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 데뷔탕트 (8) (47/181)

47. 데뷔탕트 (8)2021.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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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6117099208.jpg“봉투 몇 장 뜯어내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렐은 휴, 하고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차라리 장갑이라도 끼고 했으면 좋으련만, 소렐은 대충 봉투칼과 자만 가지고서 봉투를 마구 뜯어냈다. 불꽃이 점점 더 무섭게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소렐의 손에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차라리 봉투칼을 잘못 써서 그녀 스스로 상처를 입었으면 상처를 입었지, 사술에 다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알긴 했지만 라이킨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모든 과정을 뚫어져라 지켜보았다.

16606117099213.jpg“……힘이 드는 일 아닙니까.”

16606117099208.jpg“그래도 깨끗하게 다 떼어냈잖아요.”

침대 머리판 안쪽을 다 닦아내고 나니 다시 깨끗해졌다. 한바탕 난리를 부린 침실 주인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인데, 소렐은 호기심이 잔뜩 어린 눈으로 봉투들을 내려다보았다.

16606117099208.jpg“라이킨, 궁금한 게 있는데, 이거 진짜 효과가 있었어요?”

16606117099213.jpg“전혀 없었습니다.”

16606117099208.jpg“내가 방금 완전히 깨버린 건데, 느낌이 다르거나 하지 않아요?”

16606117099213.jpg“전혀요.”

16606117099208.jpg“음, 내가 더 예뻐 보인다거나, 나한테서 느껴졌던 꺼림칙한 기분이 사라졌다거나……?”

16606117099213.jpg“공주님은 처음부터 아름다우셨고, 꺼림칙한 기분은 전혀 들었던 적이 없습니다.”

16606117099208.jpg“그렇군요. 그럴 것 같긴 했어요. 워낙 조잡해서.”

소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16606117099208.jpg“내가 열어봐도 될까요?”

16606117099213.jpg“왜 물어보십니까, 그냥 하세요.”

16606117099208.jpg“그래도 라이킨에게 온 편지잖아요.”

라이킨은 다정하게 웃었다.

16606117099213.jpg“공주님께서 보시지 않으시겠다면 저는 당장 벽난로에 던져 넣었을 겁니다. 솔직히 지금도 그러고 싶군요.”

증거라서 가만히 두는 것뿐이지.

16606117099213.jpg“……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사술인지 혹시 아시겠습니까?”

16606117099208.jpg“오래됐죠. 백 년, 아니, 이백 년은 더 됐어요. 비싼 종이이기도 하지만, 사술 때문에 형체를 계속 유지한 거예요. 점점 빛이 바래버릴걸요.”

소렐은 봉투를 봉한 밀랍을 뜯어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16606117099208.jpg“그런데 공작저에 이런 사술을 부릴 수 있을 정도인가요? 아무나 드나들 수는 없지 않아요?”

16606117099213.jpg“보안이 허술했던 때가 한 번 있었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16606117099208.jpg“언제요?”

그녀는 별생각 없이 열렬한 연애편지를 열어보며 물었다.

16606117099213.jpg“어머니의 장례식 때요.”

소렐은 한 번 놀랐다가, 다시 한 번 또 놀라고 말았다. 라이킨의 어머니, 전대 칼리에르 공의 죽음이 자꾸만 언급되고 있었다.  

16606117099213.jpg‘어머니의 죽음으로 끝난 약혼이었지요.’

  게다가 장례식 때 공작저의 보안이 허술했을 거라니. 그러면 이건 그의 전 약혼녀가 어떻게든 약혼을 유지해보고자 발악을 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소렐은 두 번 놀랐다.

16606117099208.jpg“미안해요. 자꾸만 어머님이 돌아가신 이야기를 하게 되네요.”

16606117099213.jpg“아니, 저는 괜찮습니다, 공주님.”

라이킨은 고개를 흔들었다.

16606117099213.jpg“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일은 전혀 슬프거나 충격이 아니었습니다. ……충격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뿐이니까요. 저는 그 일에 딱히 크게 마음을 쓰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는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16606117099213.jpg“괜찮으니 괘념치 마세요.”

라이킨은 슬프지도 않았고,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화가 났을 뿐이었다. 무척이나.

16606117099208.jpg“정말 오래된 사술이네요. 그리고 이것들은……. 읽을래요?”

