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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데뷔탕트 (12) (51/181)

51. 데뷔탕트 (12)2021.01.23.

16606117373952.jpg“돌아가라고?”

갑자기 또 불려온 폴리아나 그린이 되물었다.

16606117373957.jpg“네, 돌아가세요. 글래스턴에도 사람이 하나쯤 지키고는 있어야 하니까요.”

조슈아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무척 바빴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유능한 보좌관은 언제나 한 번에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하는 법이다.

16606117373952.jpg“내가 왜?”

조슈아는 안경 너머로 말투가 험악해진 폴리아나 그린을 쳐다보았다. 이미 알고 왔지 않냐는 서늘한 눈빛이었다.

16606117373957.jpg“멍청한 짓 좀 작작해요, 그린 교수. 수습하는 나도 짜증나니까. 당분간 글래스턴에서 쥐 죽은 듯이 있어요. 마스터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그리고 라이킨이 소렐을 데리고 글래스턴으로 돌아가는 날에 폴리아나는 또다시 다른 곳으로 보내질 것이다. 워낙 유능하니 폴리아나라는 전력을 빼버릴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눈에서 보이지 않게 치울 수는 있었다.

16606117373957.jpg“마스터께서 아주, 무척, 엄청나게 격노하셨습니다.”

폴리아나는 말을 아주 잘한다. 그리고 나름의 논리도 있었다. 뭐, 늘 그렇듯이 ‘틀린 말은 안 했겠지’. 그러나 옳은 말이라 해서 늘 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그녀가 뭐라 말을 할 틈을 주지 않고 가장 무서운 말부터 던진 조슈아는 펜을 놓고 안경을 벗었다.

16606117373957.jpg“왜 이성을 잃습니까, 여태까지 수백 년간 이성이란 걸 잃어본 적이 없는 분이.”

그는 한심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폴리아나 그린은 아주 냉철하고 유능하며, 학식이 높은 뱀파이어였다. 오래도록 라이킨을 조슈아와 함께 보좌했고, 그래서 함께 일하기에 꽤 괜찮은 동료였다. 물론 일에 사적인 감정을 더 얹었다는 게 조금 흠이긴 했으나, 알아서 공과 사는 구분했으니 괜찮았다. 그러나 조슈아는 솔직히 요즘, 그녀가 공과 사를 구분했다는 건 순전히 칼리에르 공비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16606117373957.jpg“마스터께서 아주 공들이고 계시던 일을 덕분에 날렸어요.”

폴리아나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16606117373952.jpg“무슨, 어떻게? 왜요?”

16606117373957.jpg“결혼반지를 아주 큰 걸 준비하고 계셨거든. 전 세계를 다 뒤져가면서.”

아, 그래. 일 관련한 사태는 벌어진 게 아니고, 라이킨이 소렐에게 해줄 특별한 일이 날아갔다는 거지. 폴리아나의 표정이 다시 비뚤어졌다. 조슈아는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16606117373957.jpg“나는 그린 교수가 좀 더 멋지게 대처할 줄 알았습니다만.”

그 말에 폴리아나가 팔짱을 끼고 픽 웃었다.

16606117373952.jpg“멋진 게 뭔데요?”

16606117373957.jpg“멋지게 포기할 줄 알았지요. 싫다는 사람에게 좋다고 표현하면서 당사자도 아닌 당사자의 배우자를 괴롭히는 치사한 짓은 하지 않고요.”

조슈아는 아주 객관적으로 폴리아나 그린이 한 짓을 읊어주었다.

16606117373952.jpg“그건 그래요. 내가 한 짓은 치사하죠. 그 여자애가 아주 싫어요. 그렇다 해서 꼭 ‘멋있게’ 포기할 필요는 없잖아요. 굳이 그래야 한다는 법이 있나요? 그게 왜 멋있는 거죠? 모두가 편하게 조용한 것뿐이지.”

