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해제 (9)2021.03.24.
“이쪽은 7대 국왕이셨던 필립 2세께서 지으신 정원입니다.”
소렐은 왕세자의 친구라는 몇몇 젊은 귀족들과 함께 왕세자의 안내를 받고 있었지만,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라이킨이 가득 채워서 다른 게 들어갈 틈이 없었다.
“아름답네요.”
그래도 꼬박꼬박 열심히 호응은 했다. 그녀는 칼리에르 공비이고, 라이킨의 체면까지 망칠 수는 없었다. 이미 관계를 망쳤는데 여기서 어떻게 더 실수를 할까.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자꾸만 과거를 곱씹었다. 그냥 입이나 다물고 있을걸. 입만 열면 실수를 하지. 상처를 입히지. 그토록 강인하고 칼날 하나 들어갈 틈이 없는 존재에게 어떻게 그녀가 상처를 줄 수 있을까? 상상도 못 했는데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대단한 이에게 상처를 줬다. 바보야. 바보 멍청이야. 좋은 사람인데 대놓고 실례했어.
“여름에 피는 장미가 일품이지요.”
계속 생각하고, 샤를렌이 슬쩍 말해준 것까지 합쳐보니 대충 알 것 같았다. 굳이 그가 뱀파이어라는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었던 거지. 그냥 순수하게 그녀를 원한다는 말이었을 거다. 아마도. 그래, 아마도. 이젠 자신이 없어서 감히 함부로 짐작조차 못 하겠다. 그저 상처 준 것을 아파할 수밖에.
‘나라고 뭐 상처 안 받았나?’
귀하게 자란 공주님도 그가 나흘 내내, 그리고 여기에 올 때까지 밥 한번 같이 안 먹어주고 필요한 말 빼고는 본 척 만 척해서 너무 상처받았다.
‘아니, 나한테 상처받았으니 당연한 거지.’
앞으로도 이럴까? 그러면 진짜 못 견딜 것 같았다. 이토록 좋아하는 사람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깨닫는 거다. 그녀는 라이킨이 좋았다. 그가 차가운 눈길로 보기만 해도 절망을 느낄 만큼.
“아쉽게도 이 정원이 끝이군요.”
돌아서자 다시 연회장이 보였다.
“아직 다 보시지 못한 곳이 무궁무진합니다. 더 볼 만한 곳이 많으니 언제든지 놀러 오세요. 공비께서 오신다면 제가 늘 기쁘게 맞이하러 가겠습니다.”
왕세자의 말에 소렐은 얌전히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전하.”
소렐의 시선은 키가 큰 왕세자의 코 주변을 맴돌았다. 그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딱히 사람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주변으로 함께 왕궁을 잠시 구경했던 젊은 귀족들이 흩어졌다. 소렐도 다시 샤를렌을 찾아 가야겠다. 그런데 곁에 라이킨이 있으면 어쩌지? 갑자기 든 생각에 소렐의 어깨가 처졌다.
‘이젠 마주해야 하는데, 마주하는 것조차 겁내다니. 뻔뻔해.’
“이대로 흩어지긴 좀 아쉽군요. 끝날 때쯤이면 복잡해서 인사도 못 드릴 텐데요.”
왕세자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그러곤 손을 내밀었다.
“아쉬우니 제가 한 곡 청해도 될까요?”
왕세자의 청을 어떻게 거절할까? 소렐은 정말 추기 싫었다. 지금 집중도 못 하는 상황에서 무슨 실수를 할지 몰랐고, 라이킨과 춤을 춘 지 오래되어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칼리에르 공비다.
“실례를 많이 할지도 모르겠지만, 잘 부탁드려요.”
이렇게 말하는 게 맞는 거겠지. 소렐은 왕세자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를 붙잡기엔 너무나 멀리 있었던 라이킨은 여동생에게 팔을 잡혔다.
“어린 아내 속박하는 남편이라고 소문나기 싫으면 표정 관리해. 선남선녀네.”
“넌 그런 소리가 나와?”
“왜 안 나와? 왕세자전하가 올해 스물넷이라는데. 또래끼리 친한 게 귀엽잖아.”
“딱히 친하지 않아.”
“지금 친해졌을 수도 있는 거지. 그냥 나랑 이야기나 하는 척해. 전하를 노려봐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샤를렌은 재미있어 죽을 지경이었고, 라이킨도 그걸 알았지만 딱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두고 보자며 나중을 기약하는 수밖에.
“……공주님이 울었어?”
