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공주님의 남편 (9)2020.10.31.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그의 집에 사는 토끼 공주님이 딱히 예의가 바르고 착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이미 충분히 착했고, 또 순진했다. 여태까지 펠릭스 이드리스가 어떻게 키웠는지는 대충 알겠지만, 이젠 소렐도 성인이 아닌가. 꼭 착하고 바른 인생만 살아야 한다는 법도 없다.
“공주님은 마법에 대한 이해가 참 빠르군요. 바로 마법을 시전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닌데.”
이론을 알고, 힘을 이해하며, 동시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정확하게 선택해서 구별하고 손을 써야 했다. 말이야 쉽지, 그걸 급한 상황에서 한 번에 다 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커다란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던 펠릭스 이드리스가 천재라 불렸다.
“배우긴 대충 배웠어요. 아빠가 이론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자꾸만 가르치셔서…….”
소렐은 말을 흐렸다.
“근데 저는 너무 배우기가 싫었어요. 전혀 하지 못하는 걸 배워서 뭐하나 싶었거든요.”
“대부분의 학문이 얼핏 보기엔 그렇지요. 하지만 지금 아주 훌륭하게 쓰고 있지 않습니까.”
칭찬을 해주면 소렐의 말간 얼굴에 홍조가 깃들었다. 토끼는 자주 시무룩해하곤 했지만, 조금만 북돋워주면 다시 씩씩해졌다. 아직 한참 어리고, 글래스턴에 와서 좋은 기억보다는 나쁜 기억이 많은 아가씨는 풀이 죽어선 안 된다.
“굳이 잘 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해도 괜찮아요. 그냥 그 순간에 공주님이 판단을 제대로 하고, 기절하지 않았다는 건 아주 용감하다는 뜻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라이킨은 소렐과 눈높이를 맞춰가며 말했다.
“그러니 절대로, 절대로 어제 일에 대해 자책하지 말아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는 했던 말을 반복해서 하고, 또 했다. 소렐이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할 것이다.
“사람을 죽이고 납치하는 걸 전문적으로 배운 놈들 앞에서는 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자리에서 기절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사비나는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처음 사귄 친구가 그녀를 악착같이 안으며 보호하려다 기절한 걸 떠올리니 소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절 지켜주려고 계속 껴안아줬거든요.”
“아마 깨어났을 겁니다. 연락해서 알아보도록 하지요.”
라이킨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타운하우스에 사람들이 북적북적, 많이 늘었다. 로렌스 오블리앙 공이 항상 앉아 있는 티룸에서는 언제나 향기로운 차나 커피가 만들어졌다. 샤를렌은 키가 맞는 오빠의 셔츠와 바지를 대충 빼앗아 입고, 가운을 하나 또 빼앗아 걸친 채 거실 탁자에 서류를 늘어놓고 바닥에 앉았다. 소렐은 어디에나 있어도 괜찮았다. 그녀는 이 타운하우스의 주인이니까.
“이젠 잃어버리지 말아야지.”
소렐은 블루 사파이어를 자그마한 보석함에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언젠 잃어버렸다고요.”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던 샤를렌이 대꾸했다. 소렐은 그냥 웃어버렸다.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말아요. 그까짓 거, 잃어버리면 오빠한테 하나 더 내놓으라고 하면 되니까.”
이 집안사람들은 다 이런 식이었다. 샤를렌은 엄마의 물건이었던 보석인데, ‘그까짓 거’라고 말한다.
“샤를렌 어머니 거잖아요. 오블리앙 공이 주신 거라고 들었어요.”
“우린 피 안 섞였어요.”
소렐의 눈이 커졌다.
“나랑 오빠는 한 배에서 나왔고요. 고아가 됐는데, 마침 우리를 어머니가 주워 와서 키웠죠.”
그녀는 씩 웃었다.
“라이킨이랑은 많이 닮으셨던데……?”
“아버지랑요? 네, 그런 말 많이 듣죠. 성깔이 똑같은 채로 같이 늙으면 좀 비슷해지나 봐요.”
이 집안사람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주워온 자식이라니, 그런 엄청난 사실을 이렇게 쉽게 말해줘도 되나?
“공주님도 이제 우리 집 식구니까 알고는 있어야죠. 말 안 해주면 그건 사기 결혼이에요.”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가족은 가족이잖아요.”
샤를렌은 그 말에 소렐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족은 가족이지요. 그러니 딱히 숨길 일도 아니니까, 불편해하지 말아요.”
