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데뷔탕트 (17)2021.02.10.
국왕은 푸짐한 식탁을 베풀었다. 데뷔탕트들이 좋은 인연을 얻길 축복하며 넘치도록 베풀었다. 엘펜하임에 대적할 헬레인 공주가 나타난 건 조금 골치 아플 수도 있겠지만, 그 때문에 칼리에르 공을 박대하기엔 칼리에르 공과 그의 공국이 너무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엘펜하임과 싸우는 건 뱀파이어인 칼리에르 공이 알아서 할 일이니, 국왕은 그저 열심히 뱀파이어들 편만 들어주며 왕권만 강화하면 될 일이었다.
“……폐하께서 아주 신이 나셨군…….”
라이킨의 예민한 청각은 정치가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죄다 들었지만, 못 들은 척 대충 넘겼다. 그건 그가 굳이 듣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아, 다이애나에게 누가 빨리 춤을 신청해줬으면 좋겠는데.”
사비나가 소렐에게 중얼거렸다. 그게 문제다. 늘 문제였다. 데뷔탕트들은 어쨌든 춤을 추기야 하겠지만, 내내 벽 앞에 서 있기만 할 아가씨와 그렇지 않고 빨리 결혼할 아가씨가 곧 확연하게 갈렸다.
“없다면 루비가 사촌오빠 등을 찔러서라도 들이민댔잖아.”
소렐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마침 루비는 제 사촌오빠 곁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루비까지 갈 것도 없어. 우리 오빠도 춤은 적당히 추니까.”
조슬린이 손수건을 꼭 움켜쥐고 중얼거렸다. 조슬린의 곁에는 그녀와 똑 닮았지만 머리 하나 반은 더 큰 오빠가 다가와 섰다.
“안녕하십니까, 숙녀분들.”
“안녕하세요.”
사비나가 얼른 인사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니까, 조슬린. 네 친구는 금방 신청을 받을 거야.”
조슬린에게 질질 끌려온 오빠가 한숨을 푹푹 쉬어가며 중얼거렸다. 당연하게도, 친구들은 소렐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소렐의 곁에는 지금 엄청난 시선을 받고 있는 칼리에르 공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가들은 전부 다 이쪽으로 접근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친구의 데뷔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린 아가씨들이 공비를 둘러싸는 바람에 그 틈을 파고 들어오지는 못했다. 라이킨에겐 무척 편한 일이었다.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잖아.”
조슬린이 고집스럽게 말하며 오빠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꽉 붙잡았다.
“아니,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라이킨이 중얼거렸다. 아가씨들의 눈이 칼리에르 공에게 가다가, 다시 그가 보고 있는 다이애나 쪽으로 갔다. 왕과 왕비에게 인사를 하고, 친구들 쪽으로 오려는 다이애나에게 다가서는 어떤 신사가 있었다.
“……저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내 말이 맞지 않냐고 하려던 조슬린의 오빠는 여동생의 뾰족한 목소리에 다시 한숨을 쉬어야 했다. 소렐은 웃으면서 라이킨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로 오면,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마주 보며 고개를 숙여주었다.
“재미있으십니까, 공주님?”
“네, 재미있어요.”
소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레고, 재미있고, 또 즐거웠다. 친구들과 함께여서 좋았고, 무엇보다 곁에 든든한 라이킨이 있어서 너무 좋았다. 낯선 곳에 왔으나 긴장되지 않았고, 사람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겁나지 않았다. 겁이 많은 토끼에게 무서운 게 하나 없었다. 그녀를 따뜻하게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는 그녀의 통통한 뺨을 한 번 쓸어주었다. 그건 그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고, 동시에 연단 위에 서서 그의 소중한 토끼를 보고 있는 애송이에게 분명하게 보이는 사실이기도 했다.
“허면 저와 함께 춤을 추시는 건 어떠실지?”
국왕에게 데뷔탕트들이 인사하는 순서는 전부 다 끝났다. 곧 음악이 시작될 것이고, 어린 데뷔탕트들에게 일제히 손이 내밀어졌다. 가장 마지막으로 손을 뻗은 건 당연하게 아내 곁을 지키고 있던 칼리에르 공이었다. 소렐은 지난 사흘간 수도 없이 잡았던 그의 손을 보곤 또 배시시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가. 라이킨은 알 것 같으면서도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다른 데뷔탕트들과 똑같이 아름답게 꾸민 이 소녀의 마음을 낱낱이 다 알아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지금은 조금 막힌 듯, 불투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답답했다.
“영광이에요.”
소렐은 수줍게 대답했다.
“제가 더 영광이지요.”
