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공주님의 남편 (10)2020.11.04.
“공주님이 며칠째 집에만 계시는구나.”
로렌스는 라이킨을 불러다 넌지시 말했다. 하필 학교에서 큰일을 겪었으니, 학교를 무서워하지는 않을까? 모두가 염려하고 있었다.
“학교는 좋아했는데.”
“예, 원래 여기에 온 것도 학교에 갈 수 있어서 온 겁니다.”
“외출을 두려워해서는 안 돼.”
“명심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여러 가지 명함을 고르고, 로렌스와 체스를 두며, 샤를렌에게 추천받은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소렐은 나가야 했다.
“바깥바람을 쐬어야 건강도 좋아지고 활력이 생기지.”
집안의 할아버지다운 말씀이다.
“네가 데리고 나가서 좋은 걸 좀 사드리련. 블루 사파이어 때문에 손을 다쳤으니, 만회를 해주고 싶구나.”
“글쎄요. 공주님이 뭘 좋아하실지 잘 모르겠습니다.”
“너는 같이 살면서 아직까지도 아는 게 없어?”
“책은 좋아하던데…….”
보석이야 그냥 예쁜가 보다, 하고 박물관에 있는 유물 바라보듯 신기해하지 자신의 물건이라는 자각은 아직까지 없는 편이다. 그렇다고 부동산을 사주자니 토끼 공주님이 좋아할까?
“맛있는 것도 좋지.”
라이킨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토끼 공주님이 그녀의 막대한 유산을 직접 사용한 곳이 한군데 있긴 했다. 하지만 가려고 할까?
* 소렐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씩씩하고 강했다.
“라이킨?”
“예, 공주님?”
라이킨은 고개를 들다가, 가방과 외투를 챙겨서 선 소렐을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 갑니까?”
“바빠요?”
“아뇨, 보다시피.”
보다시피 아무 일도 안 하고 그저 집에 있는 소렐만 지키며 농땡이를 부리고 있었다.
“……그럼 저랑 산책할래요?”
소렐이 조금 어색하게 물었다.
“집에만 있어서 찌뿌둥한데, 혼자 바깥에 나가는 건 안 될 것 같아서요.”
라이킨은 얼른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될 게 뭐가 있습니까. 잠시만요, 외투만 입고요.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있습니까?”
소렐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글래스턴을 잘 몰라요. 이 근처도 잘 모르는걸요.”
마침 요즘 즐겨 입던 재킷이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휙 잡아채서 입으면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래도 나가는 연습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연습이라. 연습을 해야 할 지경인가. 하긴, 당연했다.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렐의 코트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럼 함께 연습하지요. 어디로 갈까요?”
“그냥 요 앞…….”
“예.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가지요. 내가 옆에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그녀의 가벼운 코트를 마치 집사처럼 펼쳤다.
“걱정하지 않아요.”
그녀는 그의 도움으로 팔을 꿰어 입은 뒤, 단추를 잠그려고 했지만 그의 손이 훨씬 빨랐다. 라이킨의 곁에 있다간 옷을 스스로 입는 법조차 잊어버릴 것 같았다.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라이킨은 한쪽 무릎을 꿇고 소렐을 보며 근사하게 웃었다. 그런 뒤 자리에서 일어나서 팔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공주님?”
소렐은 약간 어색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 라이킨과 함께 있으면 정말 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바깥을 두려워하지는 말아요. 안에서도 얼마든지 사건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는 소렐을 데리고 현관문을 지나면서 중얼거렸다.
“공주님은 용감한 사람입니다.”
도망만 치는 겁쟁이인데? 소렐은 이상하다는 듯 라이킨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느라 그녀가 어느새 계단을 내려와서 거리에 발을 디뎠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스스로 자책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훌륭해요.”
“조금 했는데…….”
“잘못된 말을 들었으니까요.”
라이킨은 폴리아나 그린이 무슨 말을 했는지 대충 알고 있다고 돌려 말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옷을 입고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다. 사실 이 부유한 거리에는 사람들보다 마차가 더 많았다. 그는 딱 거기까지만 말했다. 더 지나친 칭찬을 할 필요도 없었고, 더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전 항상 집 바깥에 있었거든요.”
그저 그녀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그게 참 멀게 느껴져요.”
그녀가 있던 공기가 좋고 햇볕이 쨍하게 들던 시골과 잿빛과 백색, 그리고 흐린 하늘이 뒤덮은 글래스턴은 너무나 다른 곳이었다.
“그렇지만 이곳도 나쁘지 않아요. 학교가 있어서 좋아요.”
결국 아직 소렐의 마음에 드는 건 학교뿐인가. 뭐, 학교뿐이라 해도 마음에 든다면 상관없었다. 혹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학교에 다시 가고 싶어요.”
“예.”
가긴 가야겠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요. 골목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걷는 것도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렐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막상 나와 보니 별거 아니었다. 주변은 평화롭고, 사람들은 바쁘게 걸어간다. 그녀가 겪었던 일은 마치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만큼 공주님이 강하다는 것이지요.”