그러더니 또 서류더미로 시선을 돌리고 바쁘게 펜을 놀린다. 소렐은 장난감처럼 작고 예쁜 보석함을 두 손으로 들고 타박타박 걸어갔다. 향기로운 커피 향이 집 안 구석구석에서 흘러나왔다. 아까 샤를렌도 벌써 두 잔째 마시고 있었고, 당장 이쪽으로 향하면 나오는 티룸에서도 갓 내린 커피 향이 신선하게 퍼졌다.
“공주님, 이리로 잠깐 올까요?”
안경을 쓴 로렌스가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그는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이름 부르시고요.”
공주는 공주라 해도 오블리앙 공의 며느리이기도 하니, 집안 어른에게는 소렐이 예의를 갖춰야 했다. 그녀는 보석함을 꼭 붙잡고 말했지만, 로렌스는 픽 웃으며 자리를 내주기만 했다.
“편하게 하고 있어요. 자, 이걸 한번 봐요. 마음에 드는 걸 골라봐요.”
티룸의 탁자 위에는 직사각형으로 잘린 작은 종이들이 널려 있었다. 같은 백색이라도 어떤 것은 아이보리색, 어떤 것은 순백색, 또 어떤 것은 테두리를 그려 넣기도 했다. 옅은 푸른색과 분홍색도 있었다.
“이게 뭐예요?”
소렐은 로렌스의 곁에 앉아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종이는 꽤 뻣뻣했다.
“일종의 명함이지요. 공주님이 어떤 집이나 사람을 방문할 때 반드시 보여줘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아, 저도 라이킨이 가지고 있는 거 봤어요!”
그는 간단하게 자신의 이름과 교수라는 지위만 적어놓은 명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어요? 그놈 거는 마음에 들어요?”
“그냥 평범한 명함 같았어요.”
“그렇지요? 여기 여러 가지 종류의 종이가 있으니, 마음에 드는 색과 모양을 골라 봐요. 나는 이 명함이 참 예쁜데.”
소렐이 로렌스가 보여주는 명함 견본을 한참 들여다보기 시작했을 때, 라이킨이 모퉁이를 돌아 티룸으로 들어왔다.
“이게 뭡니까? 명함 새로 제작하시려고요?”
“내 건 아니고, 우리 공주님 걸 하나 해드려야지.”
라이킨은 주름진 아버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명함이란 건 결국 사람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낸다. 귀족들은 자신의 작위와 자랑스러운 성을 번쩍거리는 글씨로 찍어서 들고 다녔다. 한마디로 명함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로렌스는 이번에도 사파이어에 버금가는 권력을 소렐에게 줄 생각인 거다. 아버지 나름의 방책인 셈이었다.
“이름도 적고……, 너와 내 문장을 찍어놓으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좋네요.”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렐 이드리스라는 이름에 발레시나스 공작과 글래스턴 공작의 문장이 찍혀 있다면, 어마어마할 거다. 굳이 소렐이 그의 아내라는 걸 적어놓지 않아도 대충 알아서 조심하겠지. 라이킨은 명함 제작소에서 보내온 견본을 신이 나서 들여다보고 있는 소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음, 저기, 아버님? 이렇게 부르는 거 맞지요?”
라이킨은 조금 놀란 호칭인데, 로렌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렐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예, 맞지요. 왜요? 그게 마음에 들어요?”
“아뇨, 아직 고르는 중인데…….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소렐은 힐끔 라이킨을 쳐다보았다.
“라이킨도요.”
다들 그녀가 어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어 그리 의기소침한 건지, 눈치를 챈 거다.
“저도 나가서 잘할게요.”
‘토끼 너, 아직도 마법 못 써?’라니. 그런 거지 같은 말을 들으면 뒷다리로 뻥 차줘야지. 라이킨도, 아버님도 잘했다고 했다, 뭐!
“굳이 잘하지 않아도 됩니다.”
라이킨은 그녀에게 어울릴 것 같은 연한 분홍색 견본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아니, 분홍색은 너무 뻔하다. 저 라일락 빛깔은 어떨까?
“그냥 재미있게 지내면 되지요. 하고 싶은 공부만 하고, 즐겁게 말입니다.”
