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연모와 음모 (4)2021.05.01.
소렐은 새로운 사냥별장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근처에 있는 냇가에서 한가롭게 낚싯대를 늘어 뜨려놓고 노닥거려도 좋았고, 볕이 좋은 날 잔디 위에 자리를 깔고 책을 읽거나, 아니면 그림을 그려도 좋았다.
“공주님은 전원생활을 좋아하시는 모양입니다.”
앉아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그녀의 곁에 누운 남자가 중얼거렸다.
“아닌데요.”
“아닙니까?”
“네.”
“이곳에 오시니 부쩍 자주 웃으시는 것 같아서요.”
“전원생활이 좋아서 웃는 건 아니에요.”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눈을 떴다. 챙이 넓은 모자 하나를 쓰고 머리카락을 바람에 맡긴 공주님이 또 웃었다. 햇빛과 그림자가 적절히 어우러져, 그녀는 어떤 풍경화에 끼어든 요정처럼 보였다. 그의 눈에는 그렇게 눈부셨다.
“라이킨이랑 단둘이 나와서 좋아요.”
그에게로 살짝 고개를 숙여 속삭인 소렐은 또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고, 그가 저도 모르게 뻗으려던 손을 꽉 쥐고 내려놓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쥐고 있던 연필을 내려놓고 그의 손을 대신 잡았다.
“왜요, 만져도 괜찮아요.”
“제가 안 괜찮습니다, 제가…….”
눈에 불을 켜고 그가 양심을 버리는지 안 버리는지 감시하는 이들은 많고, 이미 양심을 버린 지는 오래되었는데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토끼 앞에서는 어쩐지 계속 예의를 지켜야 할 것 같아 괴로운 옛날 남자는 잡히지 않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렇다 해서 잡힌 손을 빼내지도 않았다. 그는 그대로 끌어당겨서 소렐의 손을 오히려 감쌌다.
“라이킨은 특이한 사람이에요.”
“제가 말입니까?”
“네. 참을 것처럼 말해놓고서는 할 건 다 해요.”
마침 그녀의 손목에 입술을 묻고 있던 그가 픽 웃었다.
“그런데 내가 무섭다고 느끼기도 전에 멈춰요. 그런데 조금 생각해보면, 계속했으면 겁이 났을 것 같거든요.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공주님께 관심이 많으니까요.”
관심은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근데, 그건 알아요?”
라이킨의 눈이 다시 한번 그녀에게로 향했다.
“아니지, 이미 알고 있지요?”
그러니까, 무엇을 말인가.
“나한테서 점점 늦게 손 떼잖아요.”
소렐은 말하는 내용과는 영 상관없이 밝게 웃었다.
“내가 점점 겁을 덜 내고 있다는 거 아는 거죠, 그렇죠?”
“공주님께서는 제가 그만큼 괴롭다는 걸 아시고 계시는 거지요.”
그는 괴롭다고 하면서도 씩 웃었다.
“공주님은 제게 가장 소중하신 분입니다. 소중하니 공을 들이고, 필요한 만큼 기다려야지요.”
차분하게 말하더니, 결국 한숨을 쉰다.
“……일단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봅시다…….”
“대학에는 이미 들어갔는데요?”
“그건 예비과정이지요. 엄연히 말하면 정식과정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새 학기가 공주님의 첫 학기입니다.”
소렐은 까르르 웃었다.
“라이킨은 이런 거 보면 정말 신사예요.”
“신사가 아니라 고루한 것뿐입니다.”
라이킨은 별거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진정한 신사였다면, 공주님과 단둘이 따로 나오지도 않았을 테고 공주님께서는 여전히 저를 경계하고 계실 겁니다.”
“신사인데요?”
“그게 신사도이자 기사도이지요. 제가 그렇게 모범적인 사람은 아니라 유감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어느새 소렐의 손목 안쪽에는 붉은 자국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소렐은 빨아들이는 느낌에 움찔거리며 눈을 꼭 감았다.
