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Penny dreadful (3)2020.11.14.
“근데 원래 뭐하려고 했어요?”
소렐은 와플을 잘라 먹으면서 생각 없이 그냥 물어보았다.
“말 안 해줄 겁니다.”
“왜요?”
라이킨은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오만한 뱀파이어는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완벽했다.
“궁금하면 다른 남자 따라가지 말고 나랑 놀았어야죠, 공주님.”
어머! 소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한 그녀가 ‘사과를 해야 하나? 어쩌지?’ 하고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는 게 훤히 보였다. 토끼에게 남녀 사이의 은밀한 신경전은 아직 너무 어려울지도 모른다. 아니, 아예 그쪽으로는 생각도 안 하는 거겠지.
“나와 함께 가줄 때까지는 절대로 말 안 해줄 겁니다.”
“화났어요?”
토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난 건 아니고.”
라이킨은 팔짱을 끼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좀 심술은 나는군요. 그 책이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나보다 더?”
토끼에겐 절대로, 절대로 어설픈 연애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라이킨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되새겼다. 오로지 직진밖에 없었다. 어차피 다른 잡다한 방식은 사용할 생각도 없었다. 그가 바로 남편이고, 소렐이 마법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가디언이자, 함께 살기까지 하는 동거인인데 뭐하러 그럴까. 솔직히 소렐을 슬쩍 찔러본 루벤 실베스터를 생각하면 같잖을 지경이었다.
“읽어봐야 알지 않을까요?”
소렐은 매사에 진지했다. 이래서야 너무 쉽다.
“그래서, 읽어봤더니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으면, 또 나와의 약속은 미루고 여기에 와서 뒤에 나온 책들을 더 살 겁니까? 그거 시리즈 같은데.”
“약속을 또 미루진 않을게요.”
아니, 아닐지도 모른다. 라이킨은 그에게 조금 몸을 기울이고 배시시 웃는 소렐을 보며 생각을 바꿨다. 안 그래도 예쁜 얼굴이 그를 향해 오롯이 웃었다. 눈웃음을 치는 걸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 그거 꽤 효과가 좋은데. 아니, 효과가 없을 리가 없었다.
“이번 한 번밖에 없을 것 같아서, 그리고 잠깐 미룬 거지 오늘 같이 가려고 했어요. 아직 해는 떠 있잖아요.”
소렐은 예뻤다. 그를 향해서만 말갛게 바라보는 눈에 웃음을 담뿍 담았는데, 어떻게 예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그냥 근처에 들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아닙니다.”
라이킨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못 가요?”
“예, 못 갑니다.”
아, 즐겁다. 금세 시무룩해져서 빨갛고 도톰한 입술이 조금 쭉 나오는 걸 보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래. 그렇게 그의 말 한마디에 울었다 웃었다 했으면 좋겠다. 그게 가장 편하니까.
“거긴 학교를 며칠 빠져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라이킨은 방금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다 해도 소렐을 기필코 데리고 가야겠다.
“네에? 그럼 진짜 나중에 갈래요. 어떻게 학교를 빼먹어요?”
하지만 고지식한 그의 토끼가 가장 큰 장벽이었다. 어떻게 결석을 할 수가 있어!
“간 지 얼마나 됐다고.”
게다가 예비과정일 뿐인데.
“학교 며칠 빠진다고 해서 큰일 나는 거 아닙니다.”
“교수님이 그러시면 안 되죠, 수업 하셔야 하잖아요.”
그깟 수업, 전부 소렐 때문에 한 건데 소렐이 없다면야 그도 적당히 다른 교수에게 떠넘기고-조슈아라든가-, 가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소렐은 그게 아니란다.
“성실하게 책임감을 지고 공부해야 해요. 교수님도요.”
라이킨의 짙고 선명한 눈썹이 슬쩍 찌푸려졌다.
“왜 또 교수님이라고 부릅니까?”
“싫어요?”
“예. 직업을 부르는 부부 사이가 어디 있습니까? 이름 부르라고 했잖아요.”
