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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데뷔탕트 (6) (45/181)

45. 데뷔탕트 (6)2021.01.02.

외출은 길고 길었다. 소렐은 라이킨의 전 약혼녀와 라이킨의 벗은 상반신 사이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목적을 달성했다. 그녀는 라이킨의 오래된 재단사와 의논하여 그녀가 의상실에서 새로 맞춘 수많은 드레스 중 몇 벌과 어울리는 연회복을 맞추는 데 성공했다. 소렐은 사실 그 훌륭하고 오래된 양재점을 통째로 살 수 있는 재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수표에 서명만 하면 그만이었다.

16606116932286.jpg“감사합니다, 공비전하. 중간에 가봉만 한 번 더 하면 됩니다.”

16606116932291.jpg“잘 부탁드려요.”

소렐은 생긋 웃었다. 칼리에르 공비가 할 일이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돈을 쓰고 생글생글 웃는 것이라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시원하게 수표책에 서명을 하고 수표를 찢어 내민 뒤 그곳을 떠났다.

16606116932291.jpg“굉장히 오래된 곳이네요.”

166061169323.jpg“예. 뱀파이어들이 하는 상점들이 원래 그렇지요.”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169323.jpg“오늘은 공주님을 위해 외출하는 날이었는데, 뜻밖에도 제가 더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16606116932291.jpg“무슨 소리예요. 나는 원단과 색깔 별로 옷을 받았지만, 라이킨은 아니잖아요.”

재단사와 열띤 토론 끝에 장인을 따로 불러다가 새 연회복에 근사하게 잘 어울리는 지팡이를 새로 하나 주문하고, 여러 가지 종류의 크라바트와 커프스, 서스펜더까지 보았다.

16606116932291.jpg“오늘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옷에 그렇게 헌신하는 사람들도 멋있어 보였고요.”

안목이 높아지긴커녕, 배울 게 더 많아진 기분이지만 말이다.

166061169323.jpg“즐거우셨습니까?”

16606116932291.jpg“네. 재미있었어요.”

166061169323.jpg“지치지 않으셨다면 좀 걸을까요?”

소렐은 라이킨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16932291.jpg“그래요.”

엔버네스의 지리는 잘 몰랐지만, 라이킨이 데리고 가는 길이야 안전할 거다. 그는 실제로 그녀를 가장 안전하고 볕이 잘 드는 곳으로만 이끌었다. 키가 커다란 신사가 작은 숙녀를 거의 품다시피 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166061169323.jpg“공주님께서는 엔버네스에 처음이라고 하셨지요.”

16606116932291.jpg“네. 와본 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너무 어려서 기억에 없어요.”

166061169323.jpg“그렇군요. 여긴 엔버네스의 부유한 테이튼 로입니다. 이쪽으로 쭉 걸어가면 궁이 나오지요. 근처에는 안전하게 산책하기 좋은 공원도 있습니다.”

16606116932291.jpg“라이킨은 엔버네스에 종종 와요?”

166061169323.jpg“예. 어쨌든 처리해야 할 업무가 1년에 한 번씩은 생기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잠시 멈춰 섰다. 소렐의 시선이 근처에 있는 꽃집에 가닿기도 전에, 그가 불쑥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166061169323.jpg“골라봐요.”

16606116932291.jpg“꽃을요?”

166061169323.jpg“예.”

그는 그러면서도 아직 만개하기 전인 귀한 붉은 장미를 한 아름 주문했다.

166061169323.jpg“이 숙녀께서 가지고 가시기 괜찮을 정도로, 너무 무겁지는 않게.”

워낙 부유층이 많이 애용하는 꽃가게였던지, 싱싱한 장미는 금세 빠르면서도 예쁘게 포장되어 소렐의 품 안에 떨어졌다.

166061169323.jpg“다 골랐습니까?”

16606116932291.jpg“뭘요?”

166061169323.jpg“꽃 말입니다.”

라이킨은 꽃이 즐비한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16606116932291.jpg“하지만 받았잖아요.”

붉디붉은 장미 한 다발이 이미 그녀의 품 안에 있었다.

166061169323.jpg“그건 제가 고른 것이고, 공주님께서 마음에 드시는 게 또 따로 있을 거 아닙니까.”

소렐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제 품 안에 있는 장미를 바라보았다.

16606116932291.jpg“이게 제일 예뻐요.”

어쩌면 그 붉은색은 아직 소렐에게 이르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녀에겐 여린 분홍색, 혹은 크림색이나 주홍색 장미가 더 잘 어울리니까. 하지만 라이킨은 그녀에게 가장 먼저 선명한 붉은색 장미를 선물하고 싶었다. 그의 눈에는 그 색이 소렐에게 가장 잘 어울렸다.

