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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해제 (12) (71/181)

71. 해제 (12)2021.04.03.

소렐 이드리스는 여태까지 나름 반듯하고 착실하게 살아왔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워낙 사랑을 받고 자라다보니 크게 엇나가지 않고 컸다. 사고를 쳐본 적도 딱히 없었다. 늘 뛰어다니면서 놀기 바빴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난생처음 한 가출을 도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었다.

1660611904877.jpg“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로렌스는 껄껄 웃었다.

1660611904877.jpg“어떻게 하긴, 그냥 아가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지.”

한참 어깨를 들썩이며 웃더니, 머리를 쓰다듬어주신다.

1660611904877.jpg“참 착하게 컸어요. 말도 잘 듣고.”

어린아이를 대하듯 그저 착하다 칭찬을 받았다. 만 년 가까운 세월을 산 로렌스에게 소렐은 정말 ‘아가’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1660611904877.jpg“그 녀석을 볼 마음이 들 때까지는 여기 있어도 괜찮단다. 하고 싶은 건 마음껏 하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렴. 어차피 신경 쓸 일도 없어요.”

16606119048787.jpg“……오늘도 왔어요?”

1660611904877.jpg“당연히 와야지. 저가 한 짓에 대해 충분히 반성을 하고, 또 성의를 보여야 하니까. 자, 그 녀석이 뭘 가지고 왔던데, 보련?”

소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 가져왔을까? 토끼는 조금 설레서 로렌스의 주름진 손을 쳐다보았다. 로렌스는 주머니에서 꺼내주는 대신, 바깥을 향해 말했다.

1660611904877.jpg“가지고 오게.”

그제야 문이 열리고, 로렌스를 모시는 충직한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수레를 밀고 들어왔다.

16606119048787.jpg“……저게 뭐예요?”

1660611904877.jpg“저걸 선물이랍시고 가지고 왔더라.”

로렌스는 곤혹스럽다는 듯, 수레에 가득 실린 꽃이며 책을 쳐다보았다. 나머지는 예쁘게 포장이 되어 있어서 소렐이 직접 하나씩 열어봐야 했다.

1660611904877.jpg“심심할 거라고 하나하나 열어보라고 하더구나. 내가 그 녀석 버릇을 잘못 들였어.”

16606119048787.jpg“왜요?”

1660611904877.jpg“내가 하던 짓을 보고 배운 거지.”

16606119048787.jpg“아버님도 이렇게나 많이 선물하셨어요?”

로렌스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1904877.jpg“가끔. 가끔 그랬단다.”

이상한 일이다. 로렌스가 죽은 칼리에르 공을 말할 때 저리 얼굴에 애정이 가득한데, 라이킨은 어머니를 무척 싫어한다. 그러면서도 부자 사이는 좋다. 어떻게 된 일인가. 소렐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수레를 밀고 들어온 이가 내미는 봉투를 받아들었다.

16606119052339.jpg“공주님께 직접 전해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소렐은 편지가 들어 있는 게 분명한 봉투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1660611904877.jpg“왜, 읽고 싶지 않니?”

로렌스는 웃었다.

16606119048787.jpg“반반이요.”

읽고 싶기도 하고, 읽기 싫기도 하고.

1660611904877.jpg“돌아가게 될까 봐?”

소렐은 수레 위에 놓인 상자 중 아무거나 집어 들며 대답했다.

16606119048787.jpg“사실 벌써 보고 싶어요.”

라이킨이 보고 싶었다.

16606119048787.jpg“집에 돌아가고는 싶은데, 돌아가면…….”

나흘간 그가 그녀를 외면한 기억은 선명하고, 충격은 컸다. 하긴 라이킨이라고 무조건 그녀를 환대해주고 보살펴줘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화를 내서 아직도 조심스러웠고, 사과를 진심으로 받아주지도 않아서 더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여전히 눈치를 볼 거다. 소렐은 한숨을 쉬었다.

16606119048787.jpg“그래도 돌아가야겠죠.”

1660611904877.jpg“내일 모레나 글피쯤에 돌아가렴. 먼저 뛰쳐나간 건 그놈이니 똑같이 해줘야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하지. 나라면 일주일 정도 있다가 돌아가겠다만.”

16606119048787.jpg“어째서요?”

1660611904877.jpg“그런 짓을 한 번 저지르면 두 배로 되돌아올 거라는 걸 보여줘야 확실하지 않겠니?”

소렐은 상자 포장을 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16606119048787.jpg“라이킨은 그 정도로 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들었을 것 같은데요.”

1660611904877.jpg“그 정도로 깊이 알게 되었구나.”