비틀리고, 싫어하고, 혐오하는 게 뭐가 어때서. 폴리아나는 똑같이 입귀를 비틀었다. 솔직히 그녀도 자신에게 이런 점이 있다는 것에 계속 놀라고 있었다. 충격받고, 자괴감에 빠지다가도, 남들이 그녀를 손가락질하거나 소렐 이드리스 앞에 서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도대체 뭐가 모자라서 저런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여자애에게 밀려야 한단 말인가. 폴리아나 그린 안에서 이미 소렐은 그저 순진하고 멍청할 뿐인 물정 모르는 계집애로 박혀버렸다. 그러지 않는다면 견딜 수도 없었다.

16606117373957.jpg“에설론 백작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조슈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라이킨의 옛 약혼녀를 거론했다. 지금 그녀보다 소렐이 만만하니 그런 거 아니냐는 뜻이기도 했다.

16606117373952.jpg“그 여자는 연적이 아니었죠.”

폴리아나는 오히려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받아치며 외투를 들었다.

16606117373957.jpg“에이, 설마.”

조슈아는 히죽 웃었다.

16606117373957.jpg“마스터께서 공비 전하를 아끼시니까 그렇겠지요.”

16606117373952.jpg“다 비웃었어요? 업무가 늘어난 화풀이는 다 했고?”

16606117373957.jpg“그걸 다 하려면 아직 모자랍니다. 어쨌든 마스터께서 격노하셨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더 이상의 예의도 차리기가 싫어서 조슈아를 통해 통보하는 것만 봐도 대충 알 것 같았다. 언제나 당당했던 폴리아나의 어깨도 조금 처졌다. 내가 왜 그랬지, 하고 자괴감에 휩싸여 자책해봐도 순간의 유치한 분노에 휩싸여 퍼붓던 말들은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랬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아무도 부를 수 없는 제 이름까지 작은 토끼에게 허락하고, 그 토끼를 싸고돌았다. 그걸 보는 건 짝사랑하던 이에게 분노와 좌절, 질투만을 불러일으킨다.

16606117373952.jpg“수고해요.”

16606117373957.jpg“오늘 곧장 글래스턴으로 내려가세요.”

16606117373952.jpg“그러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이를 화나게 하는 것만큼 싫은 것도 있을까. 폴리아나는 내내 멍청한 짓만 하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사무실에서 나왔다. 지난 수백 년간 애쓰고 애써서 이루어 놓았던 게 아무것도 아니란 걸 이미 깨달았고, 그래서 더 화가 났고, 결국 라이킨과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게 된 게 더더욱 화가 났다.

16606117373952.jpg“아, 술이나 먹으러 갈까.”

애써 침착하고 평온한 척을 하려고 해도, 폴리아나는 솔직히 수치스러웠다. 그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그리고 수치심보다 더 괴롭고, 아직까지도 식지 않은 사랑과 질투심이 활활 타고 있었다. 제 손으로 망친 짝사랑과 멍청하고 불쌍한 자신을 위해 술이라도 들이부어야겠다. 추한 밑바닥을 여러 사람에게 드러내고 나니 맨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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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편을 짝사랑하는 여자가 결혼반지도 없지 않냐고 지적을 했다면, 보통 아내는 한바탕 화가 나서 난리를 피우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칼리에르 공작부부는 반대였다. 난리는 라이킨이 피웠고, 화도 라이킨이 냈다. 소렐은 그저 결혼반지 등, 결혼에 있다는 ‘예물’이란 건 신랑 측이 준비하는 게 오랜 관습이란 걸 하나 배웠을 뿐이었다. 하긴 남의 결혼도 잘 모르는 갓 성인이 된 아가씨가 뭘 알았겠는가.

16606117396239.jpg“망할.”

라이킨은 욕을 중얼거렸다. 소렐의 마음을 다시 한번 사로잡을 완벽한 기회를 날리다니, 이보다 더 화가 날 수 있을까? 기껏 장인에게 난리를 쳐서 까다로운 주문을 넣었던 반지는 그가 보여주기도 전에 폴리아나 그린이 들쑤시고 말았다.

16606117396239.jpg‘분명히 경고했는데.’

