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 해제 (14) (73/181)

73. 해제 (14)2021.04.10.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 이를 사랑하는 것은 아픈 일이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그런 사랑을 보며 아픈 일이라 여겼다. 자신이 하는 사랑도 똑같아서 아플 예정이라 생각했다. 나이도 많고 겪은 것도 많은 이가 아직 한참 어리고 말간 이를 사랑한 죄라고 해야 할까. 하긴, 그러니 당연히 마음이 자연스럽게 통하는 게 힘들지.

16606119192371.jpg“나한테 화났잖아요.”

소렐은 그녀를 보자마자 라이킨이 좋다고 웃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16606119192376.jpg“좀 났었지요.”

그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19192376.jpg“제가 잘못했습니다.”

소렐은 또 고개를 저었다.

16606119192376.jpg“일부러 절 화나게 하신 건 아니지요.”

16606119192371.jpg“모르고 그랬어도 잘못한 건 잘못한 거라고 생각해요. 나도 미안해요.”

순식간에 토끼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16606119192376.jpg“이런, 사과를 들으러 온 건 아닌데요.”

라이킨은 저절로 말랑말랑한 뺨을 만져보려는 손을 내렸다. 그리고 대신 장미꽃다발을 내밀었다. 크림색 장미꽃잎 끝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소렐의 얼굴처럼 말이다.

16606119192376.jpg“괜찮으시다면 받아주십시오.”

16606119192371.jpg“……꽃은 괜찮아요.”

소렐은 답삭 꽃다발을 안아놓고는 조금 뾰로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가져다주는 장미꽃은 언제나 색이 독특하고 아름다웠다. 꽃에만 또 붙박이는 시선은 그를 봐주지 않는다. 라이킨은 그럴 줄 알고 또 다른 걸 가지고 왔다.

16606119192376.jpg“그럼 ‘에르가’에서 파는 레몬크림파이는 어떻습니까?”

순식간에 동그란 눈이 휙 돌아갔다.

16606119192376.jpg“요즘 아주 인기 있다고 해서 공주님도 맛보시라고 사 왔습니다만.”

16606119192371.jpg“……같이 먹어요.”

소렐은 약간 인상을 쓰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하는 뱀파이어를 쳐다보았다. 일주일 정도 액체와 연기만 들이마시고 산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16606119192376.jpg“제 말을 들어주실 겁니까?”

소렐은 대답하지 않은 채 열린 문을 등지고 그냥 그 자리에 앉으려 했다. 황급히 라이킨이 손수건을 따로 깔아주자, 그녀는 털썩 앉아 파이 상자를 열었다.

16606119192371.jpg“해봐요.”

새침한 목소리에 그는 웃어버렸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곁에 딱 붙어 앉았다. 소렐이 다시 사라진다면 그 전에 낚아챌 수 있는 충분한 거리였다.

16606119192376.jpg“……오늘 왕세자가 장미를 보냈더군요.”

이건 예상했던 말이 아니었다. 라이킨은 소렐이 잘라 내미는 파이를 한입 깨물어 먹기만 했다. 달다. 레몬향이 나는 크림이 풍성하게 올라간 파이는 그의 입술에 크림을 남겼다. 소렐은 저도 모르게 그의 혀가 크림을 걷어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16606119192376.jpg“함께 산책을 간 이들에게 전부 보냈다고 하는데, 그건 핑계일 겁니다. 공주님께 장미를 보내고 싶었겠지요.”

16606119192371.jpg“……네?”

새파란 눈이 아까부터 깜빡이지도 않은 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16606119192376.jpg“공주님. 저는 엄연히 남편이 있는 여자에게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누구는 축첩을 한다지만, 라이킨은 그런 제도를 굉장히 경멸했다. 그에게 연모할 상대는 딱 하나면 족했다.

16606119192371.jpg“……아니.”

설마, 그럴 리가.

16606119192376.jpg“맞습니다. 정치적인 일 때문에 왕세자와 무슨 말씀을 나누셨나 여쭌 게 아닙니다.”

라이킨은 고개를 저으며, 아닐 거라고 의심하는 소렐의 말허리를 잘랐다.

16606119192376.jpg“물론 그때 그것부터 여쭈지는 않았어야 했지요. 제 불찰입니다. 용서해주세요. 제가 질투에 눈이 멀었습니다.”

소렐이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눈이 깜빡거리고, 살짝 벌어진 입술이 탐스러웠다. 하긴 그의 눈에도 이렇게 예뻐 보이는데, 온갖 좋은 것만 보고 산 왕세자의 안목에 소렐이 예뻐 보이지 않으면 그게 정상이겠나.

16606119192371.jpg“설마요.”