16606119048787.jpg“아니, 그냥……. 제 바람일지도 몰라요. 자신 없어요.”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1660611904877.jpg“저런, 한 번 화를 냈다고 해서 너무 기죽지 마라.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일을 당하면 마음 아프고 눈치 보게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할 일을 해야 해요.”

16606119048787.jpg“왜요?”

1660611904877.jpg“사랑이 다가 아니거든.”

아직까지도 죽은 아내를 애틋해하는 남자가 하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인 말 아닌가? 소렐은 또 고개를 갸웃거리다, 상자 안에서 나온 예쁜 오르골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16606119048787.jpg“우와!”

1660611904877.jpg“아이고, 그놈이 아주 입속의 혀처럼 구는구나.”

저리 좋아하는 것만 쏙쏙 골라서 보낸 거겠지. 교활하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들이다.

16606119048787.jpg“……음, 이것만 빼고 나머지는 그냥 돌려보낼까 봐요.”

로렌스의 눈이 커졌다.

1660611904877.jpg“어째서?”

16606119048787.jpg“너무 많아서 난감해요.”

1660611904877.jpg“그러자, 돌려보내자. 더 풀어볼 것도 없이 다 돌려보내자.”

로렌스는 웃으며 손짓을 했다. 그 가벼운 손짓에 곧장 수레가 방향을 바꿨다.

16606119048787.jpg“아, 꽃들은……, 꽃은 이거 한 바구니만…….”

소렐은 탐스런 장미를 아깝다는 듯이 가리켰다. 뱀파이어 하나가 커다란 꽃바구니를 가까이 보시라고 내려주었다.

16606119052339.jpg“곧장 칼리에르 공작저로 돌려보내겠습니다.”

공주님께서 머뭇거리다 다시 내려놓은 편지까지 함께. 토끼 공주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왜 로렌스가 즐겁다는 듯 웃는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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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급한 마음에 고르고 또 골라 서둘러 채워 보낸 선물이 장미꽃 바구니와 오르골 하나만 빼고 고스란히 돌아왔을 때, 샤를렌은 오빠의 안색이 완전히 바뀌는 걸 분명히 보았다. 편지는 봉인조차 뜯기지 않고 다시 돌아왔다. 마치 읽기 싫다는 듯, 볼 가치도 없다는 듯 손 하나 타지 않은 것처럼 깨끗하게 돌아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16606119058619.jpg“어디 가?”

16606119062203.jpg“아버지 댁에.”

16606119058619.jpg“어쩌려고?”

16606119062203.jpg“가서 얼굴 보고 빌어서라도 모셔 올 거야.”

16606119058619.jpg“아니, 꽃이라도 받아줬잖아!”

샤를렌은 외투를 입는 오빠를 따라가며 말했다. 억지로 데리러 갔다가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16606119058619.jpg“그리고, 만나주기는 한대?”

16606119062203.jpg“만나주실 때까지 버티든가 해야지. 설마 아버지가 아들한테 방 하나 안 내어주시겠어?”

16606119058619.jpg“……몸이 달았구나.”

라이킨은 지금 당장 소렐을 만나고 싶은 거였다. 그냥 보고 싶을 뿐이었다.

16606119062203.jpg“그래.”

다정하고 착한 토끼가 선물을 돌려보내라고 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쫓아갈 만큼, 지금 그에겐 여유랄 게 없었다. 뒤늦게 후회되었다. 그토록 오래 자리를 비우지 말 것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웃어줬으나, 소렐은 예리하게 그 웃음 뒤에 숨겨진 석연치 않은 마음과 냉정함을 간파해냈다. 차라리 솔직했어야 했다. 아직 공주님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못했다고, 나중에 말씀하시면 안 되겠냐고, 간절히 말했어야 했다.

16606119062203.jpg“난 혼자 돌아오지 않을 테니 기다리지 마.”

16606119058619.jpg“뭐라고 할 건데?”

16606119062203.jpg“공주님께 피를 달라고 간청할 생각이다.”

16606119058619.jpg“오, 나도 따라갈래. 뺨 맞는 거 구경해야지.”

이제 와서 앞뒤 다 자르고 피를 달라고 했다간 그 순한 공주님도 라이킨을 걷어찰 게 분명했다.

16606119062203.jpg“시끄러워. 아버지나 너나 이 일을 재미있어하기만 하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16606119058619.jpg“오빠가 지금 아버지 집 담장까지 타 넘을 기세인데 어떻게 재미있어하지 않을 수가 있어?”

16606119062203.jpg“아, 그래. 재미있겠지. 재미있겠어.”