혹은 대마법사의 혈통이 진하게 흐르는 것이거나. 대마법사 펠릭스 이드리스는 큰 힘을 다루는 만큼 대담하기로 이름 높았다. 사비나 로체는 며칠째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있다는데, 소렐은 이틀 만에 제 발로 걸어 나왔다. 펠릭스 이드리스는 대지를 뒤흔들고 불을 쏟아내며 바다를 움직였다. 태연하게 걷는 소렐 이드리스도, 어쩌면, 그래, 어쩌면 할 수 있을 거다.
“어……?”
소렐은 홀린 듯이 멈춰 섰다. 그녀는 순식간에 가게 진열장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퀭하던 눈에 생기가 다시 돌았다. 팔이 당겨져서 같이 멈춰서야 했던 라이킨은 소렐의 시선을 보았다.
“라이킨?”
“예, 공주님.”
그녀는 빨간색과 금색, 푸른색과 초록색으로 아름답게 포장하고, 보석처럼 꾸며진 초콜릿 진열장을 가리켰다.
“여기 가볼래요.”
들어가서 완전히 다 쓸어버리겠다는 굳은 표정으로 분부하시는데, 수호기사가 감히 고개를 흔들 수가 있나.
“그래요.”
그는 웃으며 문을 먼저 열어주었다. 순식간에 따뜻한 실내로 들어간 소렐은 향긋하고 달콤한 초콜릿 냄새에 눈을 감았다.
“어서 오십시오.”
각양각색의 다양한 초콜릿 바, 퍼지, 산처럼 쌓인 생초콜릿과 초콜릿을 입힌 아몬드 등이 진열장 안에 가득했다. 라이킨은 아무런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곧장 진열장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바짝 붙은 소렐의 표정을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
‘초콜릿을 좋아하는구나.’
그는 이 사실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아니, 저 표정을 보면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공주님은 초콜릿을 아주, 아주, 엄청나게 좋아한다.
“이건 뭐예요?”
“동그랗게 생긴 것 말입니까? 그건 안에 체리 럼을 넣은 것입니다.”
소렐 이드리스가 눈을 반짝거리는 건 현재로선 두 개다. 하나는 책, 또 하나는 초콜릿. 라이킨은 금세 얼굴에 홍조를 띄운 소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초콜릿 향이 달다. 혹은 소렐의 향도 무척 달았다.
“이쪽은 술을 조금 첨가한 초콜릿들이지요. 카라멜이나 과일을 넣은 초콜릿은, 여기에 있습니다.”
소렐은 고개를 들었다. 라이킨이 바로 곁에 있었다. 내내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안전하다. 안전했다. 어디에 있든 저 푸른 눈이 그녀를 지켜보는 한, 그녀는 안전할 거라는 믿음이 불쑥 들었다.
“뭐가 맛있을 것 같아요?”
“글쎄요, 술이 들어간 건 조금 위험하니 퍼지나 견과류가 들어간 게 좋지 않을까요?”
“라이킨은 시골 애들이 얼마나 일탈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저런 초콜릿에 조금 들어가는 럼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라이킨은 픽 웃었다. 알 건 대충 다 안다는 소린가.
“아빠는 항상 초콜릿은 딱 두 개만 먹으라고 했어요. 정말 너무하지 않아요? 어떻게 초콜릿을 두 개만 먹어요? 그 체리 럼 넣은 초콜릿 세 개 주세요. 그거랑…….”
그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그의 눈이 잔뜩 휘어졌다. 좋았다. 저 종알거리는 소리가, 스스럼없이 말하는 밝은 태도가, 초콜릿을 쉴 새 없이 고르는 눈이 보기 좋았다. 그래, 아무리 고대 마법을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한 허울뿐인 공주라 해도 즐겁게 지내야 하지 않겠는가.
“다크 초콜릿 바 하나랑요. 네, 그 두꺼운 거요.”
라이킨은 소렐보다 더 즐거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째 명함을 고를 때보다 더 힘이 나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잔뜩 신나서 작은 손으로 이것저것 열심히 가리키는 게 예뻤다. 그래. 공주님은 그대로 그렇게 있어야 했다. 행복하게, 뭐든 신나게. 그렇게 씩씩한 공주님답게.
“다 골랐어요?”
“네! 다음에 또 올 거예요!”
“나와 같이 와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예쁘다. 그래. 소렐 이드리스는 예뻤다. 라이킨은 웃다가, 갑자기 날카로운 눈으로 가게 바깥을 바라보았다.
“왜요?”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이킨은 다시 고개를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 상류층들은 언제나 지루하고, 돈은 넘쳐나고, 시간 역시 썩을 정도로 많다. 그들은 언제나 하이에나처럼 순간을 즐길 자극적인 유흥거리를 찾아 나선다. 그들이 소위 예의라는 허례허식을 그렇게 복잡하게 발전시킨 것도, 결국 남을 헐뜯고 평가하는 재미 때문이 아닐까?
