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해제 (7)2021.03.17.
라이킨이 화가 났다. 몹시 화가 났다.
“교수님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으신다는군요. 공주님 먼저 식사하세요.”
문제는, 소렐은 그가 왜 화가 났는지 알 수 없다는 거였다.
‘저는 배를 채우기 위해 공주님께 이때까지 구애한 것이 아닙니다. 모르시는 건 괜찮으나, 곡해하시는 것은 화가 나는군요.’
곡해라니?
“입맛에 맞지 않으세요, 공주님?”
“아니, 아니에요.”
소렐은 소렐 나름대로 그 마음에 대답한 거였는데, 곡해라니? 도대체 소렐이 뭘 잘못 알아들었단 말인가. ‘구애’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소렐은 바로 알고 있었다. 연심이란 어렵다. 사랑하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건 더 어렵다고 했다. 아, 물론 그녀가 연심이란 걸 배운 건 순전히 통속소설을 통해서였다.
“……오늘은 일찍 잘게요.”
“그러세요, 공주님.”
에벌린은 그런가 보다, 했지만 소렐은 곧장 방으로 가지 않고 서재로 달려갔다. 비어 있는 서재에서 사전을 찾아다, 기어이 ‘구애’라는 단어 뜻을 읽어 보았다.
“……맞는데?”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데. 소렐은 잠시 사전을 쳐다보다가 그냥 덮어버렸다. 실로 오랜만에 다시 외톨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것을 바랐다면 진작 흡혈하고, 공주님의 시신은 길바닥에 버렸을 겁니다.’
그는 짓씹듯 말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는 표정으로 충격과 분노를 참아가며 말했다. 하지만, 정말 힘들어 보였다. 실수했구나. 소렐은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도와주고 싶어서, 뭐든 기꺼이 해주고 싶어서 말한 건데 결국 잘못은 그녀가 한 거였다. 보답하고 싶어 한 마음조차 잘못으로 느껴졌다. 토끼는 터덜터덜 걸어갔다.
‘난 왜 실수를 한 걸까?’
자꾸 곱씹어봤자 자기혐오에나 빠질 질문을 계속하면서.
‘난 바보야.’
결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을 상처 입혔다. 화나게 했다. 무서워서, 토끼는 꼬물꼬물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꼭 감았다. 갑자기 그녀를 덮친 외로움이 무서웠다.
* 엘펜하임이 우왕좌왕하며 녹은 금화를 골라내고 있다는 소식은 바로 라이킨에게 전해졌다. 그는 몹시 바빴다. 그가 맡은 직함들은 알게 모르게 많았고, 그러면서도 수면 아래에서 더 더러운 일들까지 돌보아야 했다.
“다른 티아라들도 일제히 점검 중인 것과 함께, 이젠 금고까지 뒤지기 시작했답니다. 금화를 전부 골라내고 있다고 하니, 엘펜하임의 재력이 쪼그라들겠군요.”
조슈아의 보고에 라이킨은 잠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또?”
“예?”
“또 내가 알아야 할 게 뭐가 있지?”
그건 조슈아에게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머리가 탁하다. 자꾸만 신경이 어디론가 쏠려서, 그가 늘 기민하게 잡아내곤 했던 빈틈들을 그냥 지나친다. 신경이 쏠리는 방향은 당연히 말간 눈을 한 토끼 공주님이었다.
‘빌어먹을.’
온몸이 갑갑했다. 너무 빨랐다. 그래, 너무 빨랐다. 그도 당황스러울 만큼 빠른 감정인데 귀하게 자라신 어린 공주님께서는 얼마나 당황스럽고 놀랐겠는가.
‘실수했어.’
더 참아야 했지만 참지 못했다. 아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보다 더 어떻게 인내심을 가지고 참는단 말인가? 이보다 더 느릴 수는 없었다. 그는 바짝 달았고, 소렐도 모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내가 공주님의 피를 원한다는 생각을 어떻게……, 도대체 뭐 때문에?’
겁을 준 적이 있었나? 농담처럼 했던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였나? 그러지 않고서야 도대체 뭐 때문에 그가 그녀의 피를 원한다는 생각을 한 거지? 왜 애정이 아닌 흡혈욕구로 받아들이는 거지? 결국 그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인가? 소렐 이드리스는 그를 원한 적이 있었나?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아니, 있어. 있는데 내가 못 알아낼 뿐이지.”
