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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데뷔탕트 (16) (55/181)

55. 데뷔탕트 (16)2021.02.06.

처음 만나는 이에 대한 판단은, 씁쓸하지만 그가 입고 있는 차림새에서 거의 끝난다. 의복은 권위를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길게 가로지르는 현장, 그리고 왼쪽 가슴 위에 번쩍거리는 훈장을 매단 백색 타이 차림의 남성들과 드레스 차림의 여성들이 당당하게 들어섰다. 보통 푸른 현장을 걸고 있는 남성과 여성들은 왕족을 비롯한 지체가 아주 높은 이들인지라, 특히 눈에 띄었다.

1660611788852.jpg“전쟁이 난 것도 한참 전이라 그런가, 이젠 훈장을 받은 분들이 다 연세가 드셨군요.”

사람들은 푸른 현장을 두른 이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1660611788852.jpg“엘펜하임이 미쳐 날뛰던 것도 옛이야기니 그럴 수밖에요. 그놈들이 여태까지 강성했으면, 우리도 또 전쟁에 휘말렸을 겁니다.”

1660611788852.jpg“그래서 말인데, 엘펜하임한테 망한 바로 ‘그’ 헬레인 왕조라면서요?”

앞뒤 다 자르고 말해도 사람들은 누굴 칭하는지 다 알았다. 사람들은 하나둘 도착하는 데뷔탕트들을 곁눈질했다. 오늘 가엾게도 모든 시선을 다 한 부부에게 빼앗길 예정인 그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왕궁 안에 들어섰다. 사실 데뷔탕트들마저도 궁금한 게 바로 칼리에르 공비, 헬레인의 공주였다.

16606117888539.jpg“왕궁은 좀 건물이 많은 공작저 같아요.”

정작 그 관심을 받고 있는 소렐은 마차가 들어선 왕궁을 창밖으로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사는 칼리에르 공작저가 얼마나 대단한지 왕궁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칠 지경이었다.

16606117888545.jpg“어느 공작저 말씀이십니까?”

공작저는 엄밀히 말해 여러 곳이었다. 이곳 엔버네스에도 있었고, 글래스턴에도 있었다.

16606117888539.jpg“둘 다요. ……저는 헬레인에 전혀 가보지 못했거든요.”

그녀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헬레인 왕조는 망하고 없었으니까, 당연했다.

16606117888539.jpg“헬레인 왕궁도 이렇게 컸을까요?”

16606117888545.jpg“더 컸습니다.”

소렐은 창밖에서 눈을 떼고 라이킨을 바라보았다.

16606117888545.jpg“크고, 우아한 백색이었지요. 용맹한 토끼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훌륭하게 정원을 가꾸던 곳입니다. 뱀파이어였지만 초대된 손님에게는 아주 친절했지요.”

16606117888539.jpg“가봤어요?”

16606117888545.jpg“예. 가봤습니다.”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17888545.jpg“딱 한 번이었지만, 가봤습니다. 저를 굉장히 불편하게 쳐다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대접해주더군요.”

16606117888539.jpg“뱀파이어라서?”

16606117888545.jpg“예, 뱀파이어라서.”

그리고 아마 토끼들은 알고 있었을 거다. 그가 그들의 마지막 공주님의 남편이 될 거라는 것을. 그 따갑던 시선들은 불편한 게 아니라, 소중한 토끼 공주님을 훔쳐 간 도둑놈을 보는 시선이었다. 예언이 공식적으로 나온 건 메리 헬레인 공주, 소렐의 어머니를 통해서였지만 헬레인 왕조는 그때 이미 자신들의 몰락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 몰락 후에 벌어질 일들까지도.

16606117888539.jpg“갔던 이야기 좀 더 해줘요.”

16606117888545.jpg“나중에, 시간은 많으니까요. 우선은…….”

마차가 멈췄다.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정중하게 마차 문을 열었다.

16606117888545.jpg“들어가실까요, 공주님.”

라이킨은 먼저 마차에서 내려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렐은 배시시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비싼 천을 아낌없이 사용한 드레스의 폭은 무척 넓었고, 라이킨은 그녀가 발을 헛디디지는 않나, 그 드레스 자락을 주시하면서 소렐을 내려주었다. 그저 작은 아내가 가장 우선일 뿐이다. 그는 무릎을 여러 번 접어가며 직접 아내의 드레스 자락을 잡아주고, 또 펼쳐주었다. 권위와 명예의 상징인 푸른 현장을 둘렀으면서도 그는 서슴없이 시종을 자처했다.

