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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해제 (10) (69/181)

69. 해제 (10)2021.03.27.

새파란 눈은 허공을 한 번 본 뒤, 자신에게 이어진 황금색 결합점이 어느 방향을 향해 늘어졌는지 빠르게 확인했다. 그가 보고 있던 곳을 향한 게 아니라 어딘가, 아주 멀리 뻗어 있었다. 라이킨은 비참하게 울며 뒤로 물러서던 작은 공주를 떠올리며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16606118927599.jpg‘오빠?’

연회장에서 두 사람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샤를렌은 뜻밖에도 한 사람만 돌아오자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16606118927603.jpg‘따라와.’

라이킨은 동생에게 간단하게 눈짓을 하며 입구로 향했다. 국왕과의 면담도 끝났고, 더 이상 머물 이유도 사라졌다. 칼리에르 공은 여동생과 함께 그대로 사라졌다.

16606118927599.jpg“공주님은?”

샤를렌은 급하게 오빠를 따라가며 물었다.

16606118927603.jpg“마법을 사용하셔서.”

16606118927599.jpg“어쩌다?”

16606118927603.jpg“왕세자가 뭐라고 했냐고 먼저 물어서.”

16606118927599.jpg“미쳤어?”

샤를렌이 이마를 짚었다.

16606118927603.jpg“공주님도 뭐라 말했어도 들으실 생각이 없으셨어.”

라이킨은 형형한 눈빛으로 중얼거리다가, 결국 얼굴을 쓸어내렸다.

16606118927603.jpg“내가 이미 저질러놓고 눈에 보이는 게 없었지.”

16606118927599.jpg“공주님이 어디로 가셨는데?”

16606118927603.jpg“집.”

남매는 계단을 뛰어 내려간 뒤 사륜마차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마차는 사납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네 마리 말들은 미친 듯이 길을 달려 공작저로 돌아갔다. 라이킨은 마차가 미처 서기도 전에 급하게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16606118927599.jpg“그러다가 다친다고!”

마차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치느라 정신이 없었던 샤를렌은 이미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가는 오빠의 뒷모습을 보고 그냥 포기했다.

16606118927599.jpg“그래, 달리는 말 위에서 떨어져도 죽겠냐? 죽겠어? 내가 말을 말지!”

그녀는 씩씩대면서도 만만치 않은 속도로 마차에서 내려 함께 달려갔다. 뱀파이어였기에 구두를 신고도 뛰는 대단한 재주를 선보인 샤를렌은 현관문을 통과하며 외쳤다.

16606118927599.jpg“쫓아가면 더 겁먹을 거라고!”

지금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뭘 더 망치려고? 그녀는 급히 오빠를 쫓아갔다가 에벌린과 마주쳤다.

16606118927603.jpg“예?”

라이킨이 되물었다.

16606118930842.jpg“공주님께서는 아무도 보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고요.”

에벌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16606118930842.jpg“일찍 주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6606118927603.jpg“상태, 상태는? 마법을 사용하셨는데 힘들어하시는 기색은 없었습니까?”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 라이킨이 말을 더듬었다.

16606118930842.jpg“조금 피곤해 보이시긴 했습니다만. 무도회에서 돌아오셨으니 당연하겠지요.”

에벌린은 엄격한 눈초리로 라이킨을 바라보았다. 며칠 내내 그의 눈치만 보며 괴로워하던 소렐 이드리스는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로 나타났고, 며칠 내내 마찬가지로 괴로워서 소렐을 피했던 라이킨은 식은땀을 흘리며 뒤늦게 달려왔다. 아무리 바보라도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알 수 있었다. 올 것이 온 거다.

16606118930842.jpg“교수님도, 변호사님도 쉬시지요. 밤이 늦었습니다. 변호사님이 사용하실 침실은 이미 준비되었답니다.”

16606118927599.jpg“고마워요, 에벌린. 덕분에 편히 쉴 수 있겠네요.”

샤를렌은 서둘러 상황을 정리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라이킨이 공비의 침실 문 앞에서 밤새 무릎을 꿇기라도 할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16606118927599.jpg“오빠, 들어가. 어서. 응? 오늘은 아니야. 공주님은 시간이 필요한 거야.”

시간? 시간이 필요한 건가? 그의 냉철하고 난폭한 이성은 당장 문을 때려 부수고 들어가서 소렐의 귀에 교활하게 속삭이라 명령했다. 그녀의 말대로다. 지금 어르고 달래면 소렐은 또 홀린 것처럼 그의 손아귀 안으로 떨어질 거다.

16606118927603.jpg‘……안 되겠지.’

이성은 그렇게 말해도, 본능은 절대 그래선 안 된다고 그를 억지로 잡아채고 있었다. 라이킨은 단추를 풀며 돌아섰다.

