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해제 (11)2021.03.31.
샤를렌은 빈손으로 돌아온 오빠를 보고 의아해했다.
“뭐하러 나갔어?”
“그러게나 말이다…….”
“공주님이 죽어도 안 보시겠대?”
“아니, 아버지가 막으셔서 못 만났어.”
“아버지?”
라이킨은 지친 얼굴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공주님이 아버지한테 가셨어.”
“와.”
샤를렌은 감탄했다. 정말 감탄해서, 한동안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왜 말을 안 해?”
침묵이 너무 길어지자 라이킨은 고개를 들고 동생을 바라보았다.
“오빠가 이렇게 처절하게 당하는 건 너무 드문 일이라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려고.”
“재미있어?”
“어. 너무 재미있어.”
샤를렌은 대놓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절대로 문을 안 열어주셨겠지?”
라이킨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부탁해도 어림도 없더라.”
“그럼.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데.”
고개를 끄덕이던 샤를렌이 오빠를 쳐다보았다.
“설마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것도 못 해보고 돌아온 건 아니겠지? 이렇게 늦게 왔는데 적어도 뭐라도 해보고 왔을 거 아냐?”
이미 밤이 한참 늦었고, 샤를렌은 저녁 식사를 아주 제대로 즐긴 이후였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꽃이라도 전달해달라고 하고 왔어.”
“그래, 그건 잘했네.”
상처를 딛고 다시 마주할 약간의 여유와 평온을 되찾았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라이킨은 메마른 얼굴로 굳게 닫힌 소렐의 침실을 올려다보았다. 글래스턴 공작의 저택에는 스산한 한기가 돌았다. 돌아와 주기만 해도, 아무리 너 싫다고 소리를 질러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를 텐데.
‘고작 왕세자전하가 뭐라고 했는지 궁금해서 나한테 말을 걸어준 거죠. 난 그것마저도 너무 기뻐서, 뭐라 한마디만 더 들으면 다 괜찮다고 할 거예요.’
그도 그랬다. 소렐이 뭐라 한마디만 해주면, 그것만으로도 다 괜찮을 거다. 그 역시 그게 무서워서 억지로 참고 그녀를 외면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
“갑자기 와서 죄송해요.”
“천만에.”
“그리고, 힘든 부탁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딱히 힘든 부탁도 아니다만.”
로렌스는 꼼지락대며 연신 사과만 하는 소렐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힘든 부탁이죠.”
소렐은 고개를 숙였다.
“아들 편들지 말아달라는 거잖아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 로렌스에게 라이킨이 금쪽같은 아들이라는 건 누가 봐도 다 알았다. 그런데 그 아들을 내쫓아달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래서 발레시나스 공작저로 오는 걸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로체 집안 정도야 쉽게 뚫어버릴 라이킨을 알았기에, 소렐은 어쩔 수 없이 이리로 왔다.
“글쎄, 나는 네가 나를 아주 잘 판단했다고 생각한단다.”
소렐은 고개를 들었다.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은 로렌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웃는 모습이 라이킨처럼 다정해서, 그녀는 어쩐지 또 울고 싶었다. 내내 눈이 아프도록 울었는데, 눈물은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녀석이 새파랗게 질려서 쫓아온 걸 보면 분명 크게 잘못한 것일 테지. 자, 저번 왕실무도회 때는 바빠서 말을 제대로 못 했는데, 그때 못한 이야기나 다 하자.”
그는 하도 울어서 핼쑥해진 토끼를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저녁이 되었으니 식사를 해야 했다.
“맛있는 걸 잔뜩 준비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구나. 배부르게 먹도록 해요. 기운을 차리고, 밀린 이야기를 다 해다오.”
밀린 이야기라, 뭐가 있을까? 소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렌스는 직접 의자를 빼서 소렐을 자리에 앉혔다. 그것마저 라이킨과 똑같다.
“처음 공작저에 왔는데, 어땠나요, 공주님?”
가까이 앉으면서 빙긋 웃는 얼굴에, 소렐은 불현듯 공작저 전체를 뒤졌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특이한 일이 있었어요.”
“오, 그게 뭘까?”
“공작저 전체에 사술이 걸려 있더라고요.”
순식간에 로렌스의 얼굴이 굳었다.
“사술이?”
“네. 라이킨 말로는……, 라이킨의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쯤에 걸린 사술이래요.”
“그렇게나 오래?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
“라이킨에게 보내는 연애편지가, 공작저 전체에 오망성을 그리면서 숨겨져 있었어요. 제 침실이랑 라이킨 침실, 서재, 홀…….”
“아, 맙소사. 루드밀라.”
로렌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바로 아시네요.”
“그런 짓을 할 애가 그 애밖에 없지.”
힘없이 중얼거리던 로렌스가 다시 소렐을 보았다.
“기분이 상했겠구나.”
“조금요. 아니, 많이요. 그런 짓을 해서라도 라이킨의 마음을 얻고 싶었던 건 이해하지만, 사술은 못된 거예요. 못되고 게으른 거라고 배웠어요. 나중에 만난다면 한마디 해줄 거예요.”
