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 해제 (15) (74/181)

74. 해제 (15)2021.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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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로 어두운 이야기였다. 고작 열 살에 간신히 저주받을 뱀파이어가 된 라이킨은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제임스라는 이름과 칼리에르라는 성이었다. 라이킨과 샤를렌, 성도 없는 평범한 농사꾼의 자식은 졸지에 제임스와 제인이라는 칼리에르 공의 새로운 자식이 되었다. 그러곤 그 아들이 국경으로 보내졌다.

16606119273432.jpg“저는 지금 괜찮습니다, 공주님.”

라이킨은 웃으며 말했다.

16606119273432.jpg“정말 괜찮아요.”

16606119273441.jpg“열 살에 전쟁터에 나갔다면서요. 그게 어떻게 괜찮아요?”

소렐은 기가 막혔다. 그녀였다면 당장 글래스턴 공작저에 걸린 1대 칼리에르 공의 초상화부터 떼어냈을 거다. 하지만 라이킨은 웃으며 그녀를 제 무릎 위에 앉히기만 했다.

16606119273432.jpg“점점 무뎌집니다. 처음에는 차라리 죽었으면 해도, 쉽게 죽지도 않을뿐더러 살고 싶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누구든 창에 꿰뚫리고 싶지 않은 법이니까요.”

오싹한 말에 소렐은 바르르 떨었다.

16606119273441.jpg“열 살이었잖아요.”

그녀는 온 산을 뛰어다니며 돌멩이로 잡초를 찧고, 시냇물을 떠다 소꿉장난이나 하는 열 살이었다.

16606119273432.jpg“전쟁터에서 나이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고 약하면 짐이자 약점이 되니, 모두가 치워내고 싶어 하지요.”

라이킨은 잔혹한 이야기는 그쯤에서 관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품에 안겨 바르르 떠는 토끼에게 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16606119273432.jpg“어쨌든 저는 잘 살아남았으니 괜찮습니다.”

16606119273441.jpg“왜, 왜……, 라이킨이 샤를렌을 보호했어야 해요?”

16606119273432.jpg“샤를렌은 약했습니다. 뱀파이어로 변하는 기간 내내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고, 남들보다 기간이 훨씬 길었지요.”

그는 소렐을 안은 양손을 깍지 껴서 단단히 얽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아프고 약했던 이야기를 하는 뱀파이어의 무릎 위에 앉아, 그의 품에 단단히 갇혀 있었다.

16606119273432.jpg“강한 뱀파이어만을 추구하는 어머니가, ‘그 여자가’ 저를 제어하기엔 가장 좋은 수단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때는 네 동생을 죽이겠다 하면 그만이었고, 조금 더 자라니 번갈아가며 학대하면 그만이었지요.”

수백 년쯤 산 것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괴물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억지로 피를 마셔가며 살인에 익숙해져야 했다.

16606119273432.jpg“샤를렌에게는 나를 인질로, 내게는 샤를렌을 인질로 삼으면 됐습니다. 그게 먹히지 않을 나이가 되어봤자 소용이 없었지요. ‘그 여자’는 가장 강한 뱀파이어였고, 힘은 물론이고 돈과 권력이 있었으니까요.”

몇 번 탈출에 성공한 적도 있었지만, 혹독한 대가가 뒤따랐다. 샤를렌은 다리를 잃을 뻔했고, 라이킨이 몸을 던져 죽음을 무릅쓴 후에야 겨우 다리를 지킬 수 있었다.

16606119273432.jpg“……그렇게 피를 마셔야 했습니다. 그 여자는…….”

라이킨은 뭐라 말을 해야 최대한 순화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16606119273432.jpg“항상 흡혈을 강요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피를 마시지 않았다면 저나 샤를렌이나 죽을 테니 연하게 먹였던 거지만……. 그 과정에서 안 좋은 것까지 배웠지요. 직접 ‘사냥’했어야 하니까요.”