166061169323.jpg“그렇군요.”

그걸 안고 있는 소렐이 가장 예뻤다.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꽃을 한 아름 안겨준 남자는 공주님을 모시고 또 어디론가 잠깐 걸어갔다. 그러더니 소렐을 앉혀두고 이번엔 아주 달콤한 디저트를 선물했다. 라이킨과 다니는 건 다 이런 식이었다. 많이 걸어도 괜찮은, 튼튼한 신발을 신고 있었지만 그는 그녀가 오래 걷게 두지는 않았다. 한 걸음 가서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고, 또 한 걸음 가서 다른 세계의 문을 여는 식이다.

166061169323.jpg“입맛에 맞습니까?”

16606116932291.jpg“달콤해요.”

소렐은 고개를 끄덕이며 숟가락으로 바삭하게 구운 설탕 뚜껑을 깨고, 안에 숨겨진 달콤한 크림을 떠냈다.

166061169323.jpg“……공주님.”

소렐이 고개를 들었다. 맛있는 걸 잔뜩 사주고, 또 꽃까지 선물한 남자의 속셈이 무엇이겠는가.

166061169323.jpg“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빤히 그를 바라만 보고 있던 그녀는 숟가락을 입에 넣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169323.jpg“미리 말씀드려야 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말인가.

166061169323.jpg“……예전에 약혼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소렐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표정 변화조차 없었다.

166061169323.jpg“한 백칠십 년 전에.”

숟가락이 다시 빠져나왔다.

16606116932291.jpg“……백칠십 년이요?”

166061169323.jpg“예.”

라이킨은 조금 난감하다는 듯 덧붙였다.

166061169323.jpg“시간이 좀 지나긴 했지요.”

‘좀’ 지났단다. 이놈의 뱀파이어들은 시간개념이 참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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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리에르 공이 엔버네스로 향했다는 소문이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돌봐야 하는 모든 일들은 글래스턴으로 보내졌으나, 갑자기 방향을 바꿔서 엔버네스로 보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엉덩이가 무겁고, 인간들의 사교계가 어떻게 돌아가든 관심도 없던 뱀파이어들이 그래서 일제히 일어나 엔버네스로 향하기 시작했다.

16606116932286.jpg“칼리에르 공비를 둘러싼 소문들이 자자해.”

16606116932286.jpg“헬레인 공주라며?”

16606116932286.jpg“흥, 보나 마나 글래스턴 추기경이 일부러라도 더 퍼트린 소문이겠지.”

16606116932286.jpg“그래, 헬레인 유산은 엘펜하임이 죄다 먹어치웠는데, 헬레인 공주라니. 아주 잘 걸렸다 이거지. 멍청한 영감탱이.”

16606116932286.jpg“헬레인 공주라고 증명할 수 있으면 증명해보라는 건가.”

사교계에서 증명할 수 있는 신분이란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했다. 바꿔 말하자면, 증명할 수 없는 신분은 사교계에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헬레인 공주라고 거짓말하는 비천한 여자를 칼리에르 공이 데리고 왔다는 소문이 인간들 사이에서 조금씩 떠돌고 있었다. 약혼했다는 소식도 없고,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다는 건 누구나 다 수상하게 여기기 좋았고, 공격하기도 좋은 구실이었다. 누가 봐도 정부였다. 비천한 여자. 사교계는 평판이 전부였다.

16606116932286.jpg“엔버네스로 간다고?”

16606116932286.jpg“칼리에르 공이 참석하는 사교계 시즌이라면 마땅히 가봐야 하지 않겠어?”

16606116932286.jpg“사실은 칼리에르 공비가 누구인지 궁금한 거면서.”

16606116932286.jpg“헬레인 공주라잖아?”

뱀파이어들끼리는 이미 알음알음 알고 있는 소렐의 정체였다. 글래스턴 추기경은 믿고 싶지 않아서 오히려 사실을 널리 알리고 있는 격이라, 뱀파이어들의 비웃음을 잔뜩 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에 관해 현 칼리에르 공이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지도, 이미 그들끼리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16606116932286.jpg“그럼 프랑슈틸에서는 온대?”

16606116932286.jpg“거기가 그 전대 칼리에르 공과 친했지, 이번 칼리에르 공과는 영 사이가 나쁘잖아. 오겠어? 죽은 듯이 자고 있는 게 벌써 백 년이 넘었는데.”

16606116932286.jpg“아직도 그렇게밖에 안 됐어?”

