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데뷔탕트 (2)2020.12.19.
남들이야 이미 엔버네스에서 한창 차 모임이다, 정찬회다, 연주회다 해서 바쁘게 사교계를 시작했다지만 아직까지도 칼리에르 공작부처는 느긋했다.
“잘 다녀와요. 재미있게 놀고. 기차 여행도 나름 재미있어요.”
샤를렌은 기차를 타서 간식을 먹고, 식당칸에 방문하는 것도 잊지 말라고 가르쳐주었다.
“샤를렌도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나는 내키면 가는 사람이라. 뭐, 중간에 한 번쯤 얼굴을 내밀 수는 있겠네요.”
그녀는 웃었다.
“내가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가서 공주님이 재미있게 사교계를 즐기는 게 중요해요. 뭐, 오빠가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혹시 오빠한테 말 못 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요. 편지를 쓰든, 전보를 치든. 응?”
소렐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가서 당당하게 어깨 펴고 다니고, 재미있게 놀아요.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다 남편한테 미루고요. 남편은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
마지막으로 소렐과 인사를 할 때가 되자, 샤를렌은 가늠하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뱀파이어에겐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토끼가 남들 하듯 포옹을 하기는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다. 하지만 소렐은 조금 더 바짝 다가와서 샤를렌을 폭 안았다.
“신경 써줘서 정말 고마워요, 샤를렌.”
샤를렌의 푸른 눈이 커졌다. 그녀는 소렐의 뒤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는 오빠를 쳐다보았다.
‘봤냐! 봤어?’
‘그게 뭐 대수라고.’
‘너만 특별한 게 아니라고!’
샤를렌은 눈으로 말하며 얼른 소렐을 마주 안았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가서 하루에 하나씩 재미있는 거 하고, 나한테도 꼭 말해줘요.”
“네.”
그녀는 소렐의 비뚤어진 모자를 다시 제대로 씌워주었다.
“자, 가요. 늦겠다.”
안녕! 소렐은 샤를렌에게 다시 한 번 손을 흔든 뒤, 기차에 올라탔다. 아내가 기차에 오르는 걸 도와준 라이킨은 여동생을 향해 돌아섰다.
“우리 공주님이 아주 용감해지셨네.”
“그러게. 너처럼 성격 나쁜 뱀파이어도 안아주고 말이야.”
“오빠한테 성격 나쁘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공주님이 안 보시는 곳에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재떨이부터 문진까지 스스럼없이 집어 던지는 뱀파이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페르난데스 7세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는데, 오빠는 어차피 신경도 안 쓰겠지만 그래도 신경을 쓰는 척이라도 해. 공주님이 공주님인 이상 왕실과 척을 져서 좋을 건 없어.”
“신혼인데 귀찮군.”
라이킨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눈썹을 꾹 눌렀다.
“어쩌겠어? 다 우리의 어머니께서 일을 지나치게 잘하셔서 작위를 너무 잘 휘두르신 탓이지.”
샤를렌은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게다가 글래스턴 추기경도 막후권력을 너무 잘 사용했어. 사교계에 뻔질나게 드나들더니, 그렇게 키운 힘으로 오빠를 겨냥하고 있잖아.”
라이킨은 슬쩍 웃었다.
“하루이틀 일인가.”
소렐은 차창을 통해 그들을 보고 있었다. 남매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라이킨이 입귀를 비틀어 웃는 건 보였다.
‘잘생겼어.’
소렐은 어쩐지 수줍어져서 얼굴을 창틀 아래로 숨겼다. 눈만 내놓고 남편을 훔쳐보았다. 수려한 얼굴이, 차분하면서도 비틀린 표정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는 키가 아주 크고 체구가 단단한 편이라 어디에서든 눈에 띄었다. 지나치게 드문 장점을 다 모아서 빚어낸 것 같은 남자라, 마치 소렐과는 전혀 접점이 없는 게 더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그런데 남편이라니. 소렐은 가지고 왔던 엄마의 편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네 첫사랑은 아무래도 높은 확률로 ‘그 남자’겠지. 아빠는 몹시 마음에 안 들어한다만, 뭐 어떠니? 나는 첫사랑이 남편이 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엄마도 그랬거든! 아빠는 엄마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야. 너무 아까워서 조금씩, 한 문장을 읽고 쉬고, 또 한 문장을 읽고 쉬는 중이다. 소렐은 편지를 꼭 끌어안았다. 아빠가 엄마의 첫사랑이었구나. 소설을 돌려 읽는 친구들 사이에서 통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너무 낭만적’이었다.
