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공주님의 남편 (7)2020.10.24.
‘아주 잘했습니다.’
소렐은 웃었다. 웃다가, 순식간에 검에 의해 찔리고 베여서 형체도 없이 사라진 남자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어디 갔지? 어떡하지? 위험해!
‘토끼. 너.’
토끼. 아, 그래. 그녀는 토끼였다. 소렐은 자신의 손이 아닌 앞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너무 작았고 무력했다.
‘아직도 마법 못 써?’
못 쓰는구나. 멍청하네. 한심하네. 깔깔깔 웃는 목소리가 그녀를 칼날처럼 내려쳤다.
‘이건 꿈이야.’
나쁜 악몽이다. 어서 일어나야 했다. 소렐은 몸부림을 치다, 간신히 눈을 떴다. 놀란 몸이 떨렸다. 어색한 사주식 침대와 이중 커튼이 쳐진 창문, 그리고 너무 넓어서 어둠을 그만큼 많이 품고 있는 방이 눈에 들어왔다. 소렐은 몸을 웅크리고 이불을 꼭꼭 덮었다.
“……공주님.”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까지 깊은 밤중에 저 깊은 어둠을 건너,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괜찮습니까?”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을 시키는 대신 직접 올라온 라이킨은 방 안에서 숨을 쌕쌕 몰아쉬고 있는 토끼의 상태에 귀를 기울였다.
“……조금 불편하면…….”
라이킨은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가 들어갈 수는 없었다.
“잠깐 나올까요?”
안에서 한동안 대답이 없었지만 라이킨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아니, 딱히 길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보아하니 악몽을 꾸고 깨어난 모양인데, 겁에 질린 토끼가 망설이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이 집에는 그녀의 천적투성이다. 당장 바깥으로 나오라고 회유하고 있는 남자도 뱀파이어였다. 그는 자신이 소렐 이드리스에게 위험한 존재란 걸 언제나 인지하고 있었다.
“아니면 내가 계속 여기에 있겠습니다. 편히 자요.”
문 하나를 두고 잠든다면 그나마 조금 편하게 느끼지 않을까. 그에겐 너무 멀게 느껴지는 거리였지만, 소렐에겐 충분히 가까워서 불편할 수도 있는 거리였다. 라이킨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평생 함께해야 하는 토끼다. 아, 물론 고대 마법을 따로 빼낼 수 있는 기상천외한 방법이 생긴다면 굳이 평생을 함께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런 방법은 아직까지 없었다. 그러니 천천히, 느긋하게, 순진한 토끼가 그에게만은 모든 경계심을 다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릴 거다.
“아…….”
안에서 소렐이 덜컥 놀라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래서 그가 굳이 에벌린을 대신 올려보내지 않고 직접 올라온 거다. 그가 있는데 굳이 에벌린에게 기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그마한 발이 바닥을 탁, 딛는 미세한 소리마저 뱀파이어의 청력에 다 잡혔다. 라이킨은 소렐의 방문에 기댄 채 혀로 입술을 핥았다.
“어, 라이킨?”
급하게 부른다. 혹시 가버렸을까,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그를 부른다. 라이킨은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라이킨?”
조금 더 목소리를 돋워 그를 열심히, 또 애타게 부르는 게 좋았다. 그래, 그렇게. 계속해. 계속 나에게만 매달려. 은근한 쾌감이 느껴졌다.
“예, 공주님.”
그는 느지막이 대답했다. 무척 즐거웠다. 그사이, 소렐은 몹시 고민했다. 문과 그녀 사이에 있는 저 어둠이 무서웠다. 나이가 몇 살인데 불을 끈 방이 무섭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었지만, 뭐가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까 낮에도 불쑥 튀어나온 사람들이 여럿이지 않았나.
‘여기 아무도 없는 거 맞아요?’
물어보고 싶었지만 바보 같은 질문이란 걸 소렐 스스로도 잘 알았다. 바깥에서 라이킨이 기다리고 있다면 나가야 했다. 어둠과 무서움은 꾹 참고, 쳐다보지도 않고 뛰어나가야 했다.
“저도……, 저도 나가고 싶은데요…….”
소렐의 머리 위로 침대 위에 대충 걸쳐진 잠옷이 흘러내렸다. 으악! 소렐은 잠옷을 치워내느라 안간힘을 썼다.
“제가 지금……, 나갈 수가 없어요…….”