라이킨은 중얼거리면서 그의 손 위에 올라온 작은 손을 감쌌다. 자연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허리도 감쌌다. 아마 여기까지. 그래, 여기까지일 거다. 그에게 허락된 건 여기까지만이었다. 친절하고 다정하며, 그리고 스스럼없이 춤을 추는 정도의 접촉을 할 수 있는 상대가 되었다. 하루 만에 같은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는 게 가능한 관계는 소렐 이드리스 앞에선 어림도 없었다.
“절대로 발 밟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소렐은 신이 나서 소곤거렸다. 라이킨은 그만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잘 웃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소렐 앞에서는 웃음이 잦아졌다. 하긴, 귀엽지 않은가.
“밟으셔도 괜찮다니까요. 당황하지 말고 뻔뻔해지세요. 공주님이 밟으실 수도 있는 거지요.”
듣기 좋은 선율, 부드러운 음악, 이미 춤을 추고 있던 사람들 사이로 끼어 들어가면 되는 자연스러운 흐름, 다 좋지만 라이킨은 소렐 이드리스가 신나서 들뜬 이유에 제발 그가 포함되길 바랐다. 아마 그 욕심 때문에 이렇게 답답하고 막막한가 보다. 타이를 좀 더 풀어 내리고 싶었다.
“밟으시면 영광이고.”
느슨하게 하고, 지금 그의 앞에서 웃고 있는 이 아가씨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싶었다. 그렇게 안으로, 더 깊숙하게. 아, 제기랄. 이젠 공공장소와 공식행사에서도 발정이 나서 돌아버린 건가. 아니, 그의 잘못이 아니다. 원인은 소렐에게 있었다. 그녀는 마냥 수줍고 사랑스럽지만은 않았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소렐은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추파를 던질 줄도, 남자를 유혹하는 세련된 말을 던질 줄도 모른다.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라이킨은 참고 또 참아가고 있는데,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매혹적이다. 마냥 파고들고 싶었다. 이제 막 소녀티를 벗어나고 있는 그녀에겐 여러 가지 숨겨진 색들이 가득했다. 물론 당연히 라이킨만 알아야 하는 비밀이었다.
“나한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라이킨뿐이에요.”
오, 순진한 공주님, 그런 말을 할 놈들은 애초에 가까이 있지도 못하게 했으니 당연하지요. 라이킨은 빙긋 웃었다. 그가 괜히 소렐에게 매그놀리아 칼리지를 추천한 게 아니었다. 이렇게 예쁜데 온갖 사내놈들이 득실대는 다른 칼리지에는 절대로 소렐을 보낼 수 없었다. 뭐, 그래봤자 매그놀리아 칼리지를 기웃대는 놈들은 여전히 많겠지만. 그래서 라이킨은 이번 왕실무도회가 꽤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그녀가 그의 아내라는 사실을 전국적으로 알릴 수 있으니까.
“그래서 지금 하나도 긴장이 안 되고, 오히려 신나요.”
소렐은 그의 품 안에서 까르르 웃었다. 라이킨은 그녀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안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갔다. 소렐은 다홍빛 입술을 금세 앙다물었다. 그녀는 춤을 출 때 말을 하지 않는다. 집중력이 흩어져서 첫 춤에서 실수할까 봐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금방 긴장하신 것 같은데요.”
라이킨은 픽 웃었다. 누누이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발을 밟아도, 박자를 놓쳐도 그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했건만 소렐은 어떻게든 혼자 열심히 해보려고 끙끙거렸다. 물론 그게 귀엽긴 했다.
“라이킨이랑 첫 춤을 추는 거잖아요!”
소렐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통 인간이라면 듣지 못하겠지만, 라이킨에게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중요하다고요!”
자꾸 말 시킬래? 항의하며 고개를 팍 들던 소렐은 새파란 눈과 마주쳤다. 그 눈은 맑은 하늘 같았다. 그녀에겐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을, 그런 새파랗게 맑은 하늘.
“잘 추는 건 중요하지 않지요. 저를 보십시오, 공주님.”
바라만 봐도 소렐은 얼굴을 붉혔다. 그는 그 홍조를 보려고 항상 애썼다. 눈을 마주치고, 턱을 들어 올리고, 그녀를 불렀다. 그렇게 해서라도 소렐의 마음속에서, 다른 남자들을 제치고 그가 가장 첫 번째라는 확답을 찾아내고 싶었다.
“예. 그게 중요합니다.”