소렐은 조금 망설이다가 라이킨에게 물었다.

16606117099208.jpg“라이킨에게 온 편지들이에요.”

16606117099213.jpg“날더러 읽으라고 써놓은 것들도 아니니 딱히 읽고 싶지 않습니다. 공주님께서도 불쾌하시면 읽지 마시지요.”

16606117099208.jpg“아니, 그래도 사술을 완전히 파악하려면 내용도 읽어야 해요. 근데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네요.”

영 못마땅한 일이었지만 소렐이 읽어야 한다는데 그가 막을 힘은 없었다.

16606117099213.jpg“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공주님께서 다 아시는 게 낫겠습니다.”

라이킨은 얼굴을 문지르며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16606117099208.jpg“……우와…….”

그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16606117099213.jpg“왜 그러십니까?”

소렐은 손으로 입을 막고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양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16606117099208.jpg“그, 제가 볼 게 아닌, 아니, 봐야 하긴 봐야 하는데 이거 진짜 너무, 그러니까, 연인 사이의 그런…….”

라이킨은 당장 소렐이 읽고 있던 편지를 휙 긋듯이 읽었다. 당신과 함께 있었던 장미정원의 숨 막히는 향기가…….  

16606117099213.jpg“사실이 아닙니다.”

나오는 대답이 무척 딱딱했다.

16606117099208.jpg“아니에요?”

16606117099213.jpg“예. 이 여자와 저는 마음을 나눈 사이가 아닙니다. 연인이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어머니나 샤를렌 없이 단둘이 만난 적도 없습니다.”

보통 불쾌한 게 아니라는 표정에 소렐은 다시 한 번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16606117099208.jpg“라이킨, 나는 정말…….”

뭐라고 하려고? 당신이 다른 여자를 만났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하려고? 라이킨은 듣고 싶지 않아서 감히 공주님의 말허리를 잘랐다.

16606117099213.jpg“공주님. 말씀을 막아서 죄송합니다만.”

타오르는 푸른 눈이 소렐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16606117099213.jpg“제가 이토록 가까이 다가가서 알고 싶어 하고, 저와 같은 마음이길 바란 존재는 공주님 한 분뿐입니다.”

말하고 보니 뼈에 사무치는 이 감정을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꼭 과거의 부정을 들켜 변명을 늘어놓는 나이 많은 남편 같지 않은가. 과거의 그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고 네가 내 진정한 사람이야,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너저분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라이킨은 그래서 더 화가 났다.

16606117099213.jpg“공주님, 저는……, 맹세코 이 여자를 포함한 다른 어떤 누구와도 연인이라고 할 만한 관계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새카맣게 질린 얼굴로 어렵게 말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16606117099213.jpg“……말하고 나니 변명처럼 들리는군요.”

그것도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소렐에게 곧이곧대로 들릴 리가 만무한 말이었다. 제기랄, 라이킨은 망상과 저 혼자만의 감정에 사로잡혀 취하기까지 한 편지를 더러운 쓰레기를 보듯 내려다보았다.

16606117099208.jpg“아뇨, 변명처럼 들리지는 않아요.”

소렐은 고개를 흔들었다.

16606117099208.jpg“사술을 이 정도로 썼다면, 그쪽은 약혼을 유지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는 뜻이잖아요. 물론 이걸 필사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오죽 의지할 곳이 없으면 마법사에게까지 의탁했겠어요.”

16606117099213.jpg“이런 짓 말고도 다른 짓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사술까지 사용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16606117099208.jpg“그랬어요?”

16606117099213.jpg“예.”

라이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17099213.jpg“……약혼은 가문과 가문 사이의 약속이라,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쪽 집안에서 약혼을 유지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안에서는 어머니를 제외하곤 아무도 그 약혼에 찬성하지 않았기에…….”

이런 이야기를 소렐에게 한다는 것조차 곤혹스러웠다. 그러나 소렐도 알아야 했다. 그녀는 알 권리가 있었다.

16606117099208.jpg“무척 곤란했겠어요.”

16606117099213.jpg“예, 그렇습니다.”

그는 지금도 곤란해 보였다.

16606117099213.jpg“백칠십 년은 잊어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라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16606117099208.jpg“네, 충분히 오래된 일이에요.”

