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연모와 음모 (2)2021.04.24.
칼리에르 공비가 데뷔를 한 지도 어언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사교계는 그사이 여덟 건이나 되는 약혼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한 건의 파격적인 불륜 소식이 공식적으로 터져 나와, 뭇 사람들의 눈총을 받았다. 물론 소렐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정말 오래 있을 거예요?”
“나도 휴가를 받았으니 푹 쉬어야죠, 공주님.”
샤를렌은 웃으면서 말했다. 엔버네스에 오래 머무르겠다는 말에 소렐이 손뼉을 치며 좋아해주니, 그녀도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딜 가서 이런 귀한 환대를 받아볼까.
“어디서 머무르려고?”
가만히 듣고만 있던 라이킨이 묻자 샤를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기서 구박받기 싫으니까 어차피 아버지 집에 가 있을 거거든.”
“누가 샤를렌을 구박해요?”
“누가 하긴요. 공주님 곁에 앉아 있는 제 친오빠가 얼른 꺼지라고 눈으로 욕하지요. 저거 봐요. 지금도 하잖아요. 무섭고 서러워서 어디 있을 수가 있나.”
샤를렌은 소렐에게 말하며 라이킨을 가리켰다.
“걱정 마. 나도 내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 아버지 집으로 갈 테니까. 누구는 오빠가 그러는 꼴을 보고 싶은 줄 알아? 아, 신경 쓰지 말아요, 공주님.”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시시각각 난처하게 변하는 소렐의 표정에 샤를렌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공주님은 무척 좋아하지만 오빠가 연애하는 거는 좀 징그럽거든.”
“누군 아닌 줄 알아? 너라고 연애 안 할 것 같아?”
라이킨이 한마디 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또 전쟁이다. 샤를렌은 말로는 전혀 지지 않는 대단한 언변의 소유자였고, 라이킨은 독설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렐 혼자서 얼굴이 빨개진 채 앉았다.
‘연애래…….’
연애는 통속소설의 기사와 숙녀, 혹은 의적이 열차 강도질을 하다가 만난 쾌활한 아가씨와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 물론 라이킨이 그녀를 그저 보호자로서가 아닌, 남편으로서 아껴주고 귀하게 여겨준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서 ‘너흰 연애하고 있다’라는 말을 듣는 건 처음이라, 소렐은 귀까지 빨개졌다.
‘진짜 연애인가 봐!’
그럼 이 감정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그녀는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소렐이 보기에 라이킨은 너무나 멋지고, 또 잘난 부분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었다. 저런 사람 눈에 한참 어린 그녀가 들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으면 좋고, 라이킨이 다른 여자에게 그녀를 대하듯 대하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으며, 무엇보다 그가 왕세자를 신경 쓰는 건 그녀와 마음이 같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우와.’
“……주님, 공주님?”
소렐은 뒤늦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라이킨이 고개를 기울인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네?”
“무슨 생각을 그리 열심히 하실까요?”
그는 부드럽게 물으며 설탕에 절인 과일을 소렐에게 좀 더 많이 덜어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니 다 말해달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기에 주의를 잠깐 환기시키는 것뿐이었다. 아직 식사시간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니까.
“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공주님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도리질 치면, 궁금하지 않다가도 궁금해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라이킨은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소렐을 바라보았다. 캐물어볼까? 아니, 그렇게까지 집요한 남편은 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는 소렐의 모든 것이 궁금했다. 그가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느라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내내 고통받았던 것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만, 어쨌든 그는 항상 그녀를 생각했다. 지금도 샤를렌이 아버지 집으로 가면 공주님과 단둘이 뭘 할지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물론 그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소렐이 몰라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아무튼 오빠도 내가 없다고 해서 허튼수작 부리지 마.”
“아버지도 그렇고, 왜 다들 날 파렴치한 취급을 하지?”
“사실이니까!”
“사실이니까요.”
마침 식당에 마지막 디저트를 들고 들어오던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까지 샤를렌과 똑같이 대답했다.
“아, 에벌린까지 날 버리는군요.”
“버리다뇨, 교수님. 나는 그저 요즘 아가씨들은 스물여섯은 되어야 시집을 간다는 사실을 지적했을 뿐이에요.”
