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데뷔탕트 (5)2020.12.30.
소렐은 이제 막 서스펜스 살인사건이 마구 일어났던 소설 한 권을 다 끝낸 참이었다. 너무나 재미있고 흥미진진했다! 그녀는 그래서 갑자기 들은 라이킨의 약혼 이야기를 탐정이 되어 캐보기로 했다. 일단 알아낼 수 있는 건 다 알아낸 다음에, 그다음에. 그래, 그다음에 그에게 물어볼 거다.
“어서 오십시오, 공비전하.”
라이킨이 항상 옷을 주문했다는 재단사는 중년의 뱀파이어였다. 그러니까 라이킨보다는 나이가 많고, 그녀의 시아버지 로렌스 오블리앙 공보다는 젊은 나이였다. 그는 매우 깍듯하게 자신을 칼리에르 공의 전속 재단사 아론 맥키넌이라고 소개했고, 푸른색 조끼에 빨간 보타이를 하고 있었다.
“편히 앉으시지요. 마실 것을 드릴까요?”
“괜찮아요.”
소렐은 자리에 앉아서 라이킨이 치수를 재는 걸 일단은 구경하기로 했다. 시선은 그에게 가 있었으나, 그녀의 머리는 다른 생각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약혼? 그래, 약혼이야 뭐, 할 수도 있지. 글래스턴 공작, 칼리에르 공이잖아. 심지어 아버님보다도 호칭이 훨씬 더 높은 공작인걸. 게다가 오래 산 뱀파이어니까 약혼을 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약혼이다. 결혼에 준하는 무겁고 중한 관계. 라이킨이 다른 여자와 약혼을 했었다는 걸 소렐이 알았다면, 그녀는 그와 결혼하는 걸 좀 더 생각해봤을 거다.
‘뭐, 따지고 보면 라이킨은 나랑도 약혼한 햇수가 꽤 되는 거잖아.’
엄마와 아빠가 라이킨과 약속한 거니까, 그녀도 약혼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라이킨은 그녀를 데리러 너무나 늦게 왔다. 꼭 잊고 있던 사람처럼.
‘……아니, 잠깐.’
저 남자는 약혼을 까먹는 게 습관인가? 소렐은 시선을 휙 올려서 라이킨을 노려보았다.
“아주 오랜만에 오셨지만 신체 치수는 변함이 없으신 것 같군요.”
“여긴 엄청 오래 애용한 곳인가 봐요.”
소렐이 끼어들었다.
“예. 한……, 얼마나 되었지?”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단사에게 물었다.
“오백 년 정도 되었군요. 중간에 제가 이 가게를 이어받았으니까요.”
그렇게나 오래되었단다.
“와, 정말 오래되었네요.”
“그렇습니까? 인간으로 치면 한 사십 년 정도 운영한 셈입니다.”
재단사는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면서 라이킨에게 새로운 원단을 가져왔다.
“요즘에는 결혼을 하셨으니 일상이 많이 달라지셨겠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오래된 옷들은 다시 보냈는데……?”
“예. 고치는 중입니다. 스튜어트 부인이 기가 막히게 보관해두셨더군요.”
“에벌린이 그렇지.”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렐은 이제 입을 다물고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승마도 좀 더 해야겠고, 펜싱도 자주 하는 중이네. 우리 공주님과.”
“아, 그러시군요.”
재단사는 옷을 입는 고객의 일상에 맞춰서 옷을 재단한다. 라이킨이 입는 펜싱복, 일상복, 승마복까지 전부 이 재단사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번 사교계에 참석할 생각이고.”
“공비전하와 함께 하시는 행사가 많겠군요. 알겠습니다. 계속 공작저에 머무르시겠지요?”
“그렇네.”
라이킨은 이리저리 튀고 있는 소렐의 시선을 느꼈다. 그에게로 갔다가, 재단사에게로 갔다가, 주변에 진열된 타이와 셔츠에게로 정신없이 흘러간다. 그러다가 라이킨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그는 그제야 만족했다.
“팔을…….”
치수를 새로 재고 있는 라이킨은 한마디로 귀족이었다. 엄청난 장신에 탄탄한 몸을 가졌지만, 손끝과 발끝까지 딱 떨어지는 선은 섬세하고 고상했다. 깎아놓은 코와 날카로운 눈, 그리고 턱이나 얼굴 아래로 곧게 뻗은 목만 봐도 그는 혼자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이었다. 뱀파이어는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아름다움을 무기로 삼았다. 아니, 라이킨의 경우에는 저 아름다운 몸 안에 실제로 파괴적인 힘까지 가졌겠지만.
