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데뷔탕트 (14)2021.01.30.
소렐 이드리스는 활달하고 명랑하며, 아직 어리지만 열심히 배우려고 애쓰는 성격이었다. 칼리에르 공비전하라는 영예로운 호칭은 좀 많이 부담스럽고, 그만큼의 책임도 따르지만 소렐은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 중이다. 아니, 사실 칼리에르 공은 자신의 아내가 책임이나 의무를 지는 건 딱히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여느 스무 살, 어린 영애들처럼 사교계를 즐기고, 대학에 가서 원하는 공부를 하면 된다. 그뿐이었다.
“왕실무도회 그거 뭐 별거 없어.”
미리 사교계 데뷔를 해본 사비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데뷔탕트들이 줄지어서 국왕폐하랑 왕비폐하께 인사를 하고, 그러고서 첫 춤추고, 그다음에는 마음에 드는 상대를 찾아서 또 춰야지. 그게 다야. 아, 눈치 봐가면서 열심히 먹고.”
이번에 데뷔하는 소렐과 다이애나는 그 말을 아주 열심히 들었다.
“그런데 소렐은 다를걸, 아마?”
“나? 나는 왜 달라?”
“소렐 너는 칼리에르 공비니까 가장 먼저 인사하지. 게다가 서열상으로는 칼리에르 공이 귀족 중 최고고, 너는 헬레인 공주님이니까.”
공주님. 그 낯선 단어에 친구들은 신기하면서도 조심스럽다는 듯 소렐을 바라보았다.
“우리 엄마네 집은 150년도 전에 망했는데……?”
“와, ‘우리 엄마네 집’이래. 헬레인 왕조를 저렇게 말하는 사람 처음 봐.”
“나도. 그런데 저렇게 말하는 애가 내 친구야. 와.”
소렐은 친구들의 말에 손을 내저었다.
“진짜 사실이잖아. 그러니까, 날 왕족 취급해줄 리가 있어?”
“아니야. 우리 엄마가 그랬어. 한 번 왕족은, 나라가 망해도 왕족이래.”
루비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진짜?”
소렐은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그러겠는가.
“진짜. 무조건이랬어. 그러고 보니 사비나, 그런 예가 꽤 있지 않아? 뭐더라? 거기, 나렌베르크 말야.”
루비의 말에 사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렌베르크도 엘펜하임한테 70년 전에 공식적으로 멸망당했지만, 그래도 나렌베르크 왕자는 왕자님 대우해주잖아. 뭐, 거긴 또 다른 왕국들과 결혼을 많이 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게다가 나렌베르크 왕자와 그 가족들은 살뜰하게 재산을 챙겨 도망쳤다. 그래서 국민에게는 지탄을 많이 받았지만, 왕족들과 귀족들은 그 재산과 얽힌 결혼을 봐서라도 그들을 왕족 대우해주는 중이었다. 그래도 사돈인데, 격을 낮출 수는 없지 않나. 하지만 그게 지금 가장 언론에서 물어뜯는 문제인 이상, 사비나는 현명하게 입에 담지 않았다.
“그렇구나. 헬레인 왕조는 딱히 다른 왕조들이랑 정략결혼을 한 건 아닌 모양이던데.”
소렐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튼 소렐도 아마 비슷할 거야. 다들 왕실무도회 준비는 다 했어?”
주의를 환기시키는 사비나의 질문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 근데 춤은 솔직히 좀 자신이 없네.”
소렐은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러고 보니 국왕에게 예를 표한 후에는 춤을 춰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가 손을 맞잡고 추는 바로 그 춤 말이다.
“첫 춤이 그렇게 중요해?”
소렐의 질문에 모든 친구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엄청나게 중요해. 거의, 약혼자가 있는 애들은 무조건 약혼자랑 춰.”
루비가 딱 잘라 말했다.
“데뷔탕트들은 거기에서 이번 시즌에 시집을 가냐 못 가냐가 갈리는 거니까, 중요하지.”
졸업을 하기 전까지는 딱히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사비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예쁘다 싶으면 남자들이 줄줄이 몰리거든.”
“아니면 돈이 많다거나.”
“오, 맞아. 돈이 최고지. 첫 춤을 뭐, 아버지랑 추는 애들도 있고.”
“으, 우리 아빠가 지금 벼르고 있는데 난 죽어도 싫어.”