16606117888545.jpg“가시지요.”

소렐은 내밀어지는 팔을 꼭 껴안듯 잡았다. 낯선 곳에 와서 주변을 경계하며 그에게 의지했다. 라이킨은 제 팔에 감기는 따뜻한 체온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름답게 꾸민 왕궁의 장식에도, 그를 힐끔거리는 이 나라의 실세들에도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았으나 이 체온의 주인만큼은 그의 까탈스러운 성격을 잠재웠다.

1660611788852.jpg“초대장을 보여주십시오.”

마차가 들어올 때 입구에서 요구하던 초대장이 또다시, 연회장 입구에서 요구됐다. 라이킨은 보라색 봉투에 담긴 초대장을 내밀었다. 정복을 입은 왕궁의 시종 역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눈치를 챈 모양이었지만, 그는 임무에 따라 초대장을 다시 확인한 후 돌려주었다.

1660611788852.jpg“국왕폐하께 가장 첫 번째로 두 분이서 함께 인사를 드리실 겁니다.”

라이킨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1788852.jpg“왕실무도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글래스턴 공작부처 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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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의 인사는 나지막했지만, 뒤의 알림은 소렐이 깜짝 놀랄 정도로 쩌렁쩌렁했다. 우렁찬 목소리는 아까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만큼 연회장에 들어간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연회장은 뜻밖에도 그렇게 시끄럽지는 않았다. 쥘부채를 펼쳐 얼굴을 반쯤 가리거나, 손을 앞으로 모아 얌전하게 선 부인들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뒷짐을 쥐고 서거나 몸을 옆으로 돌리고 곁눈질을 하는 신사들도 이쪽을 바라보았다.

16606117888539.jpg‘하긴 라이킨이 잘생기긴 했지.’

배가 불뚝 나온 할아버지들이나 아저씨들과는 다르다. 그는 혼자 훤칠했고, 두르고 있는 푸른 현장의 주인답게 탄탄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16606117888545.jpg“모두가 공주님을 바라보고 있군요.”

라이킨을 보는 게 아니라? 소렐은 고개를 들었다. 까만 눈동자가 동그랗다.

16606117888545.jpg“공주님이 가장 아름다우셔서 그렇습니다.”

그런가 보다, 가 아니라 그렇다, 였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데리고 온 남편에겐 확신만 가득했다. 물론 대부분이 소렐이 쓰고 있는 티아라를 보고 경악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티아라를 쓴 소렐이 아름다운 것도 사실이 아닌가.

1660611788852.jpg“세상에, 지금 내가 보는 게…….”

1660611788852.jpg“분명해요, 나는 저 물건이 해체되어서 이미 시장에 나왔을 줄 알았는데……!”

소렐의 머리 위를 본 사람들이 쥘부채 사이로 경악하며 수군거렸다.

1660611788852.jpg“저건 헬레인 왕가의 상징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1660611788852.jpg“엘펜하임도 못 찾았던 티아라예요, 어떻게……!”

1660611788852.jpg“신원보증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저건 가짜로 흉내 내서 만들지도 못할 섬세한 티아라라고요.”

긴장한 소렐은 그런 이야기들은 듣지 못했다. 단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만 겨우 알아들을 뿐이었다.

16606117913926.jpg“소렐……!”

먼저 와있던 사비나가 손을 흔들었다. 소렐의 눈이 순식간에 또 휘어졌다.

16606117913926.jpg“교수님, 안녕하세요. 소렐 너 오늘 엄청 예쁘다, 저기 친구들 다 모여 있어! 조슬린이 다이애나를 챙겨주고 있어. 다이애나가 오늘 무척 긴장했거든. 넌 어때?”

같이 데뷔하는 동기지만, 소렐은 상황이 달랐다. 그녀는 데뷔탕트끼리 줄지어 인사하는 게 아니라, 남편과 함께 국왕에게 글래스턴 공작부처로 소개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16606117888539.jpg“괜찮아. 사비나 오늘 예뻐…….”

1660611788852.jpg“국왕폐하 드십니다! 왕비폐하 드십니다!”

16606117913926.jpg“이따 보자.”

