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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데뷔탕트 (18) (57/181)

57. 데뷔탕트 (18)2021.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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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뷔탕트의 첫 춤이 의미 있는 것이지, 그다음 춤은 누구와 추든 상관은 없었다. 아버지와 춤을 추는 영애도 있었고, 어머니와 춤을 추는 신사도 있었다. 그저 구설수에 오르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또래나 아는 지인과 춤을 춰가면서 결혼 상대를 찾아가는 것뿐이다. 그런 시대였다.

16606118060337.jpg“저요?”

그래서 소렐 이드리스, 칼리에르 공비에게 왕세자 전하께서 춤을 신청하신 것도 그저 정치적인 의도로 보일 뿐이었다. 마침 나타난 오늘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이에게 더 주목이 쏠리기도 하면서, 동시에 왕세자 역시 칼리에르 공과 친분을 다져놓는 것뿐이다. 더구나 잘생긴 왕세자 전하께서 예쁜 칼리에르 공비와 춤을 추니, 칼리에르 공과는 또 다른 보는 맛이 있지 않은가.

16606118060342.jpg“예, 공주님.”

뱀파이어답게 대단히 화려한 이목구비에 지적인 분위기, 더불어 어딘가 싸늘하고 냉정한 매력까지 갖춘 칼리에르 공에 비해 왕세자 라이오넬은 생기가 넘치는 활달한 미남이었다. 살짝 그을린 피부는 그가 무예며 승마 등 바깥활동을 좋아한 탓이다. 키가 훤칠한 라이킨에게는 약간 못 미쳤지만, 그는 그대로 키가 크고 단단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16606118060342.jpg“……제가 춤 상대로 영 내키지 않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그리고 밤색 머리카락 아래의 눈으로 상대방을 성실하게 바라보며, 농담을 할 줄도 알았다. 소렐은 까만 눈을 깜빡거렸다.

16606118060337.jpg“그건 전혀 아니고요.”

16606118060356.jpg‘저 빌어먹을 놈.’

라이킨은 영예롭고 고귀한 왕세자를 상대로도 욕하는 걸 서슴지 않았다. 물론 그는 제정신이며, 아내의 명예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옛날 사람이기 때문에 일단은 겉으로 대놓고 욕하지는 않았다.

16606118060337.jpg“오히려 영광인데, 제가 춤이 많이 서툴러서 전하의 발을 밟는 결례를 여러 번 저지를까 봐 걱정이 되네요.”

소렐은 솔직하게 곤란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16606118060342.jpg“방금 추신 춤은 아주 매끄러우시던데요.”

라이오넬 왕세자는 그녀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나 보다.

16606118060337.jpg“그건 우리 라이킨, 남편이…….”

칼리에르 공비는 칼리에르 공을 돌아보았다. ‘우리’ 라이킨 씨는 ‘우리’와 ‘남편’의 조합을 한꺼번에 들어서 갑자기 기분이 조금 나아지셨다.

16606118060337.jpg“제가 얼마나 형편없는 춤 솜씨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아서 도와준 거거든요. 그러니 미리 양해를 구할게요, 전하.”

소렐 이드리스, 펠릭스 이드리스와 메리 헬레인의 딸은 엔버네스에 온 건 처음이었으나 왕세자의 춤 신청을 거절할 만큼 맹하지는 않았다. 뭘 거절하고, 뭘 거절할 수 없는지는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라이킨은 왕세자의 춤 신청을 아마 마음에 들지 않아 할 거다. 위쪽에서 차갑고 따가운 시선이 배회하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16606118060342.jpg“그렇다면 저 역시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공주님. 저도 아주 매끄럽게 춤을 추지는 못하니, 서로서로 보완해가며 추지요.”

하지만 그가 싫다고 해서 왕세자의 춤 신청을 거절할 수는 없다. 소렐은 나이가 많은 남편의 눈치를 보는 아내도 아니었고, 그녀가 생각하기에 하는 게 맞다면 해야 했다. 그녀는 칼리에르 공비이기 이전에 이드리스의 딸이자 헬레인 공주니까.