그는 부끄러움을 참고 그와 마주 본 소렐이 웃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추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와’ 함께 첫 춤을 추었다는 게 중요했다. 마주 보다가 쑥스러운지 소렐이 배시시 웃었다. 라이킨은 이미 그녀를 보고 웃은 지 오래되었다. 샹들리에에서 쏟아진 빛이 소렐의 티아라와 눈에 반사되어 더 반짝였다. 데뷔탕트들의 첫 춤은 가장 대중적이고 흔한 춤곡이었지만, 그래도 되도록 명랑하고 쾌활한 곡이 골라서 선정되었다.
“어머나!”
가장 젊고 어린 신사숙녀들이 서로의 기량을 뽐낼 수 있도록, 일부러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춤을 보던 이들이 탄성을 터트리곤 했다. 물론 굳이 기량을 뽐내지 않고 정석대로 추고 관둬도 좋았다.
“칼리에르 공은 어지간히 새 신부가 예쁜가 보죠. 눈을 못 떼는군요.”
“저라도 못 떼겠습니다. 헬레인 공주인데 예쁘기까지 하니.”
칼리에르 공이 한번 가리면 폭 파묻혀서 풍성한 드레스 자락밖에 보이지 않을 공주가 방싯방싯 웃고 있었다. 공주만 웃고 있다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겠지만, 칼리에르 공은 홀에 들어설 때부터 지금까지 제 아내만 보고 함께 웃고 있었다. 뱀파이어 특유의 냉기가 저 자그마한 공주님 앞에서는 싹 사라졌다.
“어, 나 지금 좀 아슬아슬했어요.”
소렐이 눈이 동그래져서 그를 붙잡고 빠르게 속삭였다. 라이킨이 그녀를 이끌며 웃었다.
“괜찮다니까요, 공주님.”
“어어……!”
그녀는 순식간에 박자를 놓치고 발을 헛디뎠으나, 그가 약속했던 대로 그걸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비틀거리기도 전에 라이킨이 곧장 그녀를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휙 들어서, 다시 소렐이 있어야만 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겉으로 보기엔 그가 잠시 소렐과 기량을 보인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그냥 넘어가기엔 소렐의 드레스 자락이 허공에서 너무나 풍성하게 펼쳐졌기 때문이다.
“저 양반이 저런 것도 하는 양반이었나?”
모두가 수군거렸지만, 소렐의 눈은 커다랗게 떠져서 그만을 바라보았다.
‘아니, 놀라면 안 되지요, 공주님.’
라이킨은 놀랐던 소렐의 눈이 곧장 예쁘게 휘어지는 것을 보곤 그제야 만족했다. 보조개가 쏙 들어가고,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한 바퀴 빙글 돈다. 소렐은 이번엔 박자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또 신나게 웃었다.
“그래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는 게 아니라 웃으라고 해준 거였다. 소렐이 무척 기쁘라고. 그래, 바로 그거였다. 보통 사람들이 압도당할 만한 체격을 가진 남자는 소중하게 감싸고 있는 작은 공주님만을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조금 재미난 한 쌍이었다. 아무리 봐도 나이 차이는 일반 사람들의 상상을 거뜬히 뛰어넘어서, 오히려 무감각해질 정도인 이종족들이다. 하나는 뱀파이어, 하나는 토끼와 마법사의 혼혈.
‘웃었으니 됐지.’
라이킨은 소렐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모두가 눈이 벌게져서 고대마법만을 바라보는데, 그 계승자에게 다그치는 일도 없이 마냥 하고 싶은 것만 하게 두는 것도 라이킨이 유일했다. 작은 공주님이야 하고 싶은 공부나 하고, 저 좋아하는 일만 하면 된다. 그래, 저렇게 환히 웃기만 하면 된다. 소렐은 더 이상 실수하지 않고 지난 며칠간 호흡을 맞췄던 대로, 정확하게 박자를 밟았다. 겨우 저 작은 머리에서 복잡하던 생각이 사라졌나 보다. 소렐은 생각을 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움직여야 더 잘했다.
“훌륭해요!”
음악이 끝나고 여기저기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데뷔탕트들을 격려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보는 사람도 즐거운 춤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춤을 마친 이들은 상대에게 예를 표한 뒤 각자 자리로 돌아갔지만, 소렐은 라이킨에게 손이 잡힌 채로 그대로 함께 돌아갔다.
“드레스가 너무 무겁지는 않으십니까?”
라이킨은 그게 신경 쓰이는지 나지막하게 물어보았다.
“아뇨, 괜찮아요!”
춤을 춰서 약간 올라간 체온과 가빠진 숨, 그리고 느껴지는 라이킨의 단단한 몸이 새삼스럽게 소렐을 어지럽혔다. 수줍었고, 동시에 기뻤다. 그가 그녀의 곁에 있어줘서 무척 기뻤다.
“좀 앉아서 쉬어요.”
