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Penny dreadful (4)2020.11.18.
<웨스턴 가젯>에서 사교계 동태를 살피는 란에 슬쩍 끼워보려고 했던 칼리에르 공에 관한 기사는 당연히 저지되었다. 다음 날 그 기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최신 손수건 무늬 유행에 관한 기사가 대신했다.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칼리에르 공의 강력한 영향력을 확인했다.
“뭐하자는 거야, 이거?”
관련한 기사가 실리려다가 저지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카메론 셀레스트 교수는 정보요원에게 재차 확인했다. 정말 그 기사를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묻었다고?
“정확히는 제인 샤를렌 칼리에르가 묻었다고 합니다.”
“아, 그렇겠지. 변호사니까.”
그런데, 왜?
“결혼은 했으면서, 주변에는 알리기 싫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뭐하자는 건가, 이게. 유감스럽게도 군인이자 학자였던 카메론은 상류층의 그 미묘하고 까다로운 허례허식과, 그 사이를 관통하고 지배하는 칼리에르 공의 섬세한 사교술을 이해하긴 힘들었다. 그러나 사교를 아는 이는 바로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
“애쓰네.”
루벤 실베스터는 <웨스턴 가젯>을 휙 던졌다. 혹시나 싶어 찔러봤더니, 칼리에르는 바로 쳐내버렸다. 뱀파이어들에겐 소렐 이드리스가 칼리에르 공비라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입소문을 탄 상태였지만, 그게 인간과 수인, 그리고 마법사 등을 모두 포함한 세상에 완전히 드러나는 건 싫다는 모순적인 태도다. 언뜻 봐서는 카메론처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루벤 실베스터는 예비과정에 열심히 출석하는 소렐을 보면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일단은 닥쳐. 공공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입 밖에 내서 소렐 이드리스가 피곤할 일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숨기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다. 칼리에르 공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이 나라는 넓었고, 뱀파이어들은 특히 조용하게 살아갔다. 튀지 않는다면 눈에 띄지 않으니, 칼리에르 공은 당분간 조용히 수면 아래에 잠겨 있을 생각인 거다.
“공주님 비위를 맞추겠다는 건가.”
하긴 헬레인 왕가의 이름은 왕가가 멸망한 지 150여 년이 지나고도 아직까지 건재했다. 그 후에 왕가의 후손은 전혀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헬레인 왕가가 전하는 낭만적인 전설들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도 헬레인 왕가를 멸망시켰다는 이유로 공공연하게 지탄을 받는 엘펜하임 기사단을 보라.
“웃기시네.”
루벤 실베스터는 정말 웃긴다고 생각하면서도 환하게 웃던 소렐 이드리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 그래. 그렇게 예쁘면 루벤이라도 그녀의 비위를 적당히 맞추기는 하겠다. 좋다. 일단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의 의도는 알았다. 가장 강력한 뱀파이어들 중 글래스턴의 주인이 그렇게 하시겠다니, 방계에 불과한 실베스터는 일단 그에 따르면서 기회를 엿보는 수밖에. 그러니 일단은 학교에 가기로 하자. 학교에는 소렐 이드리스가 있다. * 소렐은 습격을 받고서도 꽤나 용감하게 학교를 쏘다녔다. 정작 함께 있었던 사비나 로체는 기절했다가 이제 겨우 몸을 추스르고 있다는데 말이다.
“그럼 사비나한테 언제 문병을 가도 될까요?”
공손하게 묻자, 로체 집안에서는 사비나가 내일 출석할 예정이라며, 공비전하의 관심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왔다. 공비전하, 라. 공주님도 이상한데 공비전하라고 불리니 소렐은 굉장히 나이가 든 기분이었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공비전하’라고 불리는 사람은 그만큼 연륜도 대단하고 우아할 것 같았다. 아직 앳된 티가 나는 그녀가 아니라.
“이번엔 제가 한 번 더 혼자 가볼게요.”
그녀에게 붙은 말 없는 경호원들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사라졌다. 소렐은 예전에 습격을 받았던 곳으로 일부러라도 더 용감하게 갔다. 그녀는 두려움과 직접 맞부딪치는 편이었다.
“아……, 꽃이 다 떨어졌네.”
