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데뷔탕트 (3)2020.12.23.
‘마법은 아주 편리하면서도 무서운 도구야, 소렐. 하지만 겁낼 건 없단다.’
아빠는 언제나 따뜻하게 말해주었다. 싫다면 마법은 사용하지 않아도 괜찮아.
‘전부 네 머릿속에 다 있으니까, 네가 원할 때, 그리고 안전할 때 꺼내서 쓰면 되는 거야. 너무 억지로 쓰려고 하지 마라.’
흘려들었던 아빠의 말이 라이킨의 푸른 눈을 보면 볼수록 더 선명하게 기억났다.
‘우리 소렐은 천재지. 아빠보다도 더 천재야.’
꼭 필요한 재능을 전부 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사람을 천재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할까.
‘그러니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너는 절대로 못난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아빠는 열 살짜리 딸을 앞에 두고 아주 불쾌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필 그놈과 붙어야 완성된다는 게 마음에 안 들지만.’
그런 다음에 아빠는 열 살짜리를 붙잡고 세상의 남자들은 아무리 잘생겨도 못 믿을 족속이고,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가르쳤다.
‘특히 뱀파이어 그놈들은 짐승이야, 소렐.’
아빠 말이 맞았다. 지금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저 눈은 짐승의 눈이다.
‘절대로, 저얼대로 그놈이랑 친하게 지내지 마라.’
‘그치만 아빠, 누구하고나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했잖아.’
‘……그놈은 아냐.’
한동안 어린 소렐은 뱀파이어는 남자만 있는 줄 알았다.
“왜 웃습니까?”
그리고 아빠가 아주 어릴 때, 드물게 말했던 ‘그놈’이 소렐을 따라 웃었다.
“아빠가 하던 말이 생각나서요.”
이 아슬아슬한 관계, 이 아슬아슬한 밤에 갑자기 불쑥 ‘아빠’라는 존재를 꺼내는 건 분위기를 깨는 건지도 모른다. 소렐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말했다.
“……아버님이, 왜요?”
펠릭스 이드리스는 감히 침대에 앉아 있는 소렐에게 다가가는 라이킨을 멈칫거리게 만드는 이름이다.
“라이킨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했어요.”
소렐은 그게 못내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쾌활하고 명랑한 웃음소리가 부서지고, 베개를 꼭 끌어안은 잠옷 차림의 갓 성인이 된 소녀는 딱히 차림이 부끄럽지도 않은 듯했다. 그래서 이 시원한 밤과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라이킨은 쓴웃음을 지으며 테라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흰 커튼을 흔들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네.”
“또 다른 말은 안 했습니까?”
말이야 ‘아버님’이지, 펠릭스는 라이킨과 한때 동료였고, 친구이기도 했다. 대마법사와 뱀파이어 사이에는 나이나 배경이 중요하지 않았다. 뜻과 마음이 맞으면 그걸로 그만이다.
“더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요.”
엔버네스는 글래스턴보다 훨씬 따뜻했다. 두꺼운 실크나 모피보다는 연약한 시폰, 하늘하늘한 레이스, 공단 리본, 나풀나풀한 오간자가 더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소렐도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따로 챙겨준 부드럽고 편안한 흰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건 나 때문인가?”
문가에 선 라이킨이 물었다. 날것 그대로의 말투였다.
“갑자기 남편을 방으로 부르는 대담한 짓을 한 건 난생처음이거든요.”
아. 라이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두운 방 안, 투명한 커튼이 바람에 휘날리는 사주식 침대에 베개를 껴안고 앉아서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여자는 웃고 있었다. 보조개가 폭 들어가고, 까만 눈이 그를 정확하게 보면서 휘어졌다. 그녀는 꼭 밤의 요정 같았다. 서류나 보면서 엔버네스를 공비가 활보하기 좋은 상태로 청소하려던 고루한 뱀파이어를 불러내서 웃어주는 신기루였다.
