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데뷔탕트 (15)2021.02.03.
소렐의 눈은 마냥 까맣지만은 않았다. 빛을 받으면 밝아졌다. 언뜻 황금색이 섞인 것 같기도 했다. 라이킨은 그 눈이 놀라서 그만을 바라보는 것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느꼈다는 것을 알자마자 동시에 쓰게 일그러졌다.
‘쓰레기가 따로 없군.’
마냥 어린 아가씨가 사교계에 데뷔해서 이런저런 만남을 고대하고 있는 거야 당연했다. 그 마음에 질투를 해놓고서 그녀가 매달리듯 바라보는 눈빛에 아주 은밀해서 더 더러운 쾌감을 느끼다니, 말 그대로 쓰레기가 따로 없었다.
‘시도 때도 없나.’
저렇게 아름다운 공비를 두고 공작이 시도 때도 없이 침대 위의 일만 떠올리고 있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라이킨은 적어도 그렇게 주장하고 싶었지만, 소렐 앞에서는 차마 티 낼 수 없는 추잡하고 더러운 욕망이다.
“네…….”
그러나 그가 심술이었다며 수습하기 전에 소렐의 힘없는 대답이 먼저 나왔다. 그가 빠져나가고서도 얼마간 허공에 머물러 있던 작은 손이 스르르 내려앉아서 치마 사이로 감춰졌다. 아차 싶었던 라이킨이 그녀를 붙잡기도 전에 소렐은 뒷걸음질을 쳤다. 순식간에 그들 사이의 거리가 벌어졌다. 요즘 유독 변덕스러운 남자가 감당하기엔 힘들 정도로 먼 거리였다.
‘아, 제기랄.’
라이킨은 차마 헬레인 공주님 앞에서 내뱉을 수 없는 욕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소렐이 뒤로 돌아버렸다. 그녀는 몇 걸음을 힘없이 걸으며, 다른 생각을 하던 와중에 툭 던져진 라이킨의 질문을 다시 제대로 곱씹어보았다. 그리고 라이킨이 그녀를 붙잡기도 전에 다시 홱 돌아섰다.
“라이킨은 내가 무도회에서 망신을 당했으면 좋겠어요?”
물어오는 목소리가 사나웠다. 미간은 무섭게 찌푸려져 있었다.
“아니, 그건 아닙니다.”
반사적으로 결코 아니라는 대답부터 튀어나왔다.
“그럼 라이킨은 나랑 춤을 추고 싶지 않아요?”
그는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서 입을 함부로 놀렸다간 사납고 용맹하기로 이름난 헬레인 토끼에게 맞아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물론 가장 강한 기사이자 소리 없는 암살자인 칼리에르 공이 결코 그럴 리가 없었지만, 그는 소렐이 때린다면 그냥 잠자코 맞아야 했다. 그냥 그래야 했다. 그건 그가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어떤 강력한 법칙이었다.
“그런데 왜 연습이 필요 없어요?”
뾰족하게 날선 질문은 그에게 감히 대답을 허락하지 않았다.
“라이킨이랑 추는 건 특히 잘 춰야 할 거 아니에요? 난 그러고 싶어요! 그런데 라이킨은 내가 못 췄으면 좋겠어요?”
“예.”
“거봐요! ……네?”
또박또박 따지던 토끼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전혀 못 추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공주님은 아주 잘 추실 게 분명하군요. 발이 가벼우니까요.”
그는 시선을 내리깔아서, 그녀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새파란 시선에 든 발이 식어 내리는 듯하다.
“그러니 연습하지 마시지요.”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다. 너무나 현명한 남자는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천연덕스럽게 부렸다.
“저는 공주님이 못 추셔도 충분히 무마할 수 있으니 저와 춤추시고, 다른 남자들의 춤 신청은 거절하십시오.”
어린 공주님이 마땅히 이것저것 맛보고, 경험하게 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건 아주 안일하고 짧은 생각이었다. 그는 스스로가 얼마나 치졸하게 바뀔 수 있는지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도 아이나 부릴 법한 심술과 고집을 부려가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못이 박히도록 가르친 기사도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었다. 날 때부터 천한 놈이라, 귀하신 공주님을 보니 정신을 못 차리는 건가.