경고를 했는데도 안 듣는다면 그건 지능 문제다. 라이킨은 신랄하게 평가했고, 가차 없이 버렸다. 글래스턴에 처박혀서 정신이나 좀 차리고 있으라지. 앞으로 칼리에르 공비가 그린 교수와 마주칠 일은 없을 거다.

16606117396239.jpg‘내 말이 말같이 안 들리나?’

오래도록 뱀파이어 집단의 일을 처리하고, 그들을 지키고, 동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지시를 내렸던 칼리에르 공은 심히 불쾌했다.

16606117396253.jpg“라이킨, 라이킨?”

혼자 욕을 하고 있던 라이킨의 표정이 금세 부드럽게 풀어졌다.

16606117396239.jpg“예, 공주님.”

그는 대답을 하며 돌아섰다.

16606117396253.jpg“정말 내가 뭘 사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소렐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16606117396239.jpg“결혼예물은 남편이 아내에게 주는 것이지요.”

16606117396253.jpg“그래도요.”

그녀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지, 자꾸만 망설였다.

16606117396253.jpg“나도 라이킨에게 뭔가 해주고 싶어요.”

그러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말한다. 라이킨은 그만 웃고 말았다. 소렐과 함께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웃게 된다.

16606117396253.jpg“왜 예물은 남자만 하나요? 나도 해줄 수 있는데요.”

16606117396239.jpg“옛날에는 재산을 가진 쪽은 보통 남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교수 아니랄까 봐 그런 대답만 하지! 소렐의 입술이 부루퉁하게 나왔다.

16606117396253.jpg“지금이 옛날이에요?”

16606117396239.jpg“아니지요.”

그는 근사하게 미소 지었다. 다정하게 생긴 남자가 다정하게 웃으면 눈이 부셨다. 약간 흐트러진 금발 아래 따뜻한 푸른 눈이 그녀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소렐의 뺨은 그의 손가락 아래에서 또다시 달아오르고 말았다. 어쩐지 부끄러워서 소렐은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라이킨의 손가락에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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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6117396239.jpg“공주님께서 하시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는 속상했으나, 소렐 앞에서는 속마음을 철저히 숨겼다. 그가 속상하다는 걸 알면 소렐은 더 의기소침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16606117396253.jpg“그래도 괜찮아요? 어……, 예법에 어긋나는 거 아니죠?”

빌어먹을. 라이킨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안 그래도 겁이 많은 토끼라 최대한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바보 취급을 하다니.

16606117396239.jpg“그런 거 아닙니다. 공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셔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소렐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16606117396253.jpg“그건 좀 이상한 말이네요. 제가 잘못할 수도 있잖아요.”

16606117396239.jpg“공주님은 잘못하지 않으실 겁니다.”

잘못을 했다면 그가 했겠지. 그리고 소렐이 잘못이란 걸 해봤자 무슨 상관인가. 아기토끼가 뛰어다니다가 사람 칠 수도 있는 거고, 모르고 건물을 부순다 해도 그럴 수도 있는 거지.

16606117396253.jpg“나 사교계에서 잘할 수 있을까요……?”

16606117396239.jpg“누가 잘해야 한다고 하던가요? 잘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즐기시면 됩니다. 재미가 없으면 글래스턴으로 돌아가지요.”

소렐이 학교에서 습격당했을 때, 이미 글래스턴 추기경 틸로네 리퀘도에게 칼을 빼든 것이나 다름없으면서도 라이킨은 자상하게 말했다.

16606117396253.jpg“사교계는 은근히 무서운 곳이래요. 평판이 그렇게 중요하대요. 뭐, 하긴 내가 살던 시골도 그랬지만요.”

16606117396239.jpg“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지요.”

라이킨은 저 멀리에서 조슈아가 보라색 봉투를 들고 흔드는 걸 발견하곤 미간을 약간 좁혔다. 그럼 그렇지. 올 게 왔다.

16606117396239.jpg“걱정하거나 겁먹지 말아요, 공주님. 그 누구도 감히 칼리에르 공비의 평판에 입방아를 찧을 엄두도 내지 못할 겁니다.”

그는 소렐의 뺨을 다시 한번 쓰다듬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16606117396239.jpg“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라이킨은 양해를 구하고서 조슈아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16606117396239.jpg“페르난데스 7세?”