16606118927603.jpg“가서 쉬어, 샤를렌. 늦었다.”

늦었으니, 공주님도 쉬셔야지. 라이킨은 말끝에 결국 깊은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16606118927603.jpg“에벌린, 공주님 좀…….”

그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뒤, 손을 눈가에 대고 잠시 섰다.

16606118927603.jpg“잘 부탁합니다.”

16606118930842.jpg“예, 걱정하지 마세요.”

너무 좋아서, 그런데 서럽고 섭섭해서, 그렇지만 너무 좋아서. 넘쳐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순진한 공주님이 품은 마음이 그에게 가득 쏟아졌다. 그런 마음을 받은 적이 있었나? 순수한 첫사랑이자 누구도 멈출 수 없는 맹목적인 순정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어쩔 줄을 몰라 속이 상할 지경인 순정. 라이킨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어내고, 공비의 침실에서 멀어졌다.

16606118927603.jpg‘오늘은 혼자…….’

혼자 울 게 분명했다. 아니, 지난 나흘간 그가 없는 사이에 많이 울었을 거다. 왜 소렐 혼자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무것도 모르니, 연신 그 순진한 눈만 깜빡거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돌이켜보니 그는 더 연장자였고, 소렐보다 훨씬 더 비겁했다. 그러니 지금 문을 열고 달래줄 자격조차 없었다. 벌이라면 지독하다. 라이킨은 문을 닫고, 주저앉아 한없이 침잠했다. 오직 바라는 건 일출뿐이다. 날이 밝으면 당신을 볼 수 있길.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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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이 왔지만 소렐의 방문은 잠깐 열린 뒤, 도로 닫혔다. 밤을 제대로 새운 라이킨은 그녀가 내려오길 기다렸지만, 소렐은 식당으로 오지 않았다. 바깥에서 들리는 말의 움직임과 마차 바퀴 소리에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났다. 그는 식당에 들어서는 에벌린을 쳐다보았다.

16606118927603.jpg“설마 저 마차에 공주님이 타신 건…….”

16606118930842.jpg“네. 가셨어요.”

라이킨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16606118927603.jpg“어디로?”

16606118930842.jpg“공주님께서는 아주 친절하게 ‘사비나 로체 아가씨의 집으로 가셔서 며칠 머무르다 오시겠다’라고 말씀을 남기셨지요.”

어디 사는 누구와는 달리 행선지와 머무르는 바를 명확하게 남겼다고 꼬집는 투였다. 라이킨은 뭐라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16606118930842.jpg“잘 생각하셨어요.”

에벌린은 그 점을 칭찬하며 식당을 가로질렀다.

16606118927603.jpg“아침 식사도 안 하시고?”

16606118930842.jpg“네, 항상 꼬박꼬박 규칙적으로 사시던 공주님이 누구한테 아주 나쁜 물이 들었지요. 식사를 안 하시다니!”

라이킨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끼니를 거르는 건 에벌린에게 절대로 용납이 안 되는 일인데 소렐은 라이킨이 한 짓을 그대로 따라 했다. 아직 어린 토끼가 무슨 잘못이겠는가. 나쁜 본을 보인 오래 묵은 뱀파이어가 문제지.

16606118930842.jpg“그것도 이 아침에 말이에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교수님.”

식당에 들어서던 샤를렌은 등을 돌리고 있는 에벌린 쪽을 보더니 얼른 인사도 하지 않고 슬금슬금 도망치려고 했다.

16606118930842.jpg“결혼까지 하셨으면서 말도 없이 외박을 하시면 어쩌나요?”

아니, 아니야. 지금 도망치면 더 큰 일 나. 라이킨은 황급히 고개를 저어 보였고, 샤를렌은 ‘절대로 아침을 거르지 않는다’는 에벌린의 신조를 지키기 위해 도로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16606118930842.jpg“그런 건 철딱서니 없는 총각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똑똑한 아가씨들은 아예 하지도 않는다고요. 교수님이 미혼으로 지내신 기간이 너무나 길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 식당에 나흘씩이나 안 오실 수가 있어요?”

퍼부어지는 잔소리에 핵심이 있었다. 너 지금 여기서 식사를 한 게 나흘만이라는 거 아느냐는 뜻이었다. 샤를렌은 아주 조용하고 민첩하게 식사 시중을 드는 시종이 가져다준 크림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화가 난 이상, 무조건 먹어야 했다. 그들이 설령 음식을 잘 먹을 필요가 없는 뱀파이어라 할지라도.

16606118930842.jpg“그것도 저에게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말이에요.”

물론 샤를렌도 오빠에게 비난의 눈빛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16606118927599.jpg‘왜 그랬냐, 왜 그랬어, 오빠놈아.’