이 나이를 먹고도 제 감정에 취해서 작은 공주님의 말은 듣지도 못하고 밀어붙이다가 제대로 뱀파이어 취급을 당했는데, 분명히 빠진 게 있겠지. 빈정거리던 그는 다시 이마를 붙잡았다.
‘아닌데. 분명히……. 분명히 공주님도…….’
당신도 같은 것을 느꼈는데. 싫다고 하지도 않았고 그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숨이 넘어갈 만큼 더딘 속도였지만 소렐 이드리스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다시 한번 점검하겠습니다.”
결국 결론은 그가 소렐에게서 물러날 때로 돌아온다. 소렐은 그를 구애하는 남편으로 본 게 아니라, 피를 갈구하는 뱀파이어로 보았다. 그녀가 남긴 상처가 몹시도 아리다.
“아, 마스터, 페르난데스 7세가 이번에도 즉위 12주년을 기념하여 무도회를 약식으로 연다는데, 거긴 가셔야지요.”
“알아. 초대장을 받았어.”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10주년이야 요란했지만 그가 참석할 바 아니었고, 이번에는 12주년이니 기념은 하고 넘어가되 반드시 글래스턴 공작, 칼리에르가 참석해달라는 건가. 소렐을 비롯해 그 역시 공작저에 처박혀 날아드는 초대장은 모두 거절하고 있었지만, 왕이 직접 보낸 초대장은 거절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칼리에르 공은 헬레인 공주인 공비와 함께 무도회에 참석할 거다.
“그냥 만들어지는 자리가 아닐 텐데요.”
“아, 독대를 하자고 하겠지. 데뷔탕트들을 특별히 챙겨줄 필요도 없으니 왕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도 종종 있을 거고, 그렇게 독대 자리도 만드는 거고.”
라이킨은 뭐가 그리 새롭냐는 듯 중얼거렸다. 그에겐 그딴 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으로 뱀파이어를 바라보고 있는 소렐이다. 도대체 뭘 어떻게 깨부숴야 그를 뱀파이어가 아닌 남편으로 볼까. 숨이 꽉 막혀왔다. ……네가 순혈 뱀파이어임을 늘 인식하며 살아야 한다. 너는 저 버러지 같은 인간이 아니야! 피를 마셔! 마시라고! 삼켜! 지겹게 세뇌당했던 어머니, 그 여자의 말이 망령처럼 되살아난다.
“나는 뱀파이어니까, 독대를 할 수도 없지. 피를 빨릴까 두려워서 경호원들과 암살자들을 둘러놓고 만나는 게 무슨 독대인가.”
이 저주받을 몸뚱이는 끊임없이 피를 갈구한다. 아, 그래. 소렐 이드리스의 피는 얼마나 달콤할까. 두고두고 맛을 보며 환희에 떨 만큼 진미가 따로 없겠지.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그는 인간이었다. 인간이었다가, 순혈 뱀파이어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제대로 된 방법’으로 뱀파이어가 되었다. 그렇다 해서 인간의 모습과 감정을 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과정에 그의 의사는 전혀 없었을 뿐더러, 피를 갈구하는 것 외에 뱀파이어가 인간과 다른 점은 없었다. 똑같이 냉혹했고, 똑같이 이기적이었으며, 똑같이 욕심 사나웠다.
“사실이지.”
인간의 감정으로 애정을 품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였단 말인가. 하긴 인간을 버리고 뱀파이어가 된 자와, 인간과 토끼의 피가 섞여 인간에 가까운 자는 달랐다. 그녀는 따뜻하고 그는 차갑다.
“새삼스러우십니다.”
“그러게, 새삼스럽네.”