“아니면 딱 한 번만 다른 남자와 추시고, 그놈의 발을 마구 밟아버린 걸로 유명해지세요. 허면 앞으로는 공주님에게 춤을 신청하는 남자는 저밖에 없을 테니.”
소렐은 누군가에게 등이 떠밀린 것처럼 타박타박 걸어와서 다시 거리를 좁혔다. 검은색과 우아한 황금색이 어룽진 눈이 그를 숨 막히게 했다. 소렐은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를 사로잡았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예뻤다.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다른 놈과 춤을 추는 생각만 해도 이 감정변화가 없던 뱀파이어의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나도 라이킨이 다른 여자한테 춤 신청을 한다면 조금 싫을 것 같아요.”
그 조그만 중얼거림만으로도 순식간에 그는 함락되었다.
“안 합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처음부터 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소렐은 또다시 느껴지는 그 묘하고 이상한 열기가 이젠 낯설고 부끄럽지 않았다. 라이킨이 빠르게 질주하는 그녀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어도, 어쩐지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도 연습은 해요. 나는 라이킨 발 밟기 싫다고요.”
“공주님이 밟으셔도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하자고요! 해야 해요!”
강하게 말하는 토끼 공주님은, 안 된다는 말은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왕실무도회에서 첫 춤 상대의 발을 밟아요?”
“저는 평생 밟으셔도 좋습니다.”
소렐은 라이킨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하긴 어린 공주님에게 이해가 되지 않으려나. 아직까지 한참 더 자라야 할 아내를 두고 지금 이게 무슨 유치하고 치사한 짓인가.
“싫어요. 내 데뷔 춤이 엉망인 건 내가 용납할 수 없어요.”
“……예.”
공주님의 소중한 사교계 데뷔는 당연히 중요했다. 그의 질투보다 더 중요했다. 라이킨은 순순히 접었다.
“그러니까 심술 그만 부려요.”
소렐은 쭈뼛대면서도 작은 손으로 그의 손을 먼저 잡았다.
“다른 애들은 사교계에 데뷔해서 신랑감을 찾는다지만, 나는 이미 결혼했잖아요.”
마지막 문장을 말하는 소렐의 뺨이 터질 듯, 장미색으로 물들었다. 햇볕을 받아 아름다운 갈색이 언뜻 보이는 머리카락 아래, 뽀얀 뺨이 붉게 물들었다.
“라이킨의 아내잖아요.”
약간 더듬거렸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하고 사랑스러운 입술로 분명하게 말했다. 칼리에르 공은 아내에게 손을 잡히고, 목줄도 잡히고, 심장까지 잡힌 채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당장 집어삼키고 싶은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건 포식자의 당연한 본능이건만, 손을 뻗어 낚아챌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해요, 네?”
그는 결국 손을 끌어당기는 소렐에게서 황급히 시선을 떼어냈다. 이 감이 좋은 토끼는 위협을 바로 알아차리고 도망가는 데는 도가 텄다. 그의 본능이 부르짖는 대로 당장 소렐을 낚아채서 다급히 삼키는 건 안 될 일이다. 참아야 했다. 아직 덜 자란 어린 공주님이다. 참고, 참고, 또 참아야 했다. 그게 이토록 힘든 일인지 몰랐다. 인내심이 너무나 쉽게 툭툭 깎여나가고 있었다. 도끼로 내리쳐서, 순식간에 얼마 남지도 않았다.
“네?”
소렐은 시선을 피하는 그의 손을 다시 한번 잡아당기며 물었다.
“예.”
그는 겨우 대답했다. 오랜 세월 동안 군림하고 지배하던 이가 힘이라곤 하나도 없고, 요령도, 또 꾀도 부릴 줄 모르는 토끼에게 사로잡혔다.
“나는 라이킨한테 배우고 싶단 말이에요. 자꾸 심술부리면 에벌린에게 새 선생님을 구해달라고 할 거예요. 여긴 수도라서 춤을 잘 추는 사람이야 많을걸요.”
그건 지나치게 아름다운 토끼 탓이 아니라, 파렴치하고 양심이라곤 없는 뱀파이어 탓일 거다.
“죄송합니다.”
그는 양손을 내밀어 소렐의 손을 잡고, 허리를 숙여 그녀와 이마를 맞댔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접촉이었다. 이 정도로 만족하고 참아봐야 했다.
