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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데뷔탕트 (4) (43/181)

43. 데뷔탕트 (4)202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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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파이어의 수명은 너무나 길어서, 그들에게 수십 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엔버네스에 위치한 칼리에르 저택은 어마어마하게 세월이 쌓여 있었다. 건물을 계속 개조하고 증축을 거듭한 흔적이 가득했고, 고용인들도 나이가 상당히 들어 보이는 뱀파이어나 수인들이었다. 그래도 뱀파이어에게 익숙해진 소렐은 놀라서 토끼 귀를 꺼내지는 않게 되었다.

1660611677634.jpg“공주님, 일어나셨네요. 오늘 기분은 어때요?”

글래스턴에서도 쾌활하게 집안 살림을 꾸려나갔던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이곳에서도 저택 전체를 진두지휘했다. 눈을 뜨고 처음으로 소환마법에 성공한 다음 날 아침 기분을 느껴보려고 했던 소렐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1660611677634.jpg“날이 아주 청명하고 화창하네요. 빨래가 잘 마르겠어요. 어서 씻고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가자고요.”

그리고 그녀와 라이킨을 제외하고 칼리에르 저택에 있는 많은 고용인들은 소렐 이드리스를 ‘공비전하’라고 불렀다. 여태까지 한 번도 칼리에르라는 성씨를 사용해본 적이 없는 소렐에겐 무척 어색한 일이기도 했다. 에벌린은 척척 들어와서 침실에서 다른 쪽으로 나 있는 문을 활짝 열었다.

1660611677634.jpg“급하게 채워놓기는 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오늘 제임스 교수님에게 말하세요.”

무엇을? 소렐은 고개를 돌리다 말고 멈칫거렸다. 글래스턴에 있는 작은 옷방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옷방이 커다란 양문을 열고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1660611677634.jpg“의상실로 가시겠다고요.”

16606116776359.jpg“……옷이 저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그녀의 옷방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눈부신 티아라 일곱 개로도 충분했다.

1660611677634.jpg“저 티아라들과 맞는 옷이 별로 없어요, 공주님. 그리고 엔버네스 사교계의 첫 번째는 안타깝게도 옷이랍니다.”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1660611677634.jpg“어떤 옷을 입었냐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겪어보기도 전에 구분하지요. 아주 나쁜 풍속이에요, 나쁜 풍속.”

16606116776359.jpg“그러네요.”

소렐이 가지고 있는 옷들은 전부 다 좋은 옷들이었다. 글래스턴에서 에벌린이 신경을 써서 고른 귀한 옷감으로 해 입은 옷들이다. 그런데 이 정도도 부족하다고? 소렐은 거대한 칼리에르 공비의 옷방 규모로 대강 엿볼 수 있는 수도 엔버네스의 화려한 사치 정도에 입을 딱 벌렸다. 시골에서만 살았던 토끼에겐 별세계에서나 벌어질 법한 이야기였다.

1660611677634.jpg“무슨 모자를 어떻게 조화롭게 배치했는지, 또 양산은 어떤 걸 들었는지, 쥘부채는 어떤 장인의 것인지, 하여튼 그걸 가장 먼저 보지요.”

소렐은 옷방을 벌컥 연 에벌린이 이번에는 욕실로 가서 물을 가득 받아다 주는 걸 보곤 허둥지둥 잠옷을 벗었다. 호랑이 수인의 속도와 힘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1660611677634.jpg“게다가 보석, 그래요, 보석이 문제랍니다. 옷을 그럴듯하게 입었어도 어울리는 보석을 하지 않았다면 당장 없는 사람 취급을 받지요. 아닌 척하면서도 결국 다 그런 게 엔버네스 사교계예요, 공주님.”

16606116776359.jpg“……우와, 골치 아프네요.”

소렐은 세수를 하다 말고 중얼거렸다.

1660611677634.jpg“그래요, 골치 아프지요. 그게 다 사교계에서 자식들을 비싼 값에 팔아치우려고 하는 고약한 전통 때문이랍니다. 그나마 아가씨들도 작위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더 난리였을 거예요.”