그녀는 믿기지가 않아 도리질을 쳤다.

16606119192376.jpg“두고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왕세자가 그녀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네 마네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었다. 이미 라이킨은 눈치챘고, 소렐은 모르던 일일 뿐이었다. 더 노골적으로 변한다면 그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쳐내야지. 라이킨은 아슬아슬하게 선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왕세자를 떠올리며 눈을 좁혔다.

16606119192376.jpg“그리고 왕세자가 공주님께 무슨 정치적인 발언을 했든, 그리 궁금하지 않습니다.”

16606119192371.jpg“정치는 중요…….”

16606119192376.jpg“하지 않습니다.”

그는 손을 뻗어 바람에 날린 소렐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다정한 손길에 소렐은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숙였다.

16606119192376.jpg“공주님. 왜 제게 피를 주시겠다고 했습니까?”

그녀는 힐끔 라이킨을 살폈다. 따뜻하고 상냥한 눈이다. 그것보다 더 부드러울 수는 없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겨우 대답했다.

16606119192371.jpg“미안해요.”

라이킨은 고개를 저었다.

16606119192376.jpg“사과는 충분히 하셨으니 이유를 알려주십시오.”

16606119192371.jpg“……내가 줄 수 있는 게 아직은 그거밖에 없어서요.”

조그만 목소리가 웅얼거렸다. 예상은 했지만 그대로 대답이 나와서, 라이킨은 입가를 쓸며 한숨을 삼켰다.

16606119192376.jpg“제 마음을 알아주시면 그걸로 족합니다.”

소렐은 무릎을 세우고 안았다.

16606119192376.jpg“무엇을 따로 달라는 건 아니었습니다.”

소렐의 고개가 무릎 사이로 파고들었다.

16606119192371.jpg“그럼 가만히 대답도 안 하고 받기만 해요?”

16606119192376.jpg“제가 부담스러우십니까?”

그녀는 다시 고개를 확 들었다.

16606119192371.jpg“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16606119192376.jpg“그러면 받기만 하세요.”

그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었다. 서늘한 숨결이 솜털에 닿고, 푸른 눈이 새카만 홍채 안에 담긴 황금빛까지 알아볼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16606119192376.jpg“받기만 하세요, 공주님.”

뱀파이어는 피를 취하기 위해 사람을 홀리고 유혹한다는 빛바랜 전설이 있다지만, 그건 아마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외모와 정중한 태도 때문일 것이다. 뱀파이어의 속삭임은 그저 부드럽고, 또 은밀하기만 했다.

16606119192376.jpg“뭘 주려고 애쓰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제게는 한없이 이기적으로 구셔도 좋습니다.”

소렐의 다홍빛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라이킨이 조금 더 빨랐다.

16606119192376.jpg“제가 그것이 좋습니다.”

여전히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특유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소렐은 아차 싶어 정신을 차렸다. 내내 모르겠다고 하면 안 된다.

16606119192376.jpg“그러니 제게 피를 주시겠다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것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라이킨은 소렐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냈다.

16606119192376.jpg“저 때문에 무엇을 희생하실 필요도 없고, 고심하실 필요도 없으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흡혈을 즐기지 않습니다.”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에 소렐은 너무나 당황했다. 저렇게 싫어하는 거였어? 뱀파이어가, 흡혈을 싫어해? 말이 안 되는 말이었지만 라이킨의 표정에는 질렸다는 기색이 다분했다.

16606119192371.jpg“그, 어, 미…….”

16606119192376.jpg“사과는 그만하시고요. 저는 괜찮습니다.”

16606119192371.jpg“음, 네…….”

소렐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라이킨은 깨끗하고 서늘한 손으로 파이를 한 조각 더 소렐에게 먹였다. 옳지. 힐끔 보다가 오물오물 잘 먹는다. 이 예쁜 모습을 보려고 단 것을 일부러 사 왔다. 그는 그녀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걸 지켜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걸 봐야 그도 음식을 먹을 마음이 생겼다. 아니, 사실은 직접 먹여주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16606119192376.jpg“그리고 제가 더 용서를 구해야겠지요.”

그는 그쯤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16606119192376.jpg“공주님께서 그런 마음으로 제게 말씀하신 것을 제멋대로 오해했습니다.”

소렐은 크게 도리질쳤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잘못은 그녀에게도 있다는 뜻이었지만, 라이킨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16606119192376.jpg“그리고 오래도록 공주님을 혼자 지내시게 했지요.”

그건 그가 계속 후회한 일이었다. 소렐을 마주할 자신이 없던 건 라이킨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보호자로서 자리를 비우지 말았어야 했다.

16606119192376.jpg“제가 크게 잘못했습니다.”

