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데뷔탕트 (9)2021.01.13.
토끼는 경계심이 아주 많고, 예민하다. 헬레인 토끼들은 그 점을 이용해 자신들만의 왕국까지 세웠다. 비록 세월에 무너지고 더 큰 힘에 당해서, 이젠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라이킨은 그 혈통을 이어받은 칼리에르 공비전하께서 차분히 침대 가운데에 벽을 쌓은 뒤 그에게 깜찍한 질문을 하는 것까지 그저 바라만 보았다.
“어느 쪽에서 잘 거예요?”
“공주님께서 편하신 쪽을 먼저 고르시지요.”
그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저 무너질 게 뻔한 베개 벽을 치우고 소렐을 안은 채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든, 벽 너머에 소렐을 두고 앉아서 밤을 새우든 마찬가지기 때문이었다.
“저는 그럼 이쪽에서 잘게요.”
라이킨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소렐이 토끼 모습으로 잔다면 그게 더 낫겠다. 그녀는 에벌린이 몰아대던 탓에 하얀 모슬린 잠옷을 입고 그의 침대 위에서 꼬물대고 있었다. 소렐의 달고 향기로운 체취가 그의 침실에서 점점 퍼지고 있었다.
‘저 침대는 당분간 사용하지 못하겠군.’
아니면 충분히 즐기면서 사용하든가. 라이킨은 고개를 흔들며 시선을 돌렸다. 짧다고는 하지 못할 세월을 살면서 욕구라는 것에 충실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절제된 삶을 강요당했고, 그도 그것에 딱히 불만이 있지는 않았다. 그는 천성이 그런 줄 알고 살아왔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아니면 소렐 이드리스가 이상하게 라이킨의 욕망이란 걸 자극하는 유일한 존재이거나.
“라이킨은 안 자요?”
“자야지요.”
겁은 나는지 베개를 꼭 껴안았으면서 그를 빤히 보니, 그가 어떻게 가만히 버티고 있을 수 있을까. 그는 즉시 침대로 걸어가면서도 어쩐지 점점 소렐의 눈빛에 약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오늘 열심히 사술을 깨시느라 피곤하시겠습니다.”
“피곤하지는 않아요, 괜찮아요. ……내 침대 위에 있는 걸 찾을 때는 좀 더 주의할 걸 그랬어요.”
소렐은 조금 의기소침해져서 중얼거렸다.
“나 때문에 편안하게 못 자서 미안해요.”
“……편안하지는 않지요.”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위에 올라앉았다.
“공주님께서 제 침대에 계시니 더 긴장도 되고…….”
그는 소렐을 보지 않았다. 지금 너무나 솔직한 그의 눈빛이 소렐을 겁먹게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기뻐서 편하게 잠이 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또 목까지 붉게 달아올랐겠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주무시지요.”
“어,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그런 말을 해놓고 신경을 쓰지 말라니, 정말 말도 안 된다. 소렐은 베개를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절 의식하신다면 저야 더 기쁩니다.”
그는 아주 솔직했다. 한 침대까지 쓰게 되었는데, 굳이 소렐에 대해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모든 걸 다 고스란히 내보이는 바보짓은 하지 않는다. 그건 하수나 하는 짓이었다.
“저만 설레면 조금 억울하잖습니까.”
그제야 라이킨이 소렐을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잘생겼는지 아주 잘 알았다. 부디 이 얼굴이 그녀의 취향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공주님께서 저와 같았다간 밤잠을 못 이루시겠군요. 공주님께서는 푹 주무셔야 하니, 아무 생각 말고 주무세요.”
사실 ‘설렌다’라는 단어는 라이킨보다는 소렐에게 어울리는 단어였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익숙할 만한 가볍고 귀여운 단어를 사용했다. 실제로 그의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시커먼 욕망을 그녀가 굳이 정확하게 알 필요는 없지 않은가.
“라, 라이킨은 자기 전에 할 일이 있지 않아요?”
잘생긴 남편이 웃어주고, 듣기 좋은 소리만 해주니 민망해진 소렐은 괜히 딴청이다. 그는 빙긋 웃었다. 지금 그가 자기 전에 할 일이 뭔지 중요한 게 아니다.
