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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데뷔탕트 (10) (49/181)

49. 데뷔탕트 (10)2021.01.16.

칼리에르 공비에 대한 기사는 이번에도 또 나왔다. 라이킨은 신문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글래스턴 추기경, 그 사교계에만 해박한 성스럽지 않은 성직자가 기자들을 얼마나 들쑤셔놨던지, 이젠 기자들이 의상실이며 양복점까지 뒤를 캐고 있었다.

16606117218274.jpg“우리 공주님은 제대로 된 행사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보여야 해.”

졸지에 엔버네스까지 끌려온 조슈아는 이젠 영락없이 데뷔탕트를 챙기는 데만 집중하고 있는 제 상관을 쳐다보았다.

16606117218278.jpg“예, 당연하지요.”

그는 제 월급을 주는 상관에게 절대복종했다. 절대로 날아들 재떨이나, 서재를 뒤집어엎을 더러운 성질머리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16606117218274.jpg“그리고 빈틈이라곤 조금도 있어선 안 돼.”

글쎄, 헬레인 공주님에게 빈틈이 무척 많은 것 같은데요. 조슈아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 객관적으로 보든, 주관적으로 보든, 소렐 이드리스는 순진하고 착했다. 그리고 사교계에서 순진한 것만큼 함정에 걸려들기 쉬운 성격도 없었다. 사교계에서 구를 대로 구른 뱀과 너구리들이 토끼를 물고 뜯어댈 거다. 아아, 어느 무도회에서 칼리에르 공이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는 끔찍한 소문만 안 들었으면 좋겠다. 그랬다간 조슈아는 과로로 쓰러질 것이다.

16606117218274.jpg“주문은?”

16606117218278.jpg“들어갔다고 벌써 일곱 번째 확인해드렸습니다. 현재 제작 중입니다. 곧 배달될 겁니다.”

16606117218274.jpg“그래, 가장 중요한 물건이니…….”

라이킨은 스스로를 가라앉히려는 듯, 길게 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엔버네스에 올라오기 전부터 그가 사용해댄 돈은 천문학적인 숫자에 달했다. 덕분에 수도 곳곳에 있는 장인들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16606117218278.jpg“또한 오블리앙 공께서도 곧 엔버네스로 올라오신다고 합니다.”

16606117218274.jpg“곧?”

16606117218278.jpg“예, 곧.”

16606117218274.jpg“갑자기 내일 등장하신다 해도 놀랍지 않아. 어쨌든 중요한 건 그 물건이야, 조슈아. 그것만 제작되는 대로 바로 가지고 오라고 해.”

16606117218278.jpg“예.”

조슈아는 아주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며칠간 라이킨이 소렐의 눈을 피해 조슈아를 쪼아대며 재촉하는 물건이다. 무조건 완성되는 대로 곧장 가져다 바쳐야 했다. 칼리에르 공비의 사교계 데뷔가 코앞이다!

16606117218274.jpg“그리고…….”

라이킨은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16606117218274.jpg“알아봤나?”

뱀파이어들은 언제나 그들의 가장 강력한 적인 엘펜하임 기사단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라이킨은 글래스턴 공국을 중심으로 한 뱀파이어 집단 전체를 책임지고 지키는 가장 큰 뱀파이어였다. 집단을 위협하는 기사단이 칼리에르 공비를 공격하고 있다는 건, 결국 우회해서 그를 공격하는 것이다. 예전과 다를 바가 하나 없었다.

16606117218278.jpg“계속 캐내고는 있는데, 기사단 중심부로 완전히 접근하는 건 아직까지도 힘듭니다. 마법사들이며 마녀들을 매수하고는 있지만, 경계가 삼엄합니다.”

헬레인 왕가가 쇠락하여 결국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 약탈자들이 둥지를 틀었다. 헬레인 왕가의 마지막 사위가 되고 보니 그 또한 예전에 마음에 들지 않던 것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이킨은 눈가를 좁혔다.