16606118060337.jpg“그럴까요?”

소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그녀가 아는 건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소렐은 아는 게 없는 것치곤 괜찮은 선택을 했다.

16606118060337.jpg“다녀올게요.”

드레스 자락을 살랑이며 소렐이 라이킨을 돌아보았다.

16606118060356.jpg“잘 다녀오세요.”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쩐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소렐은 머리를 약간 갸웃거리다가 왕세자가 내민 손을 잡고 나갔다.  

16606118060356.jpg‘딱 한 번만 다른 남자와 추시고, 그놈의 발을 마구 밟아버린 걸로 유명해지세요. 허면 앞으로는 공주님에게 춤을 신청하는 남자는 저밖에 없을 테니.’

  처음 춤을 연습하자고 했던 날, 라이킨이 농담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다.

16606118060337.jpg‘그래도 안 밟도록 최선을 다해야지.’

모든 일에 열심이고 착실한 토끼는 이번에도 최선을 다할 거다. 앙다문 입술에는 모범적인 의지가 가득했다. 라이킨은 새 춤곡이 시작되기 전, 왕세자가 소렐을 데리고 알맞게 홀로 나아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다른 사람들, 특히 숙녀들은 라이킨이 두 번째 춤 신청을 어떤 숙녀에게 할지 무척 기대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아내만을 시선으로 좇을 뿐이다.

16606118064025.jpg“칼리에르 공.”

그렇게 되면 자연히 정치가들이 그를 찾아온다. 인사를 하고, 또 그를 그들의 당파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인사를 받긴 하지만, 라이킨은 때때로 소렐을 주시했다. 시선이 저절로 가는 걸 그도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16606118064025.jpg“갑자기 헬레인 공주님이, 그것도 칼리에르 공비가 되어서 나타나시다니 우린 참 놀랐습니다.”

16606118060356.jpg“그렇습니까.”

라이킨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의 푸른 시선은 열심히 말하는 장관을 비껴가서 또 소렐에게로 가닿았다. 새로운 춤곡이 시작되고, 조슬린과 루비가 뒤로 빠지며 소렐이 들어갔다. 왕세자의 손이 소렐의 허리를 정중하게 감쌌다. 그는 조금 생각하다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잘생긴 턱이 ‘이게 아닌데’, 하듯이 까딱이며 돌아갔다.

16606118064025.jpg“저 다이아몬드 티아라는 초상화에서나 보던 것인데 말입니다.”

오늘의 최고 화제는 헬레인 왕가의 상징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이 무도회장 전체에서 다 그 얘기만 하는 모양이다. 모두가 와서 라이킨에게 저게 진짜가 맞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16606118064025.jpg“아까 보석감정가로 유명한 해밀튼 남작과 이야기를 했는데, 멀리서 봐도 흩뿌리는 저 빛만은 절대 위조할 수 없는 거라고 찬사를 보내더군요.”

소렐은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와 며칠 내내 호흡을 맞춘 라이킨은 바로 알았다. 가끔 왕세자가 말을 걸면 그것도 무난하게 잘 넘기고 있다. 묵직한 칼 같은 것이 머리에서 목을 타고 아래로, 끝도 없는 아래로 내려가 결국 질척하게 고였다.

16606118064025.jpg“엘펜하임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예상은 했었다. 그래서 소렐에게 밑도 끝도 없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가며 춤 연습까지 못하게 하려고 들었다. 못난 모습을 보였다.

16606118064025.jpg“하, 그 떼강도들은 언제라도 이 나라 역시 털어먹으려고 눈이 돌아간 놈들입니다.”

하지만 그 예상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나. 항상 지루할 정도로 맞아가던 예상이 오늘 수백 년만에 틀렸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틀려서 화가 나지 않았다. 다만 조금 당황하고, 또 기꺼이 받아들였을 뿐.

16606118064025.jpg“여기에도 그들의 귀가 있습니다.”

