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해제 (5)2021.03.10.
‘엉망이군.’
루벤 실베스터는 관리되지 않은 저택을 보며 생각했다. 늘 상주하는 뱀파이어들이 알아서 깨끗하게 만들어놨을 텐데 말이다. 이 저택은 요 며칠간은 영 관리가 안 된 티가 났다. 그런 걸 알아차리는 건 루벤이 뼛속까지 귀족이어서가 아니라, 그런 걸 빠르게 눈치채야 하는 방계혈족, 작위가 없는 평민이기 때문이다. 작위는 없는데 돈은 있다. 아니, 많다. 그래서 빈틈이 더 잘 보인다.
“사람을 불러놓고.”
그는 인상을 썼다.
“알아서 문 열고 들어오라는 건 어느 나라 예의야?”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여느 귀족들이 그렇듯, 에설론 백작이 아주 우아하게 앉아 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다. 그래, 겉보기에는 말이다.
“사용인들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번에 다 갈아치웠어. 그런 건 좀 그러려니 해.”
“어쩌다 깨어나서 깨어나자마자 집 관리 잘하던 사람들을 이렇게 싹 갈아치워?”
“마음에 안 들었다니까.”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 에설론 백작이 중얼거렸다.
“백 년 넘게 처박혀서 자고 있었으면 성질 좀 죽여서 나올 것이지.”
“너야말로 가서 좀 자. 말버릇하고는.”
고고한 척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루벤은 루드밀라, 그의 사촌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그는 방계고 저 여자는 직계다. 그리고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저 여자는 그걸 언제나 상기시키며 선을 그었다. 아, 물론 그런 건 알 바 아니었다.
“백 년간 넌 뭐했니? 여전히 그 꼴이니? 뭐라도 좀 배울 것이지.”
보통 사람은 자신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상대방에게서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혹은 그거 말고는 무기가 없어서 그러거나. 루드밀라의 경우는 후자였다. 그녀는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후자. 칼리에르 공의 며느리 자리를 바라보기라도 할 수 있었던 게, 혈통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스스로도 아는 거다.
“왜 불렀어? 아니, 왜 일어났어?”
“저거 말버릇 좀 봐.”
“비슷하게 살아놓고 노친네같은 말투 구사하지 말고. 넌 좀 더 가서 자라, 진짜.”
오래된 곳에서 먹을 거라곤 술밖에 없지. 루벤은 멀쩡한 진열장을 훑어보았다.
‘……구미가 안 당기네.’
그는 그래도 진열장을 열고 술을 꺼냈다. 맨정신으로 있을 수는 없었다. 과연 취하느냐가 문제지만.
“마실 거지?”
“여기가 네 집이야?”
루드밀라는 함부로 왜 여냐는 표정이었지만, 루벤은 싹 무시했다.
“누가 꺼내주지 않으면 먹지도 않을 거 뭐하러 묵혀? 내가 꺼내줄 테니 마셔. 네가 깨어난 게 달갑지는 않지만, 그래도 백 년 하고도 오십 년인가.”
“육십팔 년이야.”
“아.”
루벤은 무척 성의 없이 대꾸했다.
“어쨌든 오랜만에 깨어났으니 축하주는 마셔야지.”
“네가 내 얼굴을 보고 술맛이 나겠어? 별일이네.”
루벤은 루드밀라를 힐끗 보았다.
“나 피가 천박해서 비위 좋잖아.”
그는 심술궂게 웃었다.
* 글래스턴 추기경은 완전히 죽었다. 생물학적으로 죽은 건 유감스럽게도 아니지만, 당분간 사교계에서 입도 뻥긋하지 못 할 정도로 팍 죽었다. 그건 전적으로 라이킨의 공이 아니라, 소렐 이드리스의 존재 때문이었다.
“우리 공주님, 기특하기도 하시지.”
길게 늘여 말하는 칭찬에 소렐이 고개를 들었다.
“왜요? 나 뭐 잘했어요?”