16606117218278.jpg“하지만 아무래도 추측하시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손에 넣은 마녀는 높은 보안등급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슈아는 서류철에서 얄팍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라이킨 앞에 내려놓았다. 그것을 빠르게 훑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16606117218274.jpg“헬레인 왕조 마지막 왕의 예언이라고.”

16606117218278.jpg“예. 엘펜하임에게 살해당할 당시에 남았던 예언이 문자로 남아 아예 봉해버린 듯합니다. 그 봉인이 바깥에 전시된 헬레인의 티아라 몇 점과 연결되어 있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헬레인 토끼들의 예언은 아주 특별했다. 물론 왕조가 쇠락하기 시작하면서 그 힘도 점점 사라졌지만, 그래도 예언은 가끔 그 누구도 바꿀 수 없게 땅에 새겨지고, 바위에 새겨졌다. 아마 헬레인 마지막 왕의 예언도 그렇게 선명하게 남은 것이리라.

16606117218274.jpg“봉인은 흙과 돌로 덮었겠지.”

16606117218278.jpg“예. 가장 깊숙한 안쪽 중심부에 봉인을 해둬서 덮었다고 합니다.”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그가 수백 년간 추측하고 예상하던 바였다. 그는 끝도 없이 엘펜하임과 부딪쳤고, 결국 그들이 멸망시켰던 헬레인 왕가와 똑같이 엘펜하임도 쇠락해가는 꼴을 보는 중이었다.

16606117218274.jpg“내용이 무엇일 거라고 생각해?”

16606117218278.jpg“아무래도 그들의 멸망이겠지요. 엘펜하임의 멸망.”

16606117218274.jpg“그래. 왕가가 약탈당하면서 멸망했는데, 똑같이 저주해줘야겠지. 레너드 3세도 목숨 걸고 한 예언일 거야.”

마지막 왕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예언을 하고, 대마법사에게 피신시킨 하나뿐인 딸에게 희망을 걸고 죽었을 거다.

16606117218274.jpg“그놈들이 그래서 더 우리 공주님을 노리는 거야.”

결국 라이킨의 결론은 또다시 소렐 이드리스에게로 돌아왔다. 그놈의 ‘우리 공주님’. 조슈아는 칼리에르 공작저의 근사한 천장 장식을 쳐다보았다.

16606117218278.jpg‘아, 우리 마스터께서 빠져도 단단히 빠지셨구나.’

물론 그는 아주 유능했기에 입으로는 다른 말을 했다.

16606117218278.jpg“예언을 깰 수 있는 힘은 고대 마법뿐이지요.”

16606117218274.jpg“혹은 계속 잃고 있는 마법과 신성력을 부활시킬 수 있는 하나 남은 힘이기도 하고.”

마법을 자유자재로 부리던 요정들, 용들은 이제 말 그대로 전설로 남은 시대다. 들판에는 철도가 깔렸고, 인간은 기계의 동력을 사용해 바다를 가른다. 예언을 하던 토끼들도, 대마법사도 모두 지상에서 사라졌다. 엘펜하임은 그 끔찍한 머릿수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들의 강력한 적에게도 신성력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16606117218274.jpg“……헬레인 국왕의 예언이 강력하긴 하군.”

글래스턴 추기경 앞에서 ‘엘펜하임은 툭 치면 부서질 오두막 수준이군요’라고 조롱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16606117218278.jpg“망국의 왕이었으나 진정한 기사 아닙니까. 헬레인 국왕의 기사도는 저 엘펜하임 개떼들보다 훨씬 신성하고, 또 고결했다고 생각합니다.”

무뚝뚝한 조슈아의 말에 라이킨이 웃었다.

16606117218274.jpg“그런 사적인 의견을 말하다니 의외인데, 조슈아.”

16606117218278.jpg“레너드 3세는 모두가 다 그렇게 평가하지 않습니까.”

고결한 기사였으나 비운의 마지막 왕.

16606117218274.jpg“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헬레인 토끼들은 사나웠지만 그는 정말 신사 중의 신사였어. 그러고 보니 손녀사위가 나라면 아무리 그라 해도 무척 유감스러워하겠군.”