“쌓아두신 베개는 절대로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주무세요, 공주님.”
불안한 토끼에게 확실하게 약속을 해줘야 겨우 자려고 할 거다. 통속소설을 아주 열심히 읽길래, 이젠 조금 자라서 슬쩍 베개도 걷어치우고, 슬쩍 안기지 않을까 했건만, 아직까지도 공주님은 더 자라셔야 할 모양이다. 하긴 조금 자랐다 해도 그는 소렐을 정확하게 ‘안고만’ 잤을 거다.
“네…….”
원하는 말을 들은 소렐은 조금 민망한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베개를 놓고 몸을 뉘었다. 그가 하는 말에 심장이 이미 방망이질치고 있어서, 그녀도 제대로 잘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베개 벽을 사이에 두고 누웠지만, 어쩐지 부끄럽고 심장이 간질거렸다.
“라이킨, 잘 자요.”
“편안히 주무세요, 공주님.”
조명이 모두 꺼졌다. 소렐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눈을 감으니 다른 감각이 이상하게 더 예민해졌다. 베개는 편안하고, 그녀가 산처럼 쌓아둔 베개 벽은 멀쩡하다. 이불도 포근했다. 그러나 그녀의 침실에서 나지 않던 다른 냄새가 났다. 묵직한 포식자의 체취가 소렐을 부드럽게 감쌌다.
‘으…….’
소렐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내면서 괜히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예전이었다면 맡자마자 바로 도망갔을 냄새인데, 지금은 기분만 이상할 뿐이었다. 평생 함께 살아야 할 남편의 체취는 그녀가 여태까지 알고 있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위험했다. 무겁지만 부담스럽지 않고,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도 있는 향이 자꾸만 그녀를 감쌌다. 공격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니고, 그저 은은하게 흐를 뿐이다.
‘저만 설레면 조금 억울하잖습니까.’
그는 억울하지 않아도 됐다. 소렐도 지금 간질거리고 설렜으니까. 그녀는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서 벽을 이루는 베개 하나를 슬쩍 들어 올렸다. 뭔가를 힘주어 꼭 껴안아서 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억누르고 견딜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래야 이 밤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그녀의 예민한 귀에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아, 어떡해.’
소렐은 황급히 베개를 껴안았다. 아주 가까운 곳에 라이킨이 있었다. 그녀를 삼켜버릴 것처럼 크고, 동시에 아주 조밀하게 짜인 몸을 지닌 사내가 바로 옆에 있었다. 심장이 무척 빠르게 뛰었다. 콩콩 뛰는 소리가 들릴까봐 겁이 났다. 라이킨은 청력이 좋은 뱀파이어니까, 이 심장소리도 듣지 않을까? 소렐은 이리저리 뒤척였다.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베개 벽 너머로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잠자리가 바뀌니 불편하시지요.”
“그런 것도 있고요.”
“또?”
“라이킨 옆이라 긴장도 되고요.”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도 들렸다.
“그건 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좀 화가 나서 좀처럼 가라앉질 않아요.”
“화가 나요?”
“네. 화가 나요.”
소렐은 뚫어져라 베개 벽을 노려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라이킨도 베개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 때문에 화가 나셨습니까?”
“사술은 사악한 거예요.”
마냥 순진하고 말갛기만 한 줄 알았던 소렐 이드리스의 목소리에 그 누구도 무시 못 할 강단이 있었다.
“못되고, 게으른 거라고 그랬어요.”
“아버님이?”
“엄마도요.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고 든다는 게 얼마나 게으른 거냐고요. 상대방을 위해 노력을 하든가 성의를 보여야 할 거 아니에요.”
생각하면 할수록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 내 침실이랑 이곳에 부려놓은 사술이 가장 악해요. 어떻게 해서든…….”
라이킨은 그녀가 씩씩대며 하는 말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
“어떻게 해서든 침실에 들어오고 싶다는 욕망만 가득하다고요.”
공주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겠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 그런 여자였습니다.”
태연한 목소리에 소렐이 결국 벌떡 일어났다.
