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해제 (16)2021.04.17.
로렌스 오블리앙, 발레시나스 공작은 시계를 한 번 보고, 그의 앞에서 뻔뻔하게 웃고 있는 아들놈을 한 번 보았다.
“아직까지 네가 이 아버지를 생각할 정도의 정신은 있다니 다행이구나.”
로렌스는 아주 우아하게 정신머리 없는 아들녀석을 비난했다. 아주 뻔뻔한 놈이긴 했다. 늦게 맞이한 어린 아내를 울려놓고 집에 들어가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더니, 이젠 아버지 집의 담장을 이틀째 뛰어넘고 있었다.
“저는 언제나 아버지께 혼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다 죽어가는 얼굴로 기어들어왔을 때보다 여유가 생겼구나. 농담도 하고 말이다. 앉아라.”
아들놈이 적당한 시간을 넘기면서까지 아직 한참 어린 공주님의 침실 발코니에 버티고 있는 꼴은 못 봐줄 정도로 깐깐한 구석이 있는 오블리앙 공은 소파를 가리켰다. 토끼는 다시 잠들 시간이었지만 뱀파이어에게는 한낮이나 한밤이나 차이가 없다. 라이킨은 소파에 앉았다.
“어디 보자. 잘 해결했니?”
“날이 밝는 대로 돌아오실 겁니다.”
“그렇게나 빨리? 섭섭하구나.”
“그렇게 아들이 고생하는 게 즐거우십니까?”
“이 나이 되어봐라. 세상에 즐거운 건 자식이 재롱떠는 것뿐이지.”
졸지에 그 나이를 먹고 재롱떠는 자식이 된 라이킨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하긴 그도 월담을 하고 발코니에 올라가는 짓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네가 말만 해도 소렐 그 애가 돌아가겠다고 하는 게 무섭다던데. 무섭게 했니?”
“아버지, 절 뭘로 보시고…….”
“난 네가 설마 그 어린 애를 두고 집을 뛰쳐나가는 짓을 할 줄은 몰랐거든.”
로렌스는 엄하게 아들을 쳐다보았다.
“싹싹 빌었습니다…….”
“마땅히 그래야지.”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랬니?”
부자는 그저 태연하기만 했다.
“우리 가족이 되었으니 언젠간 알 일이지. 결국 그 때문에 네 길었던 약혼도 끝났고 말이다.”
지난 약혼에 대해서 지금의 아내가 당연히 알아야 할 권리가 있었다.
“그 말씀을 하시니 생각나는 게, 루벤 실베스터가 극비리에 저를 만나자고 하더군요.”
“오, 그 애가 아마 프랑슈틸 가문의 방계였지?”
“예.”
“네 어머니가 프랑슈틸 가문이라면 그래도 인정할 만하다 했지.”
“그래서 약혼을 시킨 거고요.”
라이킨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로렌스는 진열장을 한참 보다가 귀한 술 한 병을 꺼냈다.
“한잔하겠니?”
“좋습니다.”
소렐에게 옛 이야기를 하고 나니, 자연히 술이 필요했다.
“약혼이 길었지, 아마?”
“예. 몇 년 정도.”
라이킨은 아버지가 내미는 술을 열었다.
“너 참 필사적으로 버텼다.”
“엄연히 말하자면 저는 그때도 임자가 따로 있는 몸이었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 태어나지도 않았던 공주님과 말이지?”
“장인에게 멱살 잡혔으면 끝난 얘기 아닙니까.”
얼떨결에 멱살이 잡혀 라이킨도 기가 막혔지만, 메리 헬레인 공주는 당신이 맞다고 정확하게 라이킨을 가리켰다.
“약혼이 길어진다면 성사될 리가 없는 결혼이지. 네 어머니는 그걸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어.”
뱀파이어가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라이킨이 고집을 피우며 일부러 더 전쟁에 나가 몇 년간이나 결혼을 뒤로 미뤘다면 그 결혼은 끝이었다. 로렌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과거를 들춰봤자 피비린내 나는 가족 간의 비극뿐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를 참 사랑하셨습니다.”
“고집부리는 면모도 사랑했지. 매력적이었어.”
치명적인 여자였다. 그래서 끝내 그의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기도 했고. 로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눈에는 에설론 백작이나 어머니나 똑같던데요.”
“네 어머니의 유일한 단점이 바로 사람 보는 눈이다. 프랑슈틸 가의 그 애는 너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어.”
“예. 저보다는 어머니와 더 어울렸지요.”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보다 며느리를 더 사랑하는 시어머니는 아마 최초였을 겁니다.”
“결혼도 못 했는데 시어머니는 무슨.”
로렌스는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을 질색했다.
“나는 남의 집에 사술을 부리는 며느리는 싫다.”
“이미 끝난 약혼입니다.”
그랬다. 앨리스 루이즈 칼리에르가 어느 날 집에서 죽으면서 그걸로 끝난 약혼이었다.
“아버지.”
라이킨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내를 죽이고서도 침착했던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어머니를 죽이셨습니까?”
오블리앙 공은 웃었다.