“알면서 뭘 물어?”
서로 언어가 달랐던 거다. 그래. 그냥 그랬던 거다. 소렐이 한 말 또한 나름의 사랑한다는 표현이었는데, 구애를 흡혈욕구로 알았냐고 화를 내다니. 뱀파이어가 지레 찔렸지. 제기랄. 라이킨은 뒤늦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오빠도 화낼 법했어. 예뻐 죽겠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피 마시고 싶어서 그러냐고 물으면 누가 화를 안 내?”
같은 뱀파이어로서 그건 이해가 갔다. 샤를렌이었어도 모욕적으로 느끼고 상처받았을 거다. 뭘 해도 저 사람에겐 내가 피를 목적으로 다가서는 걸로 보이나, 하여.
“……그래도 화는 내지 말아야 했지.”
“그것도 그래. 오빠가 훨씬 연장자니까.”
“……넌 도대체 누구 편을 들어주는 거냐?”
“나야 늘 내 편이지. 뭘 새삼스럽게. 너무 자책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해서 내내 화내지도 말라는 거야. 뭐든 적당히 해야지. 꼴 보기 싫어.”
오빠가 괴로워하는 건 꼴 보기 싫다, 이거였다. 라이킨은 소렐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참 예쁘게 꾸며놨다. 오는 내내 반짝반짝 눈이 부셔서 한동안 바라보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예쁘다는 말이라도 한마디 해줄걸 그랬다. 그랬다면 좋아했을 텐데. 아니, 알면서 입을 다물었다는 게 더 쓰레기지. 소렐은 입은 웃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못했다. 기계적으로 웃으면서 어떻게든 실수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왕세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긴 라이킨도 몰랐다.
“쳐다도 안 봤다며, 이제 어쩔 거야?”
재미있어 죽으려고 하는 동생의 말에 라이킨이 고개를 휙 돌렸다.
“내가 언제 쳐다도 안 봤다고……?”
“공주님이 그러시던데. 나흘 내내 집에도 안 들어오고, 말도 안 걸고, 보지도 않았다고.”
자꾸 바라만 보게 되니 아예 보지 않고 참아보려 피한 거고, 결국 오늘 보게 되었을 때는 내내 살폈다. 라이킨은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오빠는 내내 웃기라도 해야 해. 안 그래도 성질 더럽게 생겨서 가만히 있으면 오해받는데, 웃기라도 해야지. 공주님이 겁 많이 먹으셨더라.”
샤를렌은 저와 똑같이 생긴 오빠의 옆모습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보다 한 뼘 정도 더 큰 오빠는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서서 뚫어져라 소렐을 바라보고 있었다. 겉보기엔 칼리에르 공이 그저 평온히 아내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겠지만, 샤를렌이 오빠가 몹시 초조해한다는 걸 바로 눈치챘다.
“또?”
“뭘 또?”
“내가 또 알아야 할 게 뭐가 있냐고.”
다 알아야겠으니 더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글쎄. 대충 다 말한 것 같은데, 오빠가 사과도 제대로 안 받아준 게 충격이 컸나 봐.”
라이킨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정말 그랬어?”
“……사과를 받을 기분은 아닌데, 그렇다 해서 사과를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계속 볼 자신은 없고.”
“아하.”
샤를렌은 뭔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씩 웃었다.
“사과는 받겠지만 꺼지라고 한 거네.”
라이킨은 속으로 전쟁터에서나 쓰던 상스러운 욕설을 중얼거렸다. 지금 모든 게 그의 신경을 바짝 태우고 있었다. 왕세자가 왜 소렐을 데리고 굳이 왕궁 구경을 시킨 건가, 무슨 소리를 한 건가, 구경이 끝났으면 얌전히 물러날 것이지 왜 춤까지 신청한 건가. 그가 없는 사이에 소렐이 결코 거절하지 못할 부탁만 한 것이니 짜증이 나는데, 지금 그의 상황이 저 왕세자만도 못해서 더 화가 났다.
“……그런 거였다고.”
“뭘?”
“피를 주시겠다고 한 게 그런 뜻이었냐고.”
그거라도 줄 수 있다고 내민 거였냐고. 라이킨은 더 확인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겐 과분했군.”
그때 소렐이 살짝 발을 헛디뎠고, 라이킨이 움찔거림과 동시에 왕세자가 그녀를 휙 들어서 다시 제자리에 두었다.
“저번에 칼리에르 공을 보고 좀 배웠습니다.”
