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데뷔탕트 (13)2021.01.27.
성기사는 신성한 빛을 따라,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항상 가르침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건 어설픈 초보 견습 기사들의 이야기고, 카메론 셀레스트는 쓴맛 단맛 다 맛보고 산전수전까지 다 거쳐서, 엘펜하임 성기사단은 딱히 신성하지도 않은 떼강도들의 정치적 집합소라는 걸 이미 깨달은 중견이었다. 그는 그래서 매우 방만한 생활을 했다.
“내가 너 때문에 낮술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좋아하잖아, 왜 이래?”
카메론의 푸념에 폴리아나가 킬킬대며 웃었다.
“……너도 웃을 줄 알았구나.”
그녀가 웃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카메론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중얼거렸다.
“네 앞에서는 웃을 일이 없어서.”
폴리아나는 그녀답게 딱 잘라 말했다.
“웃을 줄도 알고, 이성을 잃어버릴 줄도 알고, 연적을 대놓고 또 건드려서 사랑하는 사람한테 쫓겨나고. 폴리아나 그린 사람 다 됐는데?”
카메론의 평가는 인정사정없었다. 사실을 대놓고 말해서 아픈 곳을 더 들쑤셨다. 그래서 폴리아나도 똑같이 대놓고 대답해줬다.
“닥쳐.”
“그래서, 왜 그랬어?”
“왜 그랬긴.”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멍청한 게 싫어. 그리고 그 ‘애’는 멍청해.”
“그런 편이야?”
“눈치도 안 보고, 그저 해맑아서……. 다른 사람들은 지 때문에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는데 감사한 것도 모르고, 왜 그런지도 모르고…….”
폴리아나의 눈에 혐오가 그려졌다.
“뭔지도 모르고서 헤헤대고 있으면서 혈통만 타고났다고 그걸로 사람을 후려치는 못된 짓은 또 어디서 배웠는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카메론이 픽 웃었다.
“너 스무 살짜리를 상대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폴린? 소렐 이드리스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장본인이 누군데? 네가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야.”
그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똑똑한 폴리아나가 일부러 무시하는 사실을 들이댔다.
“네가 감히 공비전하에게 덤볐잖아. 내가 네 그 시선을 알지. 사람 내리깔아보는 시선. 그 여자애도 그걸 알고 가만 안 있었겠네. 누가 먼저 시작했어? 네가 먼저 시작했지. 너도 알고 있잖아.”
폴리아나는 정곡을 또 찔렸다.
“아, 그래, 그래. 하지만 어떻게 결혼반지가 없다는 것도 몰라? 그게 얼마나 문제인데.”
“오, 또 시작이네. 나한테 그런 식으로 치명적인 문제를 슬쩍 흘리지 마, 폴린. 추기경이라면 당장 신이 나서 써먹을 문제지만 나는 추기경에게 귀띔도 안 해줄 거야, 절대로.”
폴리아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재미있어하기만 하는 카메론을 쳐다보았다.
“난 너라는 연줄을 아직 잃을 수 없거든. 결혼반지 문제가 추기경 입에서 나오면, 넌 칼리에르에게 끝이야, 끝.”
“이미 끝났어.”
“웃기지 마, 그래놓고 다시 재기할 기회를 노릴 거면서.”
카메론은 낄낄 웃었다.
“이쯤에서 인정해, 그냥.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연적을 미워할 백 가지 이유를 대지 말고, 그냥 솔직하게 인정하라고, 폴린.”
“좋아.”
폴리아나는 양손을 들어 보였다.
“난 걔가 미워. 너무 싫어. 걔가 잘못한 게 아니란 건 알아.”
안다. 그저 그 말간 눈이 그냥 미웠을 뿐이다.
“아는데 자꾸 공격하게 돼. 나도 날 어쩔 수가 없어. 저 혼자서 천진하게 모르는 걸 보면 나만 속이 터진다고.”
카메론은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네가 널 어쩔 수 없다는 건 변명이지. 내가 여태까지 들어본 변명 중에 가장 최악이네.”
“아, 그래?”
“그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그냥 아주 못돼먹은 것뿐이야. 네 사랑은 끝났어, 친애하고 못돼먹은 폴린.”