소렐은 상상도 못 할 잔혹하고 끔찍한 일들이 공작저에 비일비재했다. 앨리스 루이즈 칼리에르, 그들의 ‘어머니’가 바란 건 결국 강력하고 아름다운 순혈 뱀파이어였고, 라이킨은 자신이 그 기준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는 것을 유일한 무기로 삼아 버티고 또 버텼다.

16606119273432.jpg“적군에게 포로로 잡혀 웬만한 고문도 겪어봤고, 독도 여러 번 먹어봤고……,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실제 고문에 가까운 일들도 억지로 해야 했다. 은밀한 암살도, 묵직한 정치적인 수도, 전부 혹독하게 배웠다. 배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지를 결박당한 채 입에 깔때기를 꽂아 넣고 물을 붓듯 부어지는 교육을 막을 수는 없지 않나. 억지로 삼켜야지.

16606119273432.jpg“……해서 저는 처음부터 피를 주겠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라이킨은 고개를 푹 숙였다.

16606119273432.jpg“저는 뱀파이어이기도 하지만, 상대를 죽여서 끝내고 싶지도 않고……. 공주님께는 피를 바란 게 아니라 마음을 바란 것이라. 항상 그런 건 불가능할 거라는 말만 억지로 듣고 자라서, 더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남매는 그 여자 아래에서 온갖 치욕을 직간접적으로 당했다. 사람에게 치욕을 주려면,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그중 누가 더 심하게 당했냐는 건 따질 필요도 없었다. 라이킨에겐 라이킨만의, 샤를렌에겐 샤를렌만의 사정과 치욕이 따로 있었으니까.

16606119273441.jpg“어떻게……, 어떻게…….”

소렐은 충격을 받아 떨며 울었다. 건조하게 말해주던 라이킨은 그녀를 연신 달랬다.

16606119273432.jpg“너무 울지 마십시오. 시간이 약이었습니다.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서 저와 샤를렌은 자라났고, 또 그 여자가 요구하는 대로 일단 맞추기로 했습니다. 그래야 강해질 수 있었으니까요.”

강해져서, 보복할 수 있었다.

16606119273432.jpg“적당히 무뎌지기도 했고요. 나중에는 그 여자도 만족했는지 그런 짓은 웬만하면 관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힘이 충분하지 않아 수백 년간 그냥, 적당한 상태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코 화목한 가족은 아니었다. 가족이 될 수 없었다. 그 여자는 가족이 아니었다. 그러니 재미없고 건조한 부분은 대충 접자.

16606119273432.jpg“울지 마세요. 그러실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공주님. 어느 날 그 여자가 결혼을 하겠다고 다른 순혈 뱀파이어를 데리고 왔지요.”

라이킨은 소렐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에게는 이 순간이 무척 기꺼웠다. 작은 토끼가 그를 위해 울어주고 있었다. 남매는 수백 년의 시간을 그저 서로를 위해 버티고, 또 버텨내느라 울 여유조차 없다가, 나중에는 무감각해졌는데 말이다.

16606119273432.jpg“놀랍게도 사랑하는 여자 대신 다 큰 자식 둘을 선택할 만큼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소렐은 고개를 들었다. 이 끔찍한 이야기의 결말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16606119273432.jpg“예, 공주님. 이런 집안에 시집오시게 된 건 유감이오나.”

라이킨은 씁쓸하게 웃었다.

16606119273432.jpg“우리는 어머니를 죽였습니다.”

로렌스 오블리앙은 자신이 아내를 죽였다고 말했다. 라이킨은 오롯이 로렌스의 단독범행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실로 오랜만에 머리가 깨져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던 샤를렌마저 기꺼이 공범이 되겠다고 나섰다. 어쨌든 범행은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계획적이지 못했고, 오히려 우발적이었다. 우발적으로 로렌스 오블리앙이 먼저 앨리스에게 달려들었다.

16606119273432.jpg“우리가 어머니를 죽였어요.”

언젠간 칼리에르 공비도 알아야 할 어두운, 그러나 벗어나게 되어 기쁜 비밀이다. 라이킨은 숨길 생각도 없었다. 그저 소렐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혹은 알게 되었을 때 도망칠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린 것뿐이다.

16606119273441.jpg“괜찮아요?”

