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해제 (4)2021.03.06.
오, 경! 저는 당신만의 것이에요!
“우와…….”
소렐은 열심히 읽던 통속소설을 일단 덮었다. 대단하다. 엔버네스에서 요즘 최신 유행하는 소설이라던데 이렇게 강렬하구나. 어떻게 거리낌 없이 이렇게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멋있어…….”
너무 멋있는 주인공이니까, 아껴가며 읽어야지. 그녀는 소설을 가지런하게 정리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이킨은 뭘 하고 있지? 오늘 함께 소풍을 나가기로 했는데. 소렐이 방 밖으로 나가는데, 뜻밖에도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공주님, 이리 오세요.”
“무슨 일 있어요?”
“잠깐 손님이 오셔서 제임스 교수님이 바빠요. 저와 산책을 하는 게 어떨까요? 이 공작저가 얼마나 넓은지, 보지 못한 게 분명히 많을 거예요.”
소렐은 고개를 갸우뚱거린 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에벌린을 따라갔다. 그녀는 공작의 서재에서 무슨 소리가 오고 가는지, 또 어떤 손님이 왔는지 전혀 몰랐다.
* 초대하지도 않은 객이 무작정 찾아왔다. 실로 불쾌했다. 오랜만에 보는 것이지만 딱히 반갑지도 않았다. 라이킨은 ‘빨리 꺼지라’는 눈빛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맞은편에 앉은 손님을 쳐다보았다. 아서 모드릭 헴피온, 슈토넨 후작은 뻔뻔하게 물었다.
“차도 안 주나?”
소렐이 가까이 왔다면 아마 이 순혈 뱀파이어의 기세에 놀라 또 마법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라이킨은 에벌린이 소렐을 꽉 붙잡아 놓을 거란 사실에 무척 안심했다. 고대마법의 계승자가 그의 아내라는 말에 온갖 벌레들이 다 기어들 건 생각했지만, 실제로 목격하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당신 입에 들어갈 건 없어.”
지금 내 입에 담배 물기도 바쁜데. 어딜. 라이킨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시가를 물었다. 소렐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야지. 일단 나갈 생각만 하고 버텨보자. 슈토넨 후작, 이 고약한 뱀파이어는 라이킨보다 세 배는 더 살았지만, 그의 입에서는 험한 말밖에 나가지 않았다.
“성질머리는 어머니를 닮았군. 자네 어머니가 더 상식적인 사람이긴 했는데 말이야.”
“피도 섞이지 않았는데 닮긴.”
라이킨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조용히 대꾸했다.
“그래도 닮았어. 교육도 딱 본인처럼 했고.”
그 교육이란 것 때문에 열 살에 전쟁터에서 피를 뒤집어썼던 뱀파이어는 더 이상 대꾸도 하지 않았다. 멱살을 잡아 내쫓지는 못할 정도의 작위와 머리를 갖춘 상대란 게 심히 유감이었다. 성질 같아서는 벌써 재떨이를 집어 던지고도 남았지만, 아서 모드릭 헴피온은 그랬다간 더 집요하게 그를 괴롭힐 상대였다. 아니, 그가 아닌 소렐을 괴롭힐 거다. 집착 심한 노인네 같으니. 손주들 재롱이나 보고 앉아 있을 것이지. 하긴, 재롱 피울 손주도 없지.
“나도 뭐, 싫어하는 사람 붙잡고 오래 말할 정도로 한가한 몸은 아니니 본론부터 말하지.”
“당신이 오늘 한 생각 중에 가장 똑똑한 생각이군.”
그러나 라이킨은 빈정거리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는 빼고, 펠릭스 이드리스는 뱀파이어에게 결코 우호적인 마법사가 아니었네.”
“펠릭스의 눈에 한참 모자랐나 보군. 나에겐 굉장히 우호적인 마법사였는데.”
“고대마법사들에 대한 뱀파이어의 결속을 말하는 거야.”
“아, 그 쓸데없는 거.”
칼리에르 공의 이름을 이은 남자는 비릿하게 웃었다.
“아직도 안 죽고 살아 있었나?”
“전통을 우습게 보지 말게. 그 힘으로 자네 어머니도 살아남았으니까.”
“그거 유감인데.”
진심으로 유감이었다. 그 여자가 그가 모르는 사이에 고대마법으로 죽었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의 맞은편에 앉은 슈토넨 후작은 그를 한 번 노려본 뒤, 계속 말을 이었다.