독설을 쏟아부으면서도 카메론 셀레스트는 굳이 두 사람이 작살낸 술값을 전부 계산했다. 그런 뒤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대놓고 들은 폴리아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이제 유부남이야. 성기사로서 말하는데, 정신 차려, 이 정신 나간 여자야.”
웃으면서 상냥하게 말한 카메론은 폴리아나 그린을 남겨두고 술집을 떠났다. * 왕실 무도회가 곧 열릴 것이다. 초대장이 발송되고, 왕궁은 단장에 들어갔다. 연회를 담당하는 주방장, 정원을 아름답게 꾸밀 정원사, 음악을 담당하는 왕실 음악가 등, 무도회에 참여하는 이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만 바쁜 게 아니었다. 특별한 의상을 담당하는 의상실은 이때가 대목이었다. 가볍고 날렵한 무도화를 제작하는 신발장인, 왕궁의 샹들리에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을 발할 보석을 손보는 보석장인, 덩달아 수염과 머리를 다듬고 가꾸는 이발사들까지 바빠졌다. 물론, 무도회는 철저히 상류층과 부유한 중류층에게만 국한된 이야기였다.
“어서 오세요, 숙녀분들.”
칼리에르 공작저의 문이 열리고, 집사가 직접 나와서 손님들을 환영했다. 네 명의 숙녀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집사가 안내하는 대로 안으로 들어섰다. 1대 칼리에르 공이 사망하고 난 후, 제대로 열린 적이 없었다는 엔버네스의 칼리에르 공작저가 오랜만에 공식적인 손님을 맞이했다.
“공비전하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비전하! 숙녀들은 흐읍,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내려다보고 있는 홀에는 아주 오래된 위엄이 가득했다. 어찌나 넓은지, 왕궁에서 열릴 왕실무도회 장소만 한 것 같았다. 이제 갓 스물, 성인이 된 숙녀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칼리에르 공작저의 우아하고도 부유한 건물에 감탄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
칼리에르 공비는 이곳이 지나치게 넓고, 또 천장이 높다고 생각했지만 이 아가씨들에겐 그저 모든 것이 멋있어 보였다. 모두가 오늘 초대받은 손님들을 부러워했다.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바로 ‘그’ 칼리에르 공작저에 초대받다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지? 초상화며 그림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깨끗한 백색 벽과 기둥이 틈틈이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그저 서 있었다.
“이쪽입니다.”
칼리에르 공작저는 엔버네스에 있는 저택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하긴 괜히 칼리에르 공작저겠나. 1대 칼리에르 공이 엄청난 공을 세워가며 얻어낸 작위와 부귀영화, 그리고 위엄이었다. 그러나 2대 칼리에르 공의 부인인 칼리에르 공비는 위엄 있게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입구를 서성이다 친구들을 보곤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왔어?”
“소렐!”
항상 조용하던 공작저에 소녀들이 까르르 웃는 목소리가 금세 들어찼다. 사비나 로체를 비롯한, 글래스턴 대학 매그놀리아 칼리지의 신입생 예비과정을 함께 들었던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다.
“와줘서 고마워. 요즘 다들 바쁘다면서?”
소렐이 수줍게 말하며 친구들의 손을 잡았다.
“바쁠 게 뭐가 있어? 이제 방학인데?”
친구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마주 보았다.
“요즘 사교계 준비로 모두가 다 바쁘다는 말을 들었어. 아니야?”
“에이, 소렐, 그거야 뭐.”
친구들은 하하 웃었다.
“그거야 늘 하던 건데 뭐. 이번에 데뷔하는 사람은 우리 중에는 너랑 다이애나뿐이고.”
“그렇구나.”
소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사비나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는 준비 다 했어?”
소렐에게 향하는 질문이었다. 당연히 모두가 궁금해하는 게 너무나 많았다.
“응, 앉아서 이야기하자.”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네가 그…….”
소렐은 친구들에게 자리를 권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 칼리에르 공비라고…….”
눈치를 보며 저절로 낮게 낮춘 목소리에 소렐은 약간 미소를 지었다. 미안함을 가득 담은 미소였다.
“그게 그렇게 됐어.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그럼 진짜 칼리에르 교수님이 칼리에르 공이야?”
소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칼리에르 교수님이랑 결혼한 거야?”