정말 예쁘게 핀 꽃들이었는데, 습격 때문에 꽃들이 다 망가져서 지금은 너무나 휑하게 변하고 말았다. 소렐은 그녀가 칼날을 밀어내던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 겪었던 공포는 시간이 지나면서 빛이 바래버렸다. 그녀는 어쩌면 무신경하고, 안일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소렐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타박타박 걸어서 내친 김에 벨파이어 칼리지까지 갔다. 소렐이 학교에 있는 시간에 라이킨은 똑같이 이곳에 있다고 했다.
“아, 안녕하세요.”
그리고 벨파이어 칼리지에는 폴리아나 그린도 있다. 소렐은 일단 마주치자마자 인사부터 했다.
“……여긴 학생들이 출입하는 곳이 아닌데.”
돌아오는 인사는 없다, 이거지.
“라이킨이 언제든지 와도 괜찮다고 했어요.”
소렐은 그녀보다 키가 훨씬 큰 폴리아나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폴리아나는 오늘 샤를렌이 신는 것과 비슷한 하이힐을 신고 소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렐은 라이킨이 특별하게 주문한 펜던트를 달고 폴리아나를 또렷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받다가, 폴리아나는 주변을 훑었다. 정확하게는 라이킨이 소렐에게 달아놓았으나 몸을 숨기고 있는 경호원들을 정확하게 보았다.
“바쁘신 분인데, 너무 귀찮게 하지는 말고.”
“네.”
소렐은 착하게 대답했다.
“그린 교수님.”
폴리아나는 슥 지나가려다가 다시 소렐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저와 제 친구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렐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래. 앞으로는 나나 제임스 교수님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잘했으면 좋겠다.”
그녀는 고개를 우아하게 까딱인 뒤 다시 가려고 했다. 언제나 모든 말에는 뼈가 있다.
“그린 교수님.”
소렐은 웃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고, 그저 늘 그랬듯이 진지하게 폴리아나를 응시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요. 저한테 하시는 말, 펜싱하우스에서 처음 뵈었을 때처럼 해주세요.”
펜싱하우스에서 처음 만났을 때, 쟤한테 무슨 말을 했더라? 폴리아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제가 말을 놓아도 된다고 한 분은 오블리앙 공, 아버님뿐이거든요.”
야무지게 끝낸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면 다음에 또 뵈어요. 살펴가세요.”
자그마한 토끼 공주님은 또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미련 없이 돌아섰다. ‘내가 당신한테 반말을 한다면, 당신도 기분이 나쁠 거 아니냐’라든가, 혹은 ‘내가 언제 너한테 말을 놓아도 좋다고 했냐’라고 하는 말들은 소용이 없다. 그리고 소렐은 그녀가 공손하지만 단호하게 한 말에 폴리아나가 딱히 할 대답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냥 인사를 하고 갈 길을 갔다.
‘내가 눈엣가시 같은 건 알겠지만,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건 아니잖아.’
반말에, ‘토끼’라고 부르는 건 분명히 멸칭이다. 소렐은 생각해보니 또 기분이 나빠져서 괜히 쿵쾅쿵쾅 발을 굴러가며 계단을 올라갔다. 예의는 지켜야겠지만! 그리고 상대한테 일부러 상처를 주려고 하는 건 못된 짓이지만! 저쪽이 먼저 시작했잖아! 모든 말에 깔보는 생각이 다 깔렸잖아!
“공비전하, 이쪽입니다.”
벨파이어 칼리지에서 칼리에르 교수의 연구실이 어딘진 모르지만, 어느새 나타난 경호원들이 알아서 안내해준다.
“감사합니다.”
소렐은 얼굴이 빨개져서 얼른 다시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방향만 알면 정확히 어딘지 몰라도 된다. 라이킨이 연구실 문을 열고, 그 앞에 서서 웃고 있으니까.
“여기까지 왔어요, 공주님?”
“온 거 어떻게 알았어요?”
“씩씩한 발소리가 나던데요.”
라이킨은 싱긋 웃었다. 분명히 그녀가 짜증이 나서 발을 굴러대던 걸 들은 거다! 소렐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그녀는 갈 곳 없는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조그맣게 말했다.
“오늘은 일찍 끝났어요.”
“예.”
“그래서 왔어요. 매일……, 라이킨이 데리러 오니까.”
“이번엔 공주님이 날 데리러 온 거군요. 영광입니다.”