“아버님이 가르쳐주시지 않던가요. 남자들은 절대로 믿지 말라고.”
“네. 그중에서도 ‘그놈’은.”
소렐은 라이킨을 가리켰다.
“절대 믿지 말랬어요.”
“……늘 현명한 사람이었죠.”
“네.”
“늘 저를 죽이려고 들었습니다.”
아하하하, 소렐은 웃다가 읏,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저를 구해준 건 메리 공주님이셨고. 남편을 막는 데는 탁월한 재주가 있으셨거든요.”
몸을 일으킨 라이킨은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라, 결국 그의 품 안으로 쏟아지는 소렐을 가볍게 받아 안았다.
“공주님도 그 재주를 물려받으셨습니다.”
“……내가, 뭘…….”
“지금도 저를 참 잘 막고 계시잖습니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라이킨은 발끈하는 소렐을 토닥이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예, 그러셨지요.”
긁어내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 토끼는 입을 합 다물었다. 아무리 아가라도 이젠 라이킨이 얼마나 흥분했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셨습니다.”
그는 토끼의 체취를 맡아가며 짐승처럼 몸을 들썩였다. 커다랗고 두터운 흉통이 크게 부풀었다가 숨을 간신히 내뱉을 때마다 꺼졌다. 소렐은 이럴 때마다 그녀가 꼭 맹수를 길들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감히 금기를 깨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했다. 토끼가 가지기엔 지나치게 위험한 호기심이었지만, 그녀는 용감한 토끼이기도 했다.
‘……또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시군.’
라이킨은 예전처럼 얼어붙지 않은 채, 또록또록 굴러가는 소렐의 눈동자를 보곤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점점 맛을 보게 되어 손에서 떼어낼 수 없는 건 라이킨뿐만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도발하는 어린 토끼가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오늘 밤에 늑대라도 사냥해야 하나.’
점점 괴로워지는 건 아무래도 라이킨뿐인 모양이니, 다시 한번 젠장이다.
* 에설론 백작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 그 빛나는 이름의 소유자는 엔버네스로 올라오자마자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빠르게 행동했다. 우선 그녀의 몸에 배어 있는 성기사의 냄새며 흔적을 최대한 지우고, 유명한 재단사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제대로 된, 최신 유행하는 옷들을 잔뜩 살 테니 어디 추천해봐요.”
오만한 귀족의 주문에 마침 사교계 시즌이 시작된 뒤 시간이 좀 지나 한가해졌던 재단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루드밀라는 제대로 된 전쟁을 하려면 무기고를 넉넉하게 채워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뱀파이어인 1대 칼리에르 공, 앨리스 루이즈 칼리에르가 가르쳐준 것이다.
“이런 게 필요합니까?”
그녀를 감시하기 위해 쫓아온 성기사 하나가 한심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게 내 갑옷이야.”
루드밀라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싸우려면 갑옷도 있어야 하고, 제대로 된 검도 있어야 하고, 또 방패도 있어야 하지. 귀족사회에서는 진짜 갑옷을 입을 수는 없으니, 격식을 한껏 차린 차림으로 바뀐 것뿐이야.”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고 싸움에 임해야 했다. 더구나 감히 그녀를 제치고 칼리에르 공비 작위를 손에 넣은 여자를 없애려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일단 어떤 여자인지, 아니, 어떤 ‘애’인지 확인부터 해야 할 거 아닌가.
“때로는 검을 들지 않고 말로 하는 싸움이 더 무서운 법이거든.”
그렇게 말하는 루드밀라의 얼굴에는 냉랭한 조소가 넘쳐났다. 정치는 모르고 그저 빼앗는 떼강도들인 저 엘펜하임이 뭘 알겠는가. 시간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카메론 셀레스트는 그것도 모르고 그녀를 에설론에 처박아두려고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 ‘애’가 칼리에르 공비 자리를 꿰어차고 있는 기간만 늘어나는 건데 말이다!
‘답답하긴.’