“중산층이나 귀족집안은 보통 열아홉에 다 간다는 사실을 지적해봤자 소용없겠지요.”
라이킨은 샤를렌과 에벌린의 눈총을 받고 간단히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래봤자 그가 바로 소렐 이드리스의 남편이라는 사실에 만족하면서. 남편이라니 실로 마음에 딱 드는, 아주 안정적인 위치다. 그는 여전히 얼굴에 홍조를 띄운 채 과일을 맛있게 먹고 있는 소렐을 바라보았다.
‘순서가 어떻게 되더라. 대충 가문끼리 아는 사이로 혼담을 추진하면서 선을 보이다가 약혼인가.’
그는 아직까지도 어머니가, 그 여자가 살아 있을 때 뜬금없이 메리 헬레인에게 아직 임신하지도 않은 딸의 남편이 될 거라며 지목당해서 대마법사에게 죽을 뻔했다. 어찌 보면 딱 세 사람, 부모와 사위만 아는 일이었기에 소렐은 무사할 수 있었을 거다. 그 사실을 그 여자가 알았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까.
‘아니, 어쩌면 헬레인 왕가의 혈통이라고 좋아했을 수도……, 아니. 그래도 그놈의 순혈 타령이 우선이었겠지.’
라이킨은 그 여자가 만들어낸 걸작이었다. 숨 쉬고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작품이었다. 그러니 그 작품이 망가진다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거다.
“그럼 샤를렌은 저녁 먹고 가요?”
“네, 공주님. 저녁 먹고 가요. 수시로 올 거니까 너무 섭섭해하지 마세요.”
샤를렌은 웃으면서 농담을 했지만, 나중에 발레시나스 공작저로 떠나기 전, 라이킨과 비교적 아주 심각한 어조로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그녀를 배웅한 건 부부가 함께였지만, 소렐은 적어도 라이킨이 하는 ‘위험한 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아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걸 일찌감치 터득했다.
“공주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맞이하는 한가한 저녁시간에 그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면, 소렐은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공주님을 안고, 키스하는 걸 제외하곤 저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너무 긴장하지는 마시고요.”
“아버님이 그런 건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라이킨은 뜻밖의 말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
“순식간에 선을 넘고 더 깊은 곳까지 가기 십상이라면서요.”
“아버지 댁에 괜히 오래 계셨던 게 아니군요.”
“한 사흘 남짓 있었을 뿐인데요.”
“무척 오래 계셨습니다.”
“원래는 일주일 넘게 있으려고 했어요.”
소렐은 그의 손에 비해 턱없이 작은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나한테 말을 제대로 건 게 나흘만이니까, 딱 두 배로 여드레 동안이요.”
“……다시는 그런 짓 안 하겠습니다.”
“뭐, 해도 괜찮아요. 하면 할수록 라이킨이 날 더 오래 못 보는 거니까.”
라이킨은 이번에야말로 기가 막혀서 태연하게 말하는 소렐을 쳐다보았다. 공주님이 언제 저렇게까지 발전하셨지? 어쩐지 오 년 후에는, 그가 바라는 오 년 후에는 순한 공주님이 천하의 칼리에르 공마저 간단히 구워삶는 무시무시한 지경까지 발전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뭐, 딱히 불길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펠릭스 이드리스와 메리 헬레인의 유일한 딸이다. 그들을 닮았다면 라이킨을 쥐고 흔드는 거야 당연할 거고, 그는 이미 지금도 휘둘리는 중이었다.
“안 합니다. ……그런데 공주님께서는 저를 오래 못 보는 건 괜찮으십니까?”
그건 좀 서운한데. 아니, 많이 서운하다.
“나는 음, 괜찮아요.”
소렐은 뒷짐을 지고 괜히 천장 쪽을 힐끔거리면서 종알거렸다.
“몰래 보면 되는 거지.”
“몰래?”
라이킨이 되묻는 순간, 소렐은 순식간에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그의 느리게 뛰던 심장이 허공에서 뚝 떨어졌다. 멀쩡하게 보이던 작은 공주님이 없었다. 라이킨은 고개를 휙 돌렸다. 뒤쪽의 모퉁이에 반쯤 쏙 나온 뽀얀 얼굴이 보였다.