에벌린은 고개를 흔들며 소렐의 빈약한 옷방을 둘러보았다. 글래스턴에서 싸들고 온 옷들은 이곳의 삼 분의 일도 채우지 못했다. 예전에 라이킨의 어머니가 사용하던 이곳의 위세는 그만큼 어마어마했다. 물론 그 ‘예전’도 벌써 수백 년 전이지만 말이다.

16606116776359.jpg“엔버네스가 그렇게 특별해요?”

1660611677634.jpg“크죠. 크고, 사람도 많고, 그래서 고약한 사람들은 더 많고.”

에벌린은 씻고 돌아선 소렐이 화장대 앞에 앉는 사이 천천히 대답했다.

1660611677634.jpg“신사들도 그래서 더 만만치 않아요. 턱시도, 프록코트, 타이, 커프스, 손수건에 구두까지 얼마나 챙길 게 많은데요. 지팡이는 더해요. 바지 주름을 어떤 방향으로 다리는지를 떠들어대지요.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공주님. 기죽을 것도 없어요.”

소렐은 그녀의 좁은 어깨 위에 두툼하고 커다란 양손을 내려놓은 에벌린을 거울을 통해 바라보았다.

1660611677634.jpg“마음에 안 들거나 속상한 건 전부 다 제임스 교수님한테 말해요.”

에벌린에게 말하란 것도 아니고, 라이킨에게 말하라는 거다.

16606116776359.jpg“옷이 필요해도 라이킨한테 말하라면서요.”

1660611677634.jpg“네. 그거지요. 여긴 엔버네스니까요.”

16606116776359.jpg“네!”

소렐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교계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이미 통속소설 수십 권을 통해 배운 바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남편에게! 혼자 숨기고 끙끙 앓다가 그녀 혼자 답답해 미칠 짓은 하지 말고! 그녀는 다짐하면서 서둘러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방 밖으로 달려갔다. 라이킨이 보고 싶었다.

16606116776359.jpg“……아.”

소렐은 달려가다 말고 멈췄다. 이곳은 글래스턴 타운하우스가 아니었다. 넓어도 지나치게 넓어서 어디가 식당인지 전혀 모르겠다. 움푹 들어간 벽감 안에 세워둔 화병과 벽을 장식한 화려한 마감재들, 그리고 거대한 정원을 향해 난 창문의 틀마저 절제된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16606116781957.jpg“공주님.”

라이킨은 자신을 향해 반색하며 돌아보는 소렐의 표정에 웃어버렸다. 그녀는 아주 솔직하게 표현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확실했다. 그래서 그에게, 굉장히 좋아하는 남편에게 스스럼없이 뛰어온다. 안아줘야 하나? 안아주고 싶었다.

16606116776359.jpg“라이킨!”

그러나 소렐은 그대로 그의 품에 뛰어들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경계심이 강한 토끼 공주님은 그에게 안길 듯하다가 결국 한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어젯밤에 그를 불러 뺨에 입을 맞춰주던 건 밤이 마법을 부리고, 엄청나게 용기를 낸 결과였군. 라이킨은 이 아침에 또 쭈뼛대는 소렐을 보며 생각했다.

16606116776359.jpg“잘 잤어요?”

아쉽지만 그저 웃어줄 수밖에.

16606116781957.jpg“예. 공주님께서는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으셨습니까?”

16606116776359.jpg“편안했어요!”

16606116781957.jpg“다행이군요. 이곳은 아직 익숙하지 않으실 것 같아 모시러 왔습니다.”

16606116776359.jpg“안 그래도 식당이 어딘지 몰라서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었어요. 여긴 정말 넓네요.”

거울과 벽난로까지 따로 둔 거대한 복도를 바라보며 소렐이 춤을 추듯 팔랑팔랑 걸었다. 그녀는 헬레인 토끼 특유의 가벼운 몸놀림을 제대로 이어받았다. 정작 보는 라이킨은 불안했지만, 기분이 좋을 때면 더 나풀나풀 날 듯이 걸어간다.