그래. 그렇게. 명함에 들어갈 내용을 고민하고, 요즘 어떤 모양이 유행이라더라, 하고 견본을 들여다보고. 라이킨의 푸른 눈은 소렐이 가지고 온 보석함에 고정되었다. 그 안에는 고작 블루 사파이어 하나와 그가 준 펜던트밖에 없었다. 머리에 다는 리본을 상자 하나에 가득 담아주었는데, 거기서는 마음에 드는 게 없었던 건가? 뭐, 앞으로 조금씩 채워나가면 되겠지. 공주님의 보석함이 너무 작아서 아예 바꿔야 할 정도로 가득.
‘지시 이행, 완료되었습니다, 마스터.’
소렐 이드리스가 습격당했으니, 그에 대한 정당한 보복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나. 라이킨은 차디찬 새벽에 뱀파이어들을 풀어놓았고, 그들의 배를 불렸다. 10여 년간 표면상으로는 유지되고 있던 평화를 엘펜하임이 먼저 깨버렸으니, 그도 정중히 응해준 것뿐이다. 칼리에르 공의 도시에서, 감히 칼리에르 공비가 습격받았다. 엘펜하임 기사들의 시신이 피 한 방울 없는 상태로 발견되기엔 충분한 이유가 아닌가.
“공주님, 이 색은 어떻습니까? 공주님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데요.”
그는 옅은 라일락색 견본을 건넸다.
“우와, 이것도 예쁘다아…….”
그래. 그렇게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예쁜 것만 보고 행복하게 지내야 한다. 여태까지 조용히 지내왔던 칼리에르 공 산하의 뱀파이어 조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지만 정작 붉디붉은 액체는 보이지 않는다. 살인은 전문이고, 시신처리는 부업이다. 뱀파이어는 아주 훌륭한 살인자였고, 라이킨은 그들을 다스리는 유일한 수장이니, 이 전쟁은 엘펜하임이 시작한 거나 다름없었다.
“뭐야, 다들 여기서 뭐해? 나 빼놓고?”
키가 큰 샤를렌이 불쑥 와서 입구 기둥을 짚고 물었다.
“그 색 예쁘네. 명함이에요? 그걸로 해요, 공주님.”
“예쁘죠? 그쵸? 근데 이건 이번만 한정판이어서 음, 어디 보자, 삼백 장 한정이래요.”
토끼는 안내서를 읽다가 눈이 커졌다.
“삼백 장씩이나?”
“삼백 장이면 뭐, 사교계 한 시즌이면 금방 다 쓰겠네. 너무 적은데요. 근데 게다가 한정판이라고? 아버지, 특별주문 안 된대요? 너무 예쁜데. 공주님이랑도 잘 어울리고.”
사랑스럽고 옅은 라일락색.
“라이킨이 골라줬어요!”
“아아, 그래요?”
라이킨은 동생이 빙그레 웃으며 자신을 보자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고, 무서운 칼리에르 공작 전하, 어쩌다 여자애들끼리 고르는 명함 색깔까지 골라주고 계시나.’
건수 잡았다, 이거지. 라이킨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명함 색깔이 대수인가. 어떤 펜이 편한지, 어떤 문진이 좋은지, 어떤 레이스가 더 예쁜지, 리본은 어떤 리본이 좋은지도 골랐었다. 앞으로도 뭐든 다 골라줄 거다.
“그래……. 이걸로 특별주문을 하자.”
로렌스는 라일락색 명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랑스러운 색 위에 무시무시한 두 공작의 문장이 찍히면 그건 그거대로 또 볼만 할 거다. * 글래스턴은 뱀파이어의 영지답게 음울하다. 카메론 셀레스트 교수는 밤거리를 걸으며, 이곳이야말로 뱀파이어에게 딱 어울리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곳곳에 창백하고 빛바랜 대리석이 서 있고, 똑같은 규격으로 찍어낸 창문들이 길거리를 싸늘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린 뒤, 움푹 들어간 옛길에 물웅덩이가 잔뜩 생기는 건 아주 흔하고 당연한 일이었다.
“왔어?”
느긋한 목소리에 카메론은 긴장이 조금 풀리는 걸 느끼곤 어깨를 늘어뜨렸다.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될 일인데, 그와 마찬가지로 날을 세워야 하는 상대방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나 보다.
“벌써 한 잔 마셨어?”
눈에 띄지 않는 술집의 한구석이야말로 괜찮은 접선 장소였다. 접선이라고 하기엔 적끼리 만나 의사 타진을 하는 정도지만, 카메론은 이곳을 꽤 좋아했다.