엉겁결에 남편에게서 당신밖에 없다는 고백을 소렐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저렇게 괴로워하는 라이킨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16606117099208.jpg“백칠십 년은 지나치게 오래됐어요. 잊어버린 게 당연해요.”

헬레인 왕가가 완전히 멸망했다는 백오십 년 전도 소렐에게는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열정 가득한 연애편지조차 그녀에겐 유물이었다.

16606117099208.jpg“이걸 쓴 사람에게도 부끄러운 과거가 되었을 것 같은데요.”

16606117099213.jpg“그랬으면 좋겠군요.”

라이킨은 진심으로 그러길 바랐다. 그렇다 해서 그가 이 일을 묵과하고 넘어갈 건 아니지만 말이다.

16606117099208.jpg“이분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셨대요?”

16606117099213.jpg“관심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그의 대답은 싸늘하고 냉정하기만 했다. 소렐은 종이를 빼곡하게 채운 연서를 내려다보았다.

16606117099208.jpg“사랑의 묘약 같은 사술이에요. 편지를 받는 이의 집에 걸어놓으면 가장 강력하게 구동하는……, 소년, 소녀들이 마녀에게 많이 의뢰하는 사술이래요. 상대방이 날 좋아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들 해요.”

16606117099213.jpg“효험이 있었다면 진작 있었겠지요.”

사술에 대한 라이킨의 평가는 가차 없었다.

16606117099213.jpg“백칠십 년이나 지났는데도 아무런 효과도 없었던 걸 보면 어지간히 엉터리였나 봅니다.”

16606117099208.jpg“기초가 잘못 세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강력한 사술이긴 해요.”

소렐은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면 라이킨이 너무 강한 뱀파이어라 전혀 먹히지 않았을 수도 있고.

16606117099213.jpg“그러면 공주님께서는 기초란 걸 제대로 세우시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가지는 것도 가능하십니까?”

라이킨이 슬쩍 웃으며 물어보았다. 사실 그는 그런 사술이 필요했다. 저 까만 눈을 볼 때마다 절실해졌다.

16606117099208.jpg“아뇨, 사람 마음을 어떻게 마음대로 조종해요? 그런 건 아무리 대마법사라도 불가능하다고 아빠가 그랬어요. 그럴 거였으면 엄마랑 연애할 때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거라고 농담도 했어요.”

16606117099213.jpg“예. 펠릭스가 그랬지요.”

그의 웃음이 짙어졌다.

16606117099208.jpg“엄마랑 아빠랑 어떻게 연애했는지 알아요? 봤어요? 말해줄 수 있어요?”

소렐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16606117099213.jpg“전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아버님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 그러니까 헬레인 왕가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 어머님과 함께 다시 나타났으니까요.”

16606117099208.jpg“그래도 저보다는 엄마랑 아빠를 오래 보셨겠어요. 그건 부럽다.”

그녀는 절절하다 못해 집념이 느껴지는 연애편지들을 다 모았다.

16606117099213.jpg“그건 이제 제가 손을 대도 괜찮습니까?”

16606117099208.jpg“네. 어떤 사술인지 다 확인했으니까 안전해요. 벽난로에 태워버리게요?”

16606117099213.jpg“아뇨. 칼리에르 공작저에 사술을 부린 이에게 들이댈 증거로 삼을 생각입니다.”

연서들을 직접 쓴 글씨조차 낯이 익었다. 서명까지 다 되어 있으니, 증거로 들이대면 부정할 수도 없으리라.

16606117099213.jpg“그냥 넘어갈 일은 아닙니다.”

16606117099208.jpg“그건 그래요.”

소렐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16606117099208.jpg“그럼 나는 가서 잘게요. 라이킨도 잘 자요.”

라이킨은 꼼지락대며 가지고 들어온 물건들을 다 챙기는 소렐을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16606117099213.jpg“그 침실로 돌아가서 주무시겠다고요?”

16606117099208.jpg“네, 이제 잘 시간이 가깝잖아요.”

16606117099213.jpg“……예, 주무세요, 공주님.”

그는 친절하게 소렐을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공비의 침실로 다시 바래다주었다. 그날 일어났던 소동은 이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서 또 튀어나왔다. *  

16606117116417.jpg“공주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16606117116417.jpg“바닥에 있던 의자를 침대 위에 올리고 요를 내리고 해서, 침대는 오늘 사용하실 수 없어요. 전부 다 새로 세탁해야겠어요.”