“……난생처음 한 거 치고는 아주 잘하셨습니다.”
라이킨은 그제야 펠릭스 이드리스가 아내의 예언을 듣고 나서 그를 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 딸은 당신 인생의 가장 환한 빛이 될 거예요. 밤하늘에 반짝이며 늘어선 별 같은 존재다. 그가 감히 다가가도 되나, 의문이 들다가도 끝내 움켜쥐고 싶은 존재다. 어떻게 아깝지 않을까. 어떻게 귀하지 않을까.
“내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아요.”
잘했다는 칭찬에 소렐은 환하게 웃었다. 안타깝게 사랑스러울 정도로, 푸른 밤에 파묻혀 여리게 빛났다. 라이킨은 점점 사라져가는 황금실이 그들 사이에 놓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만족감을 느꼈다. 그와 그녀는 이어져 있다. 그것만으로도 차오르던 갈증이 사라졌다.
“있잖아요, 라이킨.”
“예, 공주님.”
그는 나긋나긋하게 대답하며 친절하고 다정한 남편답게 침대로 걸어갔다. 아니, 고루한 뱀파이어이니 어쩔 수 없었다. 아내가 부르면 당연히 대답을 잘해야지. 그것이 예부터 내려오던 부부간의 예의가 아닌가. 그가 소렐을 대할 때마다 더 형편없이 물러지는 건 솔직히 좀 다른 이야기겠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난 지금 무척 기쁘거든요, 우리 아빠도 내가 숨바꼭질하다가 잠들면 이렇게 불러서 찾아냈나 봐요.”
소렐은 빠르게 많은 말을 했다. 교활한 뱀파이어가 그녀의 기쁨과 환희를 이용해 더 가까이 다가가고,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침대에 앉고, 그녀에게 손을 뻗어 뺨을 쓰다듬었는데 말이다.
“그랬습니까.”
“나쁜 사람들이 찾아오면 숨었거든요. 그러다가, 다시 눈을 떠보면 집이고, 아빠가 있고 그랬어요.”
“그랬군요. 이번에는 공주님께서 저를 찾으셨고요.”
소렐은 반달처럼 눈을 접고 웃었다. 뱀파이어가 굶주린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는데도 겁도 없이 별보다 더 어여쁘게 웃는다.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겁은 많으나 용감한 토끼는 솔직하게 말했다. 라이킨은 그녀와 이마를 맞댔다. 입을 맞추고 싶었다. 동시에 그녀의 다리를 베고 누워 저 뽀얀 뺨을 간지럽히고 싶었다. 아니, 그가 그녀를 눕히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하고 싶은 건 많지만 이마를 맞대는 것으로 한 박자 참고 넘어가야 했다. 서두르면 안 된다. 소렐이 지금 그에게 말을 하고 있잖나.
“뭘 하고 있었어요?”
“그냥, 재미없는 일들.”
그는 소렐에게서 나는 향긋한 단내를 가득 들이마셨다. 군침이 고이고, 허기가 지는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이 피어오르는, 그래서 기이한 체취다. 이 단내를 해가 뜰 때까지 맡을 수는 없을까.
“아니, 재미있는 일인가.”
그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뭔데요?”
말은 안 해주고 재미없었다, 재미있었다, 혼자만 아는 이야기를 해. 토끼는 입술을 뿌 하고 내밀었다. 라이킨이 웃었다.
“우리 공주님, 엔버네스에 계시는 동안 귀찮고 불편한 일 없이 잘 다니시라고. 뭘 청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청소할 게 있어요? 저택은 아주 깨끗한데?”
“예, 있습니다. 집 청소는 당연하고요.”
소렐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나한테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좀 무섭지만 친절한 남편님.
“그게 제가 할 일입니다.”
“재미없다면서요.”
“공주님 생각을 하면서 하니 재미있었습니다.”
“거짓말.”
“진심입니다.”
