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연모와 음모 (6)2021.05.08.
루드밀라는 카메론 셀레스트가 엔버네스에 올라오기 전, 누군가와 비밀리에 만났다.
“오랜만이에요, 후작님.”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옛날 사람이라 후작의 옛 작위인 변경백이라 불렀지만, 루드밀라는 후작이라고 바로 불렀다. 과거의 영화인가, 아니면 현재의 흐름인가. 후작이든 변경백이든 어쨌든 그나마 말이 통할 뱀파이어가 나타났다는 게 더 중요한 늙은 뱀파이어는 루드밀라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네.”
“아직 정정하시네요.”
“지극히 유감으로 들리네만.”
“돌아가실 때가 되면 돌아가셔야죠.”
“자네는 뭐 젊은 줄 아나?”
까칠한 늙은이 같으니. 루드밀라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적어도 그녀가 직면한 문제에서만큼 이 후작만큼 그녀와 마음이 맞는 이도 없었다. 성기사들의 냄새를 최대한 빼고, 몸을 웬만큼 회복하여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루드밀라는 그래서 이 늙은이를 찾아왔다. 아서 모드릭 헴피온 후작. 이 나라의 옛 국경인 슈토넨을 오래도록 지켜 슈토넨 변경백이었다가, 이젠 변경백위가 유명무실해져 슈토넨 후작으로 불리고 있다.
“아, 하긴 젊긴 하지.”
슈토넨 후작은 혀를 끌끌 찼다.
“아직까지도 열정이 있어. 칼리에르 공비 때문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지?”
루드밀라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슈토넨 후작과 말을 하다 보면 그냥 웬만한 말은 흘려듣는 게 효율적이란 걸 일찌감치 터득했기 때문이었다.
“앨리스 루이즈가 봤다면 뒤집어질 일이지. 우리 순혈 뱀파이어들이 어떻게 지켜낸 혈통인데, 그 자리를 헬레인 토끼가 꿰차?”
슈토넨 후작은 순혈 뱀파이어이기도 했다.
“어떻게 할 거야?”
“생각 중이에요.”
루드밀라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협정서에 서명은 받으셨어요?”
그게 문제였다.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루드밀라는 못마땅하다는 듯 입꼬리를 당기는 슈토넨 후작을 보며 바로 답을 얻었다.
“못 받으셨군요.”
“고집이 보통 센 게 아니야. 고대마법의 계승자가 나타나면 마땅히 서명은 해야지!”
“그전 협정서에는 서명하지 않았던가요?”
“그때야 앨리스 루이즈가 살아 있었으니까.”
슈토넨 후작은 고개를 흔들었다.
“펠릭스 이드리스에 대한 협정서에는 잘만 서명을 했다가, 소렐 이드리스는 안 된다는 이유가 뭐겠어? 이젠 어머니도 죽었겠다, 눈치 볼 거 없다는 거지.”
“발레시나스 공작은요?”
로렌스 오블리앙, 그 역시 뱀파이어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협정서에 서명할 의무가 있었다.
“했겠어? 어디서 뭘 하는지 그림자도 못 봤네. 찾아가면 번번이 없다고 하기 일쑤야.”
루드밀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아버지와 아들이 한통속이라고 봐도 무방하네요.”
“그 집 전체가 한통속이라고 봐야지. 제인 칼리에르도 대답을 안 하고 있으니까.”
그게 루드밀라의 속을 긁어댔다. 그녀는 다른 건 몰라도, 뱀파이어라면 협정서에 마땅히 서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대마법이 뱀파이어들에게 어떤 해를 끼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모두가 고대마법의 계승자를 죽이겠다고 맹세한 게 바로 협정서인데 서명을 하지 않겠다니. 꼭 아내를 아끼는 남편 같아 루드밀라를 화나게 했다.
“어떻게 할 건가?”
슈토넨 후작의 질문에 루드밀라는 곧바로 대답했다.