‘하긴, 오래 살았을 텐데 약혼 한번 안 했겠어? 그것도 공작님의 아들이라 공작이 된 귀한 신분인데.’
소렐은 에벌린이 공을 들여 고르고 입혀준 세련된 외출복 자락을 내려다보다, 탁자 위에 팔꿈치를 세우고 턱을 괴었다. 그녀의 시선은 또다시 라이킨에게서 미끄러져서 손수건과 신사용 구두가 진열된 창 너머로 향했다. 아, 날이 좋다. 날은 좋은데 남편의 옛 약혼자 이야기를 들어서 지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푸른 하늘이라도 보고 생각을 정리해야 하나.
“벗을까?”
라이킨이 물었다.
“예? 공비전하께서 여기 계시는데요, 전하.”
재단사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줄자를 대고 애먹다 말고 화들짝 놀랐지만 라이킨은 개의치 않았다.
“제대로 치수를 재야 한다면 벗어야지.”
소렐은 여전히 다른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그도 아니고, 옷감도 아니고, 도대체 어디에 빠진 건가. 설마 방금 재단사가 하던 소리를 들은 건가? 그걸 들은 것치곤 소렐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늘 그랬듯이. 어제 침실로 불러놓고서 남편이 신경 쓰이지도 않는 건가? 그는 지금 미치게 신경 쓰이는데.
“공주님.”
“네?”
“저 잠시 옷 좀 벗겠습니다.”
“네에.”
재단사는 간단한 대답에 놀란 내색은 하지 않았다. 부부 사이가 의외로 아주 좋은가 보다. 물론 라이킨은 그게 아니라, 소렐이 지금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벗어야 하지 않겠는가. 애 같은 짓이었지만, 소렐이 지금 다른 곳에 정신 팔렸다는 게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단추를 툭툭 푼 뒤 입고 있던 셔츠마저 벗어버렸다.
“그럼 한번 돌아보실까요?”
소렐은 턱을 괴고 다른 곳을 본 채 내내 라이킨의 ‘전’ 약혼녀 이름을 곱씹었다.
‘프랑슈틸이라고 그랬지. 귀족연감을 찾아보면 아마 나올지도 몰라. 일단 귀족연감부터 보고, 누군지 사비나한테 슬쩍 물어봐야지. 사비나는 발이 넓으니까. 그래. 그런 다음에 라이킨한테 물어봐야……?’
라이킨에게 물어봐야지, 하고 라이킨을 쳐다보던 소렐은 눈을 깜빡거렸다. 저게 뭐지?
“이런, 제 눈이 틀렸군요. 몸이 좀 더 늘어나신……, 운동을 많이 하셨군요.”
거울을 마주 보고 소렐을 등지고 있는 남자의 상반신에는 줄자 빼고는 아무것도 걸쳐져 있지 않았다. 척추를 따라 움푹 패인 굵고 진한 선을 중심으로 넓은 등에 근육들이 쩍쩍 쪼개져서 꿈틀거렸다.
“요즘 펜싱을 자주 하느라.”
그건 소렐도 마찬가지였다. 라이킨이 소렐에게 펜싱을 계속 가르쳐주고 있으니 당연한 이야기이긴 한데 말이다. 그녀는 라이킨의 뒷모습을 보며 몸이란 것이 저렇게 섬세한 근육으로 짜인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남자의 몸은 아름다웠다.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었고, 적당한 절제미까지 갖추었다. 무엇보다 더 그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건, 그렇게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꿈틀거리며 움직일 때마다 야만적인 힘을 품고 있다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야만……, 미쳤나 봐!’
소렐은 뒤늦게 라이킨이 허락을 구한 게 뭔지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 그래. 저 남자의 육체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건 귀족적인 교육을 받고 만들어진 몸이 아니다. 소렐도 어렴풋이 알기 시작한, 피와 죽음으로 만들어진 흉기나 다름없는 몸이었다. 그래서 더 날 것 그대로의 매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수선을 다시 해야겠습니다. 옷이 불편하셨을 텐데요.”
“딱 맞게 입는 기분이던데.”
라이킨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낮고 차분했다. 이상하게도 그의 모든 목소리가 그녀에게로 향하는 것 같았다. 그를 좀 똑바로 보라고. 다른 곳은 보지 말고.
“셔츠도 새로 해드리지요. 턱시도와 프록코트, 특히 재킷과 조끼가 중요하겠습니다.”