“아, 몰래 보는 건 안 되려나. 금방 눈치채네요.”
그들 사이에 늘어진 황금색 실, 결합선은 이젠 한 번에 셀 수 없을 정도로 가닥가닥 많이 늘어져 있었다.
“……공주님.”
라이킨은 눈을 질끈 감으며 서둘러 그녀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의 얼굴에 얼마 남지도 않았던 핏기가 싹 가셨다.
“나 이제 잘해요.”
“예. 잘하시네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굳이 그녀에게 손을 뻗어 따뜻한 체온과 익숙한 양감을 느껴보았다. 아니, 손에 닿는 것으로는 부족해 결국 끌어안고 말았다. 품에 채워놔야 겨우 안심이 된다.
“놀랐습니다.”
“잘해서?”
“아니요, 갑자기 사라지셔서요.”
“아.”
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 앞섰던 소렐은 뒤늦게 그의 굵은 팔뚝을 잡았다.
“놀랐어요? 미안해요.”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제가 각오를 더 단단하게 다져야겠습니다.”
펠릭스 이드리스의 마법을 봐와서 웬만한 마법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는데, 그걸 소렐이 사용한다면 또 이야기가 달랐다. 그는 품안에 있는 작은 토끼가 마음만 먹는다면 곧장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공주님께서는 하루하루 놀랍게 실력이 늘어나시는데, 제가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라이킨은 중얼거리다가 눈을 감았다. 갑자기 눈앞이 아찔했다. 품안에 잠겨드는 존재는 이리 여리고 작기만 해서, 아직까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데 점점 사용하는 마법은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노리는 사람도 더 많아질 거다. 결혼할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지만, 라이킨은 그때 그의 각오가 얼마나 얄팍하고 무성의했는지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충분한 것 같은데요.”
소렐은 웃었지만 라이킨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실로 교만했다. 고대마법의 계승자를 데리고 와서 부족한 거 없이 잘 지내게 해줘야지, 뭐 이딴 알량한 생각으로 끝내선 안 됐다.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녀가 없어지면 그는 살 수가 없으니까. 고대마법의 계승자가 만일 뱀파이어에게 해가 된다 해도, 죽여선 안 된다. 그녀는 살아야만 했다.
“공주님.”
그는 간신히 그를 숨 쉬게 하고, 또 숨이 멎게 하는 이를 불렀다.
“그동안 공주님께 말씀드리지 않은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라이킨은 참을 수가 없어서 소렐을 잘 받쳐 그대로 안아들었다. 어어,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녀는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고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녀도 어느새 그가 안아주는 것에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젠 공주님도 아셔야 합니다.”
소렐은 그녀를 절대로 앉히거나, 아니면 혼자 두 발로 서게 하지 않은 채 걷기 시작한 라이킨은 먼저 엘펜하임의 봉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두 개의 모조 티아라가 녹고, 펠릭스 이드리스의 웃음소리가 기사단 본부에 메아리쳤다는 이야기에 소렐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공주님을 위해 철저하게 안배해놓은 마지막 유산입니다.”
그리고 끝내 마지막 예언이 세상에 드러나게 하려는 보복이기도 했다. 라이킨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어느덧 이야기는 소렐의 마음을 한때 어지럽혔던, 그의 전 약혼녀에게로 옮아갔다.
“깨어났다고요?”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뱀파이어는 그럼 아주 오래 자서, 아주 오래 사는 것도 가능하겠네요.”
무거운 마음으로 말하던 그는 소렐의 천진한 말에 그만 웃어버렸다.
“그렇게까지 오래 자는 건 불가능합니다. 보통 잔다는 건 그만큼 몸에 타격이 있거나, 심적으로 지쳤다는 뜻이지요. 몸을 복구하기 위해서 자는 겁니다.”
하지만 소렐의 입을 쭉 나와 있었다. 통통한 저 입술이 자꾸만 시선을 끈다.
“남의 집에 정성 들여 사술까지 걸 정도인 사람이 심적으로 지치긴 뭐가 지쳐…….”
하하하하, 라이킨은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는 그녀를 더 바짝 고쳐 안았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 정도로 열의가 대단한 사람이 지치긴 뭐가 지쳐서 잠들었을까요. 그렇지요?”