라이킨은 자책했다. 그의 수려한 얼굴에 새카만 죄책감이 두껍게 뒤덮였다. 보던 사람이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어두운 표정이었다.

16606119192376.jpg“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참아가며 외면하는 것도 고역이었는데, 그 때문에 소렐이 뛰쳐나간 건 그에게 고문이었다.

16606119192376.jpg“그러니 공주님. 제발 돌아와 주십시오.”

라이킨은 입에 크림을 묻히고 있는 작은 소녀에게 애걸하고 또 애걸했다.

16606119192376.jpg“용서하지 않으셔도 좋으니, 그냥 돌아만 와주십시오.”

빌라면 얼마든지 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빌고 있었으니까. 부재는 사람의 무게를 깨닫게 한다. 만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작은 아가씨가 저택에서 사라지자, 모든 것이 황폐하게 변했다. 예전에 그토록 반짝거렸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황량하게 변했다. 들어서기도 싫을 지경이었다.

16606119192376.jpg“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제발…….”

16606119192371.jpg“라이킨.”

크림을 닦아드려야 할 텐데. 그는 제 얼굴을 양손으로 꼭 붙든 소렐을 보며 생각했다.

16606119192371.jpg“왜 흡혈하는 게 지겨워요?”

눈도 동그랗고 뺨도 동그랗고 코도 동그랗고 얼굴도 동그란 소렐은 아주 날카롭고 예리하게 물었다. 당신은 아직까지 완전히 솔직히 대답하지 않았어.

16606119192371.jpg“왜 내가 피를 주겠다는 말이 좋아한다는 말로 들리지 않았어요?”

그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뺨을 감싼 사랑스러운 손을 잡았다.

16606119192376.jpg“……제게 흡혈이라는 행위는, 항상 죽음으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손은 보드랍고, 따뜻했다. 조금 더 내려가면 손목에서 맥이 팔딱거리며 뛰고 있었다.

16606119192376.jpg“그리고 죽여서 끝내야만 했습니다.”

살며시 감싸 쥐면 말도 못하게 연약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바로 툭 꺾일 거다.

16606119192376.jpg“그러지 않는다면 제가 죽거나.”

혹독한 생애였다.

16606119192376.jpg“제 하나뿐인 혈육이 죽을 것이기에.”

해서 흡혈은 그에게 살아남으려 다른 이를 베는, 내키지 않는 생존방식에 불과했다.

16606119214776.jpg

  * 에설론 백작저에서는 하루에 한 번씩 시신이 생겨 들려 나가고 있었다. 에설론 백작을 감시 중인 성기사들은 무척 혐오스러워했지만, 카메론 셀레스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피를 다 빼앗겨 죽은 이름 없는 시신들을 잘 묻어주고, 장례도 간소하게나마 치러주라는 냉혹한 지시만 내릴 뿐이었다.

1660611921478.jpg“그냥 저렇게 두실 겁니까?”

부관의 물음에 카메론이 책을 탁 덮었다.

1660611921478.jpg“이름 없는 노숙자나 범죄자를 빼돌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역겹습니다.”

16606119218768.jpg“유지비용이라고 생각하게.”

1660611921478.jpg“유지비용이 사람 목숨인 거면 너무 비싼 거 아닙니까.”

에설론 백작 루드밀라는 아득바득 몸을 회복해서, 저 성기사들도 다 쓸어버리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흡혈했다. 그녀는 나눠서 피를 마시는 것도 아니고, 시신을 만들 정도로 막대한 양을 한 번에 다 마셨다.

16606119218768.jpg“순혈 뱀파이어니 어쩔 수 없지. 좀 더 비싼 무기를 샀다고 생각해.”

카메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1660611921478.jpg“불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16606119218768.jpg“뱀파이어들을 살육할 생각을 하면 그 불만도 사라질 텐데 불만은 무슨 놈의 불만. 뱀파이어들은 생명이 아닌가?”

1660611921478.jpg“저희는 다르다고 배웠습니다.”

부관은 강하게 불만을 표했지만 카메론은 입술을 당겨 웃었다.

16606119218768.jpg“단장님께서 승인하신 일에는 일일이 토를 달지 않는 게 좋지. 뱀파이어는 뱀파이어로 잡는 것뿐이야.”

그렇게 말을 해줘야 이 답답한 성기사들은 납득할 것이다.

1660611921478.jpg“순혈들은 원래 다 저럽니까?”

16606119218768.jpg“원래 뱀파이어에 대한 전설은 순혈들 때문에 생겨난 거지. 흡혈 당하면 죽는다, 조심해라. 뱀파이어의 피를 마셔야 뱀파이어가 된다, 뭐 그런 것들.”

