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Penny dreadful (10)2020.12.09.
라이킨은 흐트러진 소렐의 옷깃 사이를 제외하곤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지켜보면서, 그녀의 손을 들어다가 손등에 노골적으로 입을 맞출 뿐이었다. 그는 한 번도 소렐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않았다. 눈도 동그랗고, 얼굴도 동그랗고, 작은 체구마저 사랑스러운 토끼는 새빨갛게 물들어서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이대로 초야를 치른다 해도 토끼는 아무 소리 못 하고 뱀파이어에게 잡아먹힐 거다.
“라이킨.”
갈라진 목소리로 그를 간신히 불렀다.
“예, 공주님.”
불린 이는 그녀의 손등에 대고 웃었다. 이상하다. 겁이 나야 하는데 그는 너무나 다정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말할 때까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다. 어쩌면 그는 그녀와 이러고 있는 이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 함부로 들어온 건 죄송해요.”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라이킨은 푸른 안광을 빛내며 또 웃었다.
“저는 공주님께서 먼저 들어와 주신 게 기쁘니 사과하지는 마시지요.”
아니었다면 언젠간 그가 소렐의 침실 문을 부수고 들어갈지도 몰랐다. 소렐은 기겁을 할 일이었지만 그는 자신을 너무나 잘 알았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딱히 바람직한 사고방식을 가진 신사가 아니다.
“제 인내심이 계속 깎여나가던 중이었습니다.”
역시나 잡아먹으려고 그랬던 거구나! 소렐의 눈이 또다시 커다래졌다. 그 눈을 본 라이킨은 한숨을 쉬었다. 이거야 원. 여기까지 와서도 소렐은 그의 인내심에 사정 없이 도끼질을 해댔다.
“저, 저는 이해가 잘…….”
“노력해서 이해할 일이 아닙니다.”
라이킨은 짧게 말하면서 또 그녀의 손목 안쪽에도 입을 맞췄다.
“남편의 침실에 들어온다는 건 그런 뜻입니다.”
그런 거였어? 난 몰랐는데! 생각하는 게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는 소렐 때문에 라이킨은 내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러면.”
소렐은 지나치게 매력적인 뱀파이어를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뱀파이어는 사람을 홀려서 피를 취한다 했다.
“어떻게 할까요?”
“저, 저는 맛없다니까요!”
라이킨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는 웃지 않고, 마치 성적이 아주 나쁜 학생이 또 엉뚱한 대답을 했다는 표정으로 소렐을 내려다보았다. 소렐은 순식간에 낙제생이 된 기분이었다.
“아직 이해를 못 하신 것 같으니 더 읽어드려야겠군요.”
라이킨은 툭 던져놨던 문제의 소설을 다시 집어 들었다. 으아아악, 소렐은 얼굴을 가렸다.
“솔직히 이 소설의 문제점은 말입니다. 모든 게 지나치게 은유적이란 겁니다. 그래서 제 성에 차지 않는군요.”
그는 소렐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을 내렸다. 이제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거의 없었다. 호흡이 섞일 만큼 가까웠다.
“이, 읽지 말아요!”
라이킨은 그녀를 쳐다보더니, 일단 들고 있던 야한 소설을 내려놓았다.
“라이킨의 감상은 말하지도 말고요!”
“그러지요.”
소렐은 그를 조마조마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열기가 가득한데 이상하게 시린 눈이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어떤 확신을 얻었다. 그것도 뱀파이어 앞인데도 말이다.
“……내가 싫은 건 안 할 거죠?”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순진하고 말간 얼굴로 확신을 가지고 말하면, 그가 어떻게 거역하겠나.
“안 합니다.”
이대로 울려버리면 어떨까,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발갛게 물든다면 그건 그거대로 아주 예쁠 거다.
“나중에요. 나중에……, 그때는 공주님도 좋아하시게 될 겁니다.”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안 해봤으니까요. 더 해달라고 조르실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온밤 내내, 소렐이 이성을 놓치고 땀에 젖어 머리를 뒤채며 애원할 때까지. 소렐은 또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라이킨이 뭘 바라는지는 화, 확실하게 알겠어요.”
그게 정답이었다. 그제야 라이킨은 픽 웃었다.
“제가 뭘 바랄까요?”
“왜 자꾸 물어봐요?”
토끼가 드디어 화를 내기 시작했다.
“공주님께서 절 아내를 상대로 초야 치를 생각은 없고 말 그대로 식인이나 할 놈으로 보셨잖습니까.”
물론 뱀파이어도 할 말이 있었다.
“아, 그래요, 그거.”
“그거?”
그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초……야, 그거.”
그걸 바라는 거잖아. 겨우 말하는 소렐의 달아오른 뺨이 너무 예뻐서 라이킨은 결국 그녀의 뺨에 입술을 꾹 누르고 말았다. 참아야 했다. 이 이상은 토끼가 정말 토끼로 변해서 깜찍한 뒷발로 그를 걷어차고 도망갈 거다. 그는 그녀의 뺨을 맛있게 삼킨 후에 간신히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공주님, 빨리 더 자라세요.”