소렐은 줄줄 울면서 물었다. 그녀의 눈물은 늘 난감하고 당혹스러웠다. 울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자꾸만 울린다. 작은 몸으로 울면 쉽게 지치고, 피곤할 텐데. 라이킨은 커다란 손으로 소렐의 뺨을 닦아냈다.

16606119273441.jpg“밤에, 밤에 잠은 잘 자요?”

그 말에 라이킨은 픽 웃었다.

16606119273432.jpg“공주님, 저는 뻔뻔한 사람입니다. 두 다리 뻗고 잘 잡니다.”

그 여자가 죽었으니 더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16606119273441.jpg“아프지 않아요?”

16606119273432.jpg“아픈 곳도 없습니다.”

하지만 소렐은 그를 더 꼭 껴안았다. 그 여자는 그를 혹독하게 망가트리고, 보통 사람으로는 전혀 행동할 수 없게 만들어놓았다. 라이킨은 그래서 웃었다. 소렐이, 이 어여쁘고 귀여운 공주님이 그를 걱정하며 안아주는 것이 좋았다. 내내 안아준다면 얼마든지 날카롭고 지독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었다.

16606119273441.jpg“……잘했어요.”

라이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16606119273441.jpg“잘했어요.”

소렐은 훌쩍이며 반복해서 말했다.

16606119273441.jpg“라이킨이 선택한 일이라면 잘한 거예요.”

이해한다고 감히 말할 수 없었지만, 그가 괜찮다니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16606119273441.jpg“지금 괜찮다면 정말 잘했어요.”

어머니를 살해한 것을 그리 부도덕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16606119273441.jpg“그러니까 유감이라고 말하지 말아요.”

소렐은 눈물을 닦아주는 그의 손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16606119273441.jpg“하나도 유감스럽지 않아요.”

어머니를 살해한 남자와 결혼했으면서도 유감이 아니라고 말하는 토끼는 자꾸만 울었다.

16606119273432.jpg“그렇다면 그만 우십시오, 공주님.”

라이킨은 기쁨과 환희에 차 떨리는 손으로 연신 소렐의 눈물을 받아내며 속삭였다. 이 여린 공주님이 당차게 잘했다고 칭찬해줄 줄은 몰랐다.

16606119273432.jpg“저는 지금 무척 기쁘니, 울지 마세요. 공주님께서 우시면 제 마음이 몹시 아픕니다.”

16606119273441.jpg“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누가 대단한 칼리에르 공이 그런 끔찍하고 참혹한 일을 겪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소렐은 더 섧게 울어 라이킨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16606119273441.jpg“정말 미안해요.”

공주님께서 히끅히끅 숨이 넘어가게 울며 미안하다고 하면, 그는 무릎을 꿇고 빌어야 했다.

16606119273432.jpg“제가 잘못한 건 왜 따지지 않으십니까. 제가 더 잘못했습니다. 공주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말씀하신 건지 알았어야 했는데요.”

그는 너무나 당황하고 난감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소렐을 달랬다. 제발 울지 말라고 여러 번 부탁하며 주륵주륵 흐르는 눈물을 다 닦아주었다.

16606119273432.jpg“공주님께서 우시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시대에 다시없을 죄인이 된 기분이다. 라이킨은 그의 커다란 손이 푹 젖도록 우는 소렐을 안고 쩔쩔 맸다. 이보다 더한 벌이 있을까. 소렐이 집에 없는 것도 형벌이라 여겨졌는데, 하염없이 우는 건 끔찍한 둔통까지 동반했다. 명치가 죄어들었다.

16606119273432.jpg“제가 잘못했습니다. 공주님. 탈진하실까 염려되니 그만 그쳐주십시오.”

16606119273441.jpg“나는 튼……, 튼, 해요.”

딸꾹. 소렐은 간신히 말을 마치고, 딸꾹질을 했다. 어찌나 울었는지 그가 입은 상의 어깨부분에도 눈물자국이 남았다.

16606119273432.jpg“더 울지 않으실 거지요?”

16606119273441.jpg“안 울어요.”