루드밀라는 언제나 욕심 사나웠다. 그녀는 칼리에르도 가질 것이고, 저 엘펜하임 성기사놈들의 피도 다 마셔버릴 것이다. 그녀는 받은 수모를 결코 잊지 않고 갚아주리라, 오늘도 이를 갈며 맹세했다.
“서둘러 움직여야지. 시간이 없어. 지금 고대마법의 계승자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당장 알아야지,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성기사는 그 말에 정색했다.
“어떻게 움직일지는 우리 지부장님께서 결정하시는 겁니다.”
“웃기시네. 그래서 여태까지 성공한 적 있어?”
루드밀라는 새빨갛게 칠한 입술로 그들을 비웃었다. 병신들. 아직까지도 상황 파악하지 못하고 대단한 뱀파이어 하나를 생포하여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안도하고 있다. 저들은 그녀를 제대로 써먹을 줄도 모른다.
“어차피 나를 새로운 방책으로 깨운 거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할지 두고 보면 되는 거지.”
“정말로 고대마법…….”
“관심 없다고. 그딴 게 없어도 나는 충분히 완벽해.”
루드밀라는 더 이상 성기사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거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일단 엔버네스를 돌아다닐 만한 몰골을 갖춘 후에, 정보부터 끌어모아야겠다. 성기사들이 끌어모으는 찌꺼기 말고, ‘진짜’ 정보 말이다. * 밤이 깊었다. 소렐은 어둠이 깔리고 나서야 라이킨과 단둘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물론 알게 모르게 별장지기며 요리사가 드나들고 있었지만, 별장은 공작저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고, 라이킨은 공작저에서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 있었다.
“라, 라이킨!”
화들짝 놀라 부르니 저쪽 모퉁이에서 라이킨이 고개를 들었다.
“예, 공주님?”
“저기, 늑대 소리가 들려요!”
놀란 건지, 아니면 겁을 먹었는지 눈이 커다래진 토끼가 그에게로 달려왔다. 라이킨은 얼른 팔을 벌려 그녀를 안아주었다.
“밤에도 사냥을 하나요?”
“아니, 아마 안 할 겁니다.”
왕세자는 밤에 사냥을 하시기엔 너무나 귀하신 몸이니까. 안전을 위해서 모두가 만류할 것이다. 라이킨은 그녀를 안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엔버네스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험준하고 멋진 산들이 아주 가까이 있었다. 그래서 늑대들이 울부짖는 소리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청력이 유달리 좋은 토끼는 더더욱 잘 들을 수 있을 거다.
“무서우십니까?”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작은 소렐은 그에게 안기는 게 이제 익숙해졌는지, 알아서 쏙 들어와 안겨서 가만히 있었다.
“조금 놀랐어요.”
“가서 잡을까요?”
“네?”
소렐은 고개를 들어서 한참 위에 있는 라이킨을 쳐다보았다. 아, 목이 아플 지경이다. 그는 고개를 든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머리카락도 쓰다듬었다.
“공주님께서 편안히 주무셔야 하는데 시끄럽잖습니까.”
“곧 그치지 않을까요?”
라이킨은 잠시 대답하지 않고 그의 가슴까지밖에 오지 못하는 소렐을 바라만 보았다. 용감한 헬레인 토끼의 피를 받았지만, 아직 어려서 겁이 나는 걸까?
“글쎄요.”
그는 바깥을 다시 내다보았다. 어두운 조명이 일렁이고, 그의 근사한 옆선이 뚝 떨어져서 그림자와 뒤섞였다. 그는 가끔 소렐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다. 그녀가 아직 다 살지 못한 오랜 세월을 아주 메마르고 혹독하게 보낸 남자의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로 향할 때는, 언제나 다정하게 웃는 얼굴이다.
“계속 듣다 보니 소름끼치는군요.”
“그러게요…….”
“오늘 혼자서 잘 주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네?”
소렐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래도 잘 잘 수 있어요. 늑대는 조금 무섭긴 하지만…….”