“열차 출발합니다!”
뿌우, 하고 증기기관차가 연기를 뿜었다. 글래스턴 기차역 승강장에서 분주하게 오고 가던 짐꾼들도 헐레벌떡 달려나가고, 부인들은 기차를 향해 손수건을 흔들었다. 어느새 라이킨도 날렵하게 기차에 올라타서 막 객실에 들어섰다. 소렐은 손을 흔드는 샤를렌을 향해 열심히 마주 손을 흔들었다.
“마차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기차가 훨씬 빠르고 편안합니다.”
소렐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의 침실에 몰래 들어갔던 날 이후, 알게 모르게 그와 이야기를 하는 게 조금 기쁘기도 하면서 약간 어색하기도 했다. 마음이 이상하게 바람이 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건 절대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남편’과 ‘아내’라는 단어를 사용해보려고도 하는데, 그가 눈치챘을까?
“기대돼요.”
사교계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것이.
“즐거우실 겁니다.”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만일 즐겁지 않다면, 갖은 수를 다 써서 소렐이 즐겁게 만들어줄 것이다.
“……라이킨도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소렐은 그를 쳐다보다가 불쑥 말했다.
“즐거울 겁니다.”
이미 즐거운걸요.
* 현재 정치인들 중에서 글래스턴 공작, 칼리에르 공을 만나본 사람들은 무척 드물었다. 그는 그만큼 글래스턴 대학, 벨파이어 칼리지에 처박혀서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만나본 몇 안 되는 정치가들은 모두 이 나라의 중진이자 실무를 도맡아 하는 이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칼리에르 공의 무시무시한 영향력에 대해 잘 알았다. 칼리에르 공은 앉아서 오랜 세월 동안 켜켜이 쌓인 해묵은 학문만 들이 파는 게 아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사람들을 죽였다.
“이곳에서는 마법을 사용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소렐은 차창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죽음의 위협을 받지 않으면 마법을 쓸 일도 없는 것 같았다. 쓸 수도 없고 말이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사용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소렐은 고개를 들어 라이킨을 바라보았다. 느긋하게 앉은 그는 그녀의 눈길만 닿아도 웃었다.
“편리하실 겁니다. 기차를 타고 멀리 여행을 가지 않아도 되고 말이지요.”
“아빠는 가능했지만 저는…….”
“안 된다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라이킨은 마주 앉은 소렐의 손을 끌어당겼다.
“이젠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점점 잘하시게 될 겁니다. 이미 필요한 건 전부 공주님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고대 마법의 계승자와 고대 마법의 수호자. 라이킨은 펠릭스 이드리스가 이를 박박 갈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소렐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너무 걱정하지도, 또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하지도 말아요. 공주님은 제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는 그녀의 머릿속에 박아 넣듯 중얼거렸다. 너는 내가 필요해. 나 없이는 안 돼. 그러니 평생 내 곁에 있어.
“필요한 게 제 안에 다 있다고요?”
그러나 소렐은 정작 그가 상대적으로 덜 강조한 말만 들었다.
“예. 훌륭한 스승께서 마법을 사용하는 걸 다 보시지 않았습니까.”
펠릭스 이드리스는 ‘실생활’에서 ‘다방면’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손가락만 까딱이면 차 한 잔이 완성되었고, 가고 싶은 곳은 ‘안전한 선 안에서’ 얼마든지 한 걸음 만에 갈 수 있었다. 그렇다 해서 그녀의 아빠가 모든 걸 마법으로만 해결한 건 아니었다. 새카맣게 태운 팬케이크를 만들며 부녀가 같이 웃을 때도 있었고, 함께 들을 쏘다니면서 흙을 묻혀가며 약초를 캐기도 했다.
“너무…….”
라이킨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공주님이 아버지의 대단한 후광에 가려지지 않길.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마세요, 공주님.”
그는 부드럽게 말하면서 소렐의 손을 놓지 않았다. 소렐은 그의 말을 집중하려다가도 자꾸만 잡힌 손이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저는 그저 공주님께서 모든 것을 즐기셨으면 합니다.”
