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해제 (8)2021.03.20.
샤를렌은 변호사, 그것도 이혼과 강력범죄까지 아우르는 전문 변호사였다. 범위가 넓어진 건 그녀가 순전히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고객들은 그녀를 찾고, 또 그만큼의 진실과 그만큼의 거짓을 늘어놓았다. 때문에 샤를렌은 사람을 어르고 달래서 사실을 토해내게 하는 데는 이골이 나 있었다. 그건 고집 센 토끼라도 예외는 없었다.
“자, 마셔요.”
“괜찮아요.”
뭘 먹어도 부대낄 게 뻔하다. 허옇게 뜬 얼굴을 보면 대충 감이 온다. 오빠란 새끼는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소렐을 이 꼴로 만들어두고 국왕과 단독면담을 하러 간 건가. 그놈의 면담이 끝나면 오빠새끼는 그녀와도 단독면담을 해야 했다.
“왜, 못 먹겠어요?”
시비 거는 어조도 아니고, 그저 부드럽게 어르는 투였다. 우리 꼬맹이가 그렇구나, 하고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투였다. 샤를렌은 큰언니 같다. 소렐은 괜히 엄마 아빠 생각이 나서 울컥했다.
“오늘 이렇게 예쁘게 꾸몄는데 춤도 안 추고.”
“잘 못 춰요. 발 밟고 그래요.”
목소리가 젖었다. 소렐은 잘 감췄다고 생각하겠지만, 샤를렌의 눈에는 다 보였다. 보아하니 둘이 말도 제대로 안 한 것 같던데, 싸운 게 분명했다. 싸웠다니 장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하나? 샤를렌은 그녀와 칼리에르 공비를 힐끔대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소렐을 외딴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앉아요. 발 아프죠?”
발이 아팠나? 소렐은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아뇨, 뭐…….”
자, 이걸 어째야 하나. 샤를렌은 소렐을 내려다보았다. 적당히 꾸며 가렸지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먹지도 못한 티가 났다. 샤를렌의 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싸웠길래 작은 토끼가 이렇게 돼? 이렇게까지 몰아세울 일이야? 하여튼 오빠새끼 두고 보자. 샤를렌은 라이킨을 잘 알았고, 상대적으로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소렐은 잘 ‘파악’했다. 아무리 봐도 라이킨의 그 지랄맞은 성격이 이번에 제대로 꼬인 모양이다.
“무슨 일 있어요?”
그녀는 그대로 물었다. 소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주님 표정이 너무 안 좋아서 걱정이 되네요. 그냥 못 보내겠는데.”
그래도 말이 없다.
“오빠랑 싸웠죠?”
“싸……, 어떻게 싸워요?”
“그럼 오빠가 화냈나?”
화냈구나. 어디 보자. 샤를렌은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오블리앙 공은 칼리에르 공작저가 아닌, 발레시나스 공작저에 머무는 까다로운 분이다. 그러니까 둘 사이를 아직까지는 모르실 거다. 당장 오늘도 샤를렌이 온다는 말에 굳이 나오지 않으셨으니까. 그럼 결국 이 일을 슬쩍 해결해줄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왜 화를 냈을까나.”
샤를렌은 어서 말해보라고, 부드러운 말로 던져놓고 기다렸다. 소렐에겐 어차피 이 일을 털어놓을 상대가 필요했고, 그녀는 아주 온화하고 다정한 대화 상대였다.
“……제가 잘못했어요.”
의기소침해진 소렐은 바닥을 보며 중얼거렸다.
“샤를렌도 절 아주 싫어할 거예요.”
“내가 왜요?”
“아주 실례인 말을 했어요.”
그녀의 눈에 또 눈물이 고였다. 좁은 어깨가 가라앉았다.
“난 잘 상상이 안 가는데요.”
소렐은 다 포기한 얼굴로 샤를렌을 돌아보았다.
“라이킨은 맨날 절 안고 무척 참아요. 막 이렇게 제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크게 몰아쉬어요.”
“……그건 오빠 잘못이네요. 제가 가서 하지 말라고 할게요.”