“자네가 생각해서 좋을 대로 하게. 펜싱복은 한 벌 더 있었으면 좋겠고, 승마부츠도 더 필요해.”
“예, 전하.”
글래스턴에서 라이킨은 흔히 ‘칼리에르 교수’ 혹은 ‘제임스 교수님’이었지만 수도 엔버네스에서는 무조건 그의 작위에 따른 호칭이 우선이었다. 저 ‘전하’라는 호칭을 앞으로 많이 듣게 될 것 같다고, 소렐은 필사적으로 생각과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 애썼다.
“특히 외출복과 연회복은 신경 써주게. 이번에 공비전하께서 맞이하시는 첫 사교계 시즌이라.”
“아, 그러시군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재단사는 빙긋 웃었다.
“새로 추구하시거나, 한번 곁들이셨으면 하는 양식은 있으신지요?”
라이킨은 재단사가 건네주는 셔츠에 다시 팔을 꿰며 고개를 흔들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최선으로 지키면서, 몸에 딱 맞고 편안한 것으로.”
“예, 전하. 늘 하셨던 것처럼 절제되면서도 세련되게 만들겠습니다.”
“자네가 알아서 하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긴 다리를 쭉쭉 뻗어서 소렐이 앉아 있는 소파까지 단숨에 다가왔다. 라이킨이 움직일 때마다 채 여미지 않은 셔츠 자락이 아무렇게나 휘날렸다.
“공주님, 지루하십니까?”
“아뇨!”
소렐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루하다니. 지금 라이킨이 옷을 다 입지도 않고서 흐트러진 차림으로 그녀의 앞에 있는데 어떻게 지루할 수가 있을까? 게다가 그녀는 몰래 훔쳐봤던 그의 뒷모습이 아닌 앞모습을 대면하고 있었다. 그건 그거대로 더 당황스러웠다. 그는 호리호리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두껍고, 거대했다.
“나름 흥미가 있으신 것 같아서 모셔왔는데, 재미가 없으시면 그냥 저 혼자 올걸 그랬습니다.”
소렐은 곤혹스러웠다.
“저기, 그런 건 아니고요, 옷 좀 입어주실래요?”
“입었잖습니까.”
“제대로요. 그래야…….”
“그래야?”
소렐은 다정한 목소리와 전혀 다정하지 못한 몸으로 다가서는 라이킨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야 내가 뭘 좀 골라서 사줄 거 아니에요.”
그러려고 온 건데 다 망했다. 그가 벗은 걸 보고 경악하다가 그가 혼자서 주문하게 내버려두고 이제야 뭘 사주니 마니 하다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사주시려고요?”
소렐은 고개를 푹 숙이고 끄덕였다.
“직접 고르셔서?”
“네에, 그러니까…….”
“그렇다면 옷을 입을 필요가 없군요. 잘 어울리는지 직접 봐야 할 거 아닙니까.”
소렐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얄팍한 셔츠를 도로 벗던 라이킨이 웃었다. 푸른 눈이 그제야 시선을 마주쳐 기쁘다는 듯 휘어졌다.
“다 맞춤복이니까……!”
울퉁불퉁한 그의 등근육보다 쩍쩍 쪼개진 가슴근육, 그리고 그 아래 복부가 더 무서웠다. 남자의 벗은 몸을 본 일은 없다.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다. 몸이 저러니 그녀를 가뿐하게 들고, 안아줄 수 있는 거였다.
“예, 그러니까요.”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뭘 사주시겠습니까? 기대가 되는군요.”
그는 기대가 되다 못해 무척 기뻐 보였다. 소렐은 결국 스무 살,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아가씨답게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제발 옷 좀 입어요, 뭐든 사줄 테니까…….”
“절 침실로 부르셨으면서 아직까지도 제 몸에는 익숙해지시기 싫으신 겁니까?”
소렐의 양 뺨이 사랑스럽게 발그레해졌다. 왜 자꾸 어제 일을 이 벌건 대낮에 꺼내는 건가. 소렐은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그냥 시뻘게졌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아니다. 라이킨의 눈에는 그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도 없었다.
“그냥 몸일 뿐입니다. 공주님의 것이고요. 그러니 공주님께서 잘 어울리는 것으로 골라주세요.”
오래도록 귀족이었을 남자가 스스럼없이 이제 겨우 태어난 지 20년밖에 안 된 핏덩어리에게 스스로를 낮췄다. 아니, 어쩌면 그건 소렐 이드리스가 그보다 분명히 더 고귀한 핏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예법과 법도를 철저하게 따지는 고루한 옛사람이니까.