단순히 소렐의 허리에 올라가고, 소렐의 손을 잡은 왕세자가 불쾌한 게 아니었다. 그는 좀 더 소렐을 잘 이끌어줘야 했다. 그녀는 지금 바짝 긴장하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수도 없이 말해주며 미소를 지어줘야 했다. 소렐에겐 지금 왕세자가 하는 자신만만하고 또 정중하지만 쓸데없는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16606118064025.jpg“들으라고 한 소리입니다.”

소렐이 삐끗했지만 혼자 애써서 다시 박자를 따라잡았다. 라이킨이었다면 그녀가 삐끗하자마자 바로 들어 올려 당황하지 않게 살짝 내려놔주고, 괜찮다고 다독였을 거다. 소렐의 얼굴에는 긴장된 미소가 가득했다. 아직 나이가 어린데 벌써부터 저런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잖나.

16606118060356.jpg‘저 어린놈의 눈에는 공주님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군.’

혹시라도 실수할까 봐 불안해하면서 다음 박자로 발을 옮기는 모습이 하나도 안 보이는 거다. 스물넷이면 소렐보다 나이가 더 많은데, 저리 배려를 하지 못하다니 왕세자는 글러먹은 새끼다. 오늘은 소렐이 주인공인 날인데, 주인공이 저렇게 긴장해야겠는가.

16606118064025.jpg“공께서는 공비전하가 무척 걱정되시나 봅니다. 계속 바라보시는군요.”

16606118060356.jpg“예. 걱정이 됩니다.”

라이킨은 굳이 말을 한 이에게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중얼거렸다.

16606118064025.jpg“공비전하도 데뷔탕트이시긴 하지만, 그래도 왕세자전하께 설마 결례를 저지르시려고요.”

16606118060356.jpg“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뱀파이어는 그딴 걸 신경이나 쓸 것 같냐는 표정으로 싸늘하게 웃었다. 결례를 저지르면 그야 좋았다. 왕세자의 발등이 퉁퉁 부어오르도록 아주 꽉꽉 밟아주고 왔으면 좋겠다.

16606118060356.jpg‘상대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지도 못하는 반편이는 그래도 싸지.’

도대체 왜 그의 공주님이 긴장을 하면서 춤을 춰야 하냔 말이다. 소렐 이드리스는 환하게 웃어야 했다. 신이 나서 뺨이 상기되어 그를 바라봐야 했다.

16606118060356.jpg‘아니, 생각해보니 왕세자의 손을 잡고 그렇게 신이 났다면 그건 그거대로 불쾌하군.’

담배가 절실하다. 저기에서 소렐을 바로 들어다가 빼낼 수는 없으니, 담배라도 피우고 싶었다.

16606118060356.jpg“당분간 엔버네스에 머물 생각인데, 요즘 상황은 어떻습니까?”

라이킨은 딱히 궁금하지도 않고, 이미 훤히 꿰뚫고 있는 것을 물었다. 대충 저들끼리 떠들 화제를 던져주면, 알아서 관심을 돌리고 저마다 아는 척을 해댄다.

16606118064025.jpg“우리야 걱정이 없지요. 왕세자전하께서 저리 늠름하시니까요. 하지만 옆 나라들은 후계문제로 난리입니다.”

16606118064025.jpg“왕세자전하께서 마음에 두신 여성은 없답니까?”

왕세자가 누굴 마음에 두건 그건 라이킨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저 방정맞은 춤곡이 빨리 끝나길 바랐다. 그가 소렐과 출 때는 그리 짧은 곡을 연주하더니, 이번 곡은 유독 길다. 푸른 눈이 마음에 들지 않는 악단에게 가닿았다.

16606118060356.jpg‘발을 밟을 뻔하셨군.’