“그건 너무 힘든 거잖아요, 그렇지요?”
“그……, 그렇지요.”
“참는 건데 어떻게 하지 말라고 해요?”
소렐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샤를렌은 후회했다. 아아. 끼지 말걸. 오빠새끼의 그런 면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래서……, 그래서 제가 실수했어요.”
아니, 이 판국에서 공주님이 무슨 실수를 해?
“그렇게 힘들면 제가……, 제 피 마셔도 된다고 했어요.”
샤를렌은 머리를 한 대 맞은 표정이었다.
“아주 실례인 거지요? 그런데 진짜 몰랐어요. 사과해도 그냥……, 안 받아주는 건 아닌데 라이킨이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나흘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요.”
소렐은 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샤를렌은 한숨을 쉬며 손수건을 꺼내주었다.
“공주님, 공주님. 울지 말아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짐작이 가니까 울지 말아요. 울 일이 아니에요.”
“라이킨이 화났어요. 쳐다보지도 않고 말도 안 해요. 저는 안 울어요. 울지 않을 거지만 화가 났다고요.”
샤를렌은 더 이상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소렐의 눈가를 아주 섬세한 손길로 닦아냈다. 누가 봐도 물기만 사라졌을 뿐, 소렐의 얼굴은 멀쩡했다.
“라이킨이요. 화가 났어요.”
소렐에겐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고 그것만이 재앙이었다.
“공주님.”
샤를렌은 가만히 소렐을 불렀다. 오늘 내내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모든 게 무의미했던 소렐은 샤를렌을 바라보았다.
“오빠가 언제 피를 달라고 했어요?”
가만가만 물어보자 예쁜 눈꼬리가 순식간에 더 처졌다.
“아뇨…….”
“그런데 왜 물어봤어요? 순전히 피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았어요?”
소렐은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의미로 그러는지 알아요. 저 진짜 알아요. 그런데…….”
“그런데?”
“자꾸 목에만 관심을 가지니까……!”
아, 그건 오빠새끼 잘못이다. 샤를렌은 팔짱을 끼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아직 준비는 안 됐지만 그래도 피는 괜찮아요.”
샤를렌의 푸른 눈이, 라이킨과 똑같은 눈이 소렐을 쳐다보았다.
“그건 꽤나 특이하고 용감한 이야기네요.”
그녀는 뜻밖에도 웃었다.
“아플 텐데?”
“괜찮아요. ……뭐, 이젠 상관없는 이야기예요.”
소렐의 표정에서 빛이 꺼졌다.
“제가 잘못한 거네요. 먼저 말도 안 했는데 제가 뭐라고…….”
“피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걸 먼저 꺼내보지 그랬어요. 아, 그건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하셨지.”
화들짝 놀라서 자신을 보는 소렐에게,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샤를렌이 웃어 보이며 와인을 마셨다.
“오빠는 공주님이 준비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걸요. 흡혈은 안중에도 없었고.”
“그래서 그렇게 화를 낸 거라고요……?”
소렐은 여전히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그걸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샤를렌도 오빠를 붙잡고 더 캐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인데. 하지만 대충 감은 잡혔다. 감정의 격차, 뱀파이어와 인간, 뭐 그런 차이겠지.
“한번 물어봐요.”
“나랑 말 안 하려고 해요.”
소렐은 이미 포기한 모양이었다. 샤를렌이 뭐라 말하려는 사이, 인기척이 들렸다.
“여기 계셨습니까?”
두 여자는 황급히 일어섰다. 뜻밖에도 왕세자 라이오넬이 웃고 있었다.
* 라이킨은 페르난데스 7세가 굳이 독대를 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이 와중에 엘펜하임과 전쟁을 할 수는 없소.”
헬레인 공주가 당신 아내이고, 엘펜하임은 헬레인을 무너뜨렸으니 적당히 하라. 일부러 날 세우지 말라는 소리였다.
“엘펜하임이 전쟁을 할 능력은 있습니까?”
“공은 없다고 보오?”
“예.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끄럽게 무력 사용은 할 수 있잖소. 그리고 나는 무력 사용은 용납할 수가 없소.”
