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공주님의 남편 (5)2020.10.17.
사건이 벨파이어 칼리지 근처에서 터진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라이킨은 그를 향해 결합점이 늘어난 걸 보자마자 황금색 선을 따라 달려갔다. 소렐은 지금 목숨의 위협을 느낄 때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것도 거의 그냥 혼자 살아남기 위해 강제로 발동되는 거나 다름없었지, 소렐의 자유의지라곤 조금도 없었다. 결론은 그녀가 지금 무척 위험하다는 거였다.
“아아아아아악!”
때마침 비명도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라이킨은 대단히 섬세하게 짜놓은 그물망을 찢어발기며 뛰어들었다. 폴리아나 그린이 소렐 이드리스 앞에서 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와르르르, 진주가 여기저기 튀었다.
‘일단 됐군.’
라이킨은 그 모습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며, 근처에 있던 습격자 하나를 맨손으로 잡아 땅에 처박았다. 글래스턴 대학교 소속 정원사가 정성 들여 키워놓은 장미 나무가 덕분에 뚝뚝 부러지고 망가졌다.
“아아아악!”
사비나 로체는 참 목청이 컸다. 소렐보다 키가 크긴 했지만, 어디서 저런 목소리가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어떻게든 도움을 청하기 위해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소렐은 질린 얼굴로 사파이어를 꼭 움켜쥔 채 폴리아나 그린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휘두른 검이 꼭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날 치려는 줄 알았어.’
조금이라도 더 멀리에서 검을 떨어트려놓고 목걸이를 끊으면 안 되는 거였을까.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이 순간에 그런 일은 사치인가? 소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일부러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찰나에 불과했다. 챙! 폴리아나는 다시 한번 검을 부딪치며, 소렐을 어쨌든 보호했다. 그녀의 두 눈은 당혹감과 분노로 떨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폴리아나는 지금 상황을 책임지고 버텨야 했다. 그녀는 언제나 맡은 바 일을 완벽하게, 보란 듯이 해냈다. 이번에도 반드시 해내야 했다. 언제나 칼리에르 공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공주님.”
소렐은 하얗게 질린 채 사비나를 꼭 붙잡았다. 어디선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마법을 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건 일종의 본능이었다. 소렐도 자신이 어떻게 마법을 쓰는지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그저 계속 생겨나는 황금실들을 보며, 내가 쓰고는 있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날아드는 검은 날카로우면서 지나치게 빠르고, 또 강력했다. 게다가 한둘이 아닌데, 그녀는 마법을 얼마나 쓸 수 있을지 전혀 자신이 없었다.
‘이러다 죽는 걸까?’
검에 맞아서 피를 흘려가며 죽는 걸까? 토끼는 보통 이런 때 완전히 뻣뻣하게 굳어서 픽 쓰러지지만, 소렐은 안간힘을 다해 참았다. 조금이나마 희망이 보였다. 폴리아나 그린도 어쨌든 애쓰고 있었고, 사비나도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도 어쨌든 마법을 쓰긴 했다. 그게 중요했다.
“공주님.”
좀 더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렐은 사비나를 향해 날아드는 검 때문에 시선을 돌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목소리의 주인은 그 검을 멈춰버렸다. 습격자 하나가 사비나 로체를 향해 검을 치켜세우다가 순식간에 기습을 당했다.
“크억!”
좀처럼 소리를 내지 않는 습격자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끼어들어,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소렐은 그자가 누군지 보려고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보지 말고 고개 숙여요.”
다정한 목소리가 이번에는 아주 분명하게 들렸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이라는 손짓에 얼른 사비나를 안고 고개를 숙였다. 그다음부터는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좀 줄어들었다.
‘라이킨이 다치지 않을까?’
소렐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토끼의 눈에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가득 담겼다. 아니, 폴리아나 그린도 있었다.
‘……와.’