이번에 묻는 목소리는 좀 더 낮았다. 친구들의 눈이 당장 그녀의 왼손 약지에 가는 걸 보고서야 소렐은 결혼반지가 사교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다시 한번 실감했다. 시골에서 소렐은 결혼반지란 것에 의미를 부여할 정도로 충분히 나이가 차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았었다. 아빠가 끼고 있는 아무 무늬도 없는 금반지는 아빠 거. 그게 다였다.
“으응.”
“언제부터?”
“언제 결혼했어?”
“어디서 결혼했어?”
“결혼식은 몰래 한 거야? 낭만적이야!”
“교수님은 잘해주셔?”
소렐이 한번 고개를 끄덕였는데 연달아 질문들이 쏟아졌다. 그나마 침착하고 차분하며, 이 결혼의 뒷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던 사비나가 친구들을 진정시켰다.
“한 번에 하나씩만 물어보자. 소렐이 입이 열 개가 있어도 대답 다 못 하겠다.”
그녀가 까르르 웃으면서 하는 말에 나머지 어린 숙녀들은 조금 멋쩍은 표정이 되어 사과했다.
“미안, 우린 진짜 놀랐어.”
사과하는 숙녀들 사이에서 다이애나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아니, 사실 나는 조금 눈치를 채고 있었어. 우리 사촌 언니가 극장에서 칼리에르 공을 봤다고 했잖아. 그런 이야기들을 다 듣고,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다 들어본 다음에 혹시나 하긴 했는데, 그래도 진짜라니까 너무 신기한 거 있지?”
모두의 심정이 그랬다. 점점 기사들이 구체화되기 시작하면서 혹시, 혹시 하다가 마침 엔버네스로 온 소렐이 칼리에르 문장이 찍힌 초대장을 보내자 역시나가 된 것이다. 그래도 너무나 놀라웠다.
“내 옆에 바로 칼리에르 공비가 있을 줄은 몰랐어!”
어린 숙녀들이 방문한다 하여 특별히 열린 응접실에 아기자기한 다과며, 특별하고 향기로운 차들이 차려졌다.
“일부러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닌데, 라이킨……, 그러니까 교수님이랑 나는 그래도 웬만하면 조용하게 학교를 다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미안해, 반지도 끼지 않았고, 너희들한테 말하지도 못했어.”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나라도 조용히 다니고 싶겠더라.”
숙녀들은 손사래를 치며 저마다 한마디씩 꺼냈다.
“그래. 신문기사 나는 거 보니까 무섭더라. 내가 당하는 거였으면, 으, 너무 끔찍해.”
“우린 솔직히 화가 나는 것보다 걱정부터 되던데? 소렐 너 괜찮아?”
괜찮아? 여러 쌍의 눈이 소렐에게 걱정스레 모였다.
“응, 괜찮아. 어차피 그중에 사실인 건 없거든.”
소렐은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에르 공비가 처음 가지는 자그마한 사교모임은 사교모임이라기보단 그저 편안하고 재미있는 친구들끼리의 만남이었다.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응접실에서 활달한 말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빙긋 웃으면서 지나갔다.
“아, 그리고 결혼은 글래스턴에서 얼른 했어. 나는 대학에 너무 다니고 싶었거든. 그래서 너희 같은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어서 기뻐.”
“무슨 소리야, 우리가 더 기뻐! 우리 엄마가 너한테서 온 초대장 보고 엄청 놀라시더라.”
“그래? 나는 조금 걱정했어. 알다시피 내가 워낙 온갖 기사들이 다 나고 있어서, 혹시라도 싫어하시면 어쩌나 했거든.”
“싫어하시긴! 우리 아빠도 빈손으로 찾아가는 거 아니라고 이렇게 선물도 챙겨주셨는데!”
당치도 않다며 친구들은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주변을 자꾸 살피는 모습이, 궁금한 게 너무 많은 눈치였다. 결국 돌려 돌려 하는 질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렐은 친구들이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해주었다. 기본적으로 착하고 예의가 있는 친구들이었고, 그래서 소렐이 가장 친해진 친구들이기도 했다.
“우리 엄마 성함은 메리 알렉산드라 이그나시아 클레리 헬레인이야. 아빠 성함은 펠릭스 이드리스고.”
루비는 먹고 있던 과자를 툭 떨어트렸다.
“야, 잠깐만…….”
“나도 잠깐만. 이거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해?”
“나도 모르겠어. 갑자기 역사수업에서 들었던 이름들이 막 튀어나오는데?”