“어이구, 그래야지. 마땅히 그래야지.”
소렐은 또랑또랑하니 말하다가 다시 어깨가 축 처졌다.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어째서 중요하지 않아? 네가 공작저에 감히 부려놓은 사술을 다 찾았는데. 그런데 그거 어떻게 해결했니?”
“제가 뜯었어요.”
“마법으로?”
“아뇨, 그냥.”
힘으로. 소렐은 붙어 있던 편지를 휙 뜯어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안 아팠니?”
“괜찮았어요. 불꽃이 튀긴 하던데, 저는 괜찮아요. 너무 단단히 붙여놔서 그걸 뜯어내는 게 좀 힘들었지만요.”
로렌스는 별거 아니었다는 듯 말하는 소렐을 쳐다보다 웃어버렸다.
“아주 튼튼하구나.”
“그럼요!”
“다행이다. 또? 그래서 어떻게 됐니?”
소렐은 이젠 포기한 심정으로 종알거렸다.
“공작저가 넓었고요, 왕궁 구경도 이번에 왕세자전하께서 시켜주셨는데요, 근데 라이킨이 화를 냈어요, 우리가 왜 싸웠냐면요, 그게 말이에요……. 이런 말을 해도 될까요……?”
“시간은 많구나. 뭐든 말해보렴.”
로렌스는 정신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재미있어했다.
“……제가 좀 잘못을 많이 해서, 엄청나게 실례를 해서, 혹시 화내실지도 몰라요.”
“글쎄다. 일단 그것부터 터트려보지 그러니?”
“엄청, 엄청난 잘못이에요. 라이킨이 몹시 화냈어요.”
“그 녀석이 다른 곳에 가서 말하지 말라고 했니?”
소렐은 고개를 흔들었다.
“샤를렌에게 말해봤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도 화를 내든?”
고개를 흔든다.
“그럼 말해보렴. 괜찮아요, 괜찮아. 그 녀석을 칼로 찌르고 온 것도 아니고.”
소렐은 로렌스를 쳐다보다가 결국, 있었던 일을 전부 다 말했다.
“……저런.”
두서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고 나니, 소렐은 식사를 다 마치고 디저트 접시까지 싹싹 비웠다.
“저런, 아가.”
한참 어린 아가가 얼마나 울었는지 눈에 선했다. 로렌스는 그의 눈에 이제 세상에 갓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는 소렐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대로 라이킨을 다시 만나도 괜찮겠니?”
소렐은 멍하니 로렌스를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자신이 없어서 연락드린 거예요.”
그녀는 양 뺨을 감쌌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상하게도 로렌스 앞에서는 말이 술술 나왔다. 이야기의 순서가 뒤섞여서 몇 번이나 정정하고, 빠트렸던 사실이 뒤늦게 생각나서 말해도 그저 그러냐고, 찬찬히 들어주기 때문일 거다.
“혹시 그거 아세요?”
로렌스는 변함없이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소렐은 고개를 숙이고 몸을 감싸 안았다.
“……딱 한마디를 들으면, 아니, 안 들어도 얼굴만 보면, 다 용서가 될 정도로…….”
말은 오래도록 완성되지 못했다.
“사랑하고 아끼는 것 말이지.”
로렌스는 그 말을 대신 완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아주 잘 알지.”
“……너무 섭섭하고 미운데도 말이에요.”
“그래. 보통 연인이라면 용서할 수 없는 일인데도 그 사람은 괜찮은 거 말이지.”
“저도 자존심이 있거든요.”
소렐은 갑자기 고개를 반짝 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숙였다.
“……그냥 그렇다고요.”
로렌스는 웃었다.
“라이킨이 왜 화를 냈는지 이해는 했고?”
“그걸 말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한 게 죄책감이 들 정도로 미안하기도 했고요. 뱀파이어에겐 실례인 말인가 보다, 하고 제멋대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잖아요.”
중얼거리던 그녀의 입이 또 쭉 나왔다.
“……라이킨은 이제 좀 말해줄 생각이 드는 모양인데, 그 이유가 왕세자전하 때문이란 게 더 화나는 거 있죠.”
“순수하게 공주님의 사과를 듣고 말해줬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로렌스는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아들에게 딱히 미안하지도 않은 이야기지만, 젊은 아이들끼리 사랑싸움을 하는 게 늙은 뱀파이어에게는 무척 재미있었다.
“그래요! 제가 바란 게 바로 그거라고요! ……바꿔 말하면…….”
소렐의 눈에 눈물이 또 한가득 고이기 시작했다. 오늘 사비나와 즐겁게 놀고 와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왕세자전하처럼,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내내 계속 화가…….”
화가 났을 게 분명해서. 그녀는 이만큼 그를 좋아하는데 그는 고작 그것뿐이라서. 좋아하는지도 솔직히 이젠 모르겠어서.
“이런, 공주님, 울지 말아요.”