16606117218278.jpg“마스터가 어때서요? ‘그’ 펠릭스 이드리스도 사위로 받아들였는데, 마스터 정도면 차고도 넘치십니다.”

조슈아는 다른 공작들보다 더 높고, 독립군주의 위치에 준하는 칼리에르 ‘대’공 정도면 헬레인 공주의 남편이 되는 것도 솔직히 라이킨에게 밑지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얼마나 전대 칼리에르 공이 죽어라고 끌어 올린 지위이자 영예로운 호칭이던가.

16606117218274.jpg“글쎄. 아닌 것 같아.”

라이킨은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렐이 조금 손해 보는 결혼을 한 게 맞았다. 예법에 통달한 아버지 오블리앙 공의 엄격한 말대로, 이건 귀천상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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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606117245052.jpg“……엔버네스는 좀…….”

소렐은 책을 뒤적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라이킨이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그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그녀를 위해 서재에 책을 더 잔뜩 구매하고, 침실이며 티룸, 서재의 내부 장식까지 뜯어고치는 걸 보면 소렐이라도 그의 정성을 알 수 있었다.

16606117245052.jpg“지루한 것 같아요.”

그녀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 따라주던 에벌린이 그 말에 웃었다.

16606117245064.jpg“아직 바깥으로 나가지 않아서 그렇지요.”

혹은 라이킨이 소렐을 애지중지하며 공작저에 숨겨둔 탓이든가. 바깥에는 그녀를 노리고 있는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이 즐비했다.

16606117245064.jpg‘망할 영감탱이.’

에벌린은 속으로 글래스턴 추기경을 욕했다. 지금 라이킨과 그녀가 신문이란 신문들은 선별하고, 또 숨기기도 해서 그렇지, 이 집에 감히 들어오지 못하는 삼류 황색신문에서는 소렐을 칼리에르 공의 정부로까지 만들고 있었다. 라이킨이 싸늘하게 웃으며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건, 관심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영예로운 칼리에르 공비이자 헬레인 공주는 아무런 흠도 없이 등장하는 거다.

16606117245064.jpg‘이렇게 어린 애를 깎아내릴 데가 어디 있다고…….’

불분명한 출생신고 외에 소렐이 헬레인 공주라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거겠지.

16606117245064.jpg“아……, 공주님.”

소렐이 고개를 들었다.

16606117245064.jpg“일어나세요.”

에벌린은 소파에 엎드려 있던 소렐을 일으켜 옷매무새를 다듬어주었다.

16606117245064.jpg“막고 싶지만 어쩔 수 없네요. 폴리아나 그린 교수가 오고 있어요.”

16606117245052.jpg“이리로요?”

16606117245064.jpg“네. 예전에 제임스 교수님이 가르치신 거 기억하시죠?”

헛소리를 하는 상대에겐 지독하게 쏘아붙여주라고. 라이킨은 그걸 ‘마땅한 예절교육’이라고 고상하게 불렀지만, 조슈아나 에벌린, 그리고 샤를렌이 보기엔 영락없이 독설이었다.

16606117245052.jpg“네.”

소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만 받고 명랑하게 자란 공주님은 자존감도 드높아서, 그녀에게 날을 세우는 이에게 그냥 당하지는 않았다.

16606117245052.jpg“근데 왜 이리로 오는 거예요?”

16606117245064.jpg“공작저에 왔는데 당연히 공비전하께 인사를 드려야지요. 그게 예의입니다.”

지가 별수 있어? 에벌린은 콧방귀를 뀌고, 먼저 티룸 입구로 나갔다. 공비전하를 함부로 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렐에게로 가는 관문에는 언제나 커다란 호랑이가 지키고 서 있었다.

16606117245064.jpg“안녕하세요, 그린 교수님. 여긴 또 어쩐 일이신가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에벌린에게 폴리아나는 용건을 말했다.

16606117250125.jpg“공작저에 들른 김에 공주님께 인사를 하고 가려고요.”