작게 톡 쏘아붙이던 소렐이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활짝 웃었다. 대뜸 이 밤에 침실로 뱀파이어를 불러놓고도 마냥 좋아하다니. 이래서 그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공주님.”
“응? 네?”
까만 눈이 동그래진다.
“혼자 침실에 계실 때 저 말고 다른 사람을 부르시면 안 됩니다. 위험해요. 아시지요?”
“네.”
“저 말고 다른 사람이 뭘 하나, 궁금해하는 것도 좀 곤란합니다.”
“그건 왜요?”
하루를 정리하며 누워서 사비나가 뭘 하나, 샤를렌이 뭘 하고 있을까, 궁금해할 수도 있는 거지!
“제가 질투가 많습니다.”
그는 소렐이 느슨하게 안다 못해 대충 무릎 위에 내려놓은 베개를 슬쩍 내려다보다, 다시 그녀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적어도 침실에서는 제 생각만 해주세요, 공주님.”
순식간에 토끼의 얼굴이 화르륵 불탔다. 라이킨은 그저 앉아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소렐은 충분히 부끄럽고 마음이 터질 것 같았다. 푸른 눈에 꿰뚫릴 것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 분명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약속해주세요.”
“……치사해요.”
라이킨은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본다는 듯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소렐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팩 돌렸다. 그는 길고 곧은 손으로 소렐의 턱을 살짝 돌려 다시 자신을 마주 보게 했지만, 그녀는 그래도 시선을 다른 쪽으로 보냈다.
“어째서요?”
“라이킨은 그런 약속 안 하잖아요.”
왜 나한테만 하래? 쳐다보지도 않고 있는 소렐은 그의 말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라이킨은 픽 웃었다.
“안 할래요.”
소렐은 옆을 보며 삐죽거렸는데, 눈앞에 있던 남편이 고개를 푹 숙이고 웃는 걸 보곤 놀랐다.
“왜 웃어요?”
“내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받아내려고만 하는 걸로 들렸습니까?”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생각해보니 불공평하잖아요!”
점점 목소리가 쭉 올라간다. 라이킨은 또 웃었다.
“제가 왜 그런 약속을 해달라 애원하겠습니까.”
애원이라고? 소렐은 라이킨을 그제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는 이미 매일 침실에서 공주님 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렇지요.”
으아. 소렐은 뱀파이어의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손바닥에 얼굴을 푹 묻었다. 그는 결국 자그마한 공주님을 품에 안았다. 안지 않고서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어떻게 라이킨 말고 다른 사람 생각을 해요?”
노린 게 틀림없어. 소렐은 투덜거렸다. 그녀가 종알거릴 때마다 그녀를 품에 가둔 남자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혔다.
“아는 남자도 없고, 생각도 안 나요.”
소렐은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많이 부끄럽지만, 그렇다 해서 숨기지도 않았다.
“일부러 그러라고 이런 말 하는 거잖아요.”
그녀는 알 건 충분히 다 알았다.
“이곳은 엔버네스니까요.”
소렐은 고개를 들었다. 열어놓은 테라스 사이로 불어온 바람이 라이킨의 머리카락을 흩어놓았다. 달빛이 흔들리는 금발 머리카락을, 그녀를 보며 다정하면서도 무섭게 번뜩이는 푸른 눈을 비췄다. 모두 새파랗게 시려 보였다.
‘아, 어쩌면.’
소렐은 아주 가까이 와 있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 할 수 있을 것도 같아. 아니, 아직은 아닌가?
“눈길을 끄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제가 다 이깁니다만.”
아니, 오늘인가 봐. 언제나 당당한 라이킨이 그녀의 양 뺨을 감쌌다.
“하지만 모든 걸 제가 다 이길 수는 없는 법이고, 공주님은 아주 호기심이 많으시지요. 그러니 이 남편의 걱정을 조금만 알아주세요.”