“무슨 일입니까?”
라이킨의 목소리가 변했다.
“들어가도 됩니까?”
그가 당장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소렐은 눈을 깜빡거리며 밀려드는 잠옷의 홍수에서 버둥거리다가, 결국 포기한 목소리로 허락했다.
“네에…….”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라이킨은 문을 열어젖혔다. 이 방에 분명히 소렐 이드리스가 있었다. 다른 것은 없었지만,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닌가, 순식간에 그의 신경이 날카롭게 섰다.
“공주님?”
어딜 간 건가. 침대는 이불이 젖혀진 채 비어 있었다. 분명히 발소리도 들렸는데. 라이킨은 침대를 물끄러미 보다가 성큼성큼 다가가서, 침대 아래에 떨어진 여성용 원피스 잠옷을 들어 올렸다. 그 아래, 새하얀 토끼가 엎드린 채 앙증맞은 앞발로 얼굴을 꼭꼭 가리고 있었다.
라이킨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그려졌다.
“나 때문에 놀란 겁니까?”
소렐은 꼬물꼬물 움직여서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런 뒤 여전히 가린 얼굴을 힘차게 흔들었다. 그건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표시하는 거다.
“그럼 오늘 일 때문에 자다 깬 거군요.”
꿈에서 토끼로 변했다 싶었는데 일어나니 이렇게 되어 있었다. 소렐은 너무 부끄러웠다.
“내가 안아 들어도 괜찮을까요?”
라이킨은 몸을 낮춰 물었다.
“벽난로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소렐은 또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충분히 귀엽고 예쁘니까 속상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속삭이면서 조심스럽게 소렐을 감싸들었다. 잠옷 역시 잊지 않고 챙겼다. 아기 토끼의 체온이 떨어지면 곤란하니까.
“갈까요?”
그는 손바닥 위에 올라앉은 토끼에게 입술을 가까이 대고 연신 괜찮다고 속삭이며 방을 나갔다. 항상 세 발자국 멀리 떨어져 있던 소렐의 자그마한 호흡, 바들바들 떨리는 몸, 부드러운 털과 그만큼 따뜻하고 동시에 너무나 작은 크기가 손바닥 위에서 느껴졌다.
“자, 따뜻한 곳에 있어요.”
커다란 안락의자와 오토만이 놓인 벽난로가로 온 라이킨은 이 자그마한 토끼를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는 결국 안락의자에 앉아서 오토만을 좀 더 벽난로 가까이 끌어다주었다. 잠옷을 오토만 위에 올려놓고, 토끼를 그 위에 올려주니 꼬물꼬물 제 옷을 파고 들어간다. 그런 뒤 또 얼굴을 앞발로 푹 가리고 엎드렸다.
“와인을 한 잔 줄까, 했는데.”
토끼의 몸이니 술을 마셨다간 큰일 날 것 같기도 하고. 라이킨은 작은 냄비를 벽난로 위에 걸었다. 그는 편안한 옷차림에 흡연용 가운을 대충 걸쳤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여미지 않은 가운 자락이 흔들렸다.
“우유가 좋겠지요.”
소렐은 살며시 앞발을 내렸다. 라이킨은 주방에서 가지고 온 우유병을 열어 냄비에 부었다. 납작하게 누웠던 토끼 귀가 조금씩 들어 올려졌다. 우유만? 우유만 넣을 거야? 딱 우유만 끓여서 먹는 거야? 진짜 그럴 거야? 소렐은 라이킨이 하는 걸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엎드려서 웅크려만 있던 몸도 점점 펴졌다. 앞발도 꼭 쥐어졌다.
“조금만 마시고 다시 자도록 해요.”
라이킨은 빈 우유병을 내려놓았다. 우유배달부가 다시 수거해 갈 것이다. 그는 대충 집어 온 조그만 단지도 열었다. 토끼의 세모나고 빨간 입이 헤 벌어졌다. 저건 뭐지? 작은 나무 숟가락을 집어넣었다 들어 올리니, 황금빛 끈끈한 액체가 줄줄 떨어졌다. 꿀이다! 꿀! 토끼의 귀가 발딱 섰다. 라이킨은 모르는 척, 웃음을 깨물며 냄비 안에 꿀을 두 스푼이나 가득 넣고 젓기 시작했다.
“자.”