이것 봐라.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오블리앙 공이 늘 칭찬하는 유능한 가정부였다. 그러니 그녀가 폴리아나의 말에서, ‘공주님’이라는 호칭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16606117245064.jpg‘곧 죽어도 공비전하라는 호칭은 인정 못 하겠다, 이거지.’

소렐 이드리스는 날 때부터 공주였으니 공주라고는 불러주겠지만, 라이킨의 아내인 공비전하라는 호칭은 못 붙이겠다 이거였다. 그게 폴리아나의 얄팍한 자존심이었다.

16606117245064.jpg“공비전하께서 시간이 되실지 어떨지 여쭤보고 오지요.”

그렇다면 그러시던가. 에벌린은 꼿꼿한 자세로 다시 티룸으로 들어왔다. 이미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던 소렐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16606117245064.jpg“인사는 받으세요.”

에벌린은 조용히 말했다.

16606117245064.jpg“마땅히 받으셔야죠, 공주님. 괜히 온 게 아닐 텐데.”

아하. 소렐은 그녀가 폴리아나 그린을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 떠올렸다.  

16606117245052.jpg‘제가 말을 놓아도 된다고 한 분은 오블리앙 공, 아버님뿐이에요.’

  그러니까 넌 말을 함부로 놓지 말라고 쏘아붙이고 라이킨의 연구실로 갔었다. 그거 때문에 인사를 하러 온 건가. 소렐은 고개를 끄덕였고, 곧 에벌린이 폴리아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16606117250125.jpg“안녕하세요, 공주님.”

폴리아나 그린의 말투는 소렐이 분명하게 말했듯, 펜싱하우스에서 처음 소개받았을 때로 돌아가 있었다.

16606117245052.jpg“안녕하세요, 교수님. 어쩐 일이세요?”

16606117250125.jpg“당분간 제임스 교수님이 엔버네스에 계시니, 저를 비롯한 사람들도 다 엔버네스에 있을 예정이라 겸사겸사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16606117245052.jpg“앉으세요. 차를 좀 드시겠어요?”

소렐은 공작저에 앉아서 제법 안주인답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폴리아나의 눈에는 전부 안 좋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거슬리고, 싫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의 합법적인 아내는 그녀가 아니라 저기 저 조그만 토끼니까.

16606117250125.jpg“아뇨, 그렇게 오래 머무르지는 못합니다. 시키신 일이 많아서.”

하긴 같이 차를 마시면서 하하호호 할 사이는 아니었다. 혹은 기싸움을 길게 할 필요도 없는 사이였다.

16606117245052.jpg“하긴 그러시겠네요.”

소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폴리아나가 이곳에 먼저 와서 인사를 했다는 건, 그녀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대단히 상하는 일이니 그 이상은 못 하겠다는 뜻이라는 건가.

16606117245052.jpg“일이 많이 바쁜가요?”

16606117250125.jpg“지금 모두가 공주님의 기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사교란을 장식하고 있어서 너무나 바쁜데, 공주님 혼자서 모르시나 봐요.”

에벌린의 눈이 사납게 폴리아나에게로 꽂혔다. 그럼 그렇지, 저 자존심 강하고 도도하며 똑똑한 재원이 어떻게 얌전하게 인사를 하러 왔나 했다.

16606117245052.jpg“제가 사교란을 장식하고 있다고요.”

소렐은 표정 없이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16606117250125.jpg“모르셨군요. 신문을 좀 읽으세요.”

저년이 진짜. 에벌린의 인자한 눈에 살기가 어리기 시작했지만, 소렐은 에벌린만 눈치챌 만큼 살짝 고개를 저었다. 나서지 말라는 뜻이었다.

16606117245052.jpg“읽고는 있는데 항상 라이킨이 사교란은 가져가버려서 읽지 못했어요.”

에벌린의 눈에 형형하던 살기가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 만만해 보이는 작은 토끼 공주님은 지금 폴리아나가 가장 싫어하는 말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라이킨’이라고 특별히 부르는 특권, 그에 더해 그가 소렐이 보는 신문에서 사교란만 빼 갈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거다.