“소문 들었어요?”
그러니 사교계를 뒤흔드는 소문은 언제나 부채와 장갑을 타고 번져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가끔 활자로 구체화되기도 했다.
“글쎄, 칼리에르 공이 말이에요…….”
“그 뱀파이어 말이죠? 거긴 남들이 14대까지 갈 때 혼자 2대라니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집 근처에서 어느 아가씨와 걷더래요.”
깎아놓은 듯이 잘생기고, 혼자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글래스턴 전체를 손에 넣고 있으며, 왕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뱀파이어가 소문에 휩싸이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그 ‘소문’은 아직 변방에서 슬쩍 돌다 마는 것에 그쳤다. 칼리에르 공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무척 적었고, 때론 사람들은 그의 존재조차 잊곤 했다. 그러다가도 그가 가진 영향력이 여전히, 그림자처럼 존재한다는 것을 알곤 오싹한 공포에 떨 뿐이다.
“처음 보는 아가씨였는데……. 공이 그 아가씨를 보고 웃고 있더라니까요. 공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봤대요. 분명해요.”
“워낙 여자 문제에는 관심이 없기로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사교활동을 아주 안 하는 건 아니겠지요. 친구도 만나고, 뱀파이어들끼리 아는 사람들도 있을 거 아닙니까.”
모두가 점잖게 말하지만, 금지된 호기심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사교계에 활발하게 출입하지 않는 뱀파이어 공작은 아주 무서운 존재였지만, 동시에 너무나 매력적이기도 했다. *
“요즘 시선이 많이 따라붙던데.”
라이킨이 날카롭게 말했다.
“예. 사교계 중심에서 조심스럽게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중입니다. 전부 마스터께서 공비전하와…….”
조슈아는 잠시 말을 줄였다. 공주님, 공비전하, 고대 마법의 계승자, 소렐을 가리키는 호칭은 굉장히 많았다.
“함께 계시는 걸 목격한 내용입니다.”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다 거기서 거기니 당연하겠지.”
뱀파이어들이 가지고 있는 작위는 엄청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동시에 평소에는 잊기 십상이었다. 그들은 지나치게 오래 살았고, 자신들과 시간의 흐름이 다른 인간세계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엄청난 힘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때문에 보통 상속받은 영지의 지명과 작위를 붙여 무조건 ‘글래스턴 공작’이라 칭하는 것이 옳겠지만, 사실 칼리에르 일가는 글래스턴이라는 지명보다 훨씬 더 유명했다. 너무나 유명했다.
“방심했군. 아니, 방심했다고 해도…….”
라이킨은 고개를 흔들었다. 사교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은 이 뱀파이어들을 부를 때, 영지와 가문을 혼용해서 사용해도 곧장 알아듣는다는 것으로 자신들의 고상함과 연륜을 뽐내곤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소렐을 집에 가둬놓을 수는 없지 않나.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대는 게 짜증난다. 어차피 소렐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그도 학교를 제외한 외부활동을 삼가고, 사교계에는 일절 출입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야 그녀가 편안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을 테니까. 칼리에르 공비전하라 불리며 대학생활을 하면 소렐이 잃는 게 얼마나 많겠는가.
‘학교에 갈 거예요!’
초콜릿을 잔뜩 사들고 온 소렐은 로렌스와 샤를렌, 에벌린까지 불러놓고 선언했다. 그녀가 바라는 대학생활은 고작 몇 년 안 된다.
“묻어.”
예상했던 일이고, 충분히 관리할 수 있기에 소렐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예.”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킨의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조슈아는 이 정도면 아주 양호했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게 확실히 해.”
확실하게 칼리에르 공이 왜 무서운 사람인지 알려주라는 뜻이었다. 그래, 양호할 리가 없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 빠르게 움직이는 쥐처럼 소문을 물어 나르던 이들은 동시에 입을 다물 것이다. 라이킨은 눈을 감고 이마를 문질렀다.
“계속 묻으실 생각이십니까?”
조슈아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부터 공주님이 바라는 대학생활은 끝이야. 평생 못 가져.”
호기심 어린 눈들이 계속 쫓아다니면서 몸가짐이나 옷차림에 대해 입방아를 찧어댈 것이고, 그녀의 성적마저 지저분한 관음증의 대상이 될 것이다. 소렐이 그런 걸 견딜 수나 있을까?
“그냥 약혼만 했다는 식으로 넘기는 건…….”
“마찬가지야.”
‘그’ 칼리에르 공의 약혼녀든, 아내든 소렐이 학교를 다니는 이상 안 된다.
“전부 입 다물게 만들어.”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러나 결코 입 밖에 낼 수 없는 금기다. 이미 그가 소렐과 목격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시선이 모이고 있는데, 그들의 관계가 드러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라이킨은 다시 한번 안 된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소렐을 평온하게,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야 했다. 습격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가겠다고 하는 공주님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해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