어느새 일어나서 냄비 안을 보려고 발돋움을 하고 있던 소렐은 라이킨이 내미는 것을 보곤 다시 뒤로 물러났다. 라이킨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오토만 끄트머리에 내려놓았다.
“공주님 거잖습니까.”
무척 커다란 블루 사파이어가 테두리에 작은 다이아몬드 여러 개를 두른 채 빛났다. 아주 귀한 물건이다.
“아버지가…….”
라이킨은 한 손을 바지주머니에 꽂은 채 천천히 우유를 저었다.
“공주님이 왜 손을 다치셨는지 아시곤, 속상해하셨습니다. 아침이 되면 아마 말씀하시겠지만.”
토끼는 뱀파이어 냄새가 가득 묻어 있는 사파이어 근처에 가까이 가지 않은 채 코만 킁킁거렸다. 라이킨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우유를 젓기만 했다.
“라이킨.”
“예, 공주님.”
“손이 너무 많이 가서 미안해요.”
웅얼웅얼한 뒤 또 작은 앞발에 얼굴을 폭 파묻는다. 라이킨은 슬쩍 뒤를 돌아보다가 웃고 말았다.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공주님 혼자서 미안하면 어쩝니까.”
“내가, 내가 자다가 중간에 깰 줄은 몰라서……!”
“뱀파이어는 잠을 잘 자지 않습니다.”
라이킨은 걸어놨던 냄비를 다시 빼냈다.
“밤은 길고, 일상은 무료하지요. 할 일이 없던 차에 차라리 기쁘군요.”
그는 작은 찻잔 받침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알맞게 식은 걸 확인한 뒤 우유를 덜어주니, 토끼는 망설이다가 작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다가가서 우유를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달달하고 따뜻하며, 크림까지 넣어 고소한 우유는 혀를 부드럽게 감았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챙기는 건데 뭐 어떻습니까.”
토끼는 그대로 우유를 먹던 걸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입가가 우유에 젖은 것도 귀여웠다.
“당연한 거지요.”
그런가? 소렐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다시 우유를 마시기 시작했다. 라이킨은 자리에 앉아서 그녀가 잘 먹는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래, 그렇게. 그가 주는 것만 받으면서 계속 그에게만 기댔으면 좋겠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평생 아무것도 모른 채로, 뱀파이어가 쳐둔 울타리 안만 가장 안전한 줄로 알고,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야 했다.
“입맛에 맞습니까?”
“네.”
“다 마셔요. 몸이 따뜻해지면 다시 잠이 올 겁니다.”
이런. 성인 여성을 생각해서 우유 한 병을 다 썼는데, 토끼가 마시는 분량은 반의반도 안 됐다. 소렐은 달달하고 따뜻한 우유를 열심히 먹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팔을 세워 턱을 괴고 그녀를 보고 있던 라이킨이 눈썹을 슬쩍 들었다.
“근데요.”
“예, 공주님.”
뱀파이어는 말씀만 하시라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비록 속내는 딱히 공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토끼가 아내인 건 싫지 않아요?”
“어째서요?”
“사람이 아니잖아요.”
툭 떨어지는 고개를 보아하니 누군가에게 토끼 수인이란 걸 들키고 심하게 상처를 받았나 보다.
“토끼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사람이 아닌 건 아니잖습니까. 공주님은 사람 맞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그냥…….”
우물우물거리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우유만 마신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그럼 공주님도 뱀파이어가 남편인 게 싫지 않습니까?”
소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깜찍한 토끼가 조금씩 움직이는 건 상당히 귀여웠다.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라이킨은 잠시 침묵했다. 아, 그래.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그럴 수 있지.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있지? 그가 남편인데?
“하지만 오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기 토끼는 공손히 앞발을 모으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라이킨은 재빨리 생각을 바꿨다. 뱀파이어가 남편인 것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지 않았다 한들, 그게 뭐 대수인가. 저렇게 깜찍한데 그럴 수도 있지. 아직까지도 아기인 토끼인데 그럴 수도 있지! 소렐은 순식간에 그의 아량을 넓은 바다만큼 늘려버렸다.
“제 목숨의 은인이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또 꾸벅 고개를 숙여서, 라이킨은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참아야 했다. 손을 뻗었다간 당장 놀라서 도망칠 거다. 그건 안 된다.
“별말씀을요, 공주님.”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마주 고개를 숙이기만 했다.