또 또륵, 남은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굴러 내렸지만 라이킨이 마저 닦아냈다.

16606119273432.jpg“그래요……. 다행입니다. 그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16606119273441.jpg“나도, 나도…….”

뭐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면 그는 작은 목소리정도야 얼마든지 들을 수 있으면서, 귀를 더 가까이 대주었다.

16606119273441.jpg“어려운 말해줘서 고마워요…….”

16606119273432.jpg“듣는 사람이 거북한 이야기지, 제게는 말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저 잔혹한 이가 업보대로 죽은 흔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로렌스가 그 여자를 죽이지 않았다면, 언젠간 분명히 라이킨이 죽였을 거다. 혹은 샤를렌이 먼저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으나 라이킨은 그 말을 듣고 소렐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두려워하거나 혐오하는 기색이 있는지 집요하게 살폈다. 답삭 안겨들기는 했지만 시선을 피한다면 큰일이다.

16606119273432.jpg“공주님.”

부르면 또렷하게 올려본다. 불러놓고 한참 바라보았지만 눈만 깜빡일 뿐,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소렐에겐 그가 고백한 끔찍하기 짝이 없는 과거가 말 그대로 ‘잘 끝난’ 일인가 보다. 정말 그런가 보다. 그는 철저하게 확인한 후 깊이 안도했다.

16606119273432.jpg“공주님께서 집에 계시지 않아서, 저도 집으로 돌아가기가 무척 싫었습니다.”

팔딱팔딱 뛰고 있는 그녀의 심장소리를 더 가까이 듣고 싶었다. 라이킨은 소렐을 더 강하게 끌안았다. 품 안에 들어차는 두께가 한숨이 나올 정도로 작고 여렸지만, 이젠 이 두께와 체온 말고 다른 건 그를 채워줄 수 없었다.

16606119273432.jpg“하루에도 몇 번이나 피를 주신다 말씀하셨을 때, 그저 감사하다고 대답해야 했다고 후회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소렐은 고개를 팍 쳐들고 저었다. 아무튼 한마디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16606119273441.jpg“아니에요, 내가 정말 실수했는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미안해요.”

그의 과거를 듣고 난 후에는 더더욱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란 걸 알았다. 라이킨은 쓴웃음을 지으며 소렐과 이마를 맞댔다. 너무 오랜만에 하는 접촉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몸을 떼어내기가 싫어졌다.

16606119273432.jpg“그러면 서로 사과한 것으로 하고 이쯤에서 사과는 그만하는 걸로 할까요. 저는 계속 사과드리고 싶지만 공주님께서 하시는 사과는 듣고 싶지 않군요.”

누가 얼마나 더 미안한지 재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소렐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리광을 부리듯 그의 목을 또 껴안았다. 또 목덜미에 물기가 느껴져서 라이킨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쓰다듬었다.

16606119273432.jpg“공주님.”

16606119273441.jpg“네.”

대답하는 목소리도 젖었다.

16606119273432.jpg“돌아와 주십시오. 당장 오늘이 아니어도 좋으니, 언젠간 돌아와 주십시오.”

응, 하고 웅얼거리는 대답이 그의 어깨에 묻혔다. 조그맣게 끄덕이는 고개가 느껴졌다.

16606119273432.jpg“약속하신 겁니다.”

절박한 포식자는 그 작은 대답이라도 낚아채서 어떻게든 확실하게 답을 받아내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이렇게 안은 채로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싶었다.

16606119273432.jpg“약속하신 거예요, 공주님. 돌아오시겠다고, 이 남편에게 약속하신 겁니다.”

16606119273441.jpg“갈 거예요, 가려고 했어요…….”

소렐은 우는 건지, 아니면 부끄러워하는 건지 모를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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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6119273432.jpg“공주님이 계시지 않으니 제가 일을 하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버티고 있기가 힘듭니다.”

16606119273441.jpg“무슨 말이에요,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 소렐은 믿지 않으려 했다.

16606119273432.jpg“공작저가 너무 넓습니다.”

그는 그녀의 좁은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16606119273432.jpg“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공주님이 오셔서 채워주십시오.”