그는 성마르게 대꾸하며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뭐 때문인지 불분명했다. 소렐이 그가 고심해서 고른 선물을 다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녀가 고심해서 한 사과를 거절한 그는 뭐가 다른가. 아니, 그런 건 상관없었다. 소렐이 선물을 돌려보낸 게 마치,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거절처럼 느껴졌다.

16606119062203.jpg‘이제 와서?’

아니, 이제 와서가 아니다. 라이킨은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소렐을 필사적으로 멀리한 게 사흘, 어쩔 수 없이 나흘째에 무도회에서 잠깐 보고, 그러고선 이틀 내리 또 못 봤다. 무도회로 가는 마차 안에서라도 말을 걸어볼걸 그랬다. 소렐은 완전히 풀이 죽어서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16606119062203.jpg‘제기랄.’

공주님 앞에서는 절대로 쓸 수 없는 험악한 욕설이 쏟아졌다. 그의 소위 어머니라 하던 여자는 그의 그런 습성을 경멸했다. 그런 천박한 말은 버려라. 그런 걸 배워 오라고 전장에 보낸 게 아니야. 알게 뭡니까, 어머니. 열 살짜리를 전장에 내보낼 때 그쯤은 예상을 하셨어야지. * 소렐은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로렌스는 아주 다정한 시아버지로, 그녀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모든 것을 살뜰히 살펴주었다. 하긴 발레시나스 공작저에서 공작의 며느리가 머무는 게 뭐 그리 불편할 일이 있겠는가. 하지만 조금 어색했다. 소렐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16606119048787.jpg‘……화났겠지?’

로렌스는 그럴 리가 없다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소렐이 생각하기에 라이킨은 좀 화가 났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비나네 집으로 갔다가, 결국 이리로 내빼고, 얼굴도 안 보여주고, 또 선물도 온전히 받아주지 않았다. 소렐은 라이킨에게 자신이란 게 없었다.

16606119048787.jpg‘똑같이 가출했는데 마음이 참 불편하네.’

라이킨은 그렇게까지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던 모양인데. 사사건건 그가 끼어들지 않는 생각이 없었다. 소렐은 내내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억울해! 그녀는 베개를 팡팡 때리고, 발을 바동거렸다. 그가 그녀만큼 속상하고, 또 울었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소렐의 눈에 라이킨은 한참 연륜도 있고 멋진 어른이라, 그녀가 가출한 건 애들 장난처럼 성가신 짓에 불과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나서, 소렐은 두 주먹을 꼭 쥐고 눈물을 쓱쓱 닦았다. 그때 톡, 하고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16606119062203.jpg“……공주…….”

님, 하고 부르던 라이킨의 목소리가 삼켜졌다. 침실에 난 발코니에 내려선 그는 창살을 가늘게 넣은 문을 두들겼다가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앙증맞은 주먹을 쥔 소렐의 눈에서 미처 마르지 못한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그녀는 갑자기 등장한 남편을 보고 깜짝 놀라 주춤거렸다.

16606119062203.jpg“가지 마세요.”

그는 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물러났다.

16606119062203.jpg“가지 마세요, 공주님.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번처럼 눈앞에서 울다 사라지지 말라고 다급히 말했다. 소렐은 뺨을 마저 닦고 베개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어쨌든 잠옷 차림이었고, 라이킨은 한밤중에 숙녀의 침실 문을 두드린 무뢰한이었다. 공작저의 주인이 보았다면 두들겨 내쫓아도 할 말이 없었다.

16606119062203.jpg“……저녁식사는 잘하셨습니까?”

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소렐을 눈으로 담다가, 정신을 겨우 차리고 조심스럽게 물러나 물었다. 그래도 시선은 변함없이 그녀를 샅샅이 살폈다. 굶주린 듯, 여태 보지 못한 것을 채우려고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소렐은 저도 모르게 침대에서 내려와서, 문 건너편 발코니에 서 있는 라이킨을 마주했다.

16606119062203.jpg“불편하신 데는 없으시고요?”

물어보는 목소리가 그저 조심스럽기만 했다. 소렐은 베개를 꼭 껴안은 채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이 밤에 갑자기 발코니에 등장한 사람이 정말 라이킨이 맞나? 하도 오랜만에 제대로 보는 사람인데다,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는 모습까지 또 보여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16606119062203.jpg“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소렐은 그제야 고개를 저었다.

16606119062203.jpg“그렇군요.”

숨이 턱 막혔다. 무작정 데려오겠다고 달려왔지만 정작 소렐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 잠옷 차림으로 베개만 안고 있다. 말갛고 여려 보였다. 상처를 입히면 그대로 깨져서 부서질 것 같이 연약해 보였다. 몹시도 무력하다. 라이킨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16606119062203.jpg“……공주님.”