“네가 그 질문을 이제야 하는구나. 샤를렌은 벌써 오십 년 전에 물어본 질문인데 말이다.”
“그렇게 빨리 물어봤습니까?”
“그 애는 그때 많이 아팠잖니. 나한테 많이 미안해하기도 했고 말이다.”
로렌스는 턱을 가렸다.
“피해자가 미안해하다니,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어.”
라이킨은 그 끔찍하던 날 밤을 기억했다. 벼락이 치고 비가 내렸다. 살인으로 인한 소음을 가리기엔 아주 적당한 폭풍이 쳤다.
“네 어머니는 너희들을 너무 오래도록 괴롭혔다. 그런데도 너희가 바르게 잘 자랐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담배상자로 뻗는 손에, 라이킨이 대신 상자를 열었다.
“고맙구나.”
로렌스는 한숨을 쉬었다.
“왜 네 어머니를 죽였냐고? 내가 샤를렌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니? 나는 그때 지극히 침착했단다.”
“예, 그러셨습니다.”
그는 아주 침착하게 아내의 머리를 내려쳤다. 그러곤 검을 빼들었던 라이킨에게 ‘목을 자르려면 지금 자르렴.’이라고 말했다.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린 상태였어. 물론 너희는 싫어하겠지만 나는 네 어머니를 무척 사랑했단다.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로렌스는 값비싼 시가를 피워 물었다. 술과 연초가 동원되어야만 그날의 끔찍한 기억을 열 수 있었다.
“추억으로 남기는 게 아름다운 사람이었지.”
“어떻게 그렇게 사랑에 객관적이십니까?”
요 며칠간 철저히 감정에 휘둘렸던 라이킨은 아버지를 감탄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런 게 가능했단 말인가.
“나는 객관적이지 못해. 냉정하지도 못하단다. 네 어머니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사랑은 아주 지저분하게 끝났을 거야. ……살아 있어선 안 될 사람이니까.”
“그렇게까지 생각하십니까?”
“딸이 결혼하기 싫다 했다고 냅다 딸의 머리를 깨는 사람이 어디 있니?”
사랑도 점점 빛이 바래간다. 특히 그날 밤을 생각할 때마다 불타는 사랑도 식어간다. 사랑하는 이에게 느꼈던 추잡함과 경멸만 짙어질 뿐이다. 슬픈 일이었다. 비극이다.
“네 어머니는 그때 이미 한계였다. 네게 위협을 느끼고 있었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던데요.”
어머니보다 뛰어났던 아들이 픽 웃었다.
“왜 너 말고 약한 샤를렌을 공격했겠니? 샤를렌이 네 약점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 애를 찍어 눌러서 너를 누르고자 함이었어. ……그렇게까지 치졸하게 바뀌다니.”
로렌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앨리스 루이즈 칼리에르는 잔혹한 면도 있었지만, 스스로에게도 엄격하고 가차 없었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힘이 줄어들고, 아이들이 장성했으며, 더 이상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란 걸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걸 인정할 사람이 아닌데요.”
“그래, 무척 오만했지. 그 오만함이 당연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도 가졌고.”
“천재이긴 했습니다.”
라이킨도 그 점은 인정했다.
“그래도 네 어머니가 너희들에게 한 짓은 미친 짓이었어.”
뒤늦게 그녀가 아이들의 뼈를 부러트려가며 복종을 가르치고, 인간을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는 것을 알고 로렌스가 받았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난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술이 찰랑이는 잔 안을 들여다보았다.
“후회하지 않아.”
샤를렌에게 가한 폭력과 라이킨에게 향한 언사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란 걸 그 순간 바로 알아차렸다.
“뜯어 말려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로렌스는 고요하게 말했다.
“그때 바로 죽여야겠다고 판단했어.”
뜻밖의 말에 라이킨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죽이지 않는다면 네가 죽였겠지. 아니, 분명히 네가 죽였을 거다. 너는 그때 이미 앨리스를 뛰어넘었어. 앨리스가 무너졌으니 시간문제였다.”
로렌스는 젊디젊고 강력하며, 아름다운 뱀파이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네가 앨리스를 죽이는 건 내가 못 견딜 거다. 내가 사랑했으니, 내가 죽여야지. ……미친 소리 같지, 그렇지?”
“아니요.”
라이킨은 조용히 대답했다.
“알 것도 같습니다.”
“알 것 같다고?”
“예.”
로렌스는 미간을 좁히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네가, 알 것도 같다고?”
“……예.”
아버지가 왜 저러실까? 라이킨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아버지의 시선을 맞받았다.
“양심도 없는 놈.”
“……예?”
그 파괴적인 마음이 왜 사랑인지 이해할 것 같다면,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저 위에서 자고 있는 공주님은 아가다, 아가. 알고는 있니?”
아, 그 얘기인가. 라이킨은 웃었다.
“약혼한 지는 한 이백 년 정도 되었습니다. 저도 그만큼 기다렸으면 충분히 기다린 거 아닙니까?”