“서명하게 해야지요.”
* 왕세자가 사냥을 하는 내내 총소리며 개 짖는 소리가 너무나 요란해서, 소렐은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공주님, 이리로 오십시오.”
그녀가 총소리를 불편해한다는 걸 아는 건지, 라이킨은 별장 안 깊숙한 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면전에서 싸움을 걸었던 왕세자 때문에 상했던 기분이 조금 괜찮아졌나? 소렐은 그녀에게만큼은 쾌활하고 다정하며, 또 격식 없이 구는 라이킨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자주 웃었으면 좋겠다. 열 살에 전장에 나가는 기분을 그녀가 감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냥 자주 웃길 바랐다.
“이게 뭐예요? 어디로 통하는 거예요?”
소렐은 지하로 향하는 두꺼운 나무문이 열리는 걸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것저것 오래된 물건들이 많은 곳이지요.”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돌계단을 내려간 뒤, 소렐에게 손을 뻗었다.
“미끄러울지도 모르니 제 손을 잡고 내려오세요. 재미있는 물건들이 많을 겁니다.”
순식간에 총소리가 들리지 않는 지하에 내려선 소렐은 그가 그녀를 위해 불을 켜주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라이킨은 굳이 불을 켜지 않아도 이 어둠 속에서 모든 걸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와아…….”
순식간에 밝아지는 주변 모습에 소렐이 감탄을 터트렸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를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위험하니 저를 따라오시고요.”
“네.”
소렐은 라이킨의 손을 꼭 잡았다.
“원래 이곳은 술 저장고였습니다. 여기, 술들이 많이 있지요?”
병에 담겨 밀봉된 술들을 보고 소렐의 눈이 동그래졌다.
“산딸기술이래요.”
“달겠군요.”
그는 미간을 찌푸리려다가 소렐을 쳐다보았다.
“공주님은 좋아하시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술을 잘 안 하시던데.”
만찬 때 반 잔 정도 맛만 보는 걸 지켜보기만 했던 라이킨이 재미있다는 듯 소렐에게 말했다.
“산딸기술은 드셔보시고 싶으십니까?”
“조금 궁금해요. 아, 이건 사과주네. 어, 라이킨?”
소렐은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끌어 당겼다.
“이건 이백 년이나 되었다는데요.”
“어디 볼까요.”
그는 거미줄이 잔뜩 친 병을 집어 후 불어냈다.
“……아마 맛은 없을 겁니다. 이 해에는 포도농사가 영 별로였습니다.”
“그런 걸 다 기억해요?”
“기억하는 해만 기억하지요.”
라이킨은 병을 내려놓고 손을 털었다.
“해서 올해는 기억해둘 생각입니다.”
어째서?
“공주님과 만나 결혼한 해인데 당연히 기억해야지요. 올해 수확한 포도로 술을 만들어, 두고두고 남겨둘 것입니다.”
“남겨둬서 뭐하게요?”
라이킨은 짧게 웃었다.
“공주님과 오래오래 살면서 가끔 꺼내 마셔야지요. 저는 혼자 마시는 술은 싫으니, 공주님께서 항상 함께 계셔주십시오.”
고독한 뱀파이어는 난생처음으로 허전한 마음이 뿌듯하게 채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언제까지 갈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백 년 정도 갈 것이라 여겼던 마음이 지금은 한 천 년 정도는 끄떡없을 것 같다.
“네.”
“약속하신 겁니다.”
“그럼요.”
라이킨은 그 와중에도 소렐의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추고 걸어갔다. 술 저장고였던 곳에는 이것저것 잡다한 물건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손질되지 않고 던져진 무기들, 갑옷과 투구가 굴러다녔다.
“박물관에 가져다 줘도 되겠어요.”
“……예. 한 오백 년 된 물건들입니다. 상태가 나쁘지는 않군요.”
