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 Penny dreadful (6) (34/181)

34. Penny dreadful (6)2020.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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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보면 부부가 참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소렐은 단 것이라면 사족을 못 썼고, 라이킨 역시 그렇게 단 아내를 좋아했다. 오페라가 끝나고, 늦은 밤에 소렐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칼리에르 일가의 로열박스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에게는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시선들이 달라붙었다.

16606116107457.jpg“봤어요?”

16606116107457.jpg“봤죠. 로열박스에서.”

16606116107457.jpg“맙소사, 칼리에르 공이 그런 행각을 벌일 줄이야.”

16606116107457.jpg“그래서, 저 아가씨는 누구예요?”

16606116107457.jpg“설마 정부?”

16606116107457.jpg“공비인가?”

결혼식을 올리지 않아 수상하다고 수군거린다면 그 입을 틀어막을 것이다. 라이킨은 남들이 뭐라 떠들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소렐의 귀에만 안 들어가면 될 일이다. 어차피 그는 인간의 법도대로 살아오지 않았다. 공비의 신분을 상징하는 티아라를 쓰고 나타났는데도 그를 정부에게 티아라까지 씌우는 미친놈 취급을 하는 날파리들이야 치워버리면 그만이다.

16606116107483.jpg“공주님.”

라이킨은 그에게 단단히 붙잡힌 소렐을 불렀다.

16606116107483.jpg“아직 들어가기엔 시간이 이르군요.”

이미 늦은 밤인데? 소렐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모피를 두르고 반짝거리는 작은 가방을 휘두르는 숙녀들은 저마다 신사들의 손을 잡거나, 아니면 자기들끼리 또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신사들도 우르르 빠져나간다.

16606116107457.jpg“클럽에서 볼까?”

16606116107457.jpg“거기밖에 더 있나?”

클럽, 밤늦게까지 하는 어느 고급술집, 어느 부인의 집, 목적지들도 저마다 다양하다. 소렐은 제 남편을, 그렇게 지칭하니 저도 모르게 손끝과 입술이 떨리게 만드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16606116107483.jpg“시장하진 않으십니까?”

그들은 극장에 오기 전, 이미 근사한 곳에서 따로 식사를 했다. 쌀을 곁들인 로스트비프, 아스파라거스와 민대구, 값비싼 라뤼스 와인을 아낌없이 넣은 진하고 묵직한 수프, 구운 머랭까지 만찬은 훌륭했다. 소렐은 고개를 흔들었다.

16606116120561.jpg“전혀요.”

16606116107483.jpg“그렇습니까?”

라이킨은 웃었다. 웃으면서도 곧장 집으로 가지는 않았다. 사륜마차는 조용히 또 어디론가, 새로운 거리로 향했다. 소렐은 맞은편에 앉은 라이킨을 가만히 훔쳐보았다. 그는 단정하게 금발머리카락을 넘기고, 전혀 비뚤어지지 않은 검은 보타이와 검은 조끼, 그리고 새카만 턱시도 차림이었다. 지팡이를 쥐고 어느 클럽에 앉아서 시가를 피우면 완벽할 상이다. 창문을 통해 번지는 희미한 빛에 그의 매끈한 턱이며 분명한 눈썹뼈와 코가 더 드러났다. 새삼스럽지만, 그녀의 남편은 무척 잘생긴 남자였다. 극장에 있던 여자들이 죄다 힐끔거리고, 남자들이 압도당할 만큼.

16606116120561.jpg“우리…….”

푸른 눈이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16606116120561.jpg“우리 어디로 가요?”

16606116107483.jpg“좋은 곳이요, 공주님.”

그가 웃었다. 좋은 곳에 데리고 가주겠다는 약속은 아직까지도 유효한 건가 보다. 사실 소렐은 오늘 아주 만족했다. 음식점만으로도 좋았는데, 오페라라니. 비록 그녀의 손을 놔주지 않는 라이킨 때문에 오페라 내용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았지만 황홀한 기분만으로도 충분했다.

16606116107483.jpg“피곤하십니까?”

16606116120561.jpg“아뇨!”

소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라이킨이 이번에는 또 어떤 근사한 곳에 데려가줄지 기대도 되었다.

16606116107483.jpg“오페라는 어땠을지 모르겠군요.”

오페라가 끝나자마자 한참 재잘거릴 줄 알았는데, 소렐은 여태까지 말이 없다.

16606116120561.jpg“좋았어요.”

16606116107483.jpg“또 오는 건 어떻습니까?”

16606116120561.jpg“좋아요.”