그것도 아무나 부르지 못하는 이름인데.
“그럼 자꾸 학교 빠지라고 그러면 계속 교수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소렐은 와플을 써는 칼과 포크를 꼭 쥐고 야무지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는 라이킨의 표정에 통쾌함마저 느꼈다. 그가 왜 그렇게 호칭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녀가 한 방을 먹인 게 분명했다.
“학교가 아니라 그냥 예비과정일 뿐이고…….”
“아니면 아저씨.”
“……어디 다른 데 가보고 싶지 않습니까?”
“교수님.”
토끼는 조그만 손으로 여전히 포크를 꼭 쥔 채 빨갛고 세모난 입을 조그맣게 벌렸다. 토끼인데 왜 ‘삐약!’하는 소리로 들릴까.
“글래스턴은 너무 칙칙하고 우울하잖습니까.”
“아저씨.”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라이킨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렐은 의외로 고집이 있었다. 동시에 이거 하나는 분명했다. 그는 지금 루벤 실베스터를 따라 서점에 간 일은 처리하지도 못했고, 소렐 이드리스는 그보다 학교를 훨씬 더 사랑했다. 한마디로 본전도 찾지 못했다.
“그래도 모르는 사람 함부로 따라가는 거 아닙니다.”
그는 주인장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주변에 경호가 붙어 있다 해도 웬만하면 조심해요.”
주인장이 가까이 다가왔다.
“여기 커피 한 잔 더, 그리고 생크림 얹은 와플 하나 더.”
그때 맞은편에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초코시럽…….”
“초코시럽도 뿌려서. 홍차 좋습니까?”
소렐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홍차까지.”
“예, 알겠습니다.”
주인장이 다시 떠나고, 라이킨은 긴 손가락을 얽었다. 그는 아주 도회적이면서도 어딘가 더 고상했던 옛 시대의 모습이 남아 있는 신사였다. 소렐은 그의 안에 있는 파괴적인 성향과 날카롭고 잔인한 성격을 완전히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었다. 언뜻 가려진 모습은 매력적이다. 수수께끼처럼 남아, 토끼의 호기심을 계속 자극했다.
“루벤은 모르는 사람 아니잖아요.”
“공주님은 오늘 처음 만난 사람 아닙니까.”
“아니, 저 말고, 라이킨이요.”
“나는 엘펜하임에도 아는 사람이 여럿입니다.”
와플 써는 칼이 식기에 부딪쳐 쨍한 소리를 냈다.
“모든 뱀파이어가 호의적인 건 아닙니다. 인간들도 항상 우호적인 관계만을 쌓는 건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라이킨의 경우엔 조금 얘기가 달랐다. 그가 살해한 목록에 엘펜하임만 있는 건 아니었다. 뱀파이어라고 왜 없겠는가. 그는 칼리에르라는 집안에 얽힌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죄를 생각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살해했다. 그녀의 죽음에 칼리에르 남매가 무엇을 보탰던가.
“칼리에르와 오블리앙은 한 몸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하고, 세상에는 다른 뱀파이어들도 아주 많습니다.”
이름도 없는 사생아부터 고위 귀족까지, 뱀파이어들 역시 인간과 동일한 계급사회였다. 뭐가 다르단 말인가. 한때 인간이었던 이들이고, 지금도 인간사회에 섞여 있는 존재들인 것을. 몸이 변했다 해서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주 오래된 가문도 많습니다. 칼리에르와 마찬가지로. 자손을 많이 낳았지요. 덕분에 그쪽은 가족이 많습니다.”
“부부금슬이 좋았나 봐요.”
“아뇨. 축첩을 했지요.”
“으.”
“예.”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여러 방계로 갈리기도 했습니다. 여러 가문이 파생되기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실베스터입니다.”
1대 칼리에르 공이 경멸하는, 이른바 ‘첩의 자식’이었다. 혹은 뱀파이어의 제대로 된 탄생방식을 따르지 않은 이단아들.
“딱히 칼리에르와는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2대 칼리에르 공이 말했다.
“그래서 내가 찾아온 겁니다.”