옛 전쟁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이다. 라이킨은 자루가 썩어버린 창이나 검집이 부서진 검은 다 치워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엔 그가 지나왔던 과거가 고스란히 남아서 조용히 부패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주님. 그 술이 특별히 마음에 드십니까?”
몇 해 전, 별장지기의 부인이 만들어둔 게 분명한 산딸기술 단지를 꼭 안고 있는 게 퍽 귀엽기도 하고, 재미도 있었다.
“산딸기래서…….”
단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토끼가 그냥 지나칠 리 만무한가.
“맛만 조금 보려고.”
라이킨은 픽 웃으면서 썩은 무기더미를 지나쳤다.
“저와 함께?”
“어, 같이 안 먹어주려고 했어요?”
“공주님께서 허락해주셔야 제가 함께하지요.”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는 뭐든 라이킨이랑 같이하는 거라고 이미 정해놨는데요.”
같이 안 해주면 가만있지 않을 거다! 술단지를 꼭 껴안은 토끼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그냥 데리고 올라가서 침실로 가버릴까. 요즘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위험한 충동이 든다. 처음 데리고 올 때는 며칠에 한 번, 그것도 처음 그런 충동이 들었을 때 꽤 즐거웠던 것 같은데 이젠 즐겁지도 않았다. 소 렐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눈에 너무 어렸다. 그의 양심은 상관없다고 말하는데, 어쩐지 다가가면 소렐이 그를 싫어할 것 같았다.
“……그러면 식사를 마치고 마셔볼까요?”
자, 일단은 바른 생각을 해보자. 옛날 사람에, 고루하기 짝이 없는 그는 정석대로 다른 생각으로 주의를 돌려보았다. * 어쩌다가 낮술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낮에도 가끔 반주는 하는 게 뱀파이어들의 습성이니 상관은 없었다. 라이킨은 내내 허탕인 게 뻔한 사냥개들의 울음소리를 흘려들으며 소렐에게 말했다.
“공주님. 오늘 밤에는 잠시 혼자 계실 수 있으실까요?”
그가 단지에서 꺼내주는 예쁜 분홍색 산딸기 술을 보며 소렐이 정신이 팔렸다가 고개를 들었다.
“네? 왜요?”
왜긴 왜겠습니까. 지금 한계에 다다라서 다른 걸로 풀지 않으면 침실 문을 부술 것 같으니까 그러지요.
“아무래도 왕세자가 사냥에 실패한 모양입니다. 제가 밤에 가서 늑대들을 적당히 잡아놔야 내일 사냥이 수월할 것 같습니다.”
밤에 피를 마시고 미친 듯이 날뛰어야 몇 달간 시달리던 열기가 조금이라도 발산될 것 같았다. 소렐이 보스스 웃자 확신이 들었다. 그래. 발산해야 했다. 지금 저 웃음마저 그의 썩어버린 정신머리로는 그저 유혹적으로 보일 뿐이니까.
“또 뭔가 생각이 있는 거죠? 오래 걸려요?”
“늑대 우두머리가 무척 영리한 것 같습니다만, 한두 시간이면 깨끗하게 끝날 겁니다. 그 정도 되는 시간 동안에 혼자 계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위험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또 분명히 그가 특별히 선별한 호위들을 마치 철벽처럼 둘러놓고 갈 거다. 소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리고 그녀 역시, 라이킨이 피를 마시려고 한다는 걸 알았다. 흡혈은 뱀파이어에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생존 수단이다. 그러니 그녀가 따라가서는 안 된다. 라이킨은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아.”
“아?”
라이킨이 그녀의 탄성을 따라했다. 왜 ‘아’라고 했냐는 물음이었다. 소렐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몇 마리나 잡으려고요?”
“한두 마리만 남기고 전부 다 잡을 생각입니다. 다시는 공주님 앞에서 사냥이니 뭐니 떠들지 못하도록.”