“예. 늘, 뭐든 잘하시지요.”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럼 그런가 보다. 소렐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정치학을 다룬 책에 열중했다. 그녀의 곁에는 그리다 만 풍경화가 붓과 함께 널려 있었고, 피아노 뚜껑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이러다가 또 펜싱을 하자며 뛰어나가겠지. 소렐은 무엇이든 배울 수 있었고, 라이킨도 거기에 감히 제한을 두지 않았다. 소렐 이드리스는 헬레인의 공주이자 고대마법의 계승자다. 마땅히 제왕학을 배웠어야 했다.
“이젠 기사가 나지 않아요?”
게다가 그녀는, 그가 얼버무리는 것도 바로 알아들었다. 뭐 때문에 눈치를 챈 걸까. 알 수가 없어서 잠시 침묵하던 라이킨은 소렐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예, 나지 않습니다.”
소렐의 태생이 도대체 뭐냐고 열심히 부풀려가며 기사를 쓰게 하던 추기경은, 그리고 엘펜하임은 너무 교만하고 자신에 차 있었다. 그들은 완벽하게 헬레인 왕조를 멸망시켰으며, 살아남은 후예는 절대로 태생을 증명할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완벽하게 모든 걸 갈취했다고 믿었다.
‘병신들.’
라이킨은 공주님 앞에서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욕설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병신들이다. 펠릭스 이드리스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아니면 자신의 몸마저 제물로 사용하여 예언을 하고 죽은 레너드 3세는? 그가 아무리 패전국의 국왕이라 해도, 예언을 하는 헬레인 토끼였는데 설마 딸의 장래까지 지키지 못했을까?
‘헬레인의 재산이 전부 자신들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지.’
하긴 백오십 여년이 지나, 티아라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게다가 가지고 있던 금화들마저 가짜인데. 라이킨은 마지막 금화 한 닢까지 모조리 박박 긁어가지고 와서 글래스턴 은행장의 금고를 요구한 메리 헬레인을 떠올렸다. 글래스턴 은행은 앞으로도 그녀보다 더 귀중한 고객은 만나지 못할 거다. 대를 이으면서까지 은행을 이용해주시다니, 이런 황공할 데가 있나. *
“사실 마시고는 싶었어.”
어느 정도 술을 마시고 난 다음에야 루드밀라가 고백했다. 술을 먹을 기분이었다는 거다. 이유가 뭐겠는가.
“너 봤구나.”
루벤은 픽 웃었다. 순식간에 루드밀라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누구나 다 깨어나면 신문부터 펼치지 않아?”
“난 안 그래.”
“그래, 넌 그렇겠지.”
루드밀라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고정하세요, 백작님. 그럴 거면 더 버텨보지 왜 자러 들어갔어? 일찍 깨기라도 하든가. 백육십팔 년씩이나 잤으니 이 꼴이 나지.”
루벤은 담백하게 고귀한 피를 타고 나신 사촌을 비웃었다.
“아니, 너넨 원래 끝났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냥 네가 파혼당한 거야. 그러니까 칼리에르가 결혼을 했다 해도 너랑은 상관없는 거지.”
“그 자리는 내 거야!”
이런 미친년. 루벤은 비어 있는 루드밀라의 잔을 채워주었다. 아, 그래. 얘는 원래부터 미친년이었다. 그러니 전대 칼리에르 공이 그렇게 예뻐했지.
“그걸 누가 약속해줬냐? 전대 칼리에르 공이? 꿈 깨라, 그 사람 죽었어. 지금 칼리에르 공은 그 사람이 아니라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고.”
그 남자는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이 온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사람이다. 이미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존재니까.
“그 남자는 아무도 못 건드려.”
루벤은 도대체 왜 그의 친애하지 않는 사촌이 파혼을 당한 후에 잠들었으면서도 아직까지도 칼리에르 공에게 집착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백 년이 지나도 이백 년이 지나도 그 남자는 내 거야.”
“아, 그거였냐.”
뭐가 어쨌든 정해졌으니까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절대적이고 멍청한 믿음. 저 정도면 광신도다. 루벤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한참 자면 좀……, 화가 식었을 거라고……, 좀 누그러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얘 또 세상일을 전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정해놓네.”