“……고대마법이 다시 나타났으니, 협정서에 서명하게.”
“그깟 종이 쪼가리에 정말로 의미를 부여하는 건가?”
“그깟 종이 쪼가리가 아니라 뱀파이어의 피로 서명한 약속이야!”
“그래봤자 태우면 사라질걸 뭘 그렇게 애써서 만드는 건지 알 수가 없군.”
라이킨은 아직까지도 천년 전 이야기를 해대는 고리타분한 뱀파이어를 상대하자니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에 한숨을 쉬었다. 아무런 효력도 없고, 그저 약속이나 하고 서명이나 하는 종이 쪼가리였다. 차라리 그가 소유하고 있는 글래스턴 은행의 채권이 훨씬 더 쓸모가 있고, 신용도가 높겠다.
“칼리에르 공, 이게 지금 장난 같아 보이나? 고대마법사에게 칼리에르 공비 자리까지 주다니, 자네 어머니가 봤으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
“그건 그렇겠지.”
그의 어머니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라이킨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 다행이야.”
그 말에 상대가 발끈하려 했지만, 그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변경백.”
이젠 변경백이라는 작위보다는 후작위로 더 많이 불리는 이에게, 굳이 옛 작위 이름을 들먹인 건 상대가 그만큼 고리타분한 위인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우리 ‘가족’은 ‘그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라이킨은 자신의 어머니를 ‘그 여자’라고 부른다는 걸 결코 소렐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사랑받고 자란 그녀가 알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딱히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서늘한 목소리는 급하지도, 또 너무 느리지도 않았다. 상대방이 끼어들 수 없을 만큼만 말할 뿐이었다. 라이킨은 기존의 뱀파이어들, 수천 년을 묵어가며 수천 년 전의 사고방식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이들의 질서에 염증을 느꼈다.
“그 협정서 말인데. 정말 효력이 있는 건 맞아? 그 여자가 죽을 때 당신들은 가만히 있었잖아. 그런 걸 보면 참 우리들의 결속력은 형편없어.”
뱀파이어들은 철저히 이기적이고, 철저히 개인주의자들이었다. 다른 집안에서 칼부림이 일어나도 자신의 일이 아니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래서 협정서를 만들었지. 우리를 몰살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에는 대항을 해야 할 거 아닌가!”
“그래서? 고대마법사가 뱀파이어에게 위협이 되면, 다 같이 모여서 사이좋게 고대마법사를 죽이자고?”
라이킨은 협정서를 비웃었다.
“그 여자가 만든 것 중에 가장 멍청한 종이 쪼가리야. 고대마법사를 어떻게 죽이겠다는 거지? 뱀파이어들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성장한 고대마법사라면, 아무도 죽이지 못해.”
“자네도 저번에는 서명했잖은가!”
처음 그가 칼리에르 공이 되었을 때, 그래, 분명히 서명했었다. 라이킨은 여전히 웃었다.
“펠릭스 이드리스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없었으니까. 그 친구도 내가 그 웃기는 쪼가리에 서명했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는 재떨이를 던지고 싶은 욕망을 참아가며 얌전히 담뱃재만 털었다.
“고대마법이란 참 대단하지.”
“협정서에 누가 서명했는지도 알아냈단 말인가?”
“아니, 그냥 내가 말해줬는데.”
라이킨은 심술궂게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미쳤군.”
“미치긴. 펠릭스가 협정서의 존재를 알았다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그런 논리라면 저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협정서에 서명하는 게 맞겠군.”
“그때와 지금은 다르지.”
안 그래도 서늘하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현재 글래스턴 공작은 나야. 막 계승해서 정신이 없던 그때와 지금이 같나?”
“자네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재수 없었어.”
“칭찬으로 듣지. 내 공비를 죽이겠다는 서약 따위 안 해.”
“당장 죽이자는 게 아니라 혹시 모르니 보험으로……!”
“그딴 건 필요 없어.”
초대하지 않은 손님은 분노했다.
“지금 동족을 배신하겠다는 건가!”
“그러는 자네 손은 얼마나 깨끗하지? 자네 손에 동족의 피가 단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나?”
라이킨은 날카롭게 물었다.
“결국 고대마법이 두려운 거 아닌가. 그러면서도 가지고는 싶고.”