“반은 농담이었죠?”
소렐은 아직까지도 사랑스럽게 볼을 붉힌 채 물었다.
“전부 다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아, 어쩐지…….”
소렐은 에휴, 하고 한숨을 쉬었고, 라이킨은 약간 웃었다. 그녀는 그 웃음소리가 무척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심술을 부리는 것조차 귀족처럼 품위 있는 말투와 태도로 일관되게 행동할까.
“왜요, 내가 다른 사람한테 춤 신청을 받는다는 건 좋은 일이잖아요.”
“저는 딱히 좋지 않습니다. 속이 좁아 그런지.”
그리고 파렴치하고. 지금도 바로 아래에 보이는 좁은 어깨를 휙 껴안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걸, 소렐은 아마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라이킨의 한숨만 짙어졌다. 펠릭스 이드리스가 이래서 그를 싫어했다는 걸,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라이킨은 속이 좁지 않아요.”
“아니, 속도 좁고 양심도 없고 치사한 성격입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난 잘 모르겠는데.”
소렐에겐 좋은 남편이었다. 비록 그녀에겐 남편이란 단어 자체가 아직까지도 낯설고, 어쩐지 그녀와는 거리가 너무나 먼 존재로 느껴지지만, 어쨌든 그랬다.
“예. 계속 모르셔야지요.”
너는 평생 몰라야지. 지금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지 못해야지. 펠릭스 이드리스는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어떤 사람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내, 메리가 라이킨을 딸의 가디언으로 지목했을 때 혼자 펄펄 날뛰었다. 물론 헬레인의 예언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결국 수긍했지만, 어쨌든 대마법사는 이 교활하고, 저밖에 모르는 뱀파이어를 잘 알았다.
“다시 시작하실까요, 공주님?”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자신이 아내라는 것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공주님이, 다른 놈과 춤을 추는 것조차 불쾌해하는 남자인 것을.
* 소렐은 라이킨의 손을 잡는 것에 점점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 밀착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승마나 펜싱도 몸이 부딪치는 순간이 종종 있었지만, 금방 떨어져서 상관없었다. 하지만 춤은 달랐다. 내내 손을 잡고, 서로 호흡을 맞춰가며 다음 걸음을 내디딘다. 소렐은 그가 얼마나 노련하고 민첩하며, 동시에 강인한 몸을 가지고 있는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데뷔 때문에 긴장하셨어요, 공주님?”
에벌린이 마지막으로 소렐의 머리를 손질해주며 물었다.
“아뇨, 사실 별생각 없어요. 무도회는 그냥…….”
그녀는 거울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공작저의 하녀들이 모조리 붙어서 왕실무도회 채비를 전부 다 마친 상태였다.
“가서 친구들을 만나는 건 기대돼요.”
이미 언론의 공격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소렐은 당장 그녀가 어떻게 헬레인 왕조의 마지막 남은 공주인지 해명을 해야 할 지경이었으나, 라이킨은 그녀가 그렇다는 걸 최대한 모르게 했다. 게다가 지나친 공격을 더 하기엔 칼리에르 공의 권위가 막강했다. 어쨌든 오늘 왕실무도회에 모든 눈과 귀가 쏠렸다.
“즐겁게 보내고 오세요.”
에벌린은 하녀가 조심스럽게 내미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티아라를 소렐의 머리 위에 내려놓고 고정시켰다. 왕실 보석에 조예가 깊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아볼, 헬레인 왕비와 여왕의 가장 커다란 티아라였다. 헬레인 왕실의 적통을 잇는 여성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티아라였다.
“잘 어울리시네요, 공주님. 무척 예뻐요. 우리 공주님, 사교계 데뷔를 축하드려요.”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빙긋 웃은 뒤 하녀들과 함께 물러났다. 문이 열리고, 흰색 보타이를 매고 가장 격식 있는 정장을 갖춘 라이킨이 들어왔다. 그는 훤칠하게 컸는데, 손에 커다란 장미다발을 쥔 채 잠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던 소렐은 그를 돌아보았다.
“……이대로 초상화 화가나, 아니면 사진사라도 불러다 공주님을 기록하게 하고 싶군요.”
한참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뽀얀 피부에 펼쳐진 반짝거리는 드레스와 티아라, 그리고 특히 발레시나스 공작부인만이 할 수 있는 블루사파이어는 소렐의 눈보다 빛나지는 않았다.