진심이었다. 지금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까지도, 전부 다.
“도착했군요.”
칼리에르 공작부처는 엔버네스 도심에 있는 저택에 도착했다. 커다란 강이 가로지르고, 아주 오래된 건물들이 밀집한 엔버네스의 부촌에서도 항상 고요하게 외따로 떨어져 있던 저택이 있다. 그곳의 창문이 모두 열리고, 조명이 켜지며, 가구를 덮었던 흰 천들이 전부 벗겨져 나갔다.
“내리실까요, 공비전하.”
그녀의 남편, 지나치게 매력적이라 문제인 뱀파이어는 마차 문이 열리자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먼저 내린 뒤 그녀를 끌어당겼다. 소렐은 그대로 그에게 폭 안긴 채로 마차에서 내렸다. 라이킨은 그녀를 땅에 내려놓지 않고, 그대로 안은 채로 저택을 보여주었다. 정원의 분수에서는 쉴 새 없이 투명한 물이 뿜어졌고, 화단에는 글래스턴에서 본 것보다 훨씬 다양한 색의 장미며 이름 모를 화사한 꽃들이 가득했다. 소렐은 백색의 거대한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에 드십니까?”
그의 어깨 위에 손을 내려놓은 공주님은 주변을 둘러본 뒤,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뒤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와본 곳 중에 가장 멋있는 곳이에요!”
그는 그녀를 조금 낮춰서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자꾸만 손이 가고, 결국 입술까지 간다. 이 아가씨를 조그맣게 만들어서 품에 넣고 다니는 마법은 없는 걸까? 하긴, 이미 조그맣고 작은데 더 작게 만들면 어쩌겠다고.
“들어가시지요. 안은 더 마음에 드실 겁니다.”
칼리에르 공이 엔버네스에 오겠다고 결심한 건 사실, 소렐에게 말하기 전이었다. 그사이 칼리에르 공이 소유한 이곳은 분주하게 쓸고 닦아지고, 필요한 물품을 마구 사들였다. 빠르게 일을 처리하느라 요란을 떨었으니, 아마 주변에 소문이 났을 거다. 칼리에르 공이 수십 년 만에 엔버네스 저택에 들렀다고.
“……크네요.”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겨서 현관 안으로 들어온 소렐은 거대한 홀을 보며 중얼거렸다.
“라이킨의 본가 같아요.”
그곳은 불을 거의 밝히지 않아 어두침침했지만, 이곳에는 햇볕이 잘 들고 모든 게 흰색으로 눈부시게 빛난다는 게 달랐다.
“라이킨.”
“예, 공주님.”
“라이킨은 여긴 좀 좋아해요?”
그는 본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치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듯 말이다.
“공주님께서 좋아하시니 저도 좋아질 것 같습니다.”
“뭐예요, 그게. 바람둥이 같아.”
그녀가 까르르 웃어버렸다.
“내 말이 왜 바람둥이 같은 소리입니까?”
“소설에서 바람둥이들이 여자의 마음에 들려고 그런 말을 하던데요. 물론 라이킨이 그럴 리는 없지만. 이제 내려줘요.”
소렐은 내려가겠다고 했지만 라이킨은 그녀의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
“공주님은 통속소설을 너무 많이 보셨군요. 내려가지 말고 그냥 함께 올라가시지요.”
우아하게 휘어져 홀에 도달한 저 넓고도 높은 계단을, 그냥 그녀를 안고 올라가겠다고? 소렐은 그녀를 안고도 흔들림 없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라이킨을 놀라 쳐다보았다.
“침실까지는 안아다 모셔드리겠습니다.”
갓 결혼한 신부를 신랑이 안아서 데리고 가는 결혼풍습을 말하는 거다. 소렐의 얼굴이 뒤늦게 붉어졌다. 그는 호흡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고 계단을 올라, 작은 공주님이 사용하실 침실까지 도달했다.
“여기에서 무도회를 열어도 되겠어요.”
저택은 무척 거대했다.
“공주님께서 여시고 싶다면 여시지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소렐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의 어깨 뒤로 얼굴을 숨겼다. 그녀에게 뭐든 된다고, 다정하게 말하는 라이킨의 목소리에 마음속에서 간질거리는 바람이 더 거세졌다.