“공주님을 안전하게 지키는 게 제 의무이자 기쁨입니다.”
혹은 고대 마법을 안전하게 지키는 게 그의 의무이자 기쁨이었다.
“무사히 집에 돌아와서 정말 기쁩니다.”
그건 진심이었다. 저 공손한 토끼가 크게 다친 곳 없이 돌아와서 기뻤다. 소렐은 라이킨의 깎아놓은 듯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진심으로 기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뒷발을 조금 더 움직여서 그에게 가까이 갔다.
“정말요?”
“그럼요.”
그녀가 위험할 때마다 나타나서 구해주는 뱀파이어에게서는 오늘도 싸늘한 체취가 풍겼다. 소렐이 익숙한 나무 냄새, 흙냄새, 들풀 냄새와는 차원이 다른 도회적이고 차가운 냄새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토끼는 위험한 것도 모르고 뱀파이어의 매끈한 얼굴에 홀려서 조금씩 더 다가가고 있었다. 토끼는 예쁜 눈을 깜빡, 또 한 번 깜빡거리더니 느닷없이 툭 말했다.
“저도 좋아요.”
라이킨은 일단 미소를 지으며 턱을 당겼다. 뱀파이어는 토끼에게서 나는 싱그럽고도 여린 단내를 콧속 가득히 채우며 의자에 앉아 뱀처럼 도사렸다. 아기 토끼는 겁도 없이 쫑쫑 걸어서 그의 무릎 가까이 다가오더니, 또 툭 말했다.
“맨날 라이킨이 구해줘서 다행이고 좋았어요.”
뱀파이어의 미소가 더더욱 짙어졌다.
“그렇습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아까 했던 말이요.”
“예.”
“뱀파이어가 남편인 건 처음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소렐은 뱀파이어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존재인지 어렴풋이 알고 경계만 했다. 사실 라이킨에 대해서 아는 건 거의 없었다. 잘 모르니까 그냥 덮어놓고 무서워하고, 잘 모르니까 두려움이 조금 옅어진 김에 맹랑한 소리도 쉽게 할 수 있었다. 소렐은 라이킨이 저리 짙게 웃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고 그냥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행이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평생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의 손아귀 안에 있어야 할 텐데, 그가 남편인 게 나쁘지 않다니 다행이었다. 라이킨은 작은 토끼를 푸른 눈으로 샅샅이 훑어 내렸다. 그 시선이 어쩐지 맛있는 먹이를 보는 눈빛인 것 같아, 소렐은 눈이 댕그래졌다가 슬금슬금 물러났다.
‘아차.’
라이킨이 뒤늦게 알아차리고 황급히 시선을 갈무리했을 때 소렐은 이미 우유 접시로 돌아가 있었다. 라이킨은 입술을 꾹 말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이성을 놓치지 않고 있어야 했는데, 실수했다. 예민한 소렐은 뱀파이어가 포식자의 본능을 드러내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래도 펄쩍 뛰며 도망가지 않아서 다행인가. 그는 뭐라 말을 하는 게 더 어색할 것 같아, 소렐이 찻잔 받침에 코를 박고 우유를 마시는 걸 가만히 보기만 했다.
“……조금 더 줄까요?”
소렐은 고개를 홱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겁을 많이 먹게 한 건가?
“……조금만 더요.”
그런데 또 대답은 태연하다. 어쩐지 이 작은 공주님은 평범한 초식동물이나 여학생과는 좀 다른 것 같다. 겁이 많나, 싶다가도 용감하고 씩씩하게 마법을 부리고, 그럼 다부진가, 싶으면 또 겁을 먹어서 토끼로 변한다. 종잡을 수가 없었다. 라이킨은 식은 우유를 조금 더 데워서 소렐에게 덜어주었다.
“다 마시고 자러 가요.”
오늘 하루가 이렇게 마무리되는구나, 싶었다. 소렐이 우유를 다 마시면 다시 조심스럽게 안아다 방에 데려다주고,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그러고 돌아가겠지. 그러니까 그녀가 찻잔 받침을 다 비울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하암…….”
그러니까 그렇게 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찻잔 받침을 다 비운 아기 토끼는 길게 하품을 하더니, 그대로 발라당 누워서 두 눈을 꼭 감아버렸다.
“……공주님?”
황당한 남편의 목소리에도 반응도 안 한 채, 쌔근쌔근 잠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