다이애나는 몸서리를 쳤고, 친구들은 깔깔 웃었다.
“왜 그래, 다이애나? 아빠의 사랑을 무시하지 말아줘.”
“아, 싫단 말야. 나도 잘생긴 신사랑 춤추고 싶다, 뭐.”
잘생긴 신사라.
“그러면 나는 무조건 라이킨이랑 춰야 하는 건가……?”
소렐이 웃다가 말고 중얼거렸다.
“그러네. 결혼을 해서 데뷔하는 거잖아. 그렇지, 사비나?”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한참 갸우뚱거리던 조슬린이 사비나에게 물었다.
“당연히 무조건 교수님이랑 춰야 하는 거 아냐? 소렐도 그럼, 다이애나랑 같이 잘생긴 신사를 찾아보게?”
사비나의 말에 또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교수님 말고 더 잘생긴 신사가 있겠어?”
“없어, 교수님 빼곤 아무도 잘생기지 않았……, 아, 아니지.”
조슬린이 말을 황급히 정정했다.
“아니야. 왕세자전하도 아주 미남이시잖아.”
“왕세자전하는 약혼 안 하신대? 엄청 빨리 결혼하실 줄 알았는데 벌써 스물다섯이시잖아.”
왕세자가 잘생겼구나. 소렐은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이 나라 왕실에 대해서는 시골 노인이 아는 만큼만 알았다. 국왕이 있고, 아주 예쁜 왕비님이 있고, 왕자가 둘, 그리고 공주도 둘이었다.
“곧 소식이 있다고 할 것 같은데, 뭐, 왕세자전하야 어느 나라 공주님이랑 결혼하시겠지, 우리랑은 안 하실 거네요.”
“그래도 꿈은 꿔볼 수 있잖아.”
“너무 가능성이 없어. 하지만 궁금하기는 하네. 왕세자전하께서 이번에는 누구에게 첫 춤을 신청하실지.”
“그거야 뭐, 항상 형식적인 거였잖아. 난 진짜 관심이 안 간다. 차라리 소렐이 교수님이랑 춤추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소렐, 교수님이랑 춰봤어?”
소렐은 눈을 깜빡거렸다.
“어……, 왕실 무도회 며칠 남았지?”
“나흘!”
“……연습해야겠다…….”
큰일 났다.
* 친구들에게 아주 특별한 대접을 한 소렐은 친구들이 탄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든 뒤 돌아섰다. 처음으로 친구들을 초대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일종의, 칼리에르 공비가 공식적으로 가진 작은 모임이었다.
“친구들은 다 갔습니까?”
아가씨들끼리 노는 곳에는 일절 얼굴을 비추지 않고, 그저 뒤에서 살펴주기만 했던 라이킨이 걸어 나왔다. 소렐은 약간 주춤거리면서 그를 돌아보았다. 낯을 가리는 그 표정이 라이킨의 눈에 걸렸다.
‘뭐지?’
소렐이 그를 경계하는 것만큼 알고 싶지 않아도 바로 알아차리게 되는 게 없다. 그녀는 감정변화가 풍부하고, 표현도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주춤대면서 천천히 돌아보고, 곧장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 있는 건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피곤하신가요, 공주님?”
고개를 젓는다. 라이킨은 바싹 메말라가는 인내심만큼 빠르게 채워지는 조급함을 느끼며 혀로 치아를 슬쩍 핥았다. 눈으로 소렐을 가득 담았다.
“그럼, 연습을 좀 더 하시는 건 어떨까요?”
그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이것저것 하는 게 많았다. 펜싱은 물론이고, 승마도 시작했다. 그 와중에 소렐이 그를 제 침실로 불러낸 일을 계기로, 이젠 마법도 연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소렐이 불러낼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오직,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밖에 없었고, 그는 소렐이 다른 건 절대로 소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소렐이 남편만 소환하면 됐지, 누굴 더 소환한단 말인가. 다른 이를 불러낸다는 건 생각을 해보니 불쾌했다.
“아, 마법 연습이요?”
“예, 공주님.”
소렐이 그를 소환하는 데 성공하면, 그는 무조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니 지금 당장 소환해서 이 먼 거리가 좁혀졌으면 좋겠다. 속에서 올라오는 새까만 욕망은 아주 노골적이었으나, 신사도 아니면서 신사인 척해야 하는 남자는 겉으로는 무조건 다정하게 웃기만 했다. 그는 어쨌든 메리 헬레인 공주가 손수 선택한 소렐 이드리스의 수호기사였다.