내가 직접 왔어. 라이킨은 소렐을 응시했다.
“공주님이 걱정되어서요.”
당신을 걱정해서.
“음, 그러니까 아주 위험한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경계해야 할 남이라는 거네요.”
아, 그래. 라이킨은 잠시 시선을 내려서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공주님은 이제 겨우 성인이 된 참이다. 아무리 다른 스무 살들은 이미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도 하고, 혹은 연애를 하려고 케르고 칼리지를 비롯한 다른 남학생들이 소속된 칼리지를 기웃거린다고 해도 소렐은 소렐이다. 어떻게 이 정도로 그가 보내는 모든 신호가 무시될 수 있는지 기가 막히긴 했지만, 그래도 어떤가. 그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 그러니 모르는 뱀파이어라도 함부로 따라가면 안 됩니다. 맛있는 거 줘도 안 돼요.”
“서점은 좀 중요해 보였단 말이에요……. 그리고 맛있는 건 내가 줬는데요.”
당장 라이킨의 푸른 눈에 힘이 들어갔다.
“뭘 줬습니까?”
“초코……. 근데 자긴 단 거 싫어한대요.”
소렐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원래 실베스터 가문의 미각은 형편없기로 유명합니다. 마음 쓰지 말아요. 공주님이 가지고 있는 초콜릿은 맛있기로 이름난 초콜릿 아닙니까.”
캐러멜을 넣은 밀크 초콜릿, 초콜릿 퍼지, 아몬드에 초콜릿을 입힌 것, 오렌지 다크초콜릿까지, 얼마나 신중하게 고른 훌륭하고 특별한 디저트인가. 그녀는 그것만큼은 라이킨이 사지 못하게 했다. 그건 절대 안 된단다. 그래서 그는 토끼가 초콜릿 진열장에서 한참을 고르는 걸 그저 즐겁게 바라보기만 했다.
“공주님이 얼마나 훌륭한 미각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런 것도 모르는 놈과 가까이 지내지 말아요.”
라이킨은 빙긋 웃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면 공주님의 눈은 환해진다. 그래. 시무룩해하는 것보다 저렇게 신나하는 게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가. 그가 소렐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건, 적어도 그녀를 웃게 할 자신은 있기 때문이었다.
“초콜릿 하나 더 드실래요?”
환하게 웃은 소렐이 물었다.
“……다크초콜릿으로 줘요…….”
어쨌든 소렐이 신중하게 고른 초콜릿 상자를 열어준다는 건 아주 중요한 거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킨은 그녀에게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는 군말 없이 받아먹고, 얼른 커피를 마셨다. * 루벤 실베스터는 간단하게 소렐 이드리스를 평했다.
‘예쁘고, 순진하지만 똑똑하고, 착한 애.’
순진한 거야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러니, 똑똑하고 눈치가 빠른 성격이라면 점점 바뀔 거다. 아직 어리니 아직까지는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제 입맛대로 굴리기 쉽겠지.
“좀 알아냈어? 어떻게 칼리에르가 이드리스의 딸을 데리고 있는 거지?”
“그걸 어떻게 한 번에 알아내?”
루벤은 자신에게로 쏠린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귀찮다는 듯 손짓으로 쳐냈다. 같은 뱀파이어들도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칼리에르가 어떻게 이드리스의 딸을 찾아낸 건지, 정말 이드리스의 딸이 맞는지, 둘이 정확하게 무슨 사이인지, 그래서 칼리에르가 고대 마법을 어떻게 사용할 건지, 자기 잇속을 확실하게 챙기려는 이들이 빠르게 반응했다.
“이제 슬슬 알아내는 거지.”
“칼리에르가 쫓아왔다며? 그럼 대충 다 확인한 거 아냐? 쫓아왔으니까 그 여자가 확실히 대마법사의 딸인 거지.”
루벤 실베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좀 더 깊은 곳에 있었다. 당장 들어와서 ‘저자는 위험하다’라는 말을 들먹이며 소렐 이드리스를 낚아채어 갈 줄 알았던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그저 서늘한 특유의 시선으로 그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그럼 문제가 뭔데?”