“왜요, 또.”
그가 그녀를 고쳐 안으며 웃었다. 마치 그녀를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소렐은 도저히 얼굴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 소렐은 새로운 침실에 혼자 앉아서 베개를 꼭 껴안았다. 에벌린과 라이킨, 그리고 그녀까지 셋이서 오붓하게 지내던 글래스턴 타운하우스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고용인이 무척 많았다. 모든 것이 다 낯설면서도 좋았다. 소렐은 라이킨이 ‘공비전하의 침실’이라며 내어준 넓은 침실을 다시 둘러보았다.
“으…….”
소렐은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부끄러워. 그렇지만 너무 좋아. 그녀에게 하나하나 신경을 써주고,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라이킨이 싫을 리가 없었다.
‘곤하실 테니 일찍 주무세요, 공주님.’
공주님. 그가 낮게 속삭이며 불러주는 그 호칭에, 소렐은 시골뜨기 출신이 아니라 정말 곱게 자란 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라이킨은 그녀를 어느새 구름 위에 올려놨다.
‘라이킨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관심을 두지 않고 애써 자려고 노력해봐도,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자꾸 마음이 간지러워서 그런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가 뭘 하는지 궁금하고, 또…….
‘나 오늘 바보 같았을까?’
글래스턴을 벗어나 처음으로 수도에 와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게 촌스러워 보이지는 않았을까? 그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괜히 궁금했다. 그게 제일 궁금했다. 잠도 오지 않는데 라이킨이랑 놀면 안 되나? 뭘 하고 놀지? 체스를 둘까? 그런데 라이킨에게 가야 하나? 하지만 복도에는 불이 다 꺼져서 무서운걸.
‘이미 필요한 건 전부 공주님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펠릭스 이드리스, 아빠는 소렐이 어디엔가 숨어서 잠들어버려도 곧장 찾아냈다. 눈을 떠보면 그녀의 침대 위이곤 했다. 그녀도 그렇게 라이킨에게 갔으면 좋겠다. 혹은 라이킨이 이곳에 왔으면 좋겠다. 엔버네스에 온 날, 소렐은 거대한 저택과 다정한 남편 때문에 괜히 설렜다.
‘잠이 안 와. 라이킨은 지금 뭘 하고 있지?’
아니, 사실은 뭘 하고 있는지가 궁금한 게 아니다. 소렐은 그와 다시 만나고 싶었다. 지금 당장.
“……이런, 공주님.”
괜히 듣고 싶어 하던 목소리가 들리자 소렐은 고개를 휙 들었다. 느슨한 스모킹 재킷과 실내복 차림인 라이킨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는 갑자기, 정말 갑자기 소렐의 침실 안에 나타났다.
“제가 보고 싶으셨다면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어?”
어어어어? 정곡이 찔려 얼굴이 빨개진 소렐의 눈이 커졌다. 편안하게 흐트러진 라이킨은 갑자기 아내의 침실에 소환되고서도 아주 태연했다. 칼리에르 공과 같은 강력한 뱀파이어를 이렇게 쉽게 부를 수 있는 마법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내가 오라고 한다면, 당연히 착실한 남편으로서 부름에 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나는 부른 게 아니, 아닌데……!”
라이킨은 대답하는 대신 그들 사이에 늘어진 황금실을 집어서 흔들어 보였다. 그 실들은 이젠 바로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아졌다. 그렇다. 그녀가 또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언뜻 아빠가 하던 말이 기억났다.
‘소렐, 하기 싫으면 마법을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 너는 이미 천재거든.’
앞의 말은 항상 기억하고 조급한 마음과 열등감을 눌렀는데, 뒤의 말이 이제야 생각났다. 이미 천재라고?
“아니, 부르신 거 맞습니다. 그럼, 제가 공주님의 침실에 들어오는 걸 허락받은 셈이군요.”
그래서 들어올 수 있었던 건가. 라이킨은 주변을 둘러보며 콧등에 걸치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그러면, 공주님.”
밤에 더 매혹적인 뱀파이어가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는 듯 웃었다.
“무엇을 시키시겠습니까?”
뭐든 다 해주겠다는 표정에 소렐은 너무 부끄러워서 도망가고 싶었다. 마음이 간질거리다 못해 펑 터진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