소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16120561.jpg“그…….”

머뭇거리며 목소리가 기어들어가자, 라이킨은 더 묻지 않고 소렐이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아니, 말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의 푸른 눈은 집요하게 소렐의 붉은 입술만 쫓아갔다.

16606116120561.jpg“오늘처럼만 안 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16606116107483.jpg“뭘 말입니까?”

순식간에 소렐의 뺨이 터질 듯 붉어졌다.

16606116120561.jpg“라이킨이……!”

16606116107483.jpg“예, 제가요.”

그는 아주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말해보라는 표정이었다.

16606116120561.jpg“자꾸 이상하게 굴었잖아요.”

16606116107483.jpg“제가, 뭘 말입니까?”

16606116120561.jpg“말투도……!”

말을 해놓고 말을 또 못하니, 라이킨이 다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16606116107483.jpg“말투가?”

말투가 더 정중해졌다. 처음 로렌스를 만났을 때, 로렌스가 하던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정중해졌다. 정중해졌다고 해서 화를 내야 할 건 아니지만, 소렐은 그게 어떤 신호라는 걸 무의식중에 알아차리고 있었다. 아직 깨닫지는 못했을 뿐이다.

16606116120561.jpg“……놀리는 거예요?”

머뭇거리면서 상처받기 일보 직전인 심정으로 뱉어내듯 물었다. 아니, 말하면서 이미 상처받았다.

16606116107483.jpg“공주님.”

라이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 순간, 소렐은 그 질문에 대한 답도 함께 얻었다. 놀리는 건 전혀 아니다. 그는 언제나 진지했다. 그저 소렐이 겁먹지 않도록 상냥하게 웃어준 것뿐.

16606116107483.jpg“나는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서 하나뿐인 아내를 놀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소렐 때문이 아니라면 그 번잡스러운 극장엘 왜 가겠으며, 왜 이 밤이 늦도록 집으로 돌아가 쉬지 않고 거리를 달리고 있겠는가.

16606116107483.jpg“그렇게 보였습니까?”

조용히 묻는 말에 소렐은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란 걸 알겠다. 바로 알겠다.

16606116107483.jpg“공주님이 글래스턴에 오신지도 어느덧 한 달이 넘어갑니다.”

한 달하고도 몇 주가 더 된다.

16606116107483.jpg“그러니 이젠 조금씩 적응해주세요.”

혹은, 그 역시 적응해야 했다. 그저 친구의 딸을 데리고 와서 필요한 건 챙기고,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하는 관계는 이제 끝이다. 그는 그러기로 이미 결정했다.

16606116107483.jpg“이쯤이면, 그렇게 갑작스러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마차가 조용히 멈춰 섰다. 라이킨은 이번에도 먼저 내려서 소렐에게로 손을 뻗었다.

16606116107483.jpg“아직 이 남편이 낯설고 어색합니까?”

그렇게 묻는 그가 너무나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독을 감추고 있는 위험한 뱀파이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고 환한 웃음이다. 소렐은 주춤거리며 지나치게 낮아 보이는 저 아래로 내리려다가, 아예 라이킨에게 허리를 붙들려서 내려졌다. 아주 손쉽게 그녀를 휙 안아서 내리는 그의 몸은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소렐의 무게쯤이야 그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16606116107483.jpg“아니면, 칼리에르 공비가 싫은 겁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건 참 유감이다. 라이킨은 소렐 자신이 서명한 혼인계약서를 무를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16606116120561.jpg“그게 뭔지도 잘 몰라요.”

소렐은 조금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16606116120561.jpg“잘 모르는 건 문제가 아닌가요?”

16606116107483.jpg“전혀 아닙니다.”

라이킨은 소렐을 에스코트해서 눈앞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16606116107457.jpg“어서 오십시오. 공전하, 공비전하.”

보타이를 매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그들을 맞이한 중년 남성은 조용히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손님은 그들뿐인가 보다. 소렐은 유일하게 밝은, 회랑 저 건너편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커다란 분수가 물을 뿜어내고, 얕은 연못 주변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이 달빛을 받아 환상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16606116107457.jpg“이쪽으로.”

정원에는 이미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의자는 단 두 개, 오롯이 그들만을 위한 자리다.

16606116107483.jpg“공주님이 시장하지 않다 하셨지만, 그냥 돌아가기엔 몹시 아쉬워서 말입니다.”