“그것도 중요하긴 한데요.”
“그것 말고 중요한 게 또 뭐가 있을까요, 공주님.”
라이킨은 매끄럽게 웃었다.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생겼을 때 제가 공주님 곁에 없으면, 저를 무조건 부르셔야 안전하지 않습니까.”
아니, 어쩌면 그를 부르는 게 소렐에겐 경우에 따라서 더 위험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항상 연습하셔야지요. 그래야 제가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겠습니다.”
덜기는 무슨. 소렐이 간혹 가다가 그를 소환하는 데 실패해도 걱정이고, 성공해도 정말 위험할 때는 소환할 수나 있으려나 걱정이다. 소렐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다.
“그건 맞는 말인데, 마법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어요.”
“그게 뭘까요?”
소렐은 아주 곤란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저기, 무도회에서 춤을 춰야 한다면서요.”
“예, 그렇습니다. 저와 추셔야지요.”
그녀는 조금 부끄러운 것 같았다. 얼굴에 홍조가 돌더니, 양손을 난감해하며 만지작거렸다.
“그거, 연습해야 해요……. 아빠랑 춰본 지도 오래되어서…….”
“아, 그럼 지금 하러 가시지요.”
“저 진짜 못 할지도 몰라요, 막 라이킨 발을 밟을 수도 있어요!”
요컨대, 그게 걱정이었다는 건가.
“괜찮습니다, 그 정도는.”
칼로 쑤시는 것도 아니고.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니까요.”
“일단 해봅시다.”
아니, 이게 아닌가? 라이킨은 소렐이 쭈뼛대며 그가 이끄는 대로 가지만, 결코 가까이 오지는 않는 걸 유심히 지켜보았다. 뭔가가, 그래, 뭔가가 저 공주님의 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소렐은 정작 춤을 연습해야 한다고 해놓고선, 그가 내민 손을 잡는 것도 머뭇거렸다.
“공주님?”
라이킨은 아무것도 모른다. 소렐은 의아해하는 라이킨의 손을 어쩔 수 없이 잡았다. 그의 손은 아주 커다랗고, 춤을 출 만큼 가까이 다가가면 그녀가 한꺼번에 뒤덮일 정도로 체격이 컸다. 소렐은 자신의 손을 맞잡는 그의 약간 낮은 체온에 심장이 콩콩 뛰자 몹시 부끄러웠다. 라이킨이 알아챌 거다.
“자……, 어디까지 기억하고 계시는지 볼까요.”
그는 아주 능숙했다. 어느새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품 안에 바짝 당겨졌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렸다. 그리고 뱀파이어의 체취와 체온이 그녀를 완전히 잠식했다. 소렐은 라이킨이 불편한 게 아니라, 그녀 자신이 너무 불편했다.
“아버님에게 배우셨습니까?”
소렐은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의 방식이 눈에 보이는군요.”
어린 딸을 발등 위에 올려놓고, 통통한 양손을 잡는 것부터 시작했을 거다. 하나하나, 성인이 된 말쑥한 숙녀가 알아야 할 것들을 가르치라는 병약한 아내의 말에 충실히 따랐겠지. 아이가 좀 자란 후에도 수업은 계속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펠릭스 이드리스는 아주 엄격한 교사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딸과 춤을 추는 게 일종의 애정표현이었나 보다. 그래서 소렐은 아주 완벽하게 모든 춤을 구사하지는 못했다.
“그……래요?”
소렐은 괴상하게 나온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애썼다. 고개를 들자니 푸른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얼른 시선을 내리면 팽팽한 셔츠에 완벽하게 감싸인 그의 두터운 가슴이 보인다. 그냥 푹 안기면 안 될까?
‘아, 진짜 미쳤어!’
소렐은 파드득대며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가 그녀의 발을 밟기라도 했나? 아니면 어디 아픈가? 라이킨이 물었지만 소렐은 또 열심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목소리가 또 이상하게 나왔다. 소렐은 결국 발을 헛디뎠다. 다리가 엉키고,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흘러가던 사고도 결국 뒤엉켰다. 아, 하고 라이킨의 스텝을 따라가지 못하는 순간에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순식간에 붕 떠서 허공을 디딘 소렐은 그녀가 원래 있었어야 하는 곳에 정확히 다시 섰다.