“지금 어디 있어요?”
“예?”
“지금 어디 있냐고요.”
“본인 영지에 있겠……, 왜요, 공주님께서 쫓아가서 혼내주시려고요?”
라이킨의 근사한 입술에 슬그머니 미소가 어렸다.
“따져야죠. 이런 건 가만두면 안 돼요. 시도하는 사람도 나쁘고, 의뢰받은 마녀인지 마법사인지도 나빠요. 되지도 않을 걸 된다고 하고 돈을 받았을 거 아니에요. 그럼 사기지. 진짜 나쁜 사람들이야.”
“다음에 만나면 혼내주세요, 공주님.”
“꼭 한마디 해야겠어요!”
글쎄, 말이 통하는 상대여야 말을 할 텐데 말이다. 라이킨은 소렐이 열심히 쌓아둔 베개 벽을 그녀를 대신하여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공주님께서 벽을 잘 쌓으신 게 다행입니다.”
“갑자기 그건 왜요?”
“벽이 없었다면 공주님을 껴안는 무례를 범했을지도 모르겠어서요.”
소렐은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잔뜩 실려 있다는 걸 알고는 몸을 일으켰다.
“나는 장난하는 게 아니에요.”
“예, 저도 그렇습니다.”
베개 벽 너머로 한가롭게 드러누운 뱀파이어가 그녀를 보며 웃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가 짓는 미소가 잘 보였다. 아니, 차라리 어둠 속에 있어서 더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뱀파이어는 밤을 지배하는 존재니까.
“절 대신해서 화를 내주시는 공주님이 사랑스러운 건데요.”
사랑스럽다니. 소렐은 그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간지러운 단어에 시선을 또록또록 굴렸다.
“제가 좀 그렇긴 하죠!”
사랑을 잔뜩 받고 자란 토끼는 자신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쯤이야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니 그만하라는 민망함의 표현이었지만, 라이킨은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내놈들이 공주님께 이런저런 칭송을 하며 가까이 오려고 하는 것도,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걸 아시겠지요?”
“이야기가 왜 그쪽으로 가는 건데요…….”
소렐은 포기하기로 했다.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우시니 좋으면서도 걱정이 되는 치사한 성격인지라.”
“치사해요?”
“예. 치졸하고, 질투도 심합니다. 그리고…….”
그는 몸을 일으켜서, 베개 벽 너머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던 소렐의 뺨에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참을성도 별로 없고요.”
“……좋지 않은 성격을 자랑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얼굴이 붉어진 소렐이 베개를 꾹꾹 누르며 간신히 중얼거렸다.
“공주님께서 사랑스러우신 것에 비해 이 정도로 참고 있는 거면 나름대로 인내심이 강한 거 아닙니까?”
소렐은 결국 빨개져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라이킨은 그냥 웃어버리곤,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잘 넘겨주고 쓰다듬었다. 성격 같아서는 우스운 베개 벽은 한 번에 다 밀어버리고, 당장 허리를 낚아챌 텐데, 실제로 실행에 옮기자니 소렐이 아직도 너무 어리다.
“집에 걸려 있던 사술은 확실하게 효과가 없었던 거군요. 제 눈에는 공주님만 예뻐 보입니다.”
이렇게 예쁜데 가만히 대학만 다니게 하겠다고 생각한 그가 미쳤던 거다. 온 사방에 이 여자는 그의 아내라고 도장을 쾅쾅 찍어 보이고, 그의 체취로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범벅을 해놔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었다. 글래스턴 추기경이 흔드는 언론과 한바탕 전면전을 벌이기 위해 엔버네스로 부리나케 올라오긴 했지만, 겸사겸사 소렐 이드리스가 누구와 결혼했는지 광고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오늘 정말 용감하고 멋있었어요, 공주님.”
뱀파이어는 눈을 휘어가며 웃었다. 베개 위에 머리를 둔 소렐은 긴 팔을 뻗어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깨가 넓고, 가슴까지 옷이 벌어져 근육이 훤히 보이는 남자는 지나치게 다정하고,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정신 차려야 하는데, 열심히 노력하다가 소렐은 또 순식간에 픽 쓰러져 잠들고 말았다. 아기 토끼는 오늘 열심히 저택을 돌아다니며 사술을 뜯어내느라 애썼다.