소렐은 주변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곳의 묘한 분위기는 넓은 정원에 꼭 두 사람만 뚝 떨어져서 남은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글래스턴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나? 놀라울 지경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소렐은 그녀의 앞에 뭔가가 놓이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예쁜 유리그릇에 담겨 동그랗게 올라앉은 건 셔벗이었다.

16606116107483.jpg“드세요, 어서.”

라이킨은 직접 작은 디저트 스푼을 챙겨주었다. 새콤달콤한 레몬셔벗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16606116107483.jpg“입맛에 맞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면, 그도 그제야 웃었다. 이상하다. 소렐도 이 밤이 무척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라이킨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소렐 이드리스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야 괜찮은 지경까지 되었나. 그녀는 무척 예뻤다. 그가 예쁘다고 느끼는 존재가 극히 드물긴 하지만, 저렇게 맑고 환한 공주님이 예쁘면서도 어쩐지 말이다.

16606116120561.jpg“너무 상큼하고 맛있어요.”

어쩐지 꺾어버리고 싶다. 그대로 꺾어서 눕히고, 안고, 그대로 하나하나 음미하다 마침내 완전히 삼키고 싶다. 고대 마법 따위 알게 뭔가. 그녀가 완전한 대마법사가 되는 일에도 더 이상 관심이 가지 않았다.

16606116107483.jpg“레몬 말고 배도 먹어봐요.”

라이킨은 이 은밀한 충동이 종국엔 그를 잠식할 것이란 걸 알곤 싸늘하게 웃었다. 공주님이 마법은 딱히 내키지 않아하니 그냥 두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그녀는 그저 안락하고 안온하게 라이킨의 시야 안에서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그에게 맛있게 발라 먹히면 그만이다. 마치 지금처럼.

16606116107483.jpg“입맛에 맞습니까?”

물어보면 소렐은 스푼을 물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오페라가 끝나고 아름다운 곳에 앉아서 만월을 즐기며 셔벗을 먹다니, 이보다 더 완벽하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을까.

16606116120561.jpg“전 단 걸 좋아하잖아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니, 칼리에르 공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16107483.jpg“예. 공주님이 좋아하실 것 같았습니다.”

16606116120561.jpg“……제가 그……, 공비라서 잘해주시는 거예요?”

16606116107483.jpg“잘해주는 것 같습니까? 고작 이런 걸 가지고 잘해주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공주님.”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치장해주고, 훌륭한 식사를 대접하고, 오페라를 보여주며, 특별한 장소에 가서 값비싼 디저트를 선물하는 거야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래. 소렐의 주위에 있는 이들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었다.

16606116120561.jpg“저한테 시간을 쓰시는 거잖아요.”

그러나 소렐은 명민했다.

16606116120561.jpg“돈이 많은 사람이 돈을 흔하게 쓰는 건 성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없는 사람이 시간을 쓰는 건 성의가 맞다고 생각해요.”

야무지게 말한 그녀가 조금 주춤거리더니, 다시 라이킨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온순하고 겁 많은 토끼 특유의 경계하는 표정이 좋기는 하지만, 가끔은 그대로 잡아채버리고 싶은 본능을 오히려 자극하기도 한다. 라이킨은 그녀가 보지 못하는 주먹을 꽉 쥐었다.

16606116120561.jpg“저한테 공도 들이고 시간도 들이셨다면서요.”

더 꽉 쥐었다. 수줍게 말하고 배시시 웃는 모습 그대로 가만히 보아야 했다.

16606116120561.jpg“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소렐은 감사한 일은 아낌없이 표현했다.

16606116120561.jpg“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지금도 무척 행복해요.”

오, 이런. 라이킨은 웃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를 즐겁게 만들었다.

16606116107483.jpg“우리 공비전하의 심기를 거스른 건 없었습니까?”

16606116120561.jpg“전혀요. 전부 다 완벽했어요.”

그건 오늘 그녀에게 남편 역할을 제대로 하겠다고 선언한 뱀파이어의 고삐를 더 풀어버리는 짓이었다. 조금이라도 라이킨에게 이런 건 불편했으니 더 이상 다가오지 말아달라 했다면, 교활한 그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딱 한 발자국만 물러났을 텐데 말이다.

16606116120561.jpg“여기까지 전부 다 완벽해요.”

군침이 가득 고였다. 고이다 못해 뚝뚝 떨어진다. 그는 소렐이 잠시 놓았던 예쁜 스푼을 들어 새콤한 레몬 셔벗을 한 스푼 가득 담았다.

16606116107483.jpg“자.”