이렇게 불편한 자리에 앉아서 억지로 아침을 먹게 해? 두고 보자. 샤를렌은 오빠를 노려보다가 다시 수프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쌀이 들어간 건가? 무척 부드럽고 맛있다. 순식간에 오빠한테 짜증을 내는 건 잊어버리고 수프 맛에 푹 빠진 동생에게서 시선을 뗀 라이킨은 잠자코 에벌린의 잔소리를 들었다.

16606118930842.jpg“차라리 잘되었지요. 나흘 내내 공주님께서 혼자 식사하시면서 제대로 드시지도 못했는데, 로체 씨네 집에서 잘 드시고 건강히 지내다 오시면 되겠네요!”

16606118927603.jpg“……공주님이 잘 못 드셨습니까?”

라이킨이 그 말에 반응하자 에벌린이 홱 돌아섰다. 물론 샤를렌은 따끈한 버터롤의 풍미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움찔거린 건 라이킨 하나였다. 호랑이가 두 눈을 무섭게 빛냈다.

16606118930842.jpg“공주님께서 특별히 좋아하시는 시나몬롤이며 당근케이크를 매일 만들어대면 뭘 하나요!”

16606118927603.jpg“그것도 안 드셨다고요?”

16606118930842.jpg“입도 안 대셨어요! 신선한 당근을 따로 썰어서 드리면 그걸 조금 드시긴 했지요! 세상에!”

샤를렌은 잠시 휴가를 낸 김에 공작저에 며칠 더 머물기로 했다. 첫째로, 오빠가 에벌린에게 혼나는 게 너무나 재미있었으며, 둘째, 공작저의 식탁에 올라오는 모든 빵과 요리는 일품이었기 때문이다.

16606118927599.jpg“에벌린, 여기 이 버터롤 더 있어요?”

16606118930842.jpg“그럼요, 변호사님. 아주 많이 구워놨어요. 공주님께서 하도 안 드셔서 뭐라도 더 드실까 싶어 잔뜩 만들어놨거든요.”

16606118927599.jpg“좀 주실래요? 너무 맛있네요.”

그리고 셋째로, 에벌린은 많이 먹는 사람을 좋아한다. 당장 샤를렌의 앞에 버터롤 한 접시가 더 놓였다. 그녀는 만족하며 에벌린에게 ‘하던 거 계속하시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16606118927603.jpg“……그럼 제대로 드신 끼니가 얼마나 됩니까?”

16606118930842.jpg“제 기준에는 하나도 없네요. 수프 반 그릇, 빵도 억지로 하나 먹이고, 또 상추나 사과, 당근을 부지런히 깎아 드렸어야 했어요. 고기는 포크질 두어 번 하시다가 물리셔서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아직 자라나는 아기토끼는 잘 먹어야 하는데! 고기를 많이 먹고 씩씩하게 무럭무럭 자라나야 하는데!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뱀파이어야!

16606118927603.jpg“그런데 어제 무도회를 가신 겁니까?”

16606118930842.jpg“교수님이 가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호랑이의 눈에서 또 불이 뿜어졌다.

16606118930842.jpg“그럼 공주님이 힘들어서 못 가겠다고 하실 줄 알았어요? 얼마나 기대하시면서 단장하셨는데. 그래서 물어보는 건데, 공주님이 어제 무도회 만찬 자리에서 뭘 드시긴 했나요?”

라이킨은 아무런 대답도 못했고, 샤를렌은 슬쩍 에벌린이 있는 쪽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16606118930842.jpg“교수님은 잘 챙겨 드세요.”

에벌린은 아주 상냥하게 꼭꼭 고기 다지듯 말한 뒤 식당을 휙 떠났다. 가만히 앉아 있던 라이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16606118927599.jpg“앉아, 앉아. 지금은 때가 아니야, 앉아.”

어딜 뛰쳐나가서 공주님을 바로 데려 오려고 그래? 샤를렌은 오빠에게 손짓을 했다.

16606118927599.jpg“앉아. 지금 가봤자 로체 집안만 뒤집어 놓는 거니까 그냥 앉아.”

16606118927603.jpg“아…….”

라이킨은 털썩 주저앉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16606118927599.jpg“또 알아? 친구 집에서는 그래도 잘 먹을지.”

작은 공주님은 한참 더 자라야 해서 골고루 잘 먹어야 했다. 그도 지난 나흘 동안 먹지도, 또 자지도 못했지만 그와 소렐이 같은가.

16606118927603.jpg“……오늘 저녁에 모시러 가야지.”

16606118927599.jpg“그래, 오늘 저녁에 가서 싹싹 빌고 모셔와.”

오늘 저녁에는 가야 했다. 일단 잘 놀고, 잘 먹고 오라고.