“좋은 꿈 꾸시고.”
라이킨은 머리맡 쪽에 있는 베개 벽을 조금 무너트렸다. 아무렇게나 베개들을 더 치워낸 뒤, 팔을 세우고 머리를 받쳤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가 마음에 들었다. 빈틈없이 살을 맞물리고 싶었지만, 지금 소렐이 그의 앞에서 무방비하게 잠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 나중에.’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뱀파이어에겐 아직까지도 시간이 무척 많이 남아 있었다. 항상 권태롭게 느껴지던 그 긴 수명이 갑자기 기꺼워졌다. * 사교계가 시작되면 온갖 신문의 사교란이 떠들썩해진다. 사교계를 꿰고 있는 모 부인, 혹은 모 신사가 매주 사교계 소식을 새로 제보했고, 사람들은 누가 ‘대어’인지, 어느 집안의 파티가 가장 교양 있으면서도 볼거리가 많은지 알아냈다. 칼리에르 공비전하, 엔버네스에 도착! 이번 시즌의 초반 화제는 글래스턴 공작, 칼리에르 공이 즐겨 찾는다는 양복점 근처에서 죽치고 있던 기자가 낚아 올린 기사가 다 쓸어갔다.
“‘칼리에르 공비전하’라니.”
이제 막 방학에 접어든 글래스턴 대학의 학부생, 뱀파이어 루벤 실베스터는 신문기사를 보며 킥킥 웃었다. 이 명예로운 호칭을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났던 누군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에설론 백작이 이 기사를 읽었다면 당장 영지에서 뛰쳐나오겠네.”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 실베스터 가문이 방계로 빠져나온 바로 그 어마어마한 본가의 대단한 여자 말이다. 그 여자는 1대 칼리에르 공이 너무나 아꼈던 ‘순혈’ 뱀파이어였다. 그녀가 차지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자리를 웬 토끼가 차지하고 있으니, 이 사실을 안다면 에설론 백작의 분노가 대단할 것이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루벤.”
그의 맞은편에 앉은 글래스턴 대학 벨파이어 칼리지 소속 교수, 폴리아나 그린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들은 우연히 엔버네스로 올라가는 기차에서 마주한 참이었다.
“엔버네스 종착역에 도착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하차해주십시오!”
사교계가 시작되면서 엔버네스 중앙역은 사람들로 더 붐비는 느낌이다. 폴리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여자는 스스로 잠들어 버린 지 오래야.”
“아, 옛날 연적을 또 마주하고 싶지 않다, 이거죠, 교수님? 알았어, 알았어요.”
루벤은 빙글빙글 웃어가며 폴리아나를 박박 긁어댔다.
“하긴 에설론 백작이 등장하면 교수님은 당장 장외로 쫓겨나겠지. 이쪽은 공비전하고, 저쪽은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에설론 백작이니까.”
“나는 지금 눈에 네가 보이네.”
폴리아나가 빙긋 웃자 루벤은 얼른 객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숙녀 먼저.”
그녀는 고상한 옷차림을 갈무리하며 그를 슥 지나쳐갔다. 일등석은 오늘 만석이라, 공교롭게도 두 뱀파이어가 마주 앉아 갈 수밖에 없었다. 루벤 실베스터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폴리아나 그린과 멀찌감치 떨어졌다. 칼리에르의 개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게 나았다. 어쨌든 그는 실베스터, 저 위에 계시는 칼리에르 가문과는 다른 방계 중의 방계니까.
‘……셀레스트 교수?’
걸어가던 그는 익숙한 뒷모습을 보았다. 이런, 글래스턴 추기경이 칼리에르 공비를 흠집 내기 위해 기자들을 동원한다는 설이 있더니, 엘펜하임의 사냥개까지 직접 엔버네스에 출장을 오셨나 보다. 심심해서 엔버네스로 왔는데, 이래저래 재미있겠다. 루벤 실베스터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고, 그의 걸음은 소풍이라도 나온 듯 한가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