그는 푸른 눈으로 다정하게 웃었다. 언제나 웃는다. 소렐이 신기할 만큼. 샤를렌은 ‘성질 나쁜 오빠’라고 놀라운 말을 하지만, 소렐이 겪은 라이킨은 언제나 다정했고, 또 귀여운 구석도 조금 있었다. 초콜릿을 거절하지 않고 먹은 뒤 죽어라 커피를 마셔대는 것 말이다.
“들어가도 되나요?”
소렐은 새침하게 허락을 구했고, 라이킨은 그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내주었다.
“언제나, 당연하지요.”
“고마워요.”
교수의 연구실은 빡빡한 책장과 책상 위에 놓인 빛바랜 종이들로 가득했다. 곳곳에서 학문에 대한 깊은 조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수백 년 된 고서는 기본이고, 아주 오래된 지도도 여럿이다. 여러 가지 외국어로 작성된 글이 라이킨의 책상 위에 수북했다.
“앉아요.”
이 방에서 정신이 없는 건 쌓인 책과 종이뿐이다. 나머지는 라이킨의 성격답게 정갈하고 깨끗했다. 그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소렐을 앉히고 마주 앉았다.
“오늘은 어땠습니까?”
“페르탕어는 너무 어려워요. 루비는 아빠가 외교관이라 페르탕에서 살다 와서, 너무 잘하는 거 있죠? 그냥 페르탕 사람 같아요. 루비랑 페르탕어 수업을 같이 들으면 불공평한 거라고 애들이 말했어요. 루비가 혼자 다 쓸어 갈 거래요.”
여자애들끼리 조잘조잘 떠드는 이야기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라이킨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소렐이 하는 말을 차근차근 들어주었다. 들어주면 들어줄수록 낯을 가리던 소렐이 점점 말이 많아지고, 본래의 성격을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그렇지만 뭐 어쩌겠어요. 루비는 좋은 친구예요. 아마 애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소렐은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 알고 있을걸요.”
“공주님도 친구들이 공주님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대충 알고 있지 않습니까.”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공주님의 긴 눈썹이 아래로 향하면, 낮은 조명이 그녀의 눈 아래 하얀 뺨에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숱이 많고 긴 머리카락에 리본을 더 달아줘야겠다. 공비전하만이 할 수 있는 티아라도 잘 어울릴 거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는 건 즐거워요.”
“그 친구들도 공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무척 즐거울 겁니다.”
누가 봐도 잘생긴 얼굴은 듣기 좋은 소리만 했다. 라이킨은 몸을 내밀어 그녀를 바라보며,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눈을 뜨면, 그 푸른 눈이 소렐에게 오롯이 고정된다. 스무 살 아가씨는 어쩐지 그 시선을 받는 게 몹시 부끄럽고, 마음이 간질거렸다. 소렐은 괜히 큰소리로 말했다.
“하는 일이 바쁘면, 제가 여기서 가만히 기다릴까요? 조용히 있을 수 있어요. 소리 하나 안 낼 수 있어요.”
으, 목소리가 별로였던 것 같다. 소렐은 말해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 바보 같아. 폴리아나 그린 교수에겐 잘만 말했으면서. 정작 잘 말하고 싶은 사람에겐 목소리를 너무 크게, 그리고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다.
“소리는 많이 내야지요.”
라이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고 싶은 말도 하고, 먹고 싶은 초콜릿도 마음껏 먹고, 보고 싶은 책도 많이 읽어요. 어디 가서든 숨죽이고 있을 필요 없습니다.”
그의 서늘한 푸른 눈이 눈도 동그랗고 얼굴도 동그란 소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바쁘지 않군요. 갈까요, 공주님? 오늘도 공주님이 바쁠 것 같아서 사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친구들이 남학생들이 많이 온다는 식당에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거든요.”
소렐은 조금 수줍게 말했다. 그리고 라이킨은 그녀가 특별히 ‘남학생’이라는 말을 그렇게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게 불쾌했다.
“라이킨이랑 약속을 한 번 미뤘으니까, 이번엔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러나 불쾌하다는 표정은 절대 내비치지 않는다. 소렐이 자꾸만 숙이는 고개를 손을 뻗어 다시 들게 해주고 싶지만 그마저도 안 하는데, 사나운 표정을 지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냥 가지 그랬습니까. 친구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한데.”
한가롭게 말하며, 앉아 있는 그녀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어 일으켰다.