그림자 속에서 뱀파이어들은 저마다의 시간관념을 내세우며 수군거렸다.

16606116932286.jpg“프랑슈틸에게는 아주 짧은 시간이지.”

16606116932286.jpg“그렇지. 그들에겐 그렇지.”

16606116932286.jpg“순혈을 따지면서 납치하는 자들.”

16606116932286.jpg“귀족 중의 귀족이야.”

16606116932286.jpg“그런 말은 절대로 칼리에르 공 앞에서 꺼내지 마.”

뱀파이어들은 서로에게 주의를 주면서도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16606116932286.jpg“엔버네스로 가면 칼리에르 공비를 볼 수 있을까?”

16606116932286.jpg“그 집안에서 결국 공비가 나오긴 나오는군.”

16606116932286.jpg“난 프랑슈틸 그 여자가 공비 자리에 기어코 앉을 줄 알았어.”

16606116932286.jpg“그 말을 듣고 보니 그 여자는 더더욱 나타나지 못하겠네. 남이 공비 자리를 차지한 걸 그 성격에 어떻게 두고 볼까?”

호기심 어린 눈들이 엔버네스에 더 쏠리기 시작했다. 올해 사교계는 훨씬 더 북적거릴 예정이었다. *  

166061169323.jpg“어머니가…….”

라이킨은 그닥 좋아하지 않는, 죽은 전대 칼리에르 공을 언급했다.

166061169323.jpg“어머니가 주선한 약혼이었습니다.”

소렐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투는, 마치 그의 의사는 완벽하게 배제되었다는 뜻을 포함하는 것 같았다. 라이킨은 대놓고 나서서 모든 걸 다 지배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존재감이 확실한 남자였다. 그런데 그의 의사가 없었다고?

166061169323.jpg“어머니의 죽음으로 끝난 약혼이었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도 아니고, ‘죽음’이라고 표현하는 라이킨의 말투에 무심함이 넘쳐흘렀다. 아버지인 로렌스 오블리앙 공에게 보이는 다정하고, 동시에 깊은 존경심까지 깃들어 있는 애정과는 확연한 온도 차이였다.

166061169323.jpg“솔직히 저도 잊고 있었습니다.”

소렐 이드리스는 경험이 적은, 이제 겨우 성인이 된 신입생에 불과했다. 그런데 왜 그가 말하는 투에 지독하게 배어 있는 무관심과 무성의함이 선명하게 읽히는 걸까?

166061169323.jpg“아니,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끝났다는 것에 안도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군요.”

라이킨은 예전 약혼에 대해 가차 없이 말했다.

166061169323.jpg“끝나서 자유로워졌으니까요.”

16606116932291.jpg“사랑해서 한 약혼이 아니었네요.”

166061169323.jpg“전혀.”

사랑이라는 말에 그는 경기를 일으키고 싶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16606116932291.jpg“왜요? 어머니가 그래도 라이킨을 위해서 잘 알아본, 그러니까…….”

혹시 실례인 말이 아닐까, 싶어서 소렐은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그는 약간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가 말을 다 완성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16606116932291.jpg“좋은 혼처였을 거 아니에요.”

166061169323.jpg“예, 철저하게 어머니 기준이었죠. 어머니가 그 여자와 결혼을 하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라이킨은 빈정거리면서도 소렐에게 양해를 구한 뒤 담배를 꺼냈다.

166061169323.jpg“둘이 환상의 한 쌍이었을 테지요. 잘 어울렸어요.”

그는 연기를 깊게 마신 뒤 불어냈다.

166061169323.jpg“어머니는 날 위해 알아본 게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 알아본 혼처였습니다. ……철저히 그랬지요.”

그게 백칠십 년 전 이야기인가. 점점 심각해지는 것 같아서, 소렐은 섣불리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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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속내를 알아차린 걸까, 라이킨은 그녀를 돌아보며 웃었다.

166061169323.jpg“궁금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질문하세요.”

16606116932291.jpg“아뇨, 별로…….”

166061169323.jpg“어째서요?”

16606116932291.jpg“불쾌한 이야기를 억지로 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소렐은 고개를 흔들었다.

166061169323.jpg“그렇습니까.”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169323.jpg“저였다면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애썼을 겁니다.”

소렐은 다시 디저트에 집중하려고 하다가 말고 라이킨을 바라보았다.

166061169323.jpg“공주님께서 저 말고 다른 남자와 약혼을 했었다면 어떤 사람인지 낱낱이 알아냈을 겁니다.”

그러곤 아마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을 거다. 지금 가만히 앉아서 달콤한 크림을 먹고 있는 소렐을 보니 분명히 그랬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166061169323.jpg“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잠을 못 이룰 것 같군요.”