카메론은 게으르게 기대섰다. 에설론 백작저 근처에서 조용히 잠복하며 지내는 요즘이 가장 한가했다.

1660611921478.jpg“그럼 칼리에르도 마찬가지겠군요.”

16606119218768.jpg“원래 악명을 1대 칼리에르 공이 만들어냈다고 들었지. 지금 칼리에르 공은 아니고.”

부관은 미심쩍다는 듯이 카메론을 쳐다보았다. 하긴 글래스턴 지부장인 그가 모를 리가 없긴 했다.

1660611921478.jpg“아닙니까?”

16606119218768.jpg“아니야. 그래서 지금 칼리에르 공이 저 여자를 무척 싫어해.”

카메론은 에설론 백작저를 가리키며 말했다. *  

16606119192376.jpg“내 어머니는 철저하게 외모와 기량만 보고 우리 남매를 자식으로 삼았습니다. 그 자식으로 삼는다는 방법이…….”

라이킨은 표정 없이 말했다. 미간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하기만 했지만, 소렐은 그가 무척이나 혐오하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16606119192376.jpg“어머니의 피를 강제로 먹이는 것이었지요.”

16606119192371.jpg“무는 게 아니라요?”

16606119192376.jpg“소위 ‘순혈 뱀파이어’들은 먹이만 뭅니다. 저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16606119192371.jpg“그래서 뱀파이어가 된 거군요.”

16606119192376.jpg“아니요. 영지 하나를 몰살하고 제 일가친척들이 다 죽어야 했지요. 그리고 그 시체 위에서 피를 받아먹어야 했습니다.”

소렐은 하얗게 질려 입을 틀어막았고, 라이킨은 음울하게 웃었다.

16606119192376.jpg“저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소렐이 역겹고 싫다 해도 그는 그녀를 곱게 보내줄 생각은 없었다. 여기까지 알았다면 그녀는 좋든 싫든 그의 곁에 있어야‘만’ 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렐을 바라보았다. 입을 막고 있던 손이 다시 벌려졌다.

16606119192371.jpg“어, 어떡해.”

이미 오래된, 너무나 오래된 일이다. 그사이 나라가 여럿 세워졌다가 멸망하고, 또다시 세워졌는데 소렐은 덜덜 떨며 라이킨의 목을 끌어안았다. 연신 그의 어깨며 등을 작은 손이 토닥이고 쓸어줬다. 순식간에 품에 답삭 안긴 토끼를 내려다보던 뱀파이어는 슬쩍 웃었다.

16606119192376.jpg‘이 정도라면 솔직하게 말할 가치가 있는데.’

겁을 먹을 줄 알았는데, 역시나 헬레인 토끼는 용감했다. 차라리 더 말해서 아예 떠나지 못하게 발목을 붙들어야겠다. 라이킨은 소렐의 좁은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댔다. 아, 살 것 같다. 이제야 제대로 숨을 쉬는 기분이다.

16606119192376.jpg“그때 제 나이가 열 살이었습니다.”

소렐은 그가 마땅히 질러야 했을 작은 비명을 대신 질렀다. 충격의 연속에 그녀는 라이킨을 안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16606119192376.jpg“아프더군요.”

내가 이렇게 힘들었어. 라이킨은 자신이 겪었던 오래된, 너무나 오래되어 이젠 빛이 바랜 고통을 소렐 앞에 괜히 늘어놓았다. 그녀는 무던했고, 그는 끊임없이 타올랐다. 그 무던한 마음에 동정심이라도 얹어 그의 곁에 있어주길 바랄 뿐이다.

16606119192376.jpg“피를 삼켜 뱀파이어로 변하는 건 오래 걸리고, 극한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차라리 물려서 뱀파이어가 되는 게 빠르고 쉽지요.”

때문에 모든 순혈 뱀파이어들은 물어서 뱀파이어를 만드는 것을 경멸했다. 기껏해야 약한 개체만 만들어지고 끝나기 때문이었다. 소렐은 더 절박하게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마치 놓으면 라이킨이 영원한 고통에 몸부림치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그를 꼭 안았다.

16606119192376.jpg“겨우 정신을 차린 후에는, 곧장 전쟁터로 가야 했습니다.”

16606119192371.jpg“……여, 열 살이라면서요.”

16606119192376.jpg“예. 그곳에서 검을 드는 법을 처음 배웠지요.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그땐 아버지도 계시지 않아서, 샤를렌에게는 제가 유일한 보호자였으니까요.”

16606119235444.jpg

  소렐은 열 살에 모든 걸 짊어지고 여태까지 살아온 남자가 왜 그리도 화를 냈는지,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