라이킨은 슬쩍 웃으며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언제고 이 말을 할 줄 알았다. 일을 벌이지 말라, 경고를 할 줄 알았다. 그러면서도 국왕은 칼리에르 공이 가진 영향력은 이용하고 싶을 거다. 참 욕심도 사납지. 모든 존재가 다 그렇다. 라이킨, 그는 안 그렇던가.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는 일은 안 된다, 이 말이오.”
“폐하.”
라이킨은 슬쩍 웃으며 페르난데스 7세를 불렀다. 그라고 해서 빈손으로 이곳을 나갈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엘펜하임은 궁지에 몰릴수록 이를 드러낼 거고, 언젠가는 제대로 손을 봐야 했다.
“신성기사단이 폐하의 땅을 침범한다면 그건 폐하께서 벌하셔야 할 일이지요.”
“그들이 언제 그렇게 노골적으로 침범했소?”
“헬레인에게는 그랬습니다.”
“그게 언제적 일이오?”
“폐하께서 태어나시기도 전이지만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본성이 전혀 변하지 않은 채 대를 잇는 것도 보고 있지요.”
칼리에르 공은 점잖게 말했다.
“그들이 노골적으로 굴지 않는 건 그걸 덮을 만한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 염려하시는 지점이 바로 그것임은 알겠습니다. 힘이 약하다고 해서 본성이 바뀌지 않는 이상, 더 교묘하게 일을 만들기 마련이지요.”
페르난데스 7세는 그보다 훨씬 오래 산 뱀파이어를 바라보았다.
“저를 이 방에 부르셨던 모든 왕들께서 그 점을 걱정하셨지요. 알고 있습니다.”
왕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이 뱀파이어는 이미 그의 선조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오래도록 살았다. 그래서 그의 앞에서 고작 즉위 12주년을 맞은 왕은 애송이에 불과했다.
“저는 그럴 때마다 항상 똑같은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일은 은밀히 처리될 것입니다.”
하지만. 굳이 단서를 달지 않아도 쳐다만 보면 왕들은 이해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뭘 보장해주면 좋겠소?”
“옛적부터 내려오던 암묵적인 규칙을 지켜주시면 됩니다. 우리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왕은 관여하지 말라?”
“예, 그렇습니다.”
“……나도 들은 적이 있소. 그게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었다고도 들었고.”
페르난데스 7세는 망설였다.
“하지만 나는 왕이고, 내 나라에서 영지와 작위를 가지고 있는 뱀파이어들끼리 분쟁이 있을 때 개입을 안 할 수가 없소.”
“하셔야지요. 그것이 폐하께서 개입하셔야 할 일이라면. 혹은 귀족들끼리 해결해야 할 일이라면 당연히 하셔야지요. 폐하께 가기도 전에 법원에서 해결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라이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폐하께서 개입을 하셔도 해결되지 않을 일들이 훨씬 많을 겁니다.”
“종족 간의 일이다?”
“예, 그렇습니다. 그런 일들은 제가 책임지고 해결할 테니…….”
뱀파이어들 중, 가장 강대한 힘을 가진 이가 약속했다.
“폐하께서는 더러운 일에서는 적당히 멀리 떨어져 계시면 됩니다.”
더러운 일이라.
“알겠소.”
상당히 모호한 약속이었으나 라이킨은 이런 약속을 받아내고, 또 그대로 지키게 만드는 데 익숙했다. 다시 한번 약속은 재확인되었고, 라이킨은 왕이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적당히 얻어냈다. 결국 엘펜하임을 대놓고 적대시하고 싶지는 않다, 이거지. 하긴 종교의 힘을 이고 있는 이들을 무시할 수는 없을 거다. 라이킨은 왕이 앉아 있는 방에서 먼저 나왔다.
“오빠, 안녕?”
샤를렌이 그의 곁에 능숙하게 붙었다.
“공주님은?”
공주님은 어쩌고 왜 네가 여기 혼자 있어? 묻는 시선에 샤를렌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뭐 어쩔 수 없는 대단하신 분이 데리고 가셨어.”