“칼리에르가 고대마법을 동족과 나누겠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결국 본심이 튀어나왔다.
“돌아가.”
칼리에르를 대표하는 이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대마법사는 내 아내야. 이 나이를 먹고 겨우 결혼했는데, 벌써 홀아비가 될 생각은 없어.”
“항간에 네놈이 마누라에게 정신 나갔다는 소문이 돌더니, 그게 사실이었군!”
“사실이야.”
라이킨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객에게 아주 뿌듯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점 하나는 내 아버지를 제대로 닮았지.”
칼리에르 공은 손님을 내쫓을 때 당신은 돌았다는 소리를 들었고, 그게 꽤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저 종자가 찾아오면 오늘처럼 들이지 말고 곧장 내쫓게.”
“예, 죄송합니다, 주인님.”
라이킨은 상당히 더러운 기분으로 돌아섰다. 협정서는 고대마법사가 등장할 때마다 새로 맺어졌다. 내용은 항상 같았다. 고대마법사가 뱀파이어를 위협할 경우, 모든 뱀파이어는 고대마법사를 죽이기로 맹세한다. 뱀파이어는 거의 대가 바뀌지 않았지만, 라이킨처럼 대를 이을 경우 기존에 존재하는 협정서에 새로 가문이나 스스로를 대표해 서명하기도 했다. 협정서에 서명한 뱀파이어들은 손에 꼽힐 정도로 아주 유력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나라와 국경을 초월하여 협정서에 서명했다. 고대마법 앞에서 한 종족으로 뭉친 것이다.
‘개소리.’
인간과는 달리, 도저히 뭉쳐지지 않는 뱀파이어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협정서가 만들어졌다. 실로 그의 어머니나 할 법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죽었다. 앨리스 루이즈 칼리에르는 죽었다.
‘잘 죽었지.’
그 죽음만큼 기쁜 죽음이 없었다. 라이킨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뱀파이어를 제외한 모든 종족을 적대시했던 그녀의 시대는 끝났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고대마법사의 가디언이다. 펠릭스 이드리스가 자신과는 달리 홀로 고대마법을 감당하지 못하는 딸을 위해 안배해둔 유일한 수호기사다. 소렐이 감당해야 할 고대마법을, 그는 강력한 뱀파이어였기에 함께 감당할 수 있었다.
“공주님.”
라이킨은 그래서 지금 그에게 다가오는 그녀와 그를 연결해주는 황금빛 실, 결합점이 더 많아지길 바랐다. 소렐이 마법을 쓸 때마다 그가 함께 마법의 무게를 감당했다는 그 증거가 많아지길 바랐다. 그가 찾아내 부르면 대답하는 대신 얼른 돌아보고, 깡총깡총 달려오는 소렐 이드리스와 더 많이 이어지길 바랐다. 그래야 고대마법은 더 안정될 수 있었다. 그래야 그가 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야 그가 그녀에게 더 묶일 수 있었다.
“라이킨, 라이킨, 손님은 가셨어요?”
“예, 갔습니다. 아주 갔어요.”
“에벌린이 엄청나게 큰 와인 창고랑, 뒤에 있는 정원에 그네가 있는 것도 보여줬어요!”
“아, 그네가 있었습니까?”
소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몰랐어요? 줄 새로 바꿨다고 하던데.”
하도 부동산이 많고, 공작저는 넓고 광활한 데다 라이킨이 딱히 즐겨 찾는 장소가 아니어서 몰랐다는 말은 일단 집어넣은 그는 걸음을 옮겼다.
“그럼 가서 타시지요. 밀어드리겠습니다.”
“가는 데만 또 한참인데요?”
“다리가 피곤하시면 제가 안아드리겠습니다. 이리 오세요.”
고대마법을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나 약한 공주님에게 그가 손을 내밀었다. 소렐은 더 강해질 필요도 없었다. 날 때부터 홀로 고대마법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라이킨이 있었다. 더 강해져서 뭘 하려고. 그는 그녀를 간단하게 안아 들었다. 당신은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야지, 공주님.
“괜찮은데……!”
“이미 안았네요. 그냥 가도록 하겠습니다.”
“라이킨이 너무 빨랐어요!”
“예, 언제나 그렇지요.”
또 그래야만 하고. 라이킨은 아주 즐겁게 소렐을 안고 걸어갔다. 따뜻하고 작은 체구가 품 안에 쏙 들어왔다.