새삼스럽게 소렐 이드리스의 눈에도 그는 뱀파이어라는 냉혹한 사실이 느껴져서. * 소렐은 조금 울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라이킨에게 미안해서 울었다. 조금 울고, 다시 다부지게 마음을 먹었다. 실례했다면 사과해야 했다. 라이킨을 만나면 꼭 미안하다고 정중하게 사과하자. 하지만 라이킨은 그날 들어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볼 수 없었다. 소렐이 그를 본 건 사흘 후였다. *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렐은 많이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언제나 그는 늦게라도 집에 돌아왔고, 항상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 확인하고, 웃는 낯으로 말을 걸었다. 그런데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놓고 사흘이라니? 아무리 모른다 해도 소렐은 알 수 있었다. 그건 그녀를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돌아와서 그녀를 찾지도 않았다. 꼭 찾아야만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없던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토끼는 용감했다.
“저기, 라이킨, 바빠요?”
먼저 그가 도사리고 있는 서재 문을 두드리고, 기어이 빼꼼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잘못을 했으면 어쨌든 먼저 사과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싫고 불쾌했다면, 무조건 미안하다고 해야 했다. 그게 그녀가 배운 방식이었다.
“……예.”
그러나 라이킨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얼굴만 봐도 심장이 욱신거렸다. 저도 모르게 전혀 바쁘지 않다고 말하려는 혀를 겨우 움직여 바쁘다, 정확하게 잘라 말했다.
“많이 바쁩니다.”
그러나 이미 눈은 정신없이 작은 토끼를, 그의 아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병이 깊다. 동시에 소렐은 그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내서, 두려움마저 선사했다. 저 눈에 비친 남자가 뱀파이어인가, 아니면 남편인가. 자신이 없었다. 그녀에겐 여전히 뱀파이어가 우선일까? 피라는 단어는 그들 사이에서 없었으면 하는 단어인데 말이다.
“그럼 얼른 말하고 갈게요.”
그는 결국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도무지 소렐을 이길 수 없었다.
“예, 그러십시오.”
라이킨은 언제나 소렐에게 지게 되어 있었다. 그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겐 물렀다. 그래서 사흘 내내 더 안 보려고 노력했다. 일단 눈에 들어오면 그는 급속도로 허물어졌다. 저 작고 귀여운 공주님에게 어떻게 화를 내고, 날 뱀파이어로만 봤냐고 묻는단 말인가.
“……화나게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치솟았다. 함께 지내는 순간 동안 그녀는 흡혈당할 걱정을 했었나? 라이킨 혼자서 단꿈에 젖어 있었단 건가? 분명히 그녀도 같은 마음이었다. 저 작은 아가씨의 마음이 그의 손바닥 위에 훤히 들여다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내가 너무 무례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그 마음을 먼저 말하기 전에 소렐은 흡혈부터 꺼냈다. 그가 혼자 흥분하여 달려든 게 피에 미쳤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는 것처럼.
“함부로 말해서 미안해요. 상처 줄 생각은 정말 없었어요. 나쁜 의미로 말한 게 결코 아니에요.”
아니, 당신은 모른다. 뭘 잘못했는지 아직까지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더 조심할게요.”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가 어렵게 사과했다면, 그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벅찬 감정의 격차야 시작할 때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거고, 원망을 하려면 그에게 지워낼 수 없는 예언을 남긴 메리 헬레인을 원망해야 했다. 우리 딸은 당신 인생의 가장 밝은 빛이 될 거예요. 라이킨은 가장 밝은 빛을 향해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소렐은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그는 괜찮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일부러 오신 겁니까.”
사흘이나 집을 비우고 얼굴도 안 봤으면서 ‘그것 때문에’라니?
“저는 괜찮습니다, 공주님.”
그러니 더 말하지 말라는 건가. 칼리에르 공은 상처를 억누르고 웃는 것이 최선이며, 더 가까이 갈 수가 없어 물러났지만 칼리에르 공비에겐 그것이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선을 긋는 것으로 느껴졌다.
“정말 괜찮아요.”
그녀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어쩐지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내일 밤에 저와 함께 왕궁에 가셔야겠습니다. 국왕 즉위 12주년 무도회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에벌린에게 말해두었으니 준비는 다 되어있을 겁니다. 샤를렌도 올 거고요.”
그의 눈이 차다. 누구보다 더 따뜻한 눈길을 받았던 소렐은 아주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네.”
“죄송하지만 제가 바빠서 그런데…….”
이제 좀 사라져줄래?