라이킨의 눈이 더 재미있다는 듯이 휘어졌다.
“무서우면 절 부르세요, 공주님.”
어, 이거 조금 위험한 것 같다. 소렐은 반사적으로 말했다.
“안 불러요!”
“예, 말로 부르지 마시고 마법으로 부르십시오. 저는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놀리는 거죠?”
“제가 어떻게 감히 공주님을 놀리겠습니까? 저는 진심입니다.”
놀리는 거 맞았다. 소렐은 그에게서 팩 떨어졌다.
“됐어요!”
시골 출신을 뭘로 보는 거람. 늑대는 위험하다는 걸 아니까 경계하는 것뿐이고, 라이킨이 있으니 설마 집까지 들어오지는 않을 거라는 건 안다. 안전하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잘 잘 수 있다! 소렐은 그에게서 휙 돌아선 뒤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갔다.
“꼭 부르세요, 공주님.”
“안 부른다고요!”
그러셔야지요. 라이킨은 휙 가버리는 소렐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부르지 말아야지, 그를 불렀다간 순식간에 잡아먹힐 텐데. 그는 소렐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으로 좇다가,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늘 늑대들이 제법 요란하게 울었다.
“……너무 시끄러운데.”
정말 공주님이 주무실 수 있으려나. 라이킨은 다시 소렐이 떠난 자리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돌아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소렐이 걱정해야 할 건 집 바깥의 짐승이 아니라 집 안의 짐승이다.
“양심, 양심과 자제력을 잃지 말아야지…….”
양심은 이미 버렸지만 자제력은 아마 좀 남아 있을 거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도시보다 산과 계곡이 가까운 이 조용한 시골이 훨씬 더 야릇한 느낌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일탈을 저지르는 기분이라 사교계 시즌 중에도 사라지는 남녀가 그렇게 많았나. 라이킨은 뒷목을 문지른 뒤 일단은 침실로 들어갔다. 늑대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마치 오늘 그들을 사냥하는 데 실패한 사냥꾼들을 비웃는 것 같았다. 늑대는 밤새 울었다. 괴로워서 우는 소리가 아니라, 저들끼리 신나서 우는 소리다. 듣는 사람의 귀에는 오싹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라이킨은 침대 위에 멋대로 늘어져 앉아 창밖을 계속 보고 있었다. 저 늑대들의 소리가 범상치 않다. 왕세자가 과연 저 늑대들을 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던 찰나였다.
“……라이킨.”
울먹이는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려 닫혀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늑대들이 다시 사납게 울어댔다. 그 울음소리에 반응하듯, 작은 인영이 문 바깥이 아닌, 문 안쪽에 휙 나타났다. 연결된 황금색 실들이 길게 늘어져서 반짝거렸다.
“라이킨, 자요……?”
목소리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담요 하나를 폭 뒤집어쓴 소렐이 쪼그려 앉은 채 바들바들 떨었다.
그는 그녀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일어나서 달려가고 있었다.
“자려고 했는데……, 그…….”
담요 아래 까만 눈이 이리저리 불안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설마 주무시기 전에 공포소설을 읽으신 건 아니겠지요.”
어떻게 알았지! 더 커지는 눈에 라이킨은 그녀의 앞에 무릎을 접고 앉아서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아이고야.”
그녀가 그를 걱정할 게 아니라, 그가 그녀를 걱정해야 했다.
“나 저어기 구석에서 조그맣게 있을게요, 방해 안 할게요.”
소렐은 침대 구석을 가리키며 종알거렸다. 무서우면 부르라고 했더니, 공주님이 아예 마법을 써서 그의 침실에 난입해버렸다.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하게 하십니까.”
라이킨은 담요에 싸인 공주님을 휙 들어 안았다.
“저도 무서우니, 함께 있어주세요.”
“라이킨도 무서워요?”
“예, 무섭습니다.”
그는 침실에 쳐들어온 그녀가 제일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