“오늘……, 가기로 했던 곳에 못 가요?”
올려다보는 눈이, 그 실망한 기색이 라이킨은 너무나 즐거웠다.
“오늘은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빨리 끝나자마자 먼저 걸어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씩 웃은 라이킨은 시계를 보고, 달력을 보았다.
“며칠 글래스턴을 비우는 건 공주님이 결석을 해야 하니 안 될 거고.”
소렐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라이킨의 미간이 약간 좁혀졌다. 예비과정이 언제 끝나더라? 이 재미없고 칙칙하며, 뺨이 발간 공주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도시를 빨리 빠져나가야 했다. 시간이 가면 자연히 계획대로 되겠지만, 라이킨은 그답지 않게 약간 조급했다.
“그러면 아직 가보지 않은 글래스턴의 명소들을 한번 돌아볼까요.”
소렐의 표정이 환해졌다. 쉽다. 그녀를 웃게 하고, 얼굴을 환히 밝히는 건 라이킨에겐 손가락을 한 번 튕기고,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쉬워도 너무 쉬웠다.
“네!”
그리고 언제나 승낙이다. * 글래스턴에 있는 극장은 밤늦게까지 불을 휘황찬란하게 밝히고, 그 앞에 서는 마차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사륜마차, 이륜마차에서는 턱시도나 프록코트를 차려 입고 장갑을 낀 손에는 지팡이를 든 신사들이 내렸다. 그들이 내리고, 다시 마차를 향해 팔을 뻗으면 모피를 덧댄 망토나 손등까지 덮는 멋스러운 드레스를 걸친 숙녀들이 화려한 모자를 자랑하며 내렸다. 그렇다. 극장은 돈이 많은 중류층부터 상류층까지 내로라하는 이들만 출입하는 곳이었다.
“극장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것도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이만큼 자라고서는 처음이다. 소렐은 환하게 불을 밝힌 극장을 마차 창문을 통해 바라보며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어릴 때 엄마랑 아빠랑 오페라를 보러 왔었어요.”
라이킨은 소렐이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의 시선은 소렐이 말할 때마다 저절로 그녀에게 향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여왕 역할로 나온 배우가 너무 예뻤다는 거 말고는…….”
초콜릿을 고를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소렐은 창문 너머로 극장을 보았다. 까만 눈이 불빛을 담고 반들거리고, 오뚝한 코 아래 사랑스럽게 벌어진 입술이 예뻤다. 라이킨은 턱을 괸 채 살아서 움직이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를 가만히 감상했다.
“오늘도 오페라인가요?”
아, 그래. 그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입꼬리를 당겼다. 소렐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극장이든 초콜릿이든 바라보며 꿈같은 표정을 짓는 것도 좋지만, 기왕이면 그 얼굴을 돌려 그를 바라봐주는 게 좋았다.
“예. 아주 유명한 오페라 가수가 왔다고 하니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소렐이 보기에 라이킨은 아주 오래 살아 그런지, 무척 매끄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하면서 마차가 도착하자 먼저 나가고, 소렐에게 손을 내미는 것까지 완벽하게 마쳤다.
“조심해서 천천히 내려와요.”
물론 마차 문을 열어주고 숙녀들을 내려주는 일을 담당하는 극장 고용인이 따로 있었지만, 라이킨은 절대로 공주님 에스코트를 다른 사람이 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법도 상으로도 안 될 일이다. 키가 크고 훤칠한 남자가 턱시도 차림으로 자그마한 아가씨를 위해 마차 앞에 서니, 자연히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그런 존재였다. 마치 어두운 무대 위에 혼자 빛을 품고 등장한 주인공처럼, 그 복잡한 극장 앞에서도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모조리 강탈해가는 존재.
“괜찮습니다. 내가 잡고 있으니까.”
그런 그는 소렐이 신은 구두를 보며 더 낮은 걸 신길 걸 그랬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물론 아름답게 늘어진 드레스자락은 공주님답게 잘 어울리긴 했지만,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는 걸 조금 무서워하고 있으니까. 소렐은 그의 손을 잡고 조금 기우뚱거리다가, 얼른 바닥에 내려서서 웃었다. 그러다가 그만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라이킨,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것 같은데요……?”
소렐에게 허리를 굽혀 속삭이는 말을 들은 라이킨은 시리게 푸른 눈으로 주변을 휙 훑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주님이 예뻐서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