소렐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두 뱀파이어는 아주 오랫동안 서로를 알아온 게 분명했다. 그들은 기가 막히게 합을 맞추면서 상대방을 제압하고 있었다. 특히 라이킨은 움직이는 게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적어도 폴리아나와 호흡이 딱딱 맞는다는 건 알겠다.
“컥…….”
피가 튀고, 습격자 가운데 하나가 움찔거리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자 소렐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사비나는 이제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두 학생은 그저 이 모든 게 끝나길 기다릴 뿐이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소렐이 느끼기엔 너무나 길었지만, 실제로는 무척 짧은 시간이 지났다.
“전부 다 치워.”
주변이 전부 조용해지고, 라이킨의 목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렸다. 소렐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가 몸서리를 치며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망가진 덤불과 잔디, 울타리 모양으로 잘 다듬은 낮은 나무 사이로 여기저기 드러누운 사람의 다리와 발이 보였다. 전부 시체일 게 분명했다. 게다가 초록색 잎사귀에 드문드문 피를 묻힌 나무들도 보였다.
“예.”
폴리아나 그린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리고 경호 담당한……, 불러와서…….”
“예.”
라이킨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소렐은 다시 실눈을 뜨고 조심스럽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비나.”
속삭이듯 불러보았다.
“사비나?”
흔들었지만, 미동도 없었다. 화들짝 놀란 소렐이 사비나를 붙잡았다.
“사비나! 사비나!”
왜 이러지? 어디 다쳤나? 소렐은 눈을 감은 친구를 흔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오는 발소리에 소렐은 고개를 들었다.
“공주님!”
누가 듣는 곳에서 부르면 꽤나 민망한 호칭이었다. 분명히 둘만 있을 때만 그렇게 부르겠다고 해놓고, 이번에도 굳이 그녀를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부끄럽지 않았다. 소렐의 눈에서 눈물이 결국 터졌다.
“누, 눈을 안 떠, 안 떠요…….”
더듬더듬 말하며 고개를 흔드는 소렐의 말에 라이킨은 창백하게 질린 사비나 로체를 일으켜보았다. 축 늘어진다. 소렐은 그 모습을 보며 더 놀라서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다.
“……괜찮습니다. 놀라서 기절한 것뿐이지, 숨은 쉬고 있습니다.”
라이킨의 뒤에서 얼른 돕기 위해 달려오는 뱀파이어들이 여럿이었다. 소렐은 또 움찔거리며 놀랐다. 뱀파이어들이 사비나를 안아 올렸다.
“집으로 무사히 데려다줄 겁니다. 의사도 대기시킬 거고요.”
라이킨은 소렐에게 손을 대지 않고 눈부터 마주쳤다. 여기에서 완전히 토끼로 변해 도망가지 않은 것만 해도 대견했다.
“공주님은 어디 다친 곳 없습니까?”
그의 푸른 눈은 소렐을 빠르게 훑었다. 겉으로 보기에 큰 상처는 없어 보였지만 혹시 모른다.
“몸이 이상하게 무겁거나 아픈 곳 없어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라이킨의 질문에 가만히 생각하던 소렐은 문득 제 손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아픔이 느껴졌다. 라이킨은 그녀에게 허락을 구하듯, 눈을 마주쳐가며 조심스럽게 소렐이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쳤다. 작은 다이아몬드로 둘러놓은 사파이어가 드러났다.
“……이걸 왜…….”
울퉁불퉁한 보석을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손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더 힘을 주고 있었다면 아마 피를 봤겠다. 라이킨은 일단 숨을 참았다.
“이,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귀한 진주도 사방팔방에 다 떨어져 나갔다.
“라, 라이킨 어머, 어머니 건데…….”
숨도 고르게 쉬지 못해 끅끅대며 소렐이 울었다. 라이킨의 어깨가 늘어졌다.
“이게 왜 내 어머니 겁니까, 공주님 건데. 잃어버려도 괜찮습니다.”
