그녀가 술에 취한 상태였다는 건 무시하자. 중요한 건 맨손으로 늑대들을 잡아 죽이는 것보다, 품 안의 토끼 하나가 그를 만족시키고 진정하게 했다는 거다. 그거면 어엿한 성인 몫까지 훌륭히 해낸 것 아닌가!
‘……내일 사냥은 취소해야겠군.’
공비전하께서 숙취 때문에 고생하실 테니, 사냥은 없던 걸로 해야겠다. 뭐, 어차피 잡을 늑대도 없을 거다. 라이킨은 즐거운 마음으로 침실로 향했다. 그녀의 옷이 다 마를 때까지 안아주고 있다가 눕힐 생각이었다. 피를 마신 뱀파이어의 기세는 실로 압도적이었으며, 그는 무척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