루드밀라에게 세상은 정해진 거였다. 뱀파이어 우선으로, 그것도 순혈 위주로만 정해진, 편리한 세상이었다. 대단히 귀족적이고, 대단히 꽉 막힌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니까 저 꼴이 났지.’
루벤은 루드밀라를 힐끗 쳐다보았다. 인간들은 빨리 죽는 만큼,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은 빠르게 바뀌었다. 루드밀라가 잠들고 나서 또 세상은 한참 바뀌었는데 아직까지도 저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니. 저래서 1대 칼리에르 공이 쟤를 며느리로 점찍었나 보다.
“따지고 보면 네 약혼 때문에 그 사달이 난 거잖아.”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
“보태긴 했지. 제임스 칼리에르가 폭발하는데 일정 부분 공로가 있잖아.”
“아니야.”
“아니긴.”
루벤은 더는 말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술잔을 쥐고 있던 루드밀라가 잠시 고민하다 루벤에게 물었다.
“……정말 제임스가 칼리에르 공을 죽였을까?”
“그렇다는 소문만 떠돌고 있지. 누가 알겠어? 멀쩡하고 강력하던 뱀파이어가 갑자기 죽었는데, 이런저런 소문이 떠도는 건 당연한 거지.”
루벤은 칼리에르 공의 장례식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일이 분명히 있는 거고.”
집어 든 병의 무게가 지나치게 가볍다. 아, 벌써 다 마셨나.
“누가 봐도 그건 살해지. 그 집에서 살인 날 줄 모두가 다 알고 있었잖아.”
“무슨 소리야, 살인이 왜 나? 칼리에르 공은 무척 좋은 분이셨어.”
루벤은 일어나서 진열장을 향해 걸어가다가 픽 웃었다.
“그러니까 네가 파혼당한 거야.”
루드밀라의 예쁜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람들은 저 표정을 보면 당장 피했지만, 루벤은 피하지 않았다. 그도 루드밀라가 잠든 사이 더 성장했다.
“다시 해볼 생각이라면, 적어도 과거에는 문제가 뭐였는지 알아보고 고치는 게 좋지 않겠어?”
“너 늘 건방졌는데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할 말이 없으니 또 저 논리로 흘러간다. 루벤은 그냥 상냥하게 웃었다.
“그랬어?”
뭐 언제는 안 그랬다고.
“그건 내가 제임스랑 알아서 할 일이고.”
에설론 백작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일단 그 계집애부터 치워야겠어.”
아, 그래. 그럴 줄 알았다.
“걔 칼리에르 공에게 ‘라이킨’이라고 부르더라.”
그러니까 실컷 놀려줘야지. 루벤은 순식간에 무섭게 일그러지는 루드밀라를 보며 친절하게 말해줬다.
“넌 제임스라고 부르는 것도 허락 못 받았다면서. 특이하더라고. 냉큼 라이킨이라고 부르는데 그걸 또 다 대답을 해줘.”
그는 새 술을 땄다.
“게다가 공주님이야, 공주님. 왕실이 다 인정하는 공주님.”
백작보다는 훨씬 높고, 귀족과 비교도 되지 않는 왕족. 그러니까 에설론 백작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단한 공주님이다.
“이미 쫄딱 망했던데 공주는 무슨. 게다가 펠릭스 이드리스의 딸이라며. 왕족이 왕족과 결혼한 것도 아니면 격 떨어지는 거야.”
“그럼 그 상황에서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와 결혼했으면 더 격이 떨어지는 거겠네?”
그러자 루드밀라는 루벤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바로 손을 들고 달려들지는 않는 걸 보니, 분명히 그에게 바라는 게 있는 거다. 루벤은 상냥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뭐하러 그런 말을 하면서 깎아내리겠어? 아무리 펠릭스 이드리스가 왕족이 아니라 해도, ‘대’마법사인데. 모두가 그 공주님을 주목하고 있다고. 헬레인의 공주는, 끝까지 헬레인 공주니까.”