16606117373957.jpg“예, 마스터.”

국왕이 보낸 편지가 결국 도착했다. 라이킨은 조슈아에게서 보라색 봉투를 건네받아 왕실의 인이 쳐진 봉인을 뜯어냈다. 그러곤 내용물을 꺼내 슥 훑은 뒤, 다시 조슈아에게 전부 넘겼다.

16606117396239.jpg“왕이 아주 신났군.”

16606117373957.jpg“그렇군요. 왕실무도회 초대장을 왕이 직접 쓴 건 또 처음 봅니다.”

16606117396239.jpg“도대체가 이 왕가에 무게라곤 없어.”

칼리에르 공이 수백 년 만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좋아 죽는 꼴이라니. 그래봤자 딱히 왕에게 협조를 해줄 생각도 없었던 칼리에르 공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렸다.

16606117373957.jpg“그건 좀 너무 비약적이십니다. 칼리에르 공국이 이 나라의 경제와 학문을 다 선도하고 있는데, 제가 왕이라도 이 정도는 하겠습니다.”

칼리에르 공국, 글래스턴을 중심으로 한 그 주변 땅은 아주 부유한 지역이었다. 그게 다 라이킨의 소위 ‘어머니’인 앨리스 루이즈 칼리에르가 이룩해놓은 눈부신 유산이었다.

16606117373957.jpg“게다가 어차피 마스터께서도 공비전하를 왕실무도회에 참석하게 하실 생각이셨잖습니까.”

16606117396239.jpg“그것보다 더 공식적인 행사가 어디 있다고.”

벌써 엔버네스에서는 연주회며 만찬회, 작은 소풍과 낭독회등이 끊임없이 열리며 사교계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지만 칼리에르 공 부부는 아직까지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사교계의 진정한 시작은 데뷔탕트들이라면 무조건 모이는 왕실무도회이기 때문이었다.

16606117373957.jpg“그전까지는 반지가 완성될 겁니다. 그리고 폴리아나 그린에게 지시를 전달했습니다.”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렐을 돌아보았다. 정원 벤치에 앉아 있던 그녀는 모자를 다시 쓰고, 리본을 제대로 매는 중이었다. 어쨌든 외출을 하긴 해야겠다. 공주님께서 기어코 그에게 뭔가를 사주실 건가 보다.

16606117396239.jpg“글래스턴에서 정신 좀 차리라고 해.”

16606117373957.jpg“예. 그리고 오늘 신문을 보셨겠지만, 점점 기사가 도를 넘고 있습니다. 황색신문은 특히 더합니다.”

라이킨은 그 말에 국왕의 초대장을 턱으로 가리켰다.

16606117396239.jpg“안 그래도 지금 왕도 궁금해 죽을 지경이지만 티는 내지 않으려고 애쓰던데.”

칼리에르 공비가 사교계 데뷔를 하기도 전에 그녀의 평판이 엉망이 되겠다. 정말 그들이 합법적인 혼인 관계이며, 칼리에르 공비가 헬레인 공주인 건 맞냐는 의문은 이제 그녀가 어떻게 150년 전에 망한 왕조 출신임을 증명하겠냐는 노골적인 비웃음으로 이어졌다. 증거가 있기나 할까? 그 증거가 될 만한 보물들은 전부 저 신성한 날강도들, 엘펜하임 기사단이 차지하고 있는데.

16606117373957.jpg“그래서 오블리앙 공께서 곧 엔버네스로 오시겠다고 하십니다. 신문기사를 보신 모양입니다.”

16606117396239.jpg“아버지가 오실 때가 됐지.”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렐 이드리스가 헬레인 공주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칼리에르 공은 사기꾼이 될 판이다.

16606117373957.jpg“공비전하의 명함이 마침 완성되었다는 기별이 와서, 명함까지 챙겨서 오시겠다는군요.”

그 무시무시한 라일락색 명함 말인가. 라이킨은 픽 웃었다. 전설적인 헬레인 왕조의 마지막 후예를 아내로 맞은 대단한 남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사기꾼에게 깜빡 속은 형편없는 머저리가 될 것인지는 왕실 무도회 때 판가름 날 것이다.