1660611677634.jpg“제임스 교수님!”

라이킨과 소렐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 저택에서 라이킨을 저렇게 부르는 사람도 한 사람밖에 없다.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한달음에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1660611677634.jpg“공주님과 함께 의상실, 쥘부채와 양산, 절대 잊지 마세요.”

16606116781957.jpg“알겠어요.”

라이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1677634.jpg“보석상도 들리시면 좋아요. 교수님도 정장을 새로 맞추셔야 한다고요.”

쏟아지는 잔소리에 소렐은 물끄러미 라이킨을 올려다보았다.

16606116781957.jpg“걱정하지 말아요, 에벌린.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전부 해 올 테니.”

1660611677634.jpg“이 저택이 이렇게 크지만 않았어도 내가 따라나서는 건데……!”

16606116781957.jpg“날 좀 믿어봐요, 에벌린.”

1660611677634.jpg“공주님을 아끼시는 만큼 사 올 거라고 믿겠어요.”

16606116781957.jpg“저런, 그렇다면 오늘 중으로 반드시 파산해야겠군. 공주님, 이쪽입니다.”

그는 소렐과 함께 느긋하게 걸어갔다.

16606116776359.jpg“식사를 하러 이렇게 많이 걸어가야 하는 집은 처음이에요.”

16606116781957.jpg“그럼 다음부터는 침실에서 드시겠습니까?”

16606116776359.jpg“그래도 괜찮아요?”

16606116781957.jpg“괜찮습니다.”

16606116776359.jpg“아니, 그래도 식당에서 먹을래요.”

라이킨과 얼굴을 마주하고 먹는 편이 훨씬 좋았다. 그녀는 드레스를 잔뜩 차려입은 여인 일곱 명이서도 나란히 서서 무리 없이 내려갈 수 있는 넓은 계단을 지나갔다.

16606116776359.jpg“식사는 다 같이 해야 하는 거잖아요.”

16606116781957.jpg“제가 침실로 찾아갈 기회는 전혀 주시지 않는군요.”

난간을 잡고 내려가던 소렐이 멈칫거렸다. 지금 설마 잘못 들었나, 싶어 라이킨을 쳐다보니 그는 늘 그렇듯 청량하게 웃고 있었다.

16606116776359.jpg“……어제 왔잖아요. 그것도 밤에.”

그녀는 누가 들을까 봐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16606116781957.jpg“언제 또 불러주실 겁니까?”

소렐은 할 말을 잃었다.

16606116781957.jpg“어제 한 번 불러주시니 계속 기대가 됩니다만.”

16606116776359.jpg“라이킨!”

얼굴이 빨갛게 물든 소렐이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웃으면서 아예 그녀를 들어 안아서 계단을 휙 내려갔다. 칼리에르 공이 이 저택에서 저런 애정행각을 벌인 적이 있던가. 고용인들은 서로 입단속을 하면서 시선을 내렸다. 하녀들의 방이며 마구간, 세탁실이 저 일로 떠들썩하겠다.

16606116781957.jpg“오늘 어디부터 갈까요, 의상실부터 갈까요?”

16606116776359.jpg“라이킨은 의상실을 가는 게 좋아요? 보통 남자들은 그런 거 싫어한대요.”

16606116781957.jpg“그런 건 어디에서 읽었습니까?”

소렐은 마침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신문의 풍자만화를 보여주었다. 지루해 미치겠다는 얼굴로 의상실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가 사치를 부리는 아내가 산 물건들을 계산하면서 투덜거리는 만화였다.

16606116776359.jpg“마침 여기에도 있네요.”

라이킨은 그녀에게 건네받은 신문을 다시 자리에 내려놓고, 그녀가 앉을 의자를 직접 빼주었다.