‘헬레인’은 다르니까. 신비한 토끼들의 나라, 왕족이 귀족, 혹은 평민과 결혼해도 귀천상혼이 되지 않고 그대로 왕족으로 편입되는 관대한 나라. 그러면서도 위엄과 인심은 한 번도 잃어본 적이 없는 나라. 용맹한 토끼들이 지켜온 나라의 멸망은 어쩐지 슬프고도 아름다워서 여태까지 상관도 없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어쨌든 상황이 이래.”
“그럼 뭘 해, 마법은 아주 잘 쓰는 것도 아니라면서.”
“아, 그래?”
남들은 잘 모르는 걸 이제 갓 깨어난 뱀파이어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루벤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 그러니까 걔는 치워낼 거야.”
“칼리에르 공을 상대해야 할 텐데?”
“아니지. 걔 하나만 상대하는 거지.”
루드밀라는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 안 통했다. 흔히들 말한다. ‘곱게 자라 그렇다’고. 그러나 여러 곱게 자란 이들을 본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루드밀라는 곱게 자라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미치도록 이기적인 것뿐이다. 순혈 뱀파이어인 전대 칼리에르 공이 그렇듯이.
‘전대 칼리에르 공 그 여자가 마음으로 낳았든가, 아니면 어디 가서 진짜로 낳은 딸일 수도 있어. 어떻게 저렇게 똑같지?’
감탄이 나올 정도로 똑같았다. 동시에 그것 때문에 루드밀라는 안 되는 거다. 앨리스 루이즈 칼리에르, 증오해 마지않은 어머니와 똑같은 여자를 어떻게 아내로 맞을까? 어머니가 싫어서 살해했는데, 루드밀라는 자신이 살해당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나?
“그러니까 네가 날 좀 도와. 너 글래스턴에 있지?”
“대학에 다니고 있지.”
“내가 칼리에르 공비가 되면 방계에도 두루두루 좋은 일이야.”
‘웃기고 있네. 직계가 언제 방계를 챙겼다고.’
루벤은 생각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 그러니까 네가 도와야 해. 나는 지금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도움이 필요해. 일단 사용인들을 새로 고용해야 해.”
“어떤 사람으로?”
“인간도 좋고……. 예의를 알고 숙련된……. 네가 적당히 알아서 해놔.”
인간이라. 여기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흡혈당해서 죽어도 상관없을 인간 말이지.
“알았어. 또?”
“종종 들러.”
루벤은 명함을 꺼내서 쓱 밀었다.
“나도 바빠. 급한 건 그쪽으로 연락하고, 고용인은 내일까지 바로 준비시킬게. 너도 고용인이 생기면 그쪽 통해서 연락하는 게 더 편하잖아?”
루드밀라는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뭐……, 그건 그렇지.”
“그래. 오늘은 혼자 있을 수 있겠어? 바로 사람 보내줄까?”
“아, 오늘은 괜찮아.”
“그래? 알았어.”
루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다시 만나게 되어서 기쁘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응. 나도 그래.”
그건 루드밀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루벤은 에설론 백작의 저택을 천천히, 아주 자연스럽게 떠났다. 아무도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그런 뒤 한참 멀어지고 나서야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성기사들이 아주 득실대는군. 냄새가 고약해.”
루드밀라가 엘펜하임에게 잡혀버렸다. 그 멍청한 여자나, 엘펜하임은 자신들의 흔적을 최대한 지울 수 있다고 믿었겠지만 루벤 실베스터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갑자기 깨어났을 리가 없지. 엘펜하임이 작정하고 사냥한 것이다. 필요한 게 있으니 죽이지는 않았고, 금제를 걸어 옴짝달싹못하게 만들었겠지. 루벤의 이마가 사납게 찌푸려졌다. 뱀파이어 하나가 지금 엘펜하임 손에 들어갔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꽤 강력한 뱀파이어고, 그 와중에도 소렐 이드리스를 치울 생각을 하다니 보통 돈 게 아닌 뱀파이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