어서 아, 하고 드셔보세요. 의미가 충분한 단 한마디에 소렐의 얼굴이 빨개질 줄 알았지만, 그녀는 예상외로 답삭 잘 받아먹었다. 빨간 입술이 오물오물 귀엽게 움직였다.

16606116120561.jpg“라이킨은 안 먹어요?”

스푼은 하나뿐이다. 쳐다보는 눈은 그저 평온할 뿐이다. 라이킨은 아무것도 모르는 제 아내가 그냥 그대로 있길 바랐다. 이대로, 남자라곤 그만 알도록. 그가 가르쳐주는 것만 배우도록. 생각만 해도 치졸하게 만족스러웠으나, 동시에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았다. 소렐 이드리스는 그러기엔 굉장히 영민했다.

16606116120561.jpg“단 게 그렇게 싫어요?”

새삼스럽게 초콜릿을 줬던 게 미안해져서, 소렐은 시무룩하게 눈썹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달빛을 받아 깊게 그림자를 그렸다.

16606116107483.jpg“글쎄요.”

군침을 뚝뚝 흘리고 있던 뱀파이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을 내밀어, 토끼의 입술에 아슬아슬하게 녹아 있던 셔벗조각을 훔쳐냈다. 그는 그녀의 입술만큼 붉은 혀로 제 손가락을 핥았다.

16606116107483.jpg“공주님께서 주시는 건 싫지 않습니다.”

라이킨은 그 맛을 음미해보았다.

16606116107483.jpg“달군요.”

거북하게 달다는 뜻이 아니라, 딱 알맞게 달다는 뜻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소렐의 얼굴이 다시 빨갛게 물들어서,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  

16606116107483.jpg“좋은 꿈 꿔요.”

같이 산다는 건 이런 때 좋다. 라이킨은 그녀를 바로 방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16606116107483.jpg“피곤한 일일랑 생각하시지도 말고.”

말투가 나긋나긋하다.

16606116120561.jpg“그런 일은 없는걸요.”

소렐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박했다.

16606116107483.jpg“때때로 마법 때문에 고민하고 계시는 걸 압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소렐은 고개를 좀 더 들었다. 라이킨은 이젠 거리낌 없이 그녀의 얼굴에 손을 댔다. 언제나 부드럽고 다정한 손길이다. 그녀가 더 이상 겁을 먹고 피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안 것이다. 그의 긴 손가락은 소렐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보이지 않는 눈물을 걷어내는 듯한 손길이었다.

16606116107483.jpg“앞으로 속상한 일이 또 있으면, 꼭 저도 알게 하세요.”

‘또’? 소렐은 반사적으로 오늘 그를 찾아가다가 만난 폴리아나 그린을 떠올렸다.

16606116107483.jpg“남편이 되어서 부인이 뭘 고민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건 못난 짓입니다.”

이상하다. 말투는 더 높아졌는데, 거리는 더 좁아졌다. 말이 짧아지는 게 오히려 더 가까워지는 거라고 배웠던 소렐은 혼란스러웠다. 라이킨은 정중한 어투로 그동안 소렐을 위해 세워뒀던 벽을 툭툭 무너트리고 있었다. 그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여태까지 숨겨왔던 사실을 그녀에게 보란 듯이 내보였다. 소렐이 두려워할 만한 사실이다.

16606116120561.jpg“혼자 잘 해결할 수 있는 일인데요.”

16606116107483.jpg“그러다 해결할 수 없는 일도 말하지 않고 지나가실까 걱정됩니다.”

라이킨의 손가락이 그녀의 뽀얀 뺨을 부드럽게 훑었다. 이번엔 졸리기 시작했다. 그냥 한없이 내어 맡긴 채 잠에 빠져들고만 싶었다.

16606116107483.jpg“이제부터는 제가 다 알게 하세요. 아시겠습니까?”

그는 아무리 말을 정중하게 높여도,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오만하고 지배만 하는 불멸의 존재는 명령에 가까운 부탁을 했다. 소렐은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남편이 무서운 뱀파이어라 해도, 그녀 역시 헬레인의 마지막 공주이자 대마법사의 딸이다. 그녀는 속으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16606116120561.jpg‘말하고 싶은 것만 말해야지.’

16606116120561.jpg“잘 자요, 라이킨.”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지만, 라이킨은 그쯤에서 그냥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16606116107483.jpg“공주님도.”

그는 고개를 숙여서 다시 한번 그녀의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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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6116107483.jpg“공주님도 푹 주무시고, 좋은 꿈 꿔요.”

소렐은 눈을 꼭 감았다. 오늘은 정말 마법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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