왕세자가 싱긋 웃었다.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본 소렐도 마주 웃었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좀 웃으시는군요. 오늘 내내 안색이 어두우셔서 걱정했습니다.”
“제가요?”
“예. 아닙니까?”
소렐은 잠시 가슴이 따끔거리다 못해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아름다운 궁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을 뿐입니다. 너무나 좋은 구경을 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대충 주워듣고 소설로 배운 말을 흉내 내어 말했다.
“공비께서는 참 아름답게 표현을 할 줄 아시는군요.”
왕세자는 약간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휘면서 웃었다. 대충 넘어간 건가? 그럼 이번에는 실수를 하지 않았나 보다. 그쯤에 춤곡 하나가 끝났고, 왕세자는 멈춰선 소렐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오늘 뵙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군요.”
왜 안 되는데? 소렐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라이킨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소렐이 왕세자에게 뭔가 실수라도 한 걸까? 당황스러웠다.
“그럼, 공주님. 다음에 또.”
“아, 네, 전하.”
소렐은 살짝 무릎을 굽혀 예를 표했다. 자꾸만 또 실수를 한 것일까 봐 겁이 났다. 아니, 라이킨과 마주하는 게 겁났다.
“왕세자전하.”
“칼리에르 공.”
간단히 인사만 나눈 두 남자는 곧장 엇갈렸다. 라이킨은 소렐에게로 바로 다가왔다.
“가시지요.”
소렐은 그가 내민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들은 일단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나갔다.
“왕세자전하께서 궁을 구경시켜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무슨 말을 공주님께 했습니까?”
그녀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라이킨을 바라보았다. 그는 뚫어져라 소렐을 보고 있었다. 그건 무척 중요한 일이라는 듯이. 소렐은 기억을 더듬었다.
“뒤쪽의 장미가 아름다운 정원이랑, 분수랑……, 아, 그리고 회랑을 보여주셨어요. 무척 넓던데.”
“예, 그때 뭐라고 하던가요?”
“그냥 어떤 곳인지 설명을 해주시고…….”
“공주님께서 따로 들으신 건 없습니까?”
그들은 가장자리에 와서 서로를 마주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마주했다.
“……궁에 더 좋은 곳이 많다고, 언제든지 놀러 오라고 하셨어요. 그게 다예요.”
“방금 춤을 추실 때는요?”
소렐은 아차 싶어 입술을 깨물었다.
“공주님?”
“제 표정이 좀 안 좋았대요. 왜 안 웃냐고 물어봤어요. 그냥 잘 둘러댔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는 딱딱하게 말하고 돌아섰지만, 라이킨은 왕세자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그가 잠시 손을 놓은 사이 새파랗게 젊은 놈이 엄연한 유부녀에게 제 궁을 과시하는 꼴이 같잖았다.
“……궁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네, 멋있는 곳이에요.”
소렐은 아까 둘러봤던 정원 쪽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주위는 아주 고요했고, 사람이라곤 칼리에르 공작부처밖에 없었다.
“유서 깊은 곳이라 그런지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았어요. 잘 듣지는 못했지만.”
“여기보다 훨씬 더 괜찮은 곳이 많습니다.”
“네, 왕세자전하께서 그래서 또 오라고, 그때 더 보여주신다고 하시더라고요.”
조용히 대답하던 소렐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라이킨이 입술을 말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퍼뜩 깨달았다. 라이킨이 말하는 ‘훨씬 더 괜찮은 곳’은 왕궁이 아니라 그의 소유를 뜻했다. 그녀는 잡고 있던 그의 팔을 내려놓았다.
“더 계실 겁니까?”
“네?”
“무도회에 더 계시고 싶으시냐고 여쭈었습니다.”
문득 소렐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서러움을 느꼈다. 며칠 만에 겨우 마주한 라이킨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남자는 몹시 차가운 시선으로 여전히 그녀를 실수투성이 취급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만회할 기회는, 용서받을 기회는 처음부터 없던 것인지도 모른다.
“바쁘시면 먼저 가세요. 저는 샤를렌이랑 같이 돌아갈게요.”
토끼는 고집스럽게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눈치를 보고 울던 토끼가 뒤늦게 슬슬 성질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착하고 온순한 성정을 타고나긴 했지만, 괴짜로 이름 높았던 펠릭스 이드리스의 성미 역시 빼닮았다.
“바쁘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면 기다리겠습니다.”
“절요?”
“예.”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시면 그냥 가시라고…….”
