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데뷔탕트 (20)2021.02.20.
소렐은 묵직한 드레스에서 나오는 것마저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춤을 신나게 추고 맛있는 걸 잔뜩 먹어서인지, 온몸이 노곤했다. 평소엔 목욕시중이라면 기겁을 했지만, 오늘만큼은 누가 곁에 있어줘야 했다.
“공주님, 공주님?”
얼마나 피곤한지, 그녀는 욕조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기 때문이다. 누가 깨워주고, 그녀를 일으켜주지 않으면 그대로 까무룩 잠들어버릴 뻔했다.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하녀의 말에 소렐은 눈가를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씻고 나니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는 것조차 귀찮아서 대강 마르자마자 얼른 욕실 문 바깥으로 나섰다.
“아직 다 마르지 않았는데요.”
“괜찮아요, 괜찮아.”
소렐은 하품을 길게 하면서도 잽싸게 하녀들의 손을 피해 욕실에서 나왔다. 얼른 침대에 눕고 싶었다.
“공주님.”
그러나 통통 튀어가는 그녀를 누군가가 휙 들어 올렸다.
“머리가 다 마르지 않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묵직하면서도 시원한 체취가 쏟아졌다. 눈앞이 아찔해진 소렐은 잠시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어느새 몸을 씻어낸 라이킨이 잠옷만 입고 있는 그녀를 안고 있었다.
“이런 차림으로 머리를 말리지도 않으시고 다니시면 감기 걸립니다.”
그는 하녀가 내미는 커다란 수건을 대신 받아가면서 걸어갔다.
“왜, 왜 왔어요?”
“왜 오긴요, 재워드린다고 약속드렸으니, 약속을 지키려고 왔지요.”
소렐은 라이킨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보다 한참 커다란 남자는 가운을 입은 채로 싱긋 웃고 있었다.
“혼자 잘 수 있어요……!”
“피곤해서 잠도 잘 안 올 것 같으시다면서요.”
놀리는 건가? 소렐이 입을 뚜하고 내밀려고 할 때, 라이킨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늘은 특별한 날인데, 그냥 잠드는 것도 섭섭하잖습니까.”
그런가? 소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발도 많이 아프셨을 것 같고요.”
“그냥 좀 빨개졌을 뿐이에요.”
온갖 개수작이 하나도 먹히지도 않고, 열심히 튕겨져 나오고 있었다. 다른 남자에게도 이럴 테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남편에게도 이러는 걸 보면 갈 길이 멀어서 까마득하다고 해야 할까.
“……라이킨은 안 힘들어요?”
“제가 힘들 게 뭐가 있습니까?”
“아니……, 나 안고 가는 거요.”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공주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좀 더 자주 안아드리고 싶군요.”
라이킨은 그녀의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지나치게 유능한 탓에, 소렐이 엉망으로 만들었던 그녀의 침대는 하루 만에 원상복구가 되었다. 조금만 덜 유능하면 안 되나. 그는 소렐을 침대에 내려놓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감쌌다.
“제가 할 수 있어요…….”
“제가 시중을 드릴 수도 있는 일이지요. 제 기쁨인데, 이것마저 빼앗아 가실 겁니까?”
소렐은 그제야 주춤거렸다. 긴 머리카락을 말려주는 손길은 아주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가까웠고, 동시에 은밀했기에 소렐은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곤란했다. 여기저기 도로록 눈동자를 돌리던 그녀가 침대 머리맡에 놓인 꽃을 발견했다.
“어…….”
라이킨이 선물한 장미꽃 옆에, 또 장미꽃 바구니가 커다랗게 놓여 있었다. 소렐은 꽃 사이에 놓인 카드를 쑥 빼서 읽었다. 공주님에게. 데뷔를 축하해요. 오늘이 영원히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길 바라며. 힘 있고 유려한 필체로 로렌스 오블리앙 공이 직접 쓴 카드였다. 라이킨은 소렐이 배시시 웃으며 꽃향기를 맡는 것을 바라보았다. 뽀얀 코가 달싹이며 향기를 깊게 들이마신다. 그런 뒤 바구니 옆에 있는 푸른 봉투로 손을 뻗었다.