16606116781957.jpg“이건 너무 한심한데요. 따지고 보면 남성의 사치가 여성의 사치보다 더 어마어마한데. 게다가 공주님은 이런 식으로 물건을 고르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16606116776359.jpg“그래요?”

16606116781957.jpg“예. 그리고 저는 공주님께서 잘 어울리는 옷을 입으시고 보석을 잔뜩 가지시는 걸 보는 게 즐겁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자를 가져와서 그녀와 무릎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았다. 덕분에 식사 시중을 들려던 시종들이 미리 놓았던 식기를 좀 더 옮겨야 했다. 하긴, 두 사람이서 식사하기엔 지나치게 널찍한 식탁과 식당이었다.

16606116776359.jpg“그런 게 재미있어요?”

16606116781957.jpg“예. 무척이나. 그래서 오늘 외출도 기대되는군요.”

그는 싱긋 웃었다.

16606116776359.jpg“라이킨이 그렇다면 저도 좋아요.”

소렐은 목소리를 조금 낮춰 말했다.

16606116776359.jpg“사실 걱정했거든요. 라이킨이 귀찮아할까 봐.”

그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소렐을 보다가 다시 웃었다.

16606116781957.jpg“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공주님과 함께 있는 건데.”

지나치게 듣기 좋은 말이었지만, 그날 내내 그는 정말 그렇다는 것을 증명했다. *  

16606116781957.jpg“공주님의 치수부터 재요. 글래스턴에서와 같겠지만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가장 좋은 원단은 전부 다 보여주고. 외출복, 실내복, 무도회에 입고 갈 드레스를 원단별로 전부 주문할 테니.”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의상실 점원들은 라이킨의 지시에 빈틈없이 움직였다. 라이킨은 의자에 앉아서 요즘 숙녀들이 어떤 옷을 가장 좋아하는지 카탈로그를 뒤적였고, 소렐의 온몸에는 줄자가 잔뜩 감겼다가 풀어졌다. 그리고 라이킨 앞에는 점원들이 낑낑대며 가지고 나온 원단들이 가득 펼쳐졌다.

16606116776359.jpg“잠깐, 잠깐만요, 라이킨.”

사틴, 호박단, 샤르뫼즈, 광택이 반짝거리는 실크부터 부드럽게 떨어지는 이름 모를 원단에, 심지어 모피까지 나왔다. 라이킨은 그것들을 훑어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16606116781957.jpg“예, 공주님?”

16606116776359.jpg“설마 그거 다…….”

16606116781957.jpg“예, 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상실 점원들은 그 즉시 원단들을 거둬갔다.

16606116781957.jpg“전부 다. 색은 웬만하면 공주님이 좋아하는 색으로 하도록 하세요. 에벌린이 자세한 건 알아서 하겠지만, 그 정도는 되어야 옷방을 조금이라도 더 채우지요.”

하긴 글래스턴 은행 금고에 쌓여 있는 유산을 생각해보면, 저 정도 규모의 옷쯤이야 정말 별거 아닐 거다. 헬레인 공주에 칼리에르 공비전하라면 그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게 맞겠지, 아마? 소렐은 정신없이 밀려드는 여러 가지 드레스 모양을 비교해보며 어설프게 생각했지만, 계산하기도 전에 라이킨은 그녀를 데리고 보석상으로 향했다.

16606116792966.jpg“어서 오십시오.”

칼리에르 공이 아내를 위해 물건을 사들이는 방식은 지극히 옛 방식 그대로였다. 그는 좋은 물건을 골라내는 오래된 안목을 가졌고, 그가 선택한 물건들은 전문가들이 그의 주문대로 수선하고 세공한 뒤 잘 포장해서 칼리에르 공작저로 배달했다. 대금은 당연히 공작에게 청구되었다.

16606116776359.jpg“도대체 뭘 샀는지도 모르겠어요.”

소렐은 진이 빠진 얼굴로 앉았다. 물건을 고르고, 또 사는 것도 상당히 시간과 체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16606116781957.jpg“그건 나중에 옷방이 채워졌을 때 하나하나 즐겨도 늦지 않습니다.”