라이킨은 악단을 쳐다보다가, 다시 소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약간 휘청거렸지만 불행히도 왕세자의 발은 간신히 밟지 않았다. 왕이 주책맞게 소렐과 춤을 추겠다고 나설 가능성은 낮으니, 앞으로 소렐은 남편하고만 춤을 추는 것으로 해야겠다. 다른 놈들이 춤 신청을 한다면 일단 라이킨부터 뚫어야 하리라. 그는 소렐이 불안해하며 긴장하는 건 더 이상 못 보겠다고 생각했다. 춤 연습을 더 할 필요는 없었다. 항상 남편과 춤을 추면 될 거 아닌가.

16606118060356.jpg‘길어.’

쓸데없이 춤곡은 길었고, 그래서 왕세자가 아무것도 모르고 배려도 없이 소렐을 데리고 있는 시간만 더 길어졌다. 라이킨은 겨우 춤이 끝나고 인사를 한 뒤, 짧게 대화를 나누는 소렐과 왕세자를 가만히 보다가 시선을 비스듬히 옮겼다. 소렐이 씩씩하게 돌아왔다.

16606118060337.jpg“나 어땠어요? 실수 안 했죠?”

16606118060356.jpg“예, 공주님.”

유감스럽게도.

16606118060337.jpg“처음 춘 것보다 짧은 곡이라 다행이에요. 우리가 췄던 곡이었으면 더 길어져서 분명히 전하의 발을 밟았을 거예요.”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며 어깨를 바르르 떠는 소렐에게 라이킨이 약간 늦게 반응했다.

16606118060356.jpg“……예?”

16606118060337.jpg“전하랑 춘 곡이요.”

16606118060356.jpg“예.”

16606118060337.jpg“나랑 라이킨이 춘 <로솔레>보다 짧잖아요.”

16606118060356.jpg“무슨 곡을 추셨, 아, <봄의 방문>이었지요. ……그건 짧지요.”

흘리듯 중얼거리는 라이킨의 표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16606118060337.jpg“네. 그래서 다행이라고요.”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의 표정은 언제나 정갈했다. 비록 그가 자주 재떨이를 던져버리고, 저 밑바닥 인생들이 사용하는 험한 욕도 내키면 무척 자연스럽게 하고, 성질머리가 불 같지만 표정은 늘 담백하고 정갈했다. 딱히 무너지지도, 또 자주 변하지도 않아서 늘 갈무리가 되어 있는 표정이었다.

16606118060337.jpg‘어디 아프나?’

소렐은 그가 재떨이를 ‘자주’ 던지고, 내키면 욕설도 독설과 함께 퍼부으며, 성질머리가 불같다는 건 전혀 몰랐지만 그가 항상 침착하고 다정하다는 건 알았다. 그런데 그 정갈하던 표정이 어린 소렐이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16606118060337.jpg“왜 그래요, 라이킨?”

그녀는 작게 속삭이며 그에게 더 바짝 다가왔다.

16606118060337.jpg“괜찮아요? 어디 아파요?”

그의 입꼬리가 얼른 당겨졌다. 마치 그녀와 함께 있을 때처럼 다시 다정한 표정으로 돌아가겠다는 듯.

16606118060356.jpg“……괜찮습니다, 아프지 않아요.”

16606118060337.jpg“표정이 좋지 않아요.”

소렐은 손을 뻗으려다가 멈칫거렸다. 집에서라면 그의 얼굴을 한 번 만져보고 그가 그녀에게 그러했듯 똑같이 이마를 짚어주겠지만, 사람들의 눈이 있는 곳에서는 아무래도 결례가 아닐까? 다시 거두어지려는 손을 라이킨이 황급히 잡았다.

16606118060337.jpg‘이것 봐. 진짜 이상하네.’

언제나 여유롭고 자연스럽게 그녀를 붙잡아서 데리고 오던 사람이, 누가 봐도 다급한 손으로 그녀를 잡아채다시피 했다.

16606118060356.jpg“저는 괜찮습니다. 괜찮으니 일단 앉으세요.”

라이킨은 격렬하게 끓어오르려는 목소리를 간신히 내리누르며 소렐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16606118060356.jpg“많이 긴장하셨던데요, 공주님.”