“이건 뭐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봉투를 열었다. 제법 큼직한 봉투 안에는 서류 몇 장이 있었고, 가장 앞에 로렌스가 쓴 작은 메모를 읽었다. 발레시나스에 근사한 별장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도 좋겠지. 꼭 와서 들르라고 일부러 발레시나스로 정했단다. 해안을 끼고 있는 곳이니, 여름에 꼭 들러서 즐겁게 놀렴. 데뷔 축하한단다. 소렐을 눈을 깜빡이며 메모와 뒤에 있는 서류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이게 뭐야……?”
별장의 규모는 무척 컸다. 침실 여덟 개, 욕실 아홉 개, 목장과 정원도 당연히 딸려 있다는 서류에 소렐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 ‘하얀 별장’이군요. 아름다운 곳입니다. 하얗고 아담하지요.”
소렐의 어깨너머로 서류를 힐끗 본 라이킨은 덤덤하게 대답해줬다.
“아담해요? 이 규모가?”
“공주님, 우리 집안은 돈과 현물, 그리고 증여로 애정을 표시합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는 소렐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직접 가봐야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 알죠…….”
갑자기 떡하니 여름별장이 생겨버린 토끼는 적응이 되지 않아 연신 까만 눈만 깜빡거리며 뱀파이어를 바라보았다.
“그럼 올여름에 함께 가면 되겠군요.”
그는 수건을 치워내고 소렐의 발을 부드럽게 쥐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거의 튀어 오를 뻔했다.
“왜, 왜요?”
그녀는 발을 빼려고 했지만 라이킨은 놔주지 않았다.
“지금 손쓰지 않으면 내일 고생하십니다.”
“그, 괜찮……!”
말은 완성되지 못하고 소렐은 끙끙대며 신음을 터트렸다. 서류가 침대 위에 굴러떨어졌다.
‘아, 이러려고 주물러준 건 아닌데.’
라이킨은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에, 소렐이 토끼로 변했을 때 얼마나 작고 귀여웠는지를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지금의 소렐은 쳐다보면 안 된다. 그녀가 아무리 어려도, 이제 갓 성인이 된 숙녀는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또 그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본능을 자극해 죄책감마저 뒤엎을 만큼 매력적이었으니까.
‘……사심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아주 순수한 의도로 이 침실에 들어온 건 아니다. 공주님이 다 크길 마냥 기다리다간 그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파렴치하고, 양심과 인내심이란 조금도 없는 치졸한 사람이었나 보다. 기다려주겠다고, 마치 남편이 아닌 후견인과 같은 마음으로 소렐을 데리고 올 때가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 조급해졌단 말인가. 아니, 조급해지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좀 괜찮으십니까?”
부드럽게 물어보면 눈가가 붉어진 소렐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다.
“네, 훨씬 덜 아파요.”
처음 데리고 올 때부터 예쁘장하니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그는 어떤 존재가 예쁘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옆에 가만 두고 보니 예쁜 것이 예쁜 짓을 하고, 그래서 사랑스러웠다. 게다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이제 막 피어나는 매력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라이킨의 욕망까지 자극했다.
“다행입니다.”
그는 아주 아까운 것을 마지못해 놓듯, 소렐의 부드러운 발에서 손을 뗐다. 생각 같아서는 발과 발목뿐만 아니라 팽팽하게 긴장했을 종아리도 만져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올라가다간 부지불식간에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요즘만큼 스스로를 불신하는 때도 없었다.
“저, 감사해요, 라이킨.”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이렇게, 직접 챙겨주는 것도……, 그리고 항상 저를 존중해주시는 것도, 어……, 그리고 오늘도 너무 즐겁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니, 조금 더 이 짜릿하고 낯선 긴장감을 즐기는 게 좋겠다. 결국 언젠가, 수백 년이 흐르면 싫증이 날 것이다. 이 몸에 주입된 뱀파이어의 피는 모든 부귀영화에 이력이 났고, 사람에게도 쉽게 질렸다. 소렐 이드리스라고 해서 얼마나 가겠는가. 오랜만에 어여쁜 것을 찾았다면, 질리기 전까지는 하나하나 천천히 음미해야지. 그를 인간처럼 느끼게 만들어주는 감각은 어차피 한낱 신기루와 같았다. 유감스럽게도 결코 오래가지 않았다.