“네. 방해해서 미안해요.”
소렐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재에서 걸어 나갔다. 그녀는 입술을 꽉꽉 깨물며 계단을 올라갔다. 오르고, 또 올라가고, 더 올라가서 침실 문을 탁 닫았다. 그러곤 침대로 달려가 이불을 둘러썼다. 소리가 절대로 나면 안 된다.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소렐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녀는 해선 안 되는 잘못을 했고, 라이킨은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렇게 하든가.’
아니, 다정한 그를 원망해선 안 된다. 그녀가 잘못한 거다. 그렇게 싫어할 줄 몰랐다. 사과를 받아주었으나,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걸까? 그녀에겐 이제 라이킨밖에 없는데 말이다.
‘아냐, 아직 화가 다 안 풀렸으니까, 화가 풀리면 그래도…….’
그녀는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까만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다음 날에도 라이킨은 내내 바빴고, 얼굴을 볼 새도 없었다. 나흘 째 식사를 같이하지 않았다. 뭐, 상관없었다. 소렐도 갑작스러운 무도회 준비에 하루 종일 바빴으니까.
“어떤 티아라를 하시겠어요?”
무슨 상관인가. 소렐은 대충 보고, 대충 어울리는 물건으로 골랐다.
“우리 공주님, 왜 이렇게 축 처지셨어요?”
그녀의 기분이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는 걸 잘 아는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그녀를 마치 엄마처럼 꼭 안고 얼러주었다.
“가서 재미난 거 보고 재미있게 노세요. 샤를렌 아가씨도 오신다니 좋겠네요.”
“네, 그러게요. 좋아요.”
하지만 지금은 샤를렌을 볼 낯도 없었다. 그렇게 뱀파이어에게 큰 실례를 저지른 거라면, 샤를렌 역시 그녀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라이킨에게 다시 사과해야 하나?
“아유, 우리 공주님 예쁘기도 하셔라.”
혹시라도 그가 그녀를 보고 예쁘다고 웃어주지 않을까, 소렐은 조금 기대했다. 하지만 현관 앞에서 만난 라이킨은 그녀를 보고 형식적으로 웃었다.
“……잘 어울리네요, 오늘. 멋있어요.”
방싯방싯 웃기라도 하면 화가 풀릴까, 소렐은 최선을 다해 칭찬도 해봤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러나 흐리게 웃는 그 얼굴에 명치가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가실까요?”
끝인가. 끝인가 보다. 같은 마차에 앉아 왕궁으로 가는 이 길이 이토록 긴지 이렇게 알았다. 저번 왕실무도회 때는 마냥 즐겁고 새로운 길이었는데, 이토록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길이었나. 소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라이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앉아 있는 자리가 불편하다. 티아라가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공기가 탁하다. 어지러웠다.
“어서 오십시오, 칼리에르 공작전하, 공비전하.”
어깨를 끔찍하게 짓누르던 침묵이 일순간 깨졌다. 소렐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공주님.”
라이킨이 그녀를 불렀다. 쳐다보니 그가 이미 내려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내리세요.”
그래도 내려주기는 하는구나. 그런데 저번처럼 안아서 내려주는 게 아니라 손만 내미네? 차이점을 계속해서 인식하는 순간 속이 부대꼈다.
“칼리에르 공작부처이십니다!”
외치는 시종의 소리.
“폐하, 즉위 12주년을 경하드립니다.”
점잖게 말을 건네는 ‘남편’의 목소리. 모든 게 순식간에 휙휙 지나갔다. 아니, 그녀가 넋을 놓고 있었다.
“공주님,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샤를렌이 같이 있을 겁니다.”
“공주님, 저 왔어요.”
소렐은 멍하니 샤를렌을 올려다보았다. 라이킨은 이미 그녀의 곁에 없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본 반가운 얼굴은 라이킨과 똑같다.
“공주님, 얼굴이 왜 이래요?”
기겁을 한 샤를렌이 낮게 속삭여 물었지만, 소렐은 어쩐지 무서웠다. 솔직하게 말했다간, 샤를렌도 그녀를 경멸할까 봐 무서웠다. 소렐에겐 이 남매가 너무나 소중했다. 이제야 절절히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