“내, 내려주세요.”
“싫습니다. 팔은 제 목에 두르시고, 가시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명령만 하십시오.”
싫다니! 토끼는 깜짝 놀라서 뱀파이어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지금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중이긴 했다. 하지만 싫다니! 내려놓는 게 왜 싫은 건데? 라이킨이 그녀의 말에 싫다고 말한 건 처음이었다!
“어서요, 공주님.”
“왜, 왜 날 내려놓는 게 싫어요?”
“계속 이러고 가고 싶어서요. 공주님은 싫으십니까?”
“무거워요!”
라이킨은 걸음을 멈추고 소렐을 쳐다보았다.
“공주님이 무거우신 편이라고요?”
잘못 들었나?
“네!”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군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솜털 보송보송한 토끼가 무거워봤자 얼마나 무겁다고. 그가 보통 인간도 아니고 뱀파이어인 이상 성인 남성도 번쩍번쩍 들 수 있는데, 가벼운 토끼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솜털 보송보송한 토끼’를 상대로 개수작을 부리고 있는 그는 양심이 결여된 게 분명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앞으로도 종종 안아드릴 텐데 그냥 익숙해지십시오.”
손을 어쩌질 못해 꼼지락대는 게 퍽 귀여웠다.
“왜 종종 안……, 안아주시려는 건데요?”
“남편이 아내를 안아드리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가 생각해도 개소리였다.
“자주 안아드려야지요.”
그를 말가니 바라보던 소렐은 가만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도 엄마를 자주 안아줬어요.”
“그렇지요?”
“네.”
그렇구나. 소렐은 꼼질대던 손을 조심스럽게 뻗었다. 라이킨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주었고, 그녀는 그의 목을 어색하게 안았다. 그런 거구나. 가슴이 콩닥거렸다. 가까이 온 라이킨은, 생각보다 이목구비가 무척 섬세했다. 눈도 다정하고, 무척 깊었다.
‘처음 봤을 때는 엄청 무서웠는데.’
하나도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어. 소렐은 배시시 웃었다. 웃으면, 내려다봐주곤 같이 웃어준다. 좋은 사람이다. 좋았다.
“헤헤.”
소렐이 그를 보며 웃었다.
‘……아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공주님, 그렇게 꼭 안으면서 웃으시면 이 양심 없는 뱀파이어는 그네가 아니라 침실로 달려가고 싶어요.
“그네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보통 딸이 있는 집에서는 달아놓지요.”
그래봤자 샤를렌이 그 그네를 타도록 ‘허락’받은 일은 한 번도 없었지만.
“저도 어릴 때 그네 많이 탔어요!”
아무리 시골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자랐다고 해도 펠릭스나 메리가 딸을 그냥 남들처럼 키웠을 리가 없었다. 소렐은 사랑도 듬뿍 받았고, 눈에 띄지 않게 자라느라 많은 걸 해보지는 못했지만 귀하게 자랐다.
“아빠가 밀어주다가, 귀찮으면 마법으로 그냥 밀어줬거든요.”
“아, 마법사는 그런 게 편리하겠군요.”
“엄마한테 자식에게 성의 없이 굴지 말라고 혼났지만요.”
라이킨은 웃었다.
“항상 메리 공주님에겐 맥을 못 췄지요. 늘 졌어요.”
“아빠는 그게 진정한 기사도랬어요. 사실은 늘 엄마 말이 맞았던 것뿐인데.”
위에서 결국 소리 내어 떨어지는 웃음에 소렐은 눈을 크게 뜨고 라이킨을 쳐다보았다. 그는 청량하게 웃었다.
“공주님께서는 맞는 말씀만 하신다는 점에서 어머니를 닮으셨군요.”
소렐의 걸음으로는 한참 가야 하는 곳이, 라이킨의 걸음으로는 금방이었다. 그녀는 그네에 앉혀졌다.
“……참 오래 연애했습니다.”
그가 그네를 밀어주려는 찰나, 소렐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엄마랑 아빠가요?”
“예.”
“그네 밀지 말고 이야기 더 해줘요!”
“그럴까요?”
라이킨은 그녀가 앉은 그네 곁, 잔디 위에 털썩 앉았다. 불청객의 방문은 까맣게 잊을 만큼, 한가한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