16606117099208.jpg“어, 그럼 난 어디서 자야 하죠?”

16606117116417.jpg“공비의 침실을 사용할 수 없으면 당연히 공작의 침실로 가셔야죠.”

소렐은 눈을 깜빡거렸다.

16606117099208.jpg“……네?”

16606117116417.jpg“공작저에서는 법도가 그렇습니다.”

16606117099208.jpg“그냥 남는 침실 없나요?”

16606117116417.jpg“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주님께 고용인들이 사용할 침대를 내드릴 수는 없지요.”

에벌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16606117099208.jpg“여벌의 요가 없어요?”

16606117116417.jpg“침대 전체를 들어내서 소독하고 세탁할 예정이라, 요만 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침대 자체를 쓸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어쩌지? 소렐은 사상 초유의 사태에 몹시 당황했다. 당장 쓸 수 있는 베개도 없어서, 잠옷 차림으로 하녀들이 바쁘게 요를 걷어내고 있는 그녀의 침대를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16606117099213.jpg“공주님.”

등 뒤에서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그녀는 펄쩍 뛰듯 물러나며 뒤를 돌아보았다. 에벌린이 불러왔는지, 라이킨이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16606117099213.jpg“이야기 들었습니다. 일단 가실까요. 이 방에서는 차분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기가 힘들 것 같군요.”

그녀가 잠들어야 할 침대에는 여전히 하녀들이 다섯 명이나 들러붙어서 일을 하고 있었다. 소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을 잡고, 그의 침실로 돌아왔다.

16606117099208.jpg“어떡하죠?”

16606117099213.jpg“어떡하긴요, 제 침대는 넓으니 다행입니다.”

소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16606117099213.jpg“공주님께서 주무세요. 저는 하룻밤 정도는 자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에벌린도 그걸 알아서 소렐을 그에게 보낸 것이다.

16606117099208.jpg“어떻게 그래요?”

16606117099213.jpg“뱀파이어니까요.”

그는 매우 한가롭고, 동시에 농담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16606117099213.jpg“게다가 저도 저런 사술을 부려놨던 침대에서 혼자 자기가 영 무섭군요.”

16606117099208.jpg“그건 확실히 농담이란 걸 알겠어요.”

16606117099213.jpg“제가 어떻게 감히 공주님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암만 봐도 무서운 표정이 아닌데!

16606117099213.jpg“그냥 주무세요, 공주님. 겸사겸사 이 심약한 남편도 좀 지켜주시고.”

라이킨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판 앞면을 떼어낸 침대를 바라보았다. 하긴 무척 싫을 거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자신에게 사랑에 빠지게 해달라고 집에 사술을 걸었다는 걸 누가 좋아하겠는가.

16606117099213.jpg“……그저, 공주님께서 평안히 밤을 보내시면 저는 그걸로 될 것 같습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소렐을 보며 싱긋 웃었다.

16606117099213.jpg“공주님은 아주 편안하게 새근새근 잘 주무시더군요.”

16606117099208.jpg“언제 봤……, 아.”

학교에서 습격당했던 날, 악몽을 꾸고선 토끼로 완전히 변했다. 그대로 라이킨 앞에서 자버렸던 기억이 이제야 났다.

16606117099208.jpg“……그래도 나 때문에 라이킨이 밤을 새우는 건 싫어요.”

16606117099213.jpg“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일주일을 자지 않아도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소렐은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라이킨은 순순히 인정했다.

16606117099213.jpg“일주일은 좀 무리겠네요.”

16606117099208.jpg“가운데에 베개를 놓고 자면 될 거예요. 난 몸부림을 치지 않는 편이니까요.”

아빠가 아빠 빼고 모든 남자들은 믿어서는 안 되고, 특히 ‘그놈’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고 세뇌를 하다시피 가르쳤던 일이 헛수고가 되는 순간이었다. 소렐은 똑 부러지게 말해놓고 먼저 용감하게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곤 침대 중간에 남는 베개를 쌓기 시작했다.

16606117099208.jpg“꼭 자야 해요. 잠은 정말 중요하잖아요.”

이거 참. 난감하게 되었다. 라이킨은 베개로 성벽을 쌓는 아내를 바라보며 망설였다.

16606117099213.jpg‘잘 자신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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