“그걸 알아야지. 감이 이상해.”
보기만 했지만, 한마디로 ‘당장 꺼져’라는 대단한 기세도 포함이다. 그리고 꺼지지 않았을 시 일어날 일은 알아서 상상하라는 협박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대체 누가, 어느 정신 나간 작자가 제임스 칼리에르를 상대로 덤빌 생각을 할까? 루벤 실베스터는 몸을 무척 사리는 편이라, 일단은 뒤로 물러났다.
“구체적으로 말해.”
루벤 실베스터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일족을 돌아보았다. 주류에서 뻗어나간 방계는 힘을 원했다. 뱀파이어들 손에 고대 마법이 들어왔다 해서 그게 실베스터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죄다 칼리에르가, 오블리앙이 독식할 것이다. 루벤 실베스터, 실베스터 일족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뱀파이어는 양 손가락 끝을 마주 댔다.
“칼리에르가 헬레인 공주를 상대로 소꿉놀이를 해주더라고.”
한동안 침묵이 가라앉았다.
“……뭘 했다고?”
“네가 잘못 본 거 아니야?”
“같이 놀아주던데.”
“애니까 그렇겠지. 결혼까지 했다면서. 비위 좀 맞춰주는 거야 나도 할 수 있다.”
“솔직히 우리한테 공주를 데려온다 해도 누구나 잘해줄 거라고.”
“맞아.”
에이, 김이 팍 샜네. 일족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일단 이번에는 안면만 튼 거니까, 네가 계속 알아봐. 너는 헬레인 공주와 같은 대학을 다니고 있으니 다리라도 놔봐.”
그렇게 해서라도 떨어지는 이득이라도 있다면 좋다. 실베스터는 뱀파이어들의 알력싸움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헬레인 공주, 이드리스의 딸을 독점하는 게 현실적으로 힘들다면, 어떻게든 말 그대로 발이라도 걸쳐서 인맥을 쌓아야 했다.
“알겠어.”
루벤 실베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리를 놓기 전에, 상대가 어떤 이인지 알아야 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소렐 이드리스를 보던 칼리에르의 표정을, 과거에서 한 번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여동생을 볼 때나 그렇게 표정이 풀렸는데.’
루벤 역시 오래 산 뱀파이어다. 사람을 보는 눈빛이 어떤지 구분을 못 할 리가 없었다. 그는 생각 끝에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편지지를 놓고 펜을 들었다. 여러 사람들이 오고 가며 밀랍으로 봉한 편지를 배달하고, 뜯어본다. 루벤이 그랬고, 이번에는 제인 샤를렌 칼리에르가 그러했다. *
“너 이제는 퇴근을 아예 여기로 하기로 한 거냐?”
로렌스 오블리앙 공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딸을 보고 웃었다.
“아버지도 계속 계시네요.”
“그래. 이렇게 네 얼굴을 보니 좋구나.”
샤를렌은 웃으며 아버지와 포옹을 한 뒤 오빠를 찾았다.
“오빠는요?”
“서재에 있던데.”
“아버지, 함께 가셔야겠어요. 제가 오늘 좀 일찍 퇴근했죠.”
로렌스는 안경을 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있어서 그랬어요. 공주님은요?”
“숙제한다고 하더라.”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공주님은 빼고 모여야 해요.”
왜 그러냐는 아버지의 표정에 샤를렌은 뚜껑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서류로 꽉꽉 들어찬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오늘 결정하지 않으면 당장 내일 <웨스턴 가젯>에 날 기사예요.”
로렌스는 다시 안경을 끼고 기사 초고를 읽었다. 칼리에르 가에 살고 있는 묘령의 여인……. 정체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것 같은 어린 숙녀……. 대충 눈에 띄는 자극적인 단어만 슥슥 읽은 로렌스는 다시 초고를 딸에게 돌려주었다.
“천박하구나.”
“사교계는 천박한 걸 아주 좋아하죠.”
실로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