지나치게 넓고 공허해 감당이 되지 않는 것은 공작저가 아니라 그의 마음이었다. 허전하고 또 허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소렐을 공작저에 두고 돌아설 때는 마음이 쥐어뜯기듯 아프더니,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아 미친 사람처럼 바닷물이라도 퍼마셔서 가득 채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16606119273432.jpg“다시는 공주님을 두고 나가는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용서해주시고 돌아와 주세요.”

이렇게 간절하게 청해본 적이 없었다. 소렐은 그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그는 거대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토끼가 살짝 미는 힘에 그대로 밀려났다.

16606119273441.jpg“……화나면 꼭 왜 화 났는지 정확하게 말해줘요.”

16606119273432.jpg“예.”

16606119273441.jpg“한 번 더 날 두고 나가거나, 말 안 하고 무시하면 그날로 이혼하자는 소리인 줄 알 거예요.”

이혼이라니. 이 작은 토끼가 거기까지 염두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들의 결합은 고대마법으로 엮여 결코 끊어질 수 없는데 말이다.

16606119273432.jpg“절대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라이킨은 다짐하듯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똑바로 바라보는 눈앞에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수도 없이 맹세했다.

16606119273432.jpg“꽤 오래 살았다 생각했지만 여태까지 저지른 일 중 가장 멍청한 짓이었습니다. 눈에서 일단 멀어지면 어떻게든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숨을 쉬며 하는 말에 소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저렇게 뜨는 눈을 보고 싶었다. 라이킨은 슬며시 웃었다.

16606119273441.jpg“뭘 견뎌요?”

16606119273432.jpg“양심의 가책, 감정의 격차, 남편이 아닌 뱀파이어로 먼저 보이는 정체성 같은, 사소한 것들입니다.”

16606119273441.jpg“전혀 사소하지 않게 들리는데요.”

16606119273432.jpg“그리 여겨주시니 감사합니다.”

소렐은 탄탄하고 넓은 품에 안겨 아주 느린 심장 고동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수려하게 생긴 미남은 녹을 듯 다정하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양심의 가책에 더해, 감정의 격차란 말이지. 그녀는 그 말을 정확하게 기억해두었다.

16606119273441.jpg“난 왕세자전하한테는 전혀 관심 없어요.”

알고 있으면서도, 그 말을 들은 라이킨은 진심으로 웃었다.

16606119273441.jpg“그리고 잘 모르겠지만, 만약에 라이킨 말이 맞다면 나도 왕세자전하를 싫어할래요. 나는 결혼했단 말이에요.”

16606119273432.jpg“예. 그렇지요.”

그 말이 백번 천 번 옳지요. 라이킨은 연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린 아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웃고 있자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었다.

16606119273441.jpg“그리고 나는 라이킨이 좋아요.”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뚱하니 마주보다가, 결국 부끄러워서 시선을 먼저 내린 쪽은 소렐이었다.

16606119273441.jpg“많이 좋아해요.”

무도회 끄트머리에서 울면서 했던 고백이나, 지금 그녀가 좋아하는 남자가 얼마나 험악한 세월을 살아왔는지 듣고 하는 고백이나 다른 게 없었다. 똑같이, 오롯이 그를 좋아했다.

16606119273441.jpg“그러니까, 빨리 크도록 노력할게요.”

라이킨은 웃어야 할지, 아니면 울어야 할지 몰라 이마를 짚었다.

16606119273441.jpg“몇 살이 되면 괜찮은 거예요?”

16606119273432.jpg“글쎄요, 적어도 백 년은 더 자라셔야 하지 않을까요?”

16606119273441.jpg“백 년이나요?”

16606119273432.jpg“예. 이곳은 제 공작저가 아니니 일단 백 년이라고 해두시지요. 안 그래도 더 있다간 아버지께서 제 멱살을 잡고 끌어내리실 겁니다.”

그는 아쉬워 죽겠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소렐을 다시 내려놓았다. 어쨌든 이곳은 아버지의 집이고, 그는 엄연히 벽을 타고 올라온 침입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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