손끝에 착착 감기는 촉감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다 컸는데…….”
“다 안 컸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는 것 같기도 했다. 소렐은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그……, 하고 싶으시면…….”
라이킨은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다른 여자랑 하라는 소리라면 공주님, 하지 말아요. 그 말을 기어이 했다간 며칠 내내 여기에서 못 나갈 줄 알아.”
경고가 담겨 있는 싸늘한 말에 소렐은 눈을 깜빡이다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해가…….”
“그러니까 빨리 자라란 겁니다.”
어서 자라서 이 애타는 남편의 마음 좀 이해해달라고. 라이킨은 앓는 소리를 내며 그녀가 입은 블라우스에 얼굴을 묻었다.
“나 좀 안아주세요, 공주님.”
안아달라고 하면 또 답삭 잘 안아준다.
라이킨은 그녀의 체취를 잔뜩 들이마시며 간신히 속을 가라앉혔다. 도대체 얼마나 더 키워야 할까. 빌어먹을 펠릭스 이드리스, 몇 년 더 살고 가지. 더 키워놓고 갔으면 망설임 없이 싹싹 발라서 잡아먹을 수 있잖나. 침실까지 쳐들어온 예쁜 아내를 건드리지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그, 있잖아요, 라이킨.”
“예, 공주님.”
한 번도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 인내해본 적이 없던 남자는 난생처음 겪는 상황에 돌아버릴 것 같으면서도 공손하고 성실하게 대답했다.
“미안해요.”
“사과는 하지 마시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거.”
소렐은 그의 부드러운 금발을 쓰다듬어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라이킨의 침대는 무척 넓고 편안했다.
“결혼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미안해요.”
그가 그녀의 남편이라는 자각조차 없었는데, 오늘 제대로 했다. 깨닫고 보니 그녀에겐 초야를 치를 남편이 있었다.
“그러니까 사과하실 일이 아니군요. 그런 일들은 사과하지 말아요. 공주님은 잘못하신 거 없습니다.”
“화 안 나요?”
“나지 않습니다. 공주님은 아직 다 크지 않았는데 그럴 수도 있지요.”
우리 공주님이 그러실 수도 있지. 그는 정말 까탈스럽다 못해 지랄맞은 성격인데, 소렐 앞에서는 모든 엄격한 기준과 예민한 성정이 전부 녹아내렸다.
“게다가 갑작스러운 결혼 아닙니까.”
사실 라이킨에게도 갑작스러운 결혼이었다.
“그냥…….”
그는 뻑뻑한 눈가를 그녀에게 그냥 묻어버렸다.
“공주님이 너무 예쁘셔서 그럽니다.”
그게 문제였다. 같이 부대끼면 부대낄수록, 소렐 이드리스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저 예쁜 공주님의 남편인 게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좀 더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소렐 이드리스는 지나치게 깜찍할 정도로 예뻤던 것 같다. 아니면 지나치게 예뻐서 깜찍했거나.
“내가 예뻐요?”
“예. 공주님만 예쁩니다.”
“나만?”
“예.”
우와아, 하고 탄성이 터지자 라이킨의 시름도 깊어갔다. 이 어린 핏덩이를 언제 키워서 잡아먹나. 관두자. 라이킨은 몸을 일으키고 소렐과 눈을 마주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종알대는 말이나 들어줘야지.
“뭐가 그렇게 신기합니까?”
“라이킨은 무지 오래 살았잖아요.”
“……예.”
그게 사실이긴 한데 공주님 앞에서 굳이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아니었다. 뱀파이어의 시간은 보통 사람들의 시간과는 다르다고 항변해봤자 씨알도 안 먹히니까.
“예쁜 건 엄청 많이 봤을 텐데.”
그런데도 그녀‘만’ 예쁘다고 하는 게 너무 신기했다.
“딱히 많이 보지도 않았습니다.”
라이킨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넘겨주었다. 손길이 다정해서 더 이상 겁이 나지 않았다. 아니, 그녀가 여태까지 라이킨에게 느낀 ‘위협’은 죽음의 위협이나 다칠 거라는 공포와는 결이 전혀 달랐다. 소렐은 그 위협이 도대체 뭔지 골똘히 생각해보려 했다.
“예쁜 건 아주 드물잖습니까.”
“뱀파이어들은 다 예쁘던데요.”
“……어딜 봐서요?”
라이킨은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소렐을 바라보았다. 아닌가?
“라이킨 어머니도 무척 아름다우셨어요.”
초상화만 봐도 우아한 위압감과 숨길 수 없는 미모를 알 수 있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예쁘지는 않았지요.”
라이킨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딱히 감흥은 없다는 투였다.
“그리고 공주님이 훨씬 아름다우십니다.”
그게 뭐가 다른 거지?
“난 아직 어려서 아름답다는 말이랑은 거리가 먼데요.”