소렐의 눈이 더 휘어졌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가까이 오자 라이킨은 조금 난처했다.
“나는 라이킨이 제일 좋아요.”
“……예,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뒤로 물러나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토끼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이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면 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여서는 안 된다. 저도 모르게 그녀를 낚아챌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정말 좋아요.”
라이킨은 이를 악물었다. 정신 차리자. 그는 어쨌든 자제력이 극도로 강한 뱀파이어로 유명했다.
“그런데 나 혼자 좋아하는 게 아니라 라이킨도 날 좋아해줘서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좋아해요. 소렐의 붉게 물든 도톰한 입술에서 연신 나오는 단어 때문에 그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지난 천 년간 그를 무감각한 살인귀로 만들었던 혹독한 경험들은 이런 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인계는 언제나 그에게 통하지 않는 방식이었는데, 어쩌면 여태까지 적들이 그의 취향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안겨도 돼요?”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자신에게 내려진 평가가 정말 형편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유혹에 끔찍할 정도로 약했고, 눈앞에 보이는 여자에게 저항할 수가 없었으며, 육욕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음탕한 사내였다.
“……안 될 리가 있습니까.”
그는 소렐을 폭 안았지만, 하반신은 되도록 접촉을 피했다. 아, 제기랄. 빨리 사냥을 하러 가야겠다. 늑대들을 맨손으로 잡아 찢기라도 해야 정신이 차려질까. 이렇게 가볍고 쉬운 사람이었다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항상 됩니다.”
하지만 그의 손은 꽉 잠겨 있었다. 절대 풀어선 안 된다. 손을 펼치고, 뻗었다간 그는 늑대를 잡는 게 아니라 소렐을 잡아채 그대로 끌고 갈 거다.
“공주님. 일찍 주무세요.”
그가 간신히 할 수 있는 유일한 부탁이자, 유일한 말이었다. 사실 소렐이 일찍 잠드는 것도, 혼자 잠드는 것도 전부 다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라이킨은 진심으로 평온한 밤이 되길 바랐다. 산딸기술이 맛있다며 아주 작은 잔으로 한 잔만 홀짝거린 소렐은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어주었고, 가장 신임하고 있는 뱀파이어들에게 그녀의 경호를 맡긴 그는 또 다른 무리를 이끌고 산에 올랐다.
“왕세자의 사냥 실력이 형편없군요.”
부하의 말에 라이킨이 조용히 대꾸했다.
“아니면 늑대들이 지나치게 영리하거나.”
“가끔 그런 놈들이 있지요. 하지만 그런 놈들은 취미로 사냥하듯 해선 안 됩니다.”
“그렇지. 안 되지.”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놈들을 상대로 한다면 전쟁하듯 사냥해야 했다. 영리하게 사냥꾼들을 농락하던 늑대들은 왕세자 일행에게는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지만, 라이킨이 움직이기 시작한 지 이십 분 만에 두 마리가 잡혔다. 그리고 허공에 피가 튀었다.
“……아.”
라이킨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비릿한 맛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간신히 욕구를 달래는 정도다. 신선하긴 했지만 썩 좋지는 않은 그 정도. 언제부터 입맛이 이리 고급스러워졌나 싶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두 마리를 시작으로 늑대들을 사정없이 잡아대고, 몸에 튄 핏방울이 점점 많아져도 마찬가지였다. 라이킨은 결국 흐르는 개울가에 머리를 처박고 말았다.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뱀파이어들이 불안하게 물었으나, 젖은 입가를 닦아내는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는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황금색 실이 또 늘어져 있었다. 이미 묵직하게 늘어진 실타래 위로 하나, 둘, 장난처럼 가느다란 실이 계속 생겨난다.
“마스터?”
라이킨은 미간을 찌푸리며 실이 뻗은 쪽을 바라보았다. 소렐이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 그가 당장 집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고, 뱀파이어들이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마스터!”
라이킨은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