그는 손을 뻗어서 소렐의 입술에 묻은 크림을 닦아냈다. 그의 엄지에 묻은 크림은 그대로 얄팍한 뱀파이어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토끼는 숟가락을 허공에 멈추고 그를 얼어붙은 듯이 바라보기만 했다.

166061169323.jpg“그래서 더더욱 공주님께 솔직하게 모든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랑이고 애정이고 전혀 없었으며, 제 의사도 없었던 약혼이었다고.”

그리고 그는 그렇게 질투가 많고 독점 욕구가 심한 사람이라고.

16606116932291.jpg“……약혼을 안 할 수 있었으면 안 했겠네요.”

166061169323.jpg“안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을 뿐이지.

16606116932291.jpg“우연히 어머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끝난 거구나.”

166061169323.jpg“예.”

우연은 아니었지만. 라이킨은 뒷말은 삼켰다.

16606116932291.jpg“많이 힘들었겠어요.”

166061169323.jpg“끝나니 한결 나았지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의 죽음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는 뜻일까? 소렐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가 일단 보여주는 것 외에 일부러 더 파고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최근에 읽은 소설에 따르면, 신중한 탐정은 증거가 없이는 목격자든 용의자든 함부로 심문하지 않는단다.

16606116932291.jpg‘나 혼자 더 알아봐야지.’

소렐은 숟가락을 꼭 쥐고 야무지게 결심했다. * 엔버네스의 칼리에르 공작저에서도 어렵지 않게 귀족연감을 구할 수 있었다. 그건 최신판이 아닌, 아주 낡고 오래된 연감이었지만 백칠십 년 전의 약혼 관계를 따져본다면 차라리 그게 나았다. 소렐은 주변을 살핀 뒤 몰래 거대한 서재 구석에 앉아서 연감을 펼쳤다.

16606116932291.jpg“프……, 피……, 아니, 프…….”

프랑슈틸 가문. 찾았다. 소렐은 그 가문의 짧은 길이를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 이들은 뱀파이어 가문이었다. 어머니도 뱀파이어, 아버지도 뱀파이어, 전부 다 아주 오래된 뱀파이어 가문이다. 그것도 심지어 외국에서 뱀파이어와 결혼해서 가지를 뻗은 가문인가 보다.  

166061169323.jpg‘어머니가 주선한 약혼이었습니다.’

  라이킨의 어머니는 뱀파이어가 상대이길 바라셨구나. 소렐은 외가 쪽을 거슬러 올라가면 머레이 대공까지 나오는 대단한 가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위치한 이름까지 시선을 내렸다.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 에설론 백작 아마 이 여자가 라이킨의 약혼녀였을 거다. 아무리 뒤져봐도 프랑슈틸 가문에서 라이킨과 결혼을 할 만한 미혼의, 그것도 연배가 맞는 여자는 이 여자 하나뿐이었으니까. 루드밀라라니, 이름이 예쁘네. 이름은 알았으니 더 볼 일은 없다. 소렐은 넓다 못해 광활한 서재에서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서재에서도 가장 깊숙한 이 구석, 책장과 벽 사이에 끼인 종이를 발견했다. 소렐처럼 체구가 작은 사람이 쪼그려 앉아서 우연히 그 구석을 보지 않았다면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을 종이뭉치, 아니, 봉투 몇 장이었다.

16606116932291.jpg‘저게 뭐야?’

소렐은 두꺼운 귀족연감을 내려놓고 억지로 끼워 넣은 게 분명한 봉투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봉투는 대충 다섯 통 정도 되는 모양이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서재에 장식용으로 마련해둔 얇고 긴 자를 가져와서 낑낑대며 봉투를 빼냈다.

16606116932291.jpg“어휴, 깊게도 넣어놨다…….”

이게 도대체 뭔데? 깔끔하게 항상 청소되는 서재의 상태와는 좀 동떨어진 물건이다. 소렐은 낡고 빛이 바래버린 봉투를 집어 들다가 움찔거렸다. 아주 오래된, 오래되었으나 부자연스럽게 형태가 유지되고 있는 물건이었다.

16606116932291.jpg“……마법?”

아니, 아빠가 흔하게 쓰던 마법이라고 하기엔 실례가 될 정도로 조잡한 사술이다. 봉투는 밀랍으로 봉해져 있었고, 그 위에 특수하게 처리된 잉크로 발신인과 수신인이 정확하게 쓰여 있었다. 사랑하는 제임스에게, 당신의 루드밀라. 그 잉크에서마저 조잡한 사술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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