한순간만이라도 이 자그마한 토끼의 머릿속을 그로 채우지 않으면 불안해질 지경이니까. 그래.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불안했다. 실로 얼마 만에 느껴보는 위태로운 감정인가. 그는 불안해서 즐거웠다.
“걱정해요?”
“무척이나.”
“하지만 라이킨보다 잘생긴 남자는 없을걸요.”
강한 확신을 가진 말에 라이킨은 짧게 웃었다.
“나는 남자만 경계하는 게 아닙니다.”
정확하게는 사람만 경계하는 게 아니었으나, 소렐은 아직 못 알아들은 눈치였다. 그는 즐겁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러니 그가 이 시원하고 좋은 밤에도 한 발자국 더 물러나야 하지 않겠나. 다가가서 놀라게 하고, 그녀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거부감을 꾹 참게 만드느니 물러나서 안달이 나게 하는 게 나았다.
“주무세요, 공주님. 좋은 꿈 꾸시고.”
그가 이불을 들췄다.
“내일 엔버네스를 돌아다니려면 일찍 주무셔야지요.”
소렐은 잠깐 망설였다. 그러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미안해요.”
뭐가 말인가?
“부르는 방법은 알겠는데 돌려보내는 방법을 모르겠어요.”
“부르는 방법만 아시면 됩니다.”
소렐이 갑자기 부른다면, 그도 딱히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제 방은 가까우니 걸어 돌아가면 그만이지요. 공주님은 어서 들어가세요.”
그녀는 결국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누웠다.
“아, 공주님?”
소렐은 머리맡에 앉은 라이킨을 바라보았다.
“웬만하면 저만 부르셨으면 좋겠군요.”
“웬만하면요.”
“예.”
그만 부르겠다는 약속은 안 해준다, 이건가.
“라이킨은 바쁘잖아요.”
“제가 딱히 바쁜 모습을 보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공작님이시고, 교수님이시잖아요.”
“공주님 남편이기도 하지요.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어느새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진심으로 말했다. 이 밤, 이 순간만은 진심이었다.
“주무세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켜 테라스 문을 닫았다.
“어, 음, 라이킨?”
부르시니 그는 또 성실하게 몸을 돌려 침대로 다가갔다. 작은 손이 이불 사이에서 빠져나와서 손짓했다. 라이킨은 긴 몸을 숙였다. 그러곤 쭉 잡아당기는 손에 끌려가, 뺨을 내주었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소렐이 다시 떨어졌다.
“잘 자고 내일 봐요.”
안녕, 안녕. 팔랑팔랑 흔들리는 손이 이불 사이로 쏙 들어가 버렸다.
“……예, 내일 봅시다.”
라이킨이 거기에서 그렇게까지 대답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가 쓸데없이 오래 살았기 때문이었다. 보고 듣고 견뎌왔던 힘으로 그는 딱딱하게 공주님의 인사에 간신히 대답했다. 공주님께서 인사하시는데 감히 대답을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조용히 그가 연 적이 없던 방문을 도로 닫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곤 웃었다.
‘이래서 다들 결혼하나?’
스스럼없이 그의 뺨에 입을 맞춰오는 소렐 때문에 그녀를 제외한 뭐라도 부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면 그녀를 그대로 붙잡고 침대로 뛰어들던가. 간신히, 정말 간신히 참았다. 소렐 이드리스는 그의 얄팍한 인내심이 어디까지 가늘어질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 같았다. 멈칫거리는 손길, 까만 눈 안에 섞인 불안만 없었다 해도 그는 지금 자신의 침실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참아야지.’
참는 건 이상하게 괴로우면서도 즐거웠다.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는 소렐을 지켜보는 재미 때문인가. 그녀가 다가올 때마다 그는 희열, 혹은 하얗게 타올라서 마침내 터져버리는 환희를 느꼈다. 권태롭기만 하던 뱀파이어의 삶이 다채로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