“바쁘지 않습니다.”
“굳이 절 기다리실 필요 없잖아요.”
그는 그녀의 말에서 자신이 무척 늦었다는 걸 느꼈다.
“공주님.”
일단 불렀다. 까만 눈이 잔뜩 상처를 입은 채 그를 쳐다보다가, 끝내 마주 보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라이킨은 목에 칼이 걸린 느낌이었다.
“……저와 대화하실 시간은 없으십니까?”
이제야? 소렐은 푹 숙였던 고개를 홱 들었다. 왕세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였더니, 이제야?
“난 별로 할 말이 없어요. 무슨 말을 했다가 또 실수할까 봐 겁이 많이 나거든요.”
사흘 내내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보고, 이렇게 하면 용서해줄까, 저렇게 하면 용서해줄까, 얼굴이 빨개지도록 고민했다. 그런데 지금 궁금한 게 왕세자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고, 또 무슨 약속을 했냐, 뭐 이런 너절한 것들뿐인가. 아니, 끝난 거다. 그는 이미 소렐을 마음에서 쳐내서 그들의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를 의논하려는 게 뻔했다. 듣고 싶지 않았다. 정말 듣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 웃어 봐도 웃음이 나오지도 않았고, 그녀도 자존심이 있었다. 귀하게 자란 헬레인 공주님에게 자존심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럼 그냥 들어주십시오. 안 되겠습니까?”
그녀에게 언제 선택권이 있던가. 소렐은 한숨을 쉬며 잠자코 떨어질 무서운 말을 기다렸다. 아마 무척 아플 거다. 그녀는 두 손을 꼭 모아 쥐었다.
“샤를렌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공주님께서……,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소렐은 고개를 들었다.
“내가 나쁜 의도로 말한 거 아니라고 사과했잖아요.”
“……예.”
“내가 사과했을 때 내 말 제대로 안 들었죠?”
“듣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날 용서한 건 아니었잖아요.”
그녀는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하지만 눈물이 자꾸 나오려고 하는 건, 라이킨이 밉거나 이 상황이 그녀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속이 상하기 때문이 아니다.
“싫어요, 말하지 말아요.”
소렐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뚝 떨어졌다.
“나는 어리고 모르는 것도 많아요. 그래서 앞으로도 또 여러 번 실수하겠죠. 그럴 때마다 라이킨은 사흘이고 나흘이고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 거고요.”
그녀는 거칠게 눈물을 닦아냈다. 곱게 얹은 화장이 다 번져서 못나 보인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나는 혼자 남아서 내가 얼마나 라이킨을 좋아하는지 실감하면서 늘 벌벌 떨 거예요. 이번에도 그랬으니까, 다음에도 또 그러겠죠.”
아니라고, 아니라고 어떻게든 말하려던 남자의 머리가 정지했다. 눈물에 푹 젖은 까만 눈 때문에, 혹은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 말 때문에.
“라이킨이 지금 말하려는 걸 들으면, 또 납득하고 그냥 넘어갈 거고요. 내가 그만큼 라이킨을 무척 좋아하고, 또 사라지는 건 견딜 수가 없으니까요.”
엉망이다. 그래. 완전히 엉망이었다.
“그런데 나흘씩이나 날 없는 사람 취급한 걸 그냥 넘어가긴 싫어요.”
얼굴도 엉망이고, 그녀는 말도 잘 못해서 그에게 완전하게 마음을 전달할 수 없겠지. 어쩌면 지금 또 실수했는지도 모르겠다.
“고작 왕세자전하가 뭐라고 했는지 궁금해서 나한테 말을 걸어준 거죠. 난 그것마저도 너무 기뻐서, 뭐라 한마디만 더 들으면 다 괜찮다고 할 거예요. 라이킨은 정치가 더 중요하지만 나는…….”
당신이 더 중요하니까. 목이 멘 소렐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말아주세요. 듣기 싫어요.”
너무 쉽게 넘어갈 날 잘 알아서. 당신을 너무 좋아해서.
“공주님.”
나흘간 너무 괴로웠다. 이토록 좋아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그런데 왕세자 때문에 말을 걸다니. 고작 그것뿐이구나.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면 말을 걸지도 않았겠다. 소렐은 뻗어오는 손을 피해 물러섰다.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갑자기 바뀌었다.
“고, 공비전하?”
깜짝 놀란 하녀가 들고 있던 것을 툭 떨어트렸다. 불이 환하게 밝혀진 이곳은 칼리에르 공작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