소렐은 스스로를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다.
“저는 아주 까다로운 안목을 가졌다고들 합니다. 그러니 공주님이 아름답다고 하는 제 말은 농담으로 듣지 말아주시지요.”
그는 몸을 굴려 소렐과 나란히 누웠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다.
“예쁘다고 해줘서 고마워요.”
소렐은 방싯 웃었다. 아까부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그의 커다란 손이 시원하고 좋았다. 이상하게도 뱀파이어의 침실에 있는데, 나름 괜찮았다. 라이킨이 그녀를 일부러 노리고 낚아채지 않을 거란 걸 알았기 때문일까. 그는 소렐이 웃자 나지막이 한숨을 쉰 뒤, 또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소렐은 더 이상 거부하거나 뒤로 도망치지 않고, 더 가까이 와서 눈을 사르르 감았다. 라이킨의 침실에서도 그녀는 안전했다. * 가지고 있는 영지와 재산이 많을수록, 어쩔 수 없이 할 일은 많아진다. 그리고 세력이 크면 클수록, 어쩔 수 없이 정치에도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안 하고 조용히 있는 이는 칼리에르 공밖에 없었다. 그의 아버지인 오블리앙 공조차 어쩔 수 없이 업무를 몰아서 끝내고 타운하우스로 돌아왔는데 말이다.
“아버님, 오셨어요?”
소렐은 너무 어색해서 항상 우물거리며 대충 발음했던 호칭을 일부러라도 더 분명하게 발음하려고 노력했다. 로렌스가 그녀에게 마음을 써줘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아들의 타운하우스로 왔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요, 나 없는 동안 잘 있었지요?”
“별일 없었어요!”
그러나 로렌스는 그녀를 가만히 보더니 잠시 침묵했다. 소렐은 눈을 깜빡거렸다.
“자, 이건 공주님 거.”
그가 내미는 예쁜 바구니를 받아든 소렐이 일단 인사부터 했다.
“감사합니다.”
이게 뭐지? 소렐은 살짝 종이 포장을 들춰보곤 탄성을 질렀다. 알록달록한 사탕, 초콜릿, 마카롱 따위와 함께 똑같이 알록달록한 보석들이 같이 놓여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너무 좋아하는 책과 예쁜 종이, 펜 세트도 있었다.
“이렇게 많이 주시는 거예요?”
“그게 뭐 별거라고요.”
“고맙습니다.”
소렐이 방싯방싯 웃으면서 또 인사를 한참 한 뒤 신이 나서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던 로렌스는, 뒤쪽에서 나는 기척에 몸을 돌렸다.
“아버지 오셨어요?”
로렌스는 꽤 오래 살고도 아직 철이 없는 아들을 돌아보았다.
“그래.”
그러곤 소렐이 선물에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간 걸 다시 한 번 확인한 후에 입을 열었다.
“글래스턴 추기경이 슬슬 시작했더구나.”
신문이며 사람들의 입에 칼리에르 공비가 도대체 누구냐는 이야기가 오르내리고 있었다.
“샤를렌이 애쓰는 중이지요.”
기사는 변호사인 샤를렌이 전부 다 내리고 있었지만,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뒤에서 어떤 강력한 힘이 일부러 사람들의 입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교계의 강력한 인사 중 하나인 글래스턴 추기경이라든가.
“어떨 거라고 생각하니?”
“어떻긴요. 공비가 맞는지, 맞다면 왜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지 않는지, 어디 숨기는 게 있어서 그런지, 떠들다가 결국 공주님의 출신을 노릴 겁니다.”
헬레인 왕가의 후손이라는, 엘펜하임으로서는 너무나 민감할 수밖에 없는 그 출신을 어떻게든 문제 삼아 라이킨까지 후려칠 거다. 원래 이 바닥이란 게 ‘출신’이라는 것에 너무나 예민했다.
“하긴 사라진 지 150년이 넘은 왕가의 핏줄이라고 한다면 사기꾼이 하는 이야기처럼 들리지.”
로렌스는 웃으면서 탁자 위에 놓였던 신문을 집어 들었다. 샤를렌이 기사들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지만, 슬슬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신문을 대강 둘둘 말았다.
“더 이상 힘으로 막기도 힘들 거다. 저쪽은 작정한 것 같은데.”
“예. 준비하고 있습니다.”
로렌스는 뚜벅뚜벅 걸어서 아들 곁을 스쳐 지나가다 말고, 신문으로 냅다 아들의 머리를 때렸다.
“공주님 아직 어리시다.”
라이킨은 머리를 문질렀다.
“압니다.”
그래서 죽어라 참고 있지요.
“양심도 없는 놈. 내가 널 그렇게 키웠어?”
“잘 키우셔서 제가 열심히 참았지요.”
“자랑이다, 이놈아. 자랑이야.”
로렌스는 고개를 흔들며 한 번 더 아들을 신문으로 툭 때린 뒤 걸어갔다. 소렐 이드리스에게서는 라이킨의 체취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