사비나가 재빨리 그녀를 밀어내고 뒤로 물러섰다. 소렐은 거대한 샹들리에와, 그 아래 선 정복을 입은 이들이 정중하게 문을 열고 국왕부처를 맞이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16606117888545.jpg“공주님, 우리는 이쪽으로.”

국왕부처는 따로 마련된 옥좌 앞에 가서 섰고, 모든 이들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소렐은 그녀를 슬쩍 빼내는 라이킨을 따라갔다. 이제 와서 살펴보니, 티아라를 쓴 여성은 거의 없었다. 왕비가 루비 티아라, 그리고 국왕의 여동생인 이레네 공주가 에메랄드 티아라를 쓰고 있었다. 그 외에 푸른 현장을 두른 노부인 몇몇이 티아라를 쓴 게 보였다.

16606117888545.jpg“바로 국왕에게 인사를 할 겁니다.”

16606117888539.jpg“벌써요?”

16606117888545.jpg“페르난데스 7세는 격식을 갖추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왕실무도회에서는 데뷔탕트들이 춤이나 오래 추는 게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수도에 별로 오지도 않았다고 해놓고서 현 국왕의 성정은 어떻게 저리 잘 아는 걸까? 소렐은 그가 나지막하고 빠르게 속삭이는 말에 의문이 들었다가, 국왕이 입을 열자 납득을 하고 말았다.

1660611788852.jpg“자, 자, 올해 데뷔탕트들이며 신사숙녀들이 다 발을 들썩이고 있을 텐데, 말은 짧게 하고 춤은 길게 춥시다. 데뷔한 지 수십 년이 지난 늙은이가 떠들어봤자 재미있을 거 하나 없으니.”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연회장에 흘렀다. 사람들은 이미 페르난데스 7세의 유쾌한 성격을 다 알고 있는 모양이다. 늙은이라고 하기엔 아직 한창 중년인 국왕은 손짓을 했다.

1660611788852.jpg“그럼 인사부터 얼른.”

1660611788852.jpg“예, 폐하.”

라이킨은 정확한 시간에, 정확하게 소렐이 소개될 것까지 계산했다. 너무 일찍 당도해서 수군대는 사람들 한복판에 토끼를 던져 넣는 것도 안 되고, 지나치게 늦어서 예의가 아니라는 소리를 들어서도 안 된다. 그저 딱 알맞게 도착하여, 오늘의 주인공답게 소개되면 되는 것이다.

1660611788852.jpg“데뷔탕트들에 앞서, 국왕폐하, 왕비폐하. 글래스턴 공작부처입니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공작, 그리고 이드리스와 헬레인의 딸 소렐 이드리스 공주!”

16606117888545.jpg“……그냥 아는 동네 아저씨라고 생각해요. 공주님도 공주니까.”

라이킨이 나지막하게 한 말이 꽤나 웃겼다. 그래서 소렐은 왕좌 앞, 넓디넓은 곳에 깔린 붉은 융단 위에 서서도 생글생글 웃을 수 있었다. 국왕폐하가 동네 아저씨란다. 그 동네 아저씨는 왕좌에 앉지 않고, 직접 연단 끝에 나와 서서 그들을 맞았다. 소렐이 그냥 데뷔탕트가 아닌 헬레인 공주이기 때문이다. 왕족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다.

16606117888545.jpg“국왕폐하.”

라이킨은 살짝 허리를 숙이며 목례했다. 오랜만에 모습을 보인 가장 강력한 공국의 주인에게 국왕은 서슴없이 손을 내밀었다. 페르난데스 7세의 입은 이미 귀까지 찢어져 있었다. 선왕 때도 코빼기도 내밀지 않던 오래 묵은 뱀파이어가 나타났다.

1660611788852.jpg“어서 오시게. 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소?”

16606117888545.jpg“엔버네스는 세월이 갈수록 발달하고, 이번에 도로도 새로 닦여서 오는 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갈수록 나라가 강성해지는군요. 이쪽은 제 아내이자 메리 헬레인 공주의 딸인 소렐 이드리스입니다.”

국왕과 악수를 한 라이킨은 바로 옆에 딱 붙이고 있던 소렐을 소개시켰다.

1660611788852.jpg“오, 바로 이 아가씨가! 반가워요, 반가워.”