“너도 하나 마셔.”
폴리아나 그린은 대충 앉으라고 손짓을 하며 술잔을 또다시 비웠다.
“……마실 기분이 아니야.”
카메론은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기분이 아니긴, 이미 표정서부터 한 잔 들어가야 할 표정인데.”
폴리아나는 힐끗 그를 보더니 독한 위스키를 두 잔 더 주문했다.
“너무 마시는 거 아냐?”
“뱀파이어가 취해봤자…….”
“그건 좀 부럽군.”
카메론은 솔직하게 말했다.
“난 취하는 게 부럽던데.”
폴리아나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독한 술을 들이켰다. 물론 카메론 셀레스트 교수는 제법 술이 세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본론을 말했다.
“시체 배송 잘 받았다.”
“어.”
“제임스 칼리에르에게 고맙다고, 마음을 담아 저주하겠다고 해줘.”
“니들이 뱀파이어는 이미 저주받은 존재라며.”
“저주에 저주를 더 얹어주겠어.”
피가 다 빠져나간 시신이, 건장한 성기사들의 시신 스물세 구가 어떠한 예의도 없이 대충 쌓아 올려진 꼴을 보면 누구나 지독한 분노를 느끼기 마련이다. 라이킨은 엘펜하임을 조롱했고, 글래스턴 추기경의 얼굴은 희게 질렸으며, 기사단원들은 통곡하며 이를 갈았다.
“그래라.”
그러든가. 폴리아나 그린은 관심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 개자식은 뭐라고 해?”
폴리아나가 이 자리에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카메론 셀레스트는 이를테면, 상대방의 의사를 타진한 거였다.
“대학교정에서 ‘공비 전하’는 건드리지 말래.”
“……그렇게 말했다고?”
“어.”
“그걸 너한테 말하라고 시켰다고?”
“어.”
“너 뭐 잘못했냐?”
“시끄러워.”
폴리아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새 위스키를 시킨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다시 연 건 새 잔이 나와서 한 모금을 마신 후였다.
“넌 내가 제임스 교수 측근이라 가까이 지내는 거지.”
“그렇지.”
딱히 숨길 생각도 없었다. 대립하는 뱀파이어와 엘펜하임 기사단 사이에서도 어쨌든 대화창구는 필요했고, 기왕이면 상대 수장과 가까운 이와 대화해야 했다.
“측근에서 최측근으로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폴리아나는 픽 웃었다.
“……난 좀 유치한 사람인가 봐. 이제야 알았어.”
“누군 안 그러냐. 다 그런 건데 그냥 안 그런 척하고 살지.”
“너도 그래?”
“오늘 열 받아서 추기경 집무실에 있던 담배상자를 통째로 그냥 들고 나왔어.”
“오.”
“브랜디 두 병이랑, 사탕단지도. 그 영감탱이가 주전부리 하나는 착실하게 챙겨놓고 있지.”
그 성의로 똑바로 일을 하면 좀 좋아. 제기랄. 셀레스트 교수는 참지 못하고 담배를 꺼내 피웠다.
“그거야? 나도 좀 줘.”
담뱃불을 받아 피운 폴리아나는 담배를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추기경은 비싼 담배를 피우네.”
“다음에 이런 일 또 생기면 그땐 시가상자도 털어올 거야.”
“그래도 돼?”
“안 될 게 뭐가 있어?”
폴리아나는 그렇구나, 하고 묵묵히 담배를 피웠다.
“나는 담배를 제임스 때문에 피웠어.”
“너 궁상 떨 거면 그냥 나가서 너 혼자 마셔라.”
카메론은 짜증을 냈다.
“그만 좀 해. 어차피 신경 안 쓰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잖아.”
그는 담배를 다시 한 번 보았다. 다음에는 시가상자를 꼭 털어와야지.
“애초에, 약혼녀도 따로 있던 남자를 좋아한 거 아냐.”
“갑자기 토끼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지.”
“토끼나 원래 있던 약혼녀나. 궁상 그만 떨어. 그리고 원래 질투는 기분 더러운 거야. 딱히 나쁘진 않으니까 하던 거 계속 해. 이겨야 할 거 아냐.”
넌 여태까지 바친 세월이 아깝지도 않냐. 카메론은 은근히 폴리아나를 부추겼다. 그녀도 모르지 않겠지만, 결국 그의 말에 넘어갈 것이다. 오랜 짝사랑이란 놓기 힘든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