‘짐승만도 못한 괴물이지.’
항상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소렐 앞에서는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는 한때 인간이었으나, 인간미는 완전히 잃어버린 손을 뻗어 소렐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니, 사실은 그녀를 꽉 끌어안고, 따뜻하고 달콤한 체취를 한껏 들이켜고 싶었다.
“주무세요, 공주님.”
그저 토끼가 겁을 먹지 않도록 다정하게 웃고, 어서 주무시라고 이불을 들췄다. 이 사랑스러움도 결국엔 얼마나 허망하게 끝날까. 라이킨은 늘 권태롭게 그를 맴돌던 생각을 이번에도 지워버렸다. 마약 같은 즐거움을 처음 만나서, 이게 언제 질릴까 두려워하다니,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답지 않았다. 쓸데없는 두려움 아닌가.
“어서 주무세요. 제가 잠드실 때까지 곁에 있겠습니다.”
꼬물꼬물 이불 속에 들어간 소렐은 결국 바르게 누워서 이불 위로 눈만 쏙 빼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라이킨은 픽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라이킨은 피곤하지 않아요?”
“전혀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코까지 이불을 끌어당기시면 답답하진 않으십니까?”
소렐은 고개를 흔들었다. 라이킨이 말하거나, 그녀에게로 몸을 숙일 때마다 가운만 걸친 상반신이 훤히 다 보였다. 슬쩍 움직이는 빗장뼈, 유려한 쇄골과 단단한 가슴근육까지. 그가 늘 대충 흐트러진 차림으로 다닌다는 건 알았지만, 어째 점점 더 노출하는 부위가 많아지는 것 같다. 그녀는 자꾸만 시선이 가는 그의 가슴팍에서 얼른 시선을 끌어올렸다.
“정말 내가 잠들 때까지 있다가 갈 거예요?”
“그럼요.”
라이킨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퍽 다정하고, 눈빛은 따뜻하기 그지없어서 소렐은 발바닥이 간지러워졌다.
“난 어린애가 아닌데…….”
간지럽다는 걸 들킬까 봐, 일부러 투덜거렸다. 그는 웃었다.
“예, 압니다. 아이 취급을 해드리는 게 아닙니다.”
필사적으로 이불을 꼭 잡고 있던 소렐의 손이 그의 손에 감겨 다시 올라갔다. 라이킨은 허리를 숙여 그 손에 입을 맞추었다. 마디마디, 약간 서늘한 입술이 와 닿았다.
“공주님과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뿐인데……, 불쾌하십니까?”
아무 죄 없는 토끼는 고개를 열심히 흔들었다.
“저도 좋아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도 해줬다. 더 이상 손으로 만족할 수가 없어서, 라이킨은 웃으며 다시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눈 바로 아래, 여린 살에 그의 체취를 묻혔다.
“좋으시다니 기쁩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순식간에 나를 이만큼 차지한 너는 혹시 지루한 권태마저 태워버릴 수 있지 않을까?
“잠이 오시지 않습니까?”
아니, 그럴 리가. 라이킨은 달빛을 등지고 차게 웃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저 한순간의 놀이에 불과한 것을. 백 년, 그래, 백 년이면 사라질 것이다.
“네. 진짜 너무 피곤해서…….”
소렐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불이 그새 살짝 떠서, 라이킨은 좀 더 이불을 내렸다.
“잠이 안…….”
붉은 입술이 오물오물 말했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자, 그는 고운 미간을 다시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 펴주었다.
“……와요…….”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 멈추었다. 라이킨은 잠시 고개를 돌려 손에 이마를 대고 소리 없이 웃었다. 공주님은 토끼 상태로 잘 때나, 지금 원래 모습으로 잘 때나 똑같이 갑작스럽게 잠에 빠졌다. 그는 곧장 떠나지 않고, 한참 동안 소렐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즐거웠다. 소렐 이드리스와 만난 이후로, 라이킨의 일상은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글래스턴 추기경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왕실무도회에 참석하다니, 칼리에르 공이 벌일 리가 없는 짓인데 흔쾌히 저질렀다.