16606118927599.jpg“그런데 빌면 될 것 같아?”

샤를렌이 물었다.

16606118927599.jpg“통하겠어? 원래 공주님 같은 사람이 제일 무서운데. 한번 아니다 싶으면 싹 돌아서지 않아?”

라이킨은 냅킨을 식탁 위에 툭 던졌다.

16606118927603.jpg“그런 게 아니야.”

말만 하면 통할 거다. 소렐도 분명히 그럴 거라서 그를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16606118927599.jpg“아닌데 왜 나가?”

16606118927603.jpg“나랑 마주하면 용서해줘야 하니까.”

16606118927599.jpg“……착하네.”

16606118927603.jpg“착하시지.”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밤 내내 아침만을 기다렸는데, 이젠 하루 종일 해가 지기를 기다려야겠다. * 그는 해가 지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고, 석양이 질 때쯤 로체 집안의 엔버네스 저택 문을 두드렸다.

16606118927603.jpg“공비전하를 모시러 왔습니다만.”

그는 무릎을 꿇고서라도 소렐을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면 그냥 넘어올 거라고 그녀가 울먹이지 않았나. 듣기 싫다고 귀를 막는 손을 억지로 떼어내고, 그 귀에 애원을 쏟아부어서 데리고 올 생각이었다. 그녀가 혼자 있고 싶다고 해서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들었다간 더 뺨 맞을 짓만 늘리는 셈이었다.

16606118944225.jpg“칼리에르 공비전하는 여기 안 계세요.”

하지만 소렐은 그를 너무나 잘 알았나 보다. 라이킨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하는 사비나 로체를 할 말을 잃고서 바라보았다.

16606118944225.jpg“조금 전 떠나셨어요.”

16606118927603.jpg“어디로?”

칼리에르 공작저의 마차는 공비의 지시로 따로 움직인 바가 없다. 그럼 로체 집안에서 마차를 내주었단 말인가? 사비나는 싹싹하게 대답했다.

16606118944225.jpg“발레시나스 공작저로요.”

발레시나스 일대를 다스리는 발레시나스 공작, 로렌스 오블리앙 공의 저택으로. 라이킨은 그쯤에서 자신의 아내가 얼마나 똑똑하고 똑 부러지는 성격인지 제대로 실감했다. 한 번 보고 싶지 않다면, 그녀는 자신이 원할 때까지 얼마든지 라이킨을 보지 않을 재주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렐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라이킨은 당장 엔버네스의 발레시나스 공작저로 달려갔다. 칼리에르 공작저만큼 유서 깊고, 또 방대한 넓이와 규모를 자랑하는 발레시나스 공작저는 철저히 그의 아버지 취향으로 꾸며져 있었다.

16606118927603.jpg“아버지!”

로렌스는 저택 현관에 앉아서 파이프를 물고 두꺼운 책을 한창 읽고 있었다. 한가하게 그저 낡은 남방과 서스펜더, 그리고 부츠에 튼튼한 바지 차림인 걸 보면, 누가 봐도 시골 장원에서 목가적인 삶을 사는 은퇴한 신사로 보였다.

16606118946606.jpg“아, 왔니?”

로렌스는 안경 너머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마차에서 뛰어내린 라이킨의 안색은 전혀 좋지 못했다. 영리한 토끼가 잽싸게 달아나서 쏙 숨어버렸다. 토끼에게 호되게 걷어차인 그의 몰골이 꽤나 볼만했다.

16606118946606.jpg“만나서 반갑구나. 그럼 이제 돌아가렴.”

라이킨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16606118927603.jpg“……공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16606118946606.jpg“공주님께서는 널 만나고 싶지 않다고만 하셨지. 그런데 여긴 내 집이잖니.”

아버지는 그가 감히 뚫을 수 없는 벽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벽은 견고했다. 라이킨은 뭐라 더 말을 하려다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16606118927603.jpg“좀 어떠십니까?”

16606118946606.jpg“나는 멀쩡하고, 공주님? 글쎄, 잘 모르겠는걸. 오늘 어떠냐고 묻기도 전에 네가 들이닥쳐서 말이다.”

16606118927603.jpg“안색은……?”

16606118946606.jpg“너보단 낫더라.”

그런가. 그러면 됐다. 아니, 된 건가? 라이킨의 시선은 어디로 향할지 몰라 불안하게 움직였다.

16606118946606.jpg“돌아가렴, 라이킨. 돌아가. 오늘은 아니란다.”

라이킨은 힘없이 웃었다.

16606118927603.jpg“아버지는 내일도 아니라고 하실 겁니다.”

로렌스는 아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16606118927603.jpg“얼굴만이라도 보게 해주십시오.”

더 바라는 것도 없었다. 멀리서라도, 얼굴만.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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