16606117396239.jpg“알겠어.”

16606117373957.jpg“그럼 공비전화와 함께 좋은 시간 되십쇼.”

조슈아는 그렇게 말하며 라이킨에게 품에서 또 다른 것을 꺼내 찔러주었다. 받고 보니 자그마한 책자였다.

16606117396239.jpg“이게 뭔데?”

16606117373957.jpg“요즘 아가씨들이 좋아하는 엔버네스의 명소 30선입니다. 꼭 돌아보세요.”

그리고 더불어 내일 오후까지는 적어도 호출하지 마시고. 조슈아는 상관의 평온한 부부생활을 간절히 빌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부부생활이 원만해야 그가 할 일이 없고, 부부생활이 삐걱대면 그가 여지없이 쫓아와야 했다. 오늘 폴리아나 그린 건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라이킨은 픽 웃었다.

16606117396239.jpg“요령이 늘었어.”

16606117373957.jpg“제가 마스터를 모신 세월이 있는데 이 정도는 늘어야지요.”

조슈아는 정말이지 평온하고 게을러빠진 생활이 간절했다.

16606117373957.jpg“꼭 돌고 오세요. 반지 안 낀 손은 적당히 가리기라도 하시고요.”

그놈의 반지. 라이킨의 미간이 또 찌푸려졌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던 뱀파이어의 얼굴이 이토록 변화무쌍하게 된 것은, 순전히 소렐 이드리스가 글래스턴에 오고 나서부터였다.

16606117373957.jpg“그러게 제가 다 좋은 물건들이니 아무거나 고르셔도 최고의 선물이 될 거라고 미리 말씀드렸잖습니까.”

누가 까탈스럽게 트집 잡으며 이거도 안 되고, 저거도 광채가 부족하고, 이 보석은 색이 마음에 들지 않고, 이런 식으로 질질 끌랬나. 조슈아는 <숙녀들과 오후를 보내면 좋을 엔버네스 명소 30선>을 기어이 라이킨에게 찔러주곤 다시 바삐 돌아갔다. 오늘도 일이 산더미다. *  

16606117425936.jpg“폴린, 너 술이 꽤 늘었다.”

엔버네스 기차역 근처, 술집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폴리아나 그린은 옆에 앉은 남자를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16606117373952.jpg“넌 또 왜 왔어?”

16606117425936.jpg“내가 엔버네스에서 하는 일이 뭐가 있다고. 네 뒤꽁무니나 쫓아다녀야지.”

카메론 셀레스트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폴리아나가 마시는 것과 똑같은 술을 주문했다. 그러곤 술이 나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술이 나오자 한 모금 마셔보고선 질색을 했다.

16606117425936.jpg“이 독한 걸 왜 대낮부터 마셔?”

16606117373952.jpg“글래스턴으로 돌아가는 기념이야.”

16606117425936.jpg“나랑 같은 기차로 올라왔잖아.”

16606117373952.jpg“내려가는 건 혼자 가는 거지. 좋네.”

16606117425936.jpg“알 만하네.”

뻔하다. 또 칼리에르 공의 눈 밖에 났겠지. 그걸 바로 알아챌 정도로 폴린과 미묘한 거리를 유지 중인 카메론은 픽 웃었다.

16606117425936.jpg“너무 그러지 마, 폴린. 너는 내가 잡고 있는 뱀파이어 쪽 줄이라고. 네가 높이높이 올라가야 내가 이득을 보는데 왜 자꾸 쫓겨나?”

16606117373952.jpg“나는 내가 이렇게 한심한지 이제야 알았어.”

16606117425936.jpg“이야, 너 취했구나.”

뱀파이어는 잘 취하지 않는데, 길게 발음하는 걸 보니 정말 취했나? 폴리아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16606117373952.jpg“뭐, 오늘은 취해야 해.”

취해야 마땅한 날이었다. 폴리아나 그린, 세상에서 제일 멍청하고 한심하며 못된 여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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