‘……그럼 궁금해하는 걸로 하자.’
이 작은 공주님이 끝내 그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선명하게 남을지, 아니면 기나긴 세월에 풍화되어 사라질지 그냥 잠시 의문을 가져보는 걸로 끝내자. 뱀파이어는 식어버린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 글래스턴 추기경 틸로네 리퀘도는 그의 장기이던 여론전에서 보기 좋게 패했다. 패한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엘펜하임에 치욕을 선사했다. 엘펜하임이 탈취하지 못했던 단 하나의 전리품이 소렐 이드리스의 머리 위에서 높이 빛났기 때문이다. 그닥 신성하지 않은 기사단 본부에 그 소식이 전달되기 전, 새벽에 일어난 엘펜하임의 말단 수도사는 까칠한 얼굴을 문지르며 걸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일찍 일어난 수도사들이며 기사들이 조용히 인사를 나누었다. 헬레인 왕가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그 위에 다시 터를 잡은 엘펜하임 기사단 본부에는 여러 가지 자랑할 만한 전리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수도사들이 뜻밖에도 한곳에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쪽에 들어올 수 있는 이들은 그래도 보안등급이 조금 높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자랑스럽게 전시된 전리품 한 점 앞에서 수군댔다. 수도사는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서 다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왜들 모여 계십니까?”
“저기, 저거 좀 보시오.”
수도사는 발돋움을 하여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눈을 부릅떴다.
“세상에, 저게 뭡니까?”
“헬레인 왕비가 썼다는 티아라 아닙니까.”
“그런데 저게 왜 저렇게…….”
녹았다. 자랑스럽게 걸려 있던 값비싼 티아라가 흉측하게 녹아내렸다. 수도사는 앞으로 뛰어나가서 티아라를 감싸고 있던 유리 상자를 만져보았다. 차갑다. 너무나 차가웠지만, 티아라는 마치 높은 열에 녹은 것처럼 흉물스럽게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 녹은 모습이 실로 괴이했다.
“원래 저건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까? 저건 진주가 아닙니까?”
금으로 얇게 뼈대를 만들고, 진주를 하나씩 매단 티아라가 녹았으나, 그 녹은 모습은 마치 쇠가 녹아들고 싸구려 유리 보석이 진주인 양 깨져 있었다. 마치 그 안에 보관된 티아라는 진짜가 아닌 모조품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물러나시오, 모두 뒤로 물러나시오!”
수도사들은 뒤에서 외치는 소리에 뒤를 한 번 돌아본 뒤 서둘러 물러났다. 화려한 휘장을 단 제복이 펄럭였다. 부기사단장이 직접 납셨다. 부기사단장이지만 몸매가 기사보다는 관리에 가까운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주르륵, 녹아내리고 있는 티아라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싸구려였다. 헬레인의 영화로운 부와 섬세한 솜씨는 온데간데없고, 누군가가 싸구려 모조품을 넣어놓았다. 우르릉! 갑자기 쩡, 하고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무섭게 땅이 울렸다. 수도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붙잡았다. 지진인 것인가? 부기사단장은 고개를 휙 들었다. 그러나 그 울림은 단 한 번이었다.
“따라와라.”
“예, 예?”
부기사단장은 되묻는 기사들을 두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열어라!”
높은 보안등급이 요구되는 안쪽의 문들이 차례차례 열렸다. 그리고 부기사단장은 마침내 그 커다란 소리의 근원 앞에 섰다. 높이 쌓아놓고 또 다져놨던 봉인이 그를 조롱하듯 금이 가고,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쪼개진 거대한 석판 사이로 돌가루가 흘러내렸다. 봉인을 지탱하던 티아라 하나가 녹아내렸기 때문에 봉인에도 영향이 간 것이다.
“제기랄!”
부기사단장은 이를 까드득 갈아붙이며 돌아섰다. 엘펜하임이 필사적으로 묻고, 또 보란 듯이 전리품으로 가리려고 했던 예언이 다시 드러나려 했다. 하하하하하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봉인 위에 메아리쳤고,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사색이 되었다. 호탕하게 웃는 남자의 웃음소리다.
“대……, 대마법사다…….”
누군가가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