“아버지?”
“공주님한테 화냈다며.”
라이킨은 여동생을 돌아보았다.
“공주님이 우셨어. 무슨 말 했는지 다 들었고.”
그는 고개를 돌렸다.
“……몰라서 그래.”
“공주님이 뭘 모르는데?”
“글쎄. 하긴 잡아 먹히는 입장에서는 발정난 거랑 배고픈 거랑 한끝 차이인가?”
라이킨은 거칠게 중얼거렸다.
“아직도 화가 났구만.”
샤를렌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 혼자 발정난 거지. 차라리 싫다고 떨어지지, 피…….”
그는 씹어 뱉듯이 말하다가 말을 다 완성시키지도 못하고 돌아서서 입가를 쓸어내렸다.
“우린 뱀파이어야.”
“누가 모른대?”
“관계를 맺을 때 우리의 특성을 버리고 맺을 수는 없다고.”
그래도 그 상황에서 굳이, 굳이 생각하지도 않던 피 이야기를 했어야 했나. 차라리 싫다 하지. 세차게 뺨을 얻어맞은 기분이라 너무나 상처였고, 언뜻 굴욕적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소렐이 지금 눈에 보이지 않아 자꾸만 연회장을 뒤지고 있다. 울었다니, 그게 미안하고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더 말하지 말라는 경고였지만 샤를렌은 라이킨을 아주 가까이 끌어당겼다.
“오빠. 우리가 그 지옥을 같이 걸어왔지만, 우리는 뱀파이어야. 피를 원하고, 피를 마시지 않으면 굶어 죽지. 내가 내 입으로 ‘그 여자’가 하던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질린 얼굴로 웃었다. 가장 힘들었을 샤를렌이 어떤 마음으로 어머니를 입에 올리는지 잘 알았기에 라이킨은 잠자코 들었다.
“그걸 어쩔 수 없어. 그리고 우리를 사랑해주는 어떤 존재는, 우리가 피를 마셔야 한다는 것까지 감안해서 사랑해야 해.”
사랑? 라이킨의 눈이 순식간에 좁아졌다.
“정신 좀 차려. 공주님이 연애를 해봤겠어? 아주 서툴지. 물론 그 순간에 그런 말은 하면 안 되는 거였지만, 공주님 딴에는 엄청난 고백을 한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전혀 모르는 사람은 소렐이 아니라 라이킨인지도 모르겠다.
“무서운 거 각오하고 피 준다고 하는 게 얼마나 끝내주는 사랑이야? 나도 그런 고백은 못 들어봤는데.”
샤를렌은 굳어버린 라이킨을 보며 씩 웃었다.
“뱀파이어가 들을 수 있는 가장 낭만적인 고백 아니야?”
그는 간신히 혀를 움직였다. 누군가가 망치로 그의 머리를 세게 내리치고 있었다. 쾅, 쾅, 쾅.
“나는 그런…….”
“공주님도 오빠가 무슨 의미로 안아줬는지 알고 있어. 근데 그건 아직 준비가 안 됐대. 대신 다른 거라도 주시고 싶으셨던 거지.”
여동생은 오빠를 짐승 쳐다보듯 쳐다보았다.
“좀 참아, 제발. 언제부터 그렇게 욕구 조절을 못 했어? 짐승이야? 오빠 맞아? 내가 낯 뜨거워서 공주님 얼굴을 못 보겠더라.”
세상에, 세상에, 옘병이다. 그러나 라이킨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 어디 계셔?”
“아버지 안 오셨는데?”
“같이 있다며?”
“난 아버지라고 한 적 없어. 대단하신 분이 공주님을 데리고 가셨다고 했지.”
샤를렌은 딱 돌기 직전인 오빠놈에게 이번만큼은 누나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왕세자전하 말이야. 왕궁 구경시켜주신다고 데리고 가셨어.”
그리고 오빠가 돌아버리는 걸 재미있게 구경했다. 바보가 바보짓을 하는 것뿐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냉철하고 강인한 오빠가 바보짓을 하는 건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구경거리다. 글래스턴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엔버네스까지 오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