그녀는 국왕이 내민 손을 잡고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예를 취했다. 국왕은 기사답게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소렐이 예를 취할 상대는 서열상, 오직 국왕과 왕비뿐이었다.

1660611788852.jpg“헬레인의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 티아라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국왕은 감탄하며 소렐의 머리 위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티아라를 바라보았다. 지금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도 죄다 소렐이 당당하게 쓰고 나온 바로 이 티아라 때문이었다. 헬레인의 보물, 그중 티아라를 아주 당당히 기사단 본부에 숨겨진 봉인 앞에 하나씩 세워둔 엘펜하임마저 끝내 찾지 못했던 헬레인 적장녀의 티아라다. 상징은 확실했고, 권위는 여전했으며, 전통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분명했다.

1660611788852.jpg“실종된 줄 알았던 헬레인의 보물들을 다시 기대해도 되겠소?”

16606117888539.jpg“실종된 적도, 빼앗긴 적도 없습니다, 폐하.”

소렐은 웃으며 대답했다.

16606117888539.jpg“모든 건 제가 어머니로부터 전부 상속받았습니다.”

1660611788852.jpg“헬레인의 보물은 전부?”

페르난데스 7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6606117888539.jpg“예, 전부.”

국왕은 소렐의 손을 놓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1660611788852.jpg“엘펜하임이 아주 자랑스럽게 전시해두고 있다 하던데?”

소렐의 웃음이 약간 흐려졌다. 멸망시킨 왕조의 티아라, 혹은 왕의 홀을 전리품으로 전시하며 그들의 옛 만행을 자랑하는 건 강도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런 의미에서 엘펜하임 기사단은 전혀 신성하지 않았다.

16606117888539.jpg“제 아버지는 펠릭스 이드리스, 대마법사입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유일하게 ‘대마법사’의 칭호를 받은 이였다. 소렐은 그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1660611788852.jpg“허면 기대해보도록 하겠소.”

페르난데스 7세는 무슨 뜻인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렐은 옆으로 옮겨가서 헬레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티아라에 감탄을 숨기지 못하는 왕비에게도 똑같이 예를 갖췄다.

1660611788852.jpg“초상화에서나 보던 헬레인 왕실의 상징이 다시 나타났군요.”

어쩐지 소렐은 이미 국왕부처가 그녀의 신분에 대한 확인을 다 끝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잘 모르는 일이었지만, 사실 국왕이 뒷조사를 안 했을 리가 없었다. 라이킨 역시 아내의 신분을 분명하게 보증했다. 소렐 이드리스는 헬레인의 마지막 공주였다.

1660611788852.jpg“이제 갓 데뷔하는 숙녀가 써도 참 잘 어울리네요. 어서 와요, 환영합니다.”

16606117888539.jpg“감사합니다, 폐하.”

왕비폐하는 무척 상냥하고 다정하신 분인 것 같아. 소렐은 그들의 친절이 부모와 선조가 쌓아둔 명예와 영광 탓이라는 건 생각하지 못할 만큼 아직 어렸다.

1660611788852.jpg“우리 아들이 아마 공주 또래겠네요.”

소렐의 시선은 어느새 왕비의 곁에 서 있던 훤칠한 남성에게 가닿았다. 그는 라이킨과 거의 키 차이가 나지 않았고, 체격도 상당했다. 정복을 챙겨 입은 걸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이 나라 사람이라면 ‘왕자님’이 누군지 다 알았다.

16606117888539.jpg“왕세자전하.”

소렐은 왕세자에게는 손을 내밀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왕세자, 라이오넬 빌헬름 앨버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16606117940076.jpg“안녕하십니까, 헬레인 공주님.”

왕세자는 라이킨의 뒤를 이어 등장한 소렐에게 깍듯이 예를 갖췄다. 칼리에르 공은 현 국왕뿐만 아니라, 어쩌면 다음 대를 이을 왕세자에게도 날개가 되어줄지 모른다. 어떻게든 붙잡아야 했다. 게다가 새로 등장한 헬레인 공주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16606117940076.jpg“처음 뵙겠습니다. 저분들의 변변치 못한 아들입니다.”

부모를 슬쩍 가리키며 웃는 왕세자의 농담에 소렐도 그만 웃어버렸다.

16606117940076.jpg“오늘 데뷔하셨지만, 아무도 노리지 못하시겠군요.”