그래. 저 말랑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가 무슨 죄가 있다고. 죄가 있다면 지나치게 굴곡진 삶을 지나, 뱀파이어면서 뱀파이어임을 때론 거부하고 싶어 하는 그에게 있었다.

16606119062203.jpg“제가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 아버지는 그에게 정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그가 결국 월담을 했지만 귀한 공주님께 도둑처럼 방문하는 건 허락받은 연인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허락받은 연인도 뭣도 아니었다.

16606119062203.jpg“허락해주시면 말씀을 드리고.”

그가 하는 말에 곧장 넘어갈까 봐 겁이 난다고 했지. 공주님은 울면서 함구령을 내리셨다. 라이킨은 한 발자국 더 물러섰다.

16606119062203.jpg“하시지 않으면 물러나겠습니다.”

달빛이 비추는 뱀파이어는 어느 소설에서나 그렇듯 아름다웠다. 저토록 아름다워서 사람을 매혹하고, 홀려서 피를 마신다고 하던가. 저렇게 아름다운데 어떻게 거절할까. 본능적으로 붙잡고 싶었지만 결국 그의 손아귀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셈이라, 소렐은 마음이 아렸다. 이게 아마 그가 주는 마지막 기회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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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6119062203.jpg“그리고 내일 또 오겠습니다.”

소렐은 베개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뱀파이어가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어쩐지 그 웃음이 필사적으로 보였다. 어떻게 해서든 다정하게, 마음에 들게 웃어야 해서 웃는 것처럼 보였다.

16606119062203.jpg“오늘은 뵙고 싶은 마음에 빈손으로 왔지만, 내일은 오늘 몫까지 가져오겠습니다. 매일 허락받으러 올 테니, 오는 것만은 뭐라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는 문을 열지도 못하고 그저 유리문 너머로 소렐을 바라보았다.

16606119062203.jpg“늘 뵙는 것이 얼마나 호사인지 몰라 제가 참 오만하게 굴었습니다.”

씁쓸한 웃음이 달빛에 희끄무레하게 번졌다.

16606119062203.jpg“이렇게라도 뵈니 그나마 숨이 트이는군요.”

소렐이 어떤지는 몰라도, 그는 그러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시 다가와, 소렐을 한참 보았다. 그러다 마치 늘 그녀에게 이마를 맞댄 것처럼 유리문에 이마를 대었다.

16606119062203.jpg“한결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 미적거릴 수는 없었다.

16606119062203.jpg“주무세요, 공주님. 좋은 꿈 꾸십시오.”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녀를 눈에 잔뜩 욱여넣었다. 돌아갈 때는 눈을 감고 가야겠다. 그대로 잠들어야 꿈에라도 볼 수 있지. 희미하게 웃은 라이킨은 그대로 사라졌다.

16606119048787.jpg“아!”

소렐은 깜짝 놀라 유리문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발코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꿈을 꾸었나? 너무 보고 싶어서 꿈을 꾼 건가? 소렐은 문고리를 잡았다. 약간 차가운 온도가 지금이 현실이라는 걸 가르쳐주었다. 그대로 열고 나갔다. 그제야 후회가 되었다. 문이라도 열어줄걸. 너무 놀라서 열어줄 생각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지금 눈으로 보는 사람이 그 사람이 맞나, 하고 확인하다, 그가 하는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들으려 숨죽이기만 했다.

16606119048787.jpg“……너무 좋아.”

통속소설에서 자존심도 없이 남자를 좋아하는 여주인공을 볼 때마다 속이 터졌는데, 소렐이 똑같이 하고 있었다.

16606119048787.jpg‘정신 차려야지.’

소렐은 고개를 흔들고 한 번 더 마음을 다잡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자꾸만 비식비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다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뒤 문을 잘 닫고, 커튼을 내렸다. 밖에서 볼 수 없게 꼭꼭 내린 뒤 통통 튀어서 침대에 뛰어들었다. 그러곤 그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16606119048787.jpg‘데리러 왔어!’

역시 로렌스의 말을 듣길 잘했다. 너무 좋아서 다 받아주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선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돌려보냈다면 어땠을까? 괜히 궁금했지만, 소렐은 어쨌든 기뻐서 굴러다니다가 똑바로 누웠다. 그녀만 속이 상해서 많이 운 게 아니었다. 오랜만에 본 라이킨의 얼굴도 반쪽이 되어 있었다. 그건 속상했지만, 소렐은 그가 와줘서 많이 기뻤다. 아주 마음이 돌아서버린 게 아니었다. 그도 여전히 그녀를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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