소렐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는 라이킨을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뱀파이어는 매력적이다. 그중에서도 그녀를 아껴주는 이 뱀파이어는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그녀가 투덜거리는 말에도 웃어주고, 지금도 기나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 강철 같은 팔로 힘들다는 기색 하나 없이 그녀를 안고 있었다. 지금 소렐의 곁에 있는 사람들 중, 라이킨이 가장 그녀를 아끼고 많은 애정을 주었다.
“조금 주의하셔야 한다는 뜻에서 말씀드리는 것이니 지나치게 걱정하지는 마세요.”
그는 그녀를 얼마나 아끼는 걸까? 소렐은 서슴없이 라이킨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좋아한다’는 말과 라이킨의 ‘애정’의 간극이 크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엔버네스로 온다고요?”
“예. 분명히 올 겁니다만.”
“그럼 내가 만나서 뭐라고 해도 괜찮아요?”
“사술에 관해서 단단히 한마디 해주신다고 이미 말씀하셨지요. 꼭 혼내주세요.”
그리고 그는 어쩌면, 마음이 식는 순간 빠르게 돌아설지도 모르겠다. 소렐은 그의 목을 껴안고 품에 파고들었다. 라이킨이 새파랗게 질려 찾으러 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다시는 그녀를 혼자 두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의 맹세도 믿었지만, 그래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걸 배웠다.
“위험하고 무서운 사람 아니에요?”
라이킨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 있으면 자주 웃었다. 그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고, 웃음소리는 더 좋았다.
“제가 더 위험하고 무서운 사람입니다.”
‘지나치게 의지하고 기대지는 말아야지. 그건 라이킨도 부담스러워할 거야.’
그녀는 더 단단해질 것이다. 소렐은 그런 다짐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꼭 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돌아와 주시더니, 이젠 제 사심도 마음껏 채워주시는군요. 뭐 때문에 이러실까요?”
라이킨은 즐겁게 물었다.
“이유가 있어야 해요?”
“예.”
그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유를 알아야 제가 앞으로도 많이 이용하지요.”
“별로 이유는 없는데…….”
“그럼 앞으로도 이유 없이 많이 애용해주십시오.”
라이킨은 아무리 커봤자 제 어깨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렐을 내내 안고만 있었다. 작은 토끼에게서 무시무시한 뱀파이어의 냄새가 난다.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그의 체취를 가득 묻혀놓고 나서야 라이킨은 조금이나마 만족했다.
“나 무겁지 않아요?”
“전혀요. 제가 힘들어 보이십니까?”
“전혀요.”
소렐은 다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여드레나 집을 비우시려고 했다고.’
그는 기가 막히다는 눈으로 소렐을 내려다보았다. 여드레라니, 얼마나 끔찍한 시간인가. 그가 소렐을 피한 시간과, 소렐이 나가 있던 시간을 합치면 그쯤 된다. 그동안 라이킨은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었는데, 소렐은 더 긴 시간 동안 집 밖에 있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하긴 따지고 보면 그녀는 처음부터 범상치 않았다.
‘남편한테 다른 여자를 만나도 된다고 하시질 않나……. 전 약혼녀가 온다는 소리에 사술 가지고 한소리 해도 되냐고만 하시질 않나…….’
언제 쑥쑥 자라서 그가 그녀의 소유라고 오만하게 말해주려나. 라이킨은 그때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상한 구석에서는 아주 단단하면서도 다른 쪽으로는 순하기만 한 소렐이 그런 말을 해줄지도 미지수였다.
“무슨 생각 해요?”
“불길한데 싫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내 기다리고, 소렐의 애정을 갈구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계속 이 관계는 한쪽으로 치우친 관계가 아닐까.
“그럼 불길한 게 아닌 거 아니에요?”
“예. 즐겁고 길한 일이지요.”
소렐은 자존심도 강한 공주님이니, 조금 더 나이를 먹는다면 이미 그녀에게 목을 매고 있는 남편을 마음껏 휘두를 정도가 될 것이다. 아니, 이미 휘두르고 있나. 라이킨은 웃으면서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아주 여리고, 부드럽고, 연한 향이 난다. 한번 깨물어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