라이킨은 의자를 따로 빼서 기어이 소렐을 앉혔다.
“정말 괜찮은데요. 저 언덕이랑 산도 막 뛰어다녔어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뺨이 발갛게 상기되고, 눈이 반짝반짝하고, 신나게 웃는 공주님은 이미 호기심의 대상이라서, 첫 춤이 끝났으니 뻔뻔하게 몰려드는 놈들이 분명히 있을 거거든. 더구나 소렐은 공식적으로 결혼을 한 여자라, 오히려 괜찮지 않냐며 슬쩍 춤을 신청하고 그녀에 대해 더 알아내려는 인간들이 바글거렸다.
“자, 물도 마셔요.”
웬만한 인간보다 오래 살았고, 페르난데스 7세도 마음만 먹는다면 가지고 놀 수 있는 칼리에르 공보다는 토끼 공주님이 더 만만해 보이지 않나. 그래서 라이킨은 소렐에게 꽂히는 시선을 적당히 가리면서 그녀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와, 소렐. 춤추는데 너밖에 안 보이더라.”
사비나가 다가와서 감탄했다.
“다들 너밖에 안 봤어. 너무 잘 어울려서.”
“진짜?”
“진짜.”
그녀는 내 말이 틀림없다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다행이다.”
소렐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다행이라니, 뭐 걱정한 거라도 있었어?”
라이킨은 못 들은 척하면서도 사비나 로체를 소렐의 친구 자리에 낙점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사비나는 예민하고, 또 또래보다 성숙한 면이 있어서 지금 그의 마음에 걸린 점을 정확하게 소렐에게 대신 물어보고 있었다.
“아니, 그냥……. 나는 너무 작고 라이킨은 크니까…….”
시골에서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 아빠와 엄마에게 사랑을 받아봤자 시골 소녀인 소렐의 눈에 라이킨이 이곳에서도 가장 잘난 남자라는 게 훤히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녀도 여기에서 가장 예쁜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혹시나 그녀가 실수를 하거나, 안 그래도 어린데 라이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어울린다니 다행이다. 소렐은 그런 걱정들을 대충 둘러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너무’ 작은 건 아니야, 소렐.”
사비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샤를렌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지나치게 큰 라이킨이 문제라고 했을 거다.
“저는 키가 작은 편이 좋습니다, 공주님.”
라이킨은 무심한 투로 소렐이 다 마신 물잔을 챙기며 중얼거렸다. 그의 한마디에 조금 눈치를 보던 공주님의 어깨가 또 솟아오른다. 그는 픽 웃었다.
“그렇구나, 다행이다.”
그녀가 너무 작은 게 다행인 게 아니라, 라이킨이 작은 사람을 좋아해서 다행이라는 뜻이었다. 소렐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사비나에게 조그맣게 물어보았다.
“다들 어디 갔어?”
“다이애나는 춤췄던 사람이랑 저기서 말하고 있네. 마음에 드나 보다. 조슬린도 바로 다음에 춤을 추는……, 그래, 저기서 춤추네. 루비도 저기 있고.”
“사비나는 안 가?”
사비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 조금 더 있다가.”
뱀파이어의 피가 흐르는 이들은 그때 동시에 같은 반응을 했다. 사비나는 소렐의 곁에 앉았고, 라이킨은 다가오는 이를 응시했다. 두 번째 춤을 추는 사람들이 홀 가운데에서 빙글빙글 돌고, 가장자리에 앉거나 선 이들이 저마다 담소를 나눌 때 거물 하나가 움직였다.
“데뷔를 축하합니다, 공주님.”
소렐은 고개를 들었다. 키가 라이킨만큼 큰 왕세자가 다가와서 웃고 있었다.
“칼리에르 공도 모처럼 왕실무도회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해주셔서 영광이지요, 전하.”
왕세자, 라이오넬 빌헬름 앨버트에게 라이킨은 덤덤히 인사했다. 스물넷, 젊은 왕세자와 역사를 읽고 있는 칼리에르 공 사이에서도 어쨌든 예법은 존재했다.
“어떠십니까, 오랜만에 들르셨는데, 왕실무도회는 마음에 드시는지요?”
물론 왕세자 역시 라이킨에게 필요한 만큼의 예의는 착실하게 갖추었다. 앞으로 이 나라는 그가 다스릴 예정인 이상, 라이킨과 같은 강력한 힘을 가진 인사가 그를 지지해줘야 했다.
“예,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인사치레로 나누는 말이다. 왕세자가 이쪽으로 친히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럼, 첫 춤은 추셨으니, 다음 춤은 저와 함께 추시는 게 어떨지요, 공주님.”
근사한 왕자님이 소렐을 향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