“……죄송해요.”
소렐은 귀가 빨개져서 우물거리며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너무 긴장하신 듯한데, 조금만 긴장을 풀어보세요. 박자를 조금 놓쳐도 되고, 또 못 추면 어떻습니까. 제가 이렇게 안으면 됩니다.”
그리고 메리 헬레인 공주가 애석하게도, 소렐의 두 번째 춤 선생 역시 엄격한 교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렐이 집중하지 못하고 뻣뻣하게 몸을 움직여도 그만, 그의 발을 밟아도 그만이었다.
“아, 죄송해요.”
“발을 좀 밟거나 박자를 놓친 걸로 일일이 사과하시다간 춤은 제대로 못 추실 겁니다.”
라이킨은 입술을 꼭 깨무는 소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이 제대로 안 들리나 보다.
‘나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하지?’
그거야 당연히 딴생각 중이니까 그렇지. 소렐도 알고 있었다. 춤을 연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알았다. 이 춤 연습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는걸. 춤은 모든 신사숙녀의 가장 기본적인 교양 중 하나라지만, 소렐은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니, 어지러운 건 그녀의 마음이다. 그녀를 강하게 안고 있는 굵은 팔이, 간신히 눈을 들었을 때 마주치는 다정한 미소가, 셔츠 깃 사이로 보이는 목울대가,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넓은 품이 그녀를 어지럽게 했다.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왜 하필 춤이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면 얼마든지 침착할 수 있었다. 물론 힐끔힐끔 몰래 쳐다보긴 하겠지만, 그래도 멀쩡하게 대답하고 이상하고 웃긴 반응은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춤은 다르다.
“잘해야 하잖아요.”
소렐은 그의 발을 또 밟고 속이 상해서 중얼거렸다.
“라이킨은 내가 발을 밟아도 괜찮다고 해주고, 실수해도 다 만회해주지만 다른 신사랑 출 때는 그럴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칼리에르 공비가 왜 저러냐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잘해야 하는데, 라이킨과 춤을 연습하는 이상 아무래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게 다 그가 지나치게 매력적인 뱀파이어라서 그렇다. 아빠는 ‘그놈’이 뱀파이어지만 늑대 같은 놈이랬다가, 가장 마지막 순간에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그럼 다른 사람은 말고, 오직 저와 추시면 되겠군요.”
“첫 춤은 그렇죠.”
아빠가 보고 싶네. 소렐은 조금 울적해져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글래스턴에서부터 엔버네스까지, 내내 정신이 없었지만 그녀는 가끔 이렇게 가라앉았다. 아직 아빠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 춤만 추시겠다고요?”
“아뇨, 그건 아니고……, 누가 저한테 춤 신청을 할 수도 있다고 했어요. 인사도 할 거고요.”
소렐은 그 사실을 아빠가 알았다면, 아빠는 분명히 또 항상 늘어놓던 말을 지겹게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렐, 남자애들이 좀 그렇단다. 머리가 좀 굵어졌다 싶으면 그저 여자애한테 수작 좀 걸어보려고 난리가 나는 단순한 생물들이야.’
‘아빠도 그래서 엄마랑 결혼한 거면서.’
‘어, 음……. 그렇지…….’
즐거웠다. 아빠와 아주 행복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짓던 소렐에게 라이킨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래서, 이 남편은 첫 춤만 추고 버려두시겠다, 이겁니까?”
“네……, 네?”
다른 생각에 빠져 멍하니 대답하던 소렐이 되물었다. 다시 영민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순진하고 말간 눈인데, 어쩐지 라이킨은 심사가 뒤틀렸다. 공주님은 예뻤다. 무척 예뻤다. 왕실무도회에 등장할 칼리에르 공비이자 헬레인 공주에게 안 그래도 이목이 집중된 상황인데, 등장하자마자 별 잡놈들이 이 예쁜 공주님을 보겠지. 그녀 역시 데뷔탕트들과 함께 비슷한 분위기에 빠지게 될 거고.
“연습은 그럼 그만하지요.”
그는 걸음을 멈췄다.
“더 이상 연습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소렐이 움찔거리며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는 평소처럼 다정하게 웃고 있었지만, 뭔가 달랐다. 그가 그녀의 손을 먼저 놓았다. 명백히 심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