로렌스는 손수건을 천천히 내밀었다. 라이킨이 봤다면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황급히 그녀의 눈물부터 받아냈겠지만, 로렌스는 그저 서두를 거 없이 손수건을 내밀고, 찬찬하게 바라보았다.
“울 일이 아니니, 울지 말아요.”
“죄송해요.”
소렐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죄송할 것도 없고.”
노신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만 라이킨이 왜 그 말에 화를 냈는지 이유는 알 것 같구나. 하지만 이유는 내가 말해줄 수가 없어요. 그 녀석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게 좋겠다.”
토끼가 손수건을 눈 아래로 쏙 내리고 커다란 눈만 내밀었다.
“말해줄까요?”
“말할 것 같던데.”
“이제 와서 왕세자전하와의 일 때문에 말해주는 거라면 듣기 싫어요.”
소렐은 입을 삐죽거렸다. 채 마르지 못한 눈물이 뒤늦게 굴러떨어졌다.
“그래서 더 보기 싫어요. 나는, 나는 이만큼이나 좋아하는데, 만나면 바로 풀릴 텐데, 라이킨은 아니니까……!”
“아이고,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가. 그게 아니야.”
이러다 와앙 터져 버릴까 봐 로렌스는 얼른 울먹이는 소렐을 달랬다.
“그게 아니니까, 이 할아버지를 한번 믿어봐요. 응? 그 녀석은 내일도 찾아올 테니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울지 말고, 뚝.”
뚝. 토끼는 훌쩍거리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 말을 잘 들었으니 상을 줘야지. 노신사는 토끼에게 귀한 초콜릿을 하나 주었다. 답삭 잘 먹는다. 단것을 먹고 착하다 칭찬도 들으니, 눈물도 쏙 들어갔다.
“그건 그렇고, 사과는 성의 없이 무시하고 나흘 만에 무도회나 가자고 나타나다니 괘씸하구나. 우리도 어디 나흘 내내 박대나 해볼까?”
로렌스는 빙그레 웃었다.
* 라이킨은 오늘 하루 종일 토끼같이 귀여운 게 아니라 귀여운 토끼인 며느리와 뭘 했는지 줄줄 늘어놓는 아버지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말을 또 사주셨다고요.”
“그래, 승마를 아주 잘하더구나.”
“제가 가르쳐드렸으니까요.”
“원래 타고난 운동신경이 좋아.”
“그래서 공주님께서 지금 뭘 하신다고요?”
그게 중요했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꽃을 보내고, 당연히 찾아오고 있었으나 어제에 이어 오늘도 허탕을 쳤다.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던가? 글쎄, 나와 함께 있을 때는 여름휴가를 어디로 갈지 정하고 있었다만.”
좋아하는 체스까지 신나게 둔 로렌스는 까칠해 보이는 아들의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휴가요?”
“그래, 곧 여름이잖니.”
“아버지와 함께?”
“우리 둘이 사이좋게 가보기로 했다만.”
여름에 소렐에게 바다도 보여주고, 수영도 가르쳐줄 생각이었던 라이킨은 할 말을 잃었다. 소렐은 어제 발레시나스 공작저에 온 걸 전혀 후회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곳에는 소렐이 사용할 물품이 시도 때도 없이 배달되었다. 아예 눌러앉을 생각이신 건가, 어떻게든 그녀를 보고 싶었던 라이킨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러게 왜 집을 뛰쳐나갔니? 나도 네 엄마와 싸웠을 때 집을 나가지는 않았다.”
라이킨은 손을 곧게 펴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다투신 적도 별로 없잖습니까.”
“아니, 많이 다퉜어. 너희가 보지 않는 곳에서 다퉜으니까 네가 모르는 거지.”
로렌스는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공주님이 정말 절 보고 싶지 않아 하십니까?”
“알면서 뭘 묻냐. 그러게 누가 의지할 데 없는 아내를 두고 나가는 몹쓸 짓을 하라든? 이리저리 따져봐도, 네가 공주님보다 훨씬 우위에 있지 않냐. 가족이라곤 너밖에 없는 사람에게 그게 무슨 짓이니, 그것도 아직 한참 아가한테.”
대충 이런 식이었다. 라이킨은 어떻게든 소렐을 만나려고 했고, 로렌스는 철저히 어린 며느리의 말에 따라주었다. 만나기 싫다 하면 아들을 막아주었다. 그러고선 즐겁게 아들과의 정겨운 시간을 보내며, 덤으로 아들을 야단쳤다.
“……공주님께서 절 보지 않겠다고 하시는 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막으시는 거군요.”
“대답을 안 하면 그게 안 보겠다는 뜻이지. 착해서 싫다는 말도 잘 못 하는데.”
라이킨은 눈가를 누르던 손으로 그냥 눈을 덮어버렸다.
“그러게요.”
착해서 만나기 싫다는 말도 못 하는 사람인데. 그 희고 말랑한 얼굴을 그제 저녁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텅 빈 집에 돌아가기가 싫어서, 라이킨은 아버지의 잔소리라도 묵묵히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