“영원히 보고 싶을 만큼 아름다우십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순수한 감탄만이 가득했다. 오랫동안 살면서 아름다운 것들은 차고 넘칠 만큼 보았을 텐데, 라이킨은 마치 난생처음으로 아름다운 존재를 본 것처럼 소렐에게서 시선을 떼질 못했다. 그녀는 그만 또 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으……, 어……, 고마워요, 라이킨도 멋있어요……, 늘 그랬지만!”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찬사에 대해 보답한 소렐이 들썩거렸다.
“일어나지 마십시오. 앉아 계세요.”
라이킨이 그녀를 대신해 성큼성큼 다가와서 연한 분홍색과 크림색이 뒤섞인 풍성한 장미다발을 정중하게 내밀었다.
“사교계 데뷔를 축하드립니다.”
“아, 고마워요. 너무 예쁘다……!”
소렐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하게 바뀌었다. 방실방실 웃으며 장미를 받아 안는 그녀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이거 사교계 데뷔하는 애들은 항상 받는 거라면서요. 꼭 분홍색이랑, 크림색으로.”
“예.”
소렐에 대한 그의 마음을 생각하자면 글쎄, 여린 봉우리를 맺은 장미들보다는 피처럼 새빨갛고 진한 장미를 잔뜩 침대 위에 뿌려놓는 게 맞지 않을까.
“너무 예뻐요. 고마워요, 라이킨.”
“하나 더 있습니다.”
응? 뭐가? 소렐은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남자는 스스럼없이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너무 늦게 드려서 죄송합니다, 공주님.”
그가 내민 상자의 뚜껑이 우아하게 열리고, 찬란하게 빛을 내뿜는 반지를 본 소렐이 또 눈을 휘어가며 웃었다. 저 아가씨는 뭐 저렇게 예쁘게 웃을까. 계속 웃도록 온 세상의 보석을 다 쓸어다가 주고 싶게.
“주문이 워낙 까다로워서 늦은 거라면서요.”
“마땅히 까다로워야지요. 공주님께서 하실 것인데. 마음에 드십니까?”
소렐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과하지도, 또 그렇다고 해서 모자라지도 않은 반지였다. 그녀는 그가 반지를 끼워주는 것을 보며 또 환하게 웃었다.
“몸에 두른 게 다 반짝반짝 빛나서 내가 묻혀버릴 것 같아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공주님이 웃으시면 그보다 더 빛나는 것도 없으니까요.”
그는 조각같이 생긴 얼굴로 침착하게 민망한 말을 했다. 듣던 사람마저 ‘그런가?’ 하고 설득될 정도로 진중한 목소리였다.
“오늘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즐기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신경 쓸 것도, 또 걱정할 것도 없었다. 엘펜하임이 본다면 뒤집힐 티아라를 쓰고서 소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가실까요?”
그는 소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순식간에 드레스 자락이 그의 긴 다리를 휘감았다. 칼리에르 공의 사륜마차가 저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렐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팔을 잡았다. 라이킨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가까이 와서 그녀가 편안하게 의지할 수 있도록 받쳐주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의 거리가 또 줄어들었고, 그녀는 온몸을 휘감는 뱀파이어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명치인지, 뱃속인지, 어딘지 모를 곳이 간질거리고, 발걸음이 나는 듯이 가벼웠다.
“라이킨도 왕실 공식행사에는 아주 오랜만에 가는 거라고 들었어요.”
마차에 그녀를 태운 뒤, 드레스 자락을 직접 정리해주고 있던 라이킨이 약간 늦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수십 년 만이었다. 그러니 페르난데스 7세가 직접 친필로 초대장까지 보낸 것이다. 칼리에르 공이 국왕이 주최하는 왕실무도회에 나타난다는 것만큼 국왕에게 힘을 실어주는 모습도 없으니까.
“나 때문이죠, 고마워요.”
라이킨은 그녀의 맞은편에 점잖게 앉았다.
“더한 부탁도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글래스턴 추기경 틸로네 리퀘도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일부러 가는 것도 있다.
“어디든 함께 갈 테니 분부만 하십시오.”
온몸에 권위를 두른 남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칼리에르 공작저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왕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