그는 그녀가 너무 지친 나머지, 그가 건네주는 초콜릿을 얌전히 받아먹는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16606116781957.jpg“너무 힘드시면 다시 들어갈까요?”

16606116776359.jpg“아뇨!”

소렐은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16606116776359.jpg“이젠 라이킨 옷을 맞추러 간다면서요!”

16606116781957.jpg“예, 그렇습니다만……?”

16606116776359.jpg“가요! 내가 골라줄래요!”

그는 의욕 넘치는 공비전하 때문에 한 번 더 실없이 웃고 말았다.

16606116781957.jpg“뱀파이어가 운영하는 오래된 맞춤양복점입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16606116776359.jpg“괜찮아요. 저택에도 뱀파이어들이 가득하던데요, 뭐.”

소렐은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16606116776359.jpg“이제 힘 다 났어요.”

그들은 예정했던 대로, 라이킨의 옷을 계속 맞춰왔던 양복점에 들렀다. 오래된 장인이 운영하는 그곳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듯했다. 소렐은 원단과 각이 제대로 잡힌 남성복이 걸려 있는 입구를 구경하느라 조금 뒤처졌다.

16606116792966.jpg“어서 오십시오, 공작전하. 오랜만입니다.”

16606116781957.jpg“오랜만이군.”

16606116792966.jpg“공비전하와 함께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16606116781957.jpg“그렇네.”

저 푸른 재킷이 라이킨에게 잘 어울리지 않을까, 점잖게 붉은 넥타이도 좋을 것 같아, 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16606116792966.jpg“프랑슈틸 아가씨와 그렇게 오래 약혼하시더니 결국 결혼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프랑슈틸 아가씨께서 아주 오랜만에 들르시다니 제가 어서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프랑슈틸’ 아가씨? 약혼이라고? 소렐은 그대로 우뚝 섰다.

16606116781957.jpg“아니, 그 여자와 결혼한 게 아니야.”

라이킨은 단호하게 잘랐다. 안쪽으로 향하는 통로 너머로 그가 당황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좀 불쾌한 것 같기도 하다. 소렐은 귀를 쫑긋 세우고 숨을 죽였다. 눈은 근사한 짙은 갈색 원단에 붙박여 있었지만, 그녀의 온 신경은 통로 너머 안쪽에 있었다.

16606116781957.jpg“나도 잊고 있을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군.”

그의 낮은 목소리는 조금 놀란 기색이 있었다. 정말로 생각도 안 하고 있었던 건가? 소렐은 속으로 새로 들은 말을 되새겼다. 프랑슈틸. 프랑슈틸이라고 그랬어. 약혼이라고 그랬다고.

16606116781957.jpg“공비전하께서는 헬레인 공주님이시니 그런 말은 앞으로 다시는 입에 담지 말게.”

그리고 싸늘하게 온도가 내려앉은 목소리가 질책했다.

16606116792966.jpg“죄송합니다. 제가 크나큰 결례를 저질렀군요.”

소렐은 여전히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못 들은 척하고 있었지만 그러기엔 토끼의 청력은 너무나 좋았다.

16606116781957.jpg“공주님?”

라이킨이 다시 통로를 지나 소렐을 찾으러 나왔을 때까지 그녀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16606116781957.jpg“거기 뭐 근사한 것이 있습니까?”

16606116776359.jpg“이 색이 라이킨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자그마한 공주님은 불쑥, 입구에서 가까운 진열장을 가리켰다.

16606116776359.jpg“여긴 정말 예쁜 것들이 많네요. 남성복을 만드는 곳에서도 탐나는 게 많은데요.”

16606116781957.jpg“원하시는 원단이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고르시지요. 의상실로 다 보내면 되니까요.”

라이킨은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16606116781957.jpg“일단 들어가실까요?”

소렐은 선뜻 그의 팔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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