그나마 뱀파이어 혼혈인 사비나만 아하하하, 배를 잡고 웃었다.
“와……, 정말 뱀파이어나 마법사들은 다 다르구나……. 하긴 엄청나게 오래 사니까……. 사비나도 오래 살겠지?”
“그건 모르는 거지. 죽는 건 순서가 없다잖아.”
사비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그런데, 그럼 소렐은 지금 몇 살이야?”
설마 우리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거 아닌가?
“나 진짜 스무 살이야. 우리 엄마 아빠가 날 조금 늦게 낳으셨을 뿐이야.”
소렐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교수님 그렇게 안 봤는데…….”
“양심 없어…….”
“음, 좀 많이 없으신 것 같다.”
그런 말이 오고 가더니 또 까르르 웃는 소리가 난다.
“소렐 너는 싫다고 떼쓰지 않았어? 나는 열네 살 때 엄마가 갑자기 너 약혼하는 거 어떠냐고 해서 진짜 펑펑 울었는데, 농담이었다지 뭐야.”
“열네 살에 약혼하는 건 우리 엄마 때나 그런 거 아니야? 우리 언니는 스물둘에 시집가긴 했지만.”
가만히 듣던 소렐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도시는 좀 늦게 결혼하네. 나는 시골에 살았거든. 거긴 죄다 스물이 되기 전에 결혼했어.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날더러 결혼할 사람이 있다는 거야.”
칼리에르 공비가 말을 할 때마다 친구들은 숨을 죽이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했는데 라이킨이, 그러니까 교수님이 내가 살던 그 시골로 찾아왔어.”
“아, 뭐야, 낭만적이야……!”
새된 목소리들이 응접실에 난무하자 소렐은 조금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낭만적이라고?
“어디가……?”
뭐가 그렇게 낭만적인 건가.
“더 이야기해봐, 교수님이 잘해주셔?”
“맞아, 계속 교수님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던데 그건 뭐야? 교수님 성함은 제임스 아냐?”
재잘재잘 떠드는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소렐은 조금 수줍게 대답했다.
“라이킨은 가운데 이름인데, 그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어.”
또 한차례 꺅꺅대는 소리가 응접실을 비롯한 그 층을 다 쓸고 지나갔다. 조슈아는 복도를 걸어가며 위쪽을 힐끗 보다가, 서재의 문을 열었다.
“공비전하의 손님들이 재미있게 노시고 계시나 봅니다.”
라이킨은 약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벌어진 모임은 그가 소렐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만들어진 일이었다. 딸들을 보낸 부모들은 반신반의하고 있을 거다. 표면적으로는 스무 살짜리들이 친구들끼리 모인 것에 불과했지만, 만남 장소가 칼리에르 공작저다. 어찌 정치적인 이유가 없겠는가. 그것도 왕실무도회가 코앞이고, 글래스턴 추기경 틸로네 리퀘도를 비롯한 엘펜하임은 남의 나라 언론을 움직여 어떻게든 헬레인의 마지막 공주를 자칭한다는 소렐을 깎아내리느라 난리인 이 시점에.
“우리 공주님이 데뷔를 하시면 또래 친구가 있어야지.”
소렐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었지만, 전부 라이킨 선에서 고르고 엄선한 가문 출신들이기도 했다. 사교계에서 칼리에르 공비에게 또 하나의 방패가 되어준다면, 라이킨은 기꺼이 보답할 생각이었다. 그는 아주 만족스럽게 새 시계를 문질렀다.
“요즘 하시는 걸로 봐선 무도회에서 공비전하를 딱 옆에 두시고 어디에도 못 가시게 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저걸 공비전하께 새로 선물받으셨구만. 조슈아는 건물 한 채 값은 할 손목시계를 힐끗 본 뒤 말했다.
“그럴까도 생각했는데 공주님께서 내 말을 들어주시지 않을 것 같아서.”
어린 공주님이야 무도회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많이 반갑고 신나시겠지. 라이킨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왕실무도회에 필요한 건 다 갖춰졌다. 말동무가 될 친구들, 헬레인 공주라는 증거들, 라이킨이 팔불출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상실과 보석상을 탈탈 털어 가져온 장신구와 드레스까지. 무기가 준비되었으니, 이젠 전투를 벌일 차례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글래스턴 추기경이 감히 자신의 공국 안에서 공비를 습격한 것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