“이 여자 저 여자 다 싫다 하고, 헬레인 공주에겐 기대도 안 했으면 보자마자 홀딱 빠지다니.”
“예.”
라이킨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잘 참는 중이지 않습니까.”
“마땅히 참아야지.”
로렌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널 너무 무르게 키웠니?”
아내를 죽이고 아이들을 맡아 지금까지도 키우는 중이라는 아버지가 아주 심각하게 물었다.
“설마요.”
라이킨은 웃었다.
“아니,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 아가한테 빠져? 너 양심은 아직 가지고 있니?”
벌써 완전히 버린 건 아니겠지?
“결혼했으면 상대에게 충실해야지요, 아버지.”
“좀 더 기다려라.”
로렌스는 아주 엄숙하게 말했다.
“그럴 예정이라 내려왔지요.”
대답은 그렇게 나왔지만, 라이킨은 환장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환장하겠으니 술이나 한 잔 더 마시자. 겨우 아내를 어르고 달래서 집으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받았지만, 그녀가 너무 예쁘고 깜찍하다 해서 욕구대로 하기엔 지나치게 어렸다.
‘좋아해요.’
아마 그 좋아한다는 뜻도 그저 소렐 이드리스답게 마냥 순수하고 귀여운 의미일 거다. 그러니 용감하게 말했겠지. 좋아한다는 게 좋긴 한데 더 괴로웠다.
“앞으로 5년은 더 기다리고 나서 생각해야겠군요.”
“5년?”
로렌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고, 라이킨은 얼굴을 감쌌다.
“왜요, 아버지, 왜요…….”
“적어도 백 년은 기다려야지, 5년 가지고는 턱도 없어.”
“원래 성장기에는 쑥쑥 자라는 법입니다. 하루하루 몰라보게 다르다고요.”
“너는 하루하루 몰라보게 헛소리가 늘어나는구나.”
아버지의 탄식은 유감이었지만, 라이킨은 그래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5년 정도면 그래도 소렐이 성인들 사이에 흐르는 연애감정을 알고, 진도를 뺄 만하지 않을까? 아니, 아니다. 아직까지 야한 소설이 책 사이에 끼어 있다는 소리에 새파랗게 질려서 쳐다보지도 못하는 성격인데 5년은 무슨. 게다가 라이킨은 스스로에게 소렐을 지나치게 보호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좋은 것만 보여주게 되면 저 아가씨는 내내 저리 순진하기만 할 거다.
“너 내 말은 듣고 있는 거냐?”
“아버지.”
“왜?”
“제가 어쩌다가 이런 결혼을 했을까요.”
“나도 그럴 줄은 몰랐다. 살다 살다 아들이 내 집 창문을 타고 올라가는 꼴까지 보고.”
이백 여년 남짓이지만 나름 곱게 키운 아들인데 어떻게 이리 된 걸까. 로렌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안쓰럽지는 않으니 조용히 술이나 마시다 가라. 나 몰래 저 위로 올라갈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말고.”
“어차피 공주님은 내일이면 제 집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그래. 그리고 네 집에는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버티고 있지. 예의와 법도를 아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라이킨은 입을 꾹 다물고 천장을 노려보았다. 에벌린에게 장기휴가를 줄까. 아니, 줘야겠다. 아버지와 함께 이 착잡한 마음을 음주로 해소한 칼리에르 공은 다음 날 아침, 어마어마하게 술을 없앴다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모습으로 공비를 데리러 왔다. *
“나는 이제 준비가 됐어.”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 에설론 백작은 그녀에게 감히 낙인을 찍어 성기사들에게 옴짝달싹도 못하도록 구속시킨 카메론 셀레스트를 보고 또렷하게 말했다. 하지만 카메론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엔버네스로 가겠다고. 내 말 듣고 있어?”
“아니, 안 듣고 있어.”
카메론은 사실 루드밀라를 보며 폴리아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친애하는 폴린, 네가 저 여자는 특히 싫어할 것 같은데. 루드밀라는 그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책상을 쾅 내려쳤다. 하여튼 성질머리 하고는. 아, 저 성질은 둘 다 닮았다.
“상황파악은 다 끝낸 거야?”
카메론이 물었다.
“끝났다고, 준비가 되었다고.”
감히 내 말을 무시해? 루드밀라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카메론은 한숨을 쉬며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 사슬을 잡아채 끌어 당겼다. 순식간에 루드밀라는 책상에 세게 부딪치면서 그에게로 끌려왔다.
“아직까지도 상황파악이 안 되었는데 준비는 무슨.”
그가 직접 낙인을 찍고 사슬을 채운 뱀파이어는 이를 드러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가 다시 걷어차였다.
“다시 파악해.”
꼭두각시처럼 이용해먹기엔 저 성질머리와 교만한 성격이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 엘펜하임은 도구가 손에 착 감기는지, 아니면 제 살도 베이는지 가려가며 사용할 때가 아니었다. 고대마법이 칼리에르 공의 손에서 또 얼마나 깨어났는지 모른다.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했고, 두 번째 봉인을 유지하던 티아라가 녹아내렸다. 시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