왕세자의 말에 왕비가 아들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1788852.jpg“그러게나 말이에요. 칼리에르 공의 정보력은 사방에 뻗쳐 있다더니 헬레인 공주까지 찾아내고, 참 대단해요.”

라이킨은 나지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16606117888545.jpg“아주 오래전부터 약속된 결혼이라, 저 혼자만 알고 있었습니다. 저희의 결혼을 이 자리에서 두 분 폐하께 고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칼리에르 공 부처가 처음으로 함께 참석한 공식행사였다. 국왕의 어깨가 으쓱해지라고 슬쩍 감사를 표한 라이킨은 소렐이 어서 그의 팔을 잡도록 슬쩍 붙어 섰다. 아까부터 왕세자 라이오넬의 시선이 계속 소렐에게 붙어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1660611788852.jpg“데뷔를 축하하오, 공비.”

16606117888539.jpg“감사합니다, 폐하.”

소렐은 국왕의 축하에 감사하며 라이킨의 팔을 붙잡고 물러났다. 이제부터는 데뷔탕트들이 국왕부처에게 인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따로 칼리에르 공작부처와 먼저 인사하는 시간을 가진 국왕의 속셈이 뻔하긴 했다. 칼리에르 공이 이렇게 직접 왔다고 자랑도 하고, 공이 바라는 대로 소렐 이드리스를 만천하에 헬레인 공주가 맞다고 공인도 하고, 그래서 왕권을 더 굳히려는 것이다. 국왕 역시 지나치게 오래 살았고, 또 앞으로도 수백 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 뱀파이어의 힘이 필요했다. 척을 져봤자 국왕의 손해였다.

16606117888539.jpg“다이애나가 저기 있어요.”

소렐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다이애나를 바라보았다. 친구가 국왕폐하께 잘 인사하고, 좋은 말씀을 들었으면 좋겠다.

16606117888545.jpg“그렇군요.”

라이킨은 방싯방싯 잘 웃는 제 아내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힐끗 눈을 들어보니 젊은 왕세자의 시선이 아직까지도 소렐에게 가 있었다.

16606117888545.jpg‘왕세자 정도면 적당히 하고 시선 처리 좀 할 것이지.’

왕세자는 젊다. 아니, 어리다. 이제 갓 스물넷, 한참 어렸다. 아직 치기 어린 나이라 저렇게 시선 갈무리를 못하고 갑자기 등장한 칼리에르 공비에게 시선을 두는 거다. 아내가 가장 아름답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설픈 연적을 자칭하는 애송이는 돌아다니는 파리보다 더 귀찮고 하찮았다.

16606117888539.jpg“라이킨, 사비나가 그러는데 오늘 만찬 엄청 맛있을 거래요.”

그걸 그새 또 친구한테 들었어? 어느새 가까이 온 친구들과 조잘조잘 말하더니, 그걸 또 남편에게 알려주겠다고 뽀르르 온 게 예뻐서 라이킨은 입가를 늘어트려 웃었다.

16606117888545.jpg“그렇습니까, 기대되는군요.”

사소하고 별거 아닌 이야기였다. 딱 데뷔탕트들끼리 할 만한 이야기였지만, 라이킨은 소렐이 하는 이야기라면 아무리 시답잖은 이야기라도 충실하게 듣고 대답했다.

16606117888539.jpg“국왕폐하는 콧수염을 아주 공들여 기르시네요.”

16606117888545.jpg“예, 유명하지요.”

16606117888539.jpg“왕세자 전하는 처음 봤어요. 잘생기셨다고 하더니 정말이네요.”

라이킨은 소렐을 돌아보았다. 뱀파이어들이라면 움찔거릴 정도로 기괴한 목놀림이었지만,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고 다른 쪽을 보고 있던 소렐 역시 그랬다.

16606117888545.jpg“아, 그렇군요.”

마치 처음 춤 연습을 했던 때와 같은 매끄러운 말투에 소렐이 고개를 들어 다시 라이킨을 바라보았다.

16606117888539.jpg“라이킨은 왕세자전하를 별로 안 좋아해요?”

16606117888545.jpg“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16606117888539.jpg“그런 것 같아서요.”

16606117888545.jpg“여태까지는 별 관심 없었는데 지금부터는 무척 싫어하기로 했습니다.”

지금부터, 앞으로도 끝까지. 칼리에르 공과 왕세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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