“마음에 두신 것이 있으십니까?”
그는 가장 야만스러운 복장으로, 가장 세련된 말투를 구사하며, 아주 정중히 물었다. 모든 게 전부 다 그녀의 것이었다.
“……저기, 입구에 푸른색……, 재킷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리고 저기 백색 셔츠랑 옅은 회색 줄무늬 원단…….”
“아론?”
라이킨은 재단사를 불렀다.
“예, 전하. 제가 바로 가져다드리지요.”
재단사의 조수가 얼른 따라붙어서 소렐이 말했던 원단 앞으로 갔다.
“아뇨, 그 회색 말고 오른쪽 거요.”
소렐은 라이킨을 외면하고 열심히 조수가 꺼내는 원단을 정확하게 가리키려 애썼다.
“그래요, 그거 맞아요.”
조수가 사다리를 가져와서 원단을 꺼내기 시작하는 사이, 라이킨은 소렐의 턱을 살며시 감싸서 기어이 그에게로 돌려놓았다. 그녀의 남편은 생각보다 더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공주님.”
부르는 목소리가 어쩐지 건조하지 않고 습하다. 습하고 눅진했다. 그녀에게 온통 들러붙는 듯했다. 마주한 푸른 눈은 더 농도가 짙었다.
“절 봐주셔야지요.”
당신의 눈에 들겠다고 내가 지금 정도에서 벗어난 미친 짓까지 하고 있는데.
“여기 있습니다.”
소렐은 입술을 말고 조수가 가져다준 원단을 펼쳐서 그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걸쳤다. 라이킨은 그 와중에도 원단을 사이에 두고 어깨 위에 놓인 소렐의 손을 가져다가 마디마다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더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반듯하게 머리를 넘긴 남자가 원단을 마치 고대 황제처럼 느슨하게 걸친 뒤, 그녀의 손가락 끝까지 숭배하고 있었다.
‘……그 프랑슈틸 양에게도 이랬을까?’
딱히 알고 싶지 않으면서 미치게 알고 싶은 질문이 떠올랐다. 그랬을까? 심장이 단단하게 뭉치는 기분이었다. 싫었다. 그냥 달려가서 그가 얼굴 모를 그녀에게 지금과 똑같이 숭배하듯 입을 맞추는 그 광경을 구겨버리고 찢어버리고 싶었다.
“보시기에 어떠십니까?”
소렐은 간신히 그의 손에서 제 손을 비틀어 뺐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잘 어울리네요. 웬만하면 다 잘 어울리잖아요.”
라이킨의 눈에서 냉기가 서렸다. 그녀를 향한 게 아니라, 그녀가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거다. 소렐은 그걸 눈치채고 얼른 고개를 들었다.
“이걸로 정장을 한 벌 해도 좋겠어요. 가볍겠다. 아, 그리고 저 소재……, 네, 저 하얀……, 너무 백색은 아니고 아이보리색이요.”
소렐은 재단사가 가져다준 원단을 펼쳐서 그의 반대편 어깨에 걸쳐주었다.
“이걸로 정장을 짓고, 안은 푸른색 셔츠를 입는다면 잘 어울리지 않을까요?”
“공비전하께서 감각이 있으시군요. 마침 가벼운 원단입니다. 날이 좋은 날 야외활동을 할 때 입을 만한 옷이 될 겁니다.”
칼리에르 공비는 약간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겉보기에 이상한 점은 전혀 없었지만 라이킨은 그녀의 석연치 않은 미소를 곧바로 간파했다.
‘들었군. 제기랄, 아론.’
충직한 재단사를 탓하기엔 그의 약혼이란 게 그저 침묵 속에서 끝나버려서, 당사자였던 그마저도 잊고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좋은 날 나와서 이것저것 사고, 얼마나 좋았으면 그의 옷까지 사주겠다고 했을까. 그런데 팍 상해버린 공주님의 기분을 어떻게 풀어줘야 하나, 라이킨은 갑자기 너무나 난감해지고 말았다.
“공주님.”
어쩌지?
“왜요? 이거 한번 걸쳐 봐요.”
그래도 씩씩하게 사준다고 해준 약속을 지키려고 넥타이를 골라보고, 모자를 헤아리는 네가 너무 예쁜데. 너무 예뻐서, 속상하게 만든 게 너무나 미안했다. 이걸 어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