16606117245052.jpg“상황이 많이 심각한가요?”

16606117250125.jpg“네, 심각합니다.”

폴리아나는 고개를 냉철히 끄덕였다.

16606117250125.jpg“공주님이 정말 헬레인 공주가 맞는지, 왜 결혼식은 안 올렸는지, 별의별 추측들이 다 나오고 있어요. 이 모든 걸 뒤엎을 증거가 필요합니다.”

16606117245052.jpg“난처하겠네요.”

소렐은 여전히 조용하고 얌전하게 대답하기만 했다.

16606117250125.jpg“난처한 정도가 아닙니다. 모든 뱀파이어가 엔버네스로 와서 고생하고 있어요.”

16606117245052.jpg“라이킨이 일을 좀 많이 시키는 편인가 봐요.”

라이킨이 시킨 일이지 뭐 내가 시킨 일인가. 소렐은 폴리아나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16606117245052.jpg“그래도 제 어머니가 헬레인 공주인 건 사실이고, 제가 데뷔만 하면 전부 다 사라질 헛소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폴리아나는 대놓고 웃었다. 웃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16606117250125.jpg“누가 그러던가요?”

소렐은 그저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구든, 널 싫어한다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과 함께 공유하는 공기는 따끔거린다.

16606117250125.jpg“결혼식도 안 하셨잖아요. 약혼을 하긴 했나요? 제 말은,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할 거라는 겁니다. 아주 수상하게 볼 거예요. 결국 제임스 교수님의 체면과 평판이 무참히 비난받는 거죠.”

폴리아나는 객관적인 상황을 냉정하게 말해주는 것인 양 소렐을 공격했다. 저 순진하고 멍청한 애가 싫었다. 온 세상이 다 지 머릿속처럼 꽃밭인 줄 아나? 마녀를 매수하고, 엘펜하임과 싸우는 동료들이 목숨을 걸고 있는 이때에!

16606117250125.jpg“공주님, 뱀파이어들은 이 일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상황을 좀 더 똑바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소렐에게 가르치듯 타일렀다.

16606117250125.jpg“지금 그 누구도 공주님을 제임스 교수님의 합법적인 아내라고 보고 있지 않습니다.”

16606117245052.jpg“그래요? 저는 그린 교수님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소렐은 정확하게 짚고, 꾹 눌렀다.

16606117250125.jpg“……아닙니다. 공주님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제임스 교수님이 공격받고 있고요.”

16606117245052.jpg“엘펜하임이 부지런하긴 하네요. 학교에 막 쳐들어오더니, 이젠 신문기사도 엄청 열심히 써요.”

소렐은 순진한 눈을 깜빡이며 하고 싶은 말은 죄다 했다.

16606117245052.jpg“그래서 일이 많으신가 봐요.”

16606117250125.jpg“아뇨, 아까 말씀드렸듯이 공주님께서 전혀 교수님의 아내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일이 많은 겁니다. 사교계에서 평판은 목숨보다 더 중요하거든요.”

에벌린은 웃고 싶은 걸 참았다. 화가 나긴 했지만, 이젠 화가 나기보다는 그녀보다 한참 어린 폴리아나가 애 같은 짓을 하는 게 우스웠다. 혼자 저리 바락바락 고집을 부려대며, 나잇값도 못 하고, 항상 고고하던 모습을 사정없이 망가트리고 있다는 걸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는 지경이다.

16606117245064.jpg‘하긴 쟤가 원래 고집이 심하게 셌지.’

그리고 소렐은 말갛고 순진한 얼굴로 이상하게 폴리아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서로 잘 맞지 않는 편이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폴리아나를 순식간에 저렇게까지 흥분하게 만드는 존재는 별로 없는데 말이다.

16606117250125.jpg“지금도 보세요. 약혼도 없고, 결혼식도 없어서 숨어서 사는 정부라는 소리까지 듣는 마당에 보기 좋게 결혼반지도 없잖아요.”

그 말은 꽤나 날카롭고 의기양양했으며, 에벌린이 듣기에 몹시 유치했지만 소렐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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