자, 어디 한번 털어놔봐. 너는 내가 조금만 말문을 열어줘도 또 종알거리며 전부 솔직하게 말하지.

16606118060337.jpg“당연히 긴장하죠. 왕세자전하인데요. 그래도 전하께서 잘 배려해주셔서 실수는 거의 안 하고 끝났어요.”

라이킨은 그저 나란히 앉아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16606118060337.jpg“다시 말해 실수를 좀 하긴 했다는 거죠, 네…….”

소렐이 풀이 죽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혼자 신났다가, 또 축 처졌다가 한다.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16606118060356.jpg“옆에서 지켜보니 그렇더군요. 만회도 잘하셨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왕세자의 발을 밟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라이킨은 같은 생각을 또 하다가 얼른 고개를 돌려 소렐이 보지 못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그는 아주 사소한 것에 심하게 집착하고 있었다.

16606118060337.jpg“네, 그렇기는 한데 라이킨은 괜찮아요?”

16606118060356.jpg“괜찮다니까요.”

16606118060337.jpg“아니, 여기.”

소렐은 자신의 미간을 가리켜 보였다.

16606118060337.jpg“화났어요?”

가장 둔하길 바라는 여자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그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이렇게 되면 곤란했다. 정말 너무나 곤란했다. 라이킨은 얼굴이 잔뜩 허물어질 지경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16606118060337.jpg“화 안 났나?”

고개를 숙이고 웃는 걸 보면 화가 안 난 것 같은데. 소렐은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에게 라이킨은 언제나 비밀이 많고, 또 수수께끼 같은 남자였다. 오랜 세월을 살아서 그런가, 그가 품고 있는 게 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16606118060356.jpg“예, 화나지 않았습니다. 몸이 안 좋은 것도 아닙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주님.”

16606118060337.jpg“그렇다니 다행이지만, 오늘 라이킨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그는 소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에 새카만 욕망과 질척한 집착을 품은 남자가 비쳤다.

16606118060356.jpg“공주님께서.”

그는 한숨을 쉬듯 중얼거리며 작고 포근한 소렐의 손을 잡아당겼다. 귀부인들이 이쪽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라이킨은 나른한 손동작마저 뜨거운 밤을 상상하게 만드는 남자였다. 물론 그렇다는 걸 토끼 공주님만 몰랐다. 이젠 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알 날이 있을까, 싶었다.

16606118060356.jpg“저를 잠시 두고 가셔서 기분이 좋지 않군요.”

검은 밤에 별 가루를 떨어트린 것 같은 눈동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16606118060337.jpg“그건 좀 참아요.”

라이킨은 그에게 말도 안 되는 말을 착실하고 모범적으로 하는 토끼를 쳐다보았다.

16606118060356.jpg“참으라고요?”

16606118060337.jpg“네, 참아야죠, 어쩌겠어요. 왜 기분이 좋지 않으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원래 우리 엄마도 절 첫 심부름 시키실 때 무척 불안하셨대요. 그래서 아빠가 추적마법으로 쫓아갔었다나요. 아니, 그게 투명마법이었나? 어쨌든요.”

소렐은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의 팔을 토닥였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16606118060337.jpg“저는 라이킨 눈에는 아직 미처 다 못 자란 어린 아이로 보이겠지만요, 그리고 사실 토끼 모습은 아직 한참 새끼인 게 맞긴 하지만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성인이에요.”

아, 제기랄. 라이킨은 차마 또박또박 말하는 소렐을 마주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다시 숙였다. 당장 저 뽀얀 콧등이며 뺨, 눈에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공주님은 뭘 먹고 저렇게 귀여울까?

16606118060337.jpg“절 똑바로 보시라니까요. 진짜예요. 앞으로도 더 잘할 수 있어요.”

라이킨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16606118060356.jpg“예.”

그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16606118060356.jpg“압니다.”

공주님께서 그러시다면 무조건 그런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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