“소중한 거잖아요.”
“공주님이 다치지 않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다행히 소렐은 군말 없이 그에게 안겼다.
“많이 놀랐지요. 하지만 잘했습니다.”
“너무 늦었어요.”
그의 어깨 뒤로 소렐의 투명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늦게, 늦게 했어요.”
토끼 너, 아직도 마법 못 써?
“다치지 않았지요.”
라이킨은 조용히 말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아주 잘했어요.”
그렇지만 소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글래스턴 공작은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겁날 정도로 작은 몸뚱이의 감촉이, 따뜻한 체온과 공포에 질린 안색이, 그의 품 안에 전부 끌어모았으나 결국 한참 남은 소렐 이드리스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라이킨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식으로 처음 안고 싶지는 않았다. 포옹이란 게 그에겐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소렐에겐 특별할 거 아닌가.
“어떻게 된 거지?”
라이킨은 조용히 물었다. 그가 오늘 들어야 할 보고가 한둘이 아니었다. 소렐은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황급히 작은 토끼를 싸안아서 데려다 놓고 문을 꼭꼭 닫았다고 했다. 라이킨은 한마디만 묻고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뱀파이어들은 신중하게, 아주 신중하게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오늘 경호 책임진 새끼 누구야?’
뱀파이어들끼리 서로 눈치를 살폈다. 라이킨은 아주 공평하고, 모시기 꽤 괜찮은 상관이었다. 그러니까, 화가 나지만 않으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 아내가 습격을 ‘또’ 당한 일로 인해 칼리에르 공은 굉장히 화가 났다. 그는 아주 차분히 보고를 들었다. 대부분은 가장 먼저 현장에 뛰어들었던 폴리아나 그린이 보고했다.
“……그러고선 바로 제임스가 왔잖아요.”
그 후에는 라이킨이 알아서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보고가 필요 없는 뒷내용이었다. 폴리아나는 깔끔하고 완벽하게, 뭐 하나 빠트리지 않고 보고를 마쳤다. 라이킨은 그사이에도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걸 잊지 않아서,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다 보니 이젠 폴리아나 혼자만 남았다.
“제임스, 아무래도…….”
“아무래도 카메론 셀레스트가 움직인 거겠지.”
라이킨은 폴리아나의 말허리를 잘랐다.
“……증거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요. 있다고 해도 엘펜하임은 여태까지 그랬듯 또 발뺌할 거고요.”
그건 이미 그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폴리아나를 꿰뚫을 듯 바라보았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대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면 쳐냈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폴리아나는 그래도 자신이 가장 가까이 그에게 접근한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명히 그들 사이에는 남들과 다른 뭔가가 있었다.
“그래, 그렇겠지.”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문질렀다. 방금 전에 사람 여럿을 맨손으로 죽인 것치고 그는 아주 태연했다. 살인은 어찌 보면 뱀파이어의 직업이나 다름없었다. 엘펜하임 기사단원도 그러했다. 오래된 피의 대립은 계속해서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오늘은 수고했어.”
“제임스도요.”
“바로 뛰어가서 공주님을 구해줘서 고마워.”
폴리아나의 녹색 눈동자가 그대로 잠시 굳었다. ‘고맙다’라. 이건 함께 하는 동료의 인사가 아니다. 그녀는 그 인사가 평소의 인사와는 다르다는 건 알았지만,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쯤에서 생각을 멈추고 미소 지었다.
“마땅히 해야 했을 일인데요.”
예의 바르고 깔끔한 대답이었다.
“아버지가 곧 오실 거야.”
그러나 곧이어 돌아오는 말들은 전부 폴리아나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말들뿐이었다. 마치 그녀가 분노와 함께 내리쳐 끊어냈던 소렐 이드리스의 목걸이처럼.
“하나뿐인 며느리, 큰일 날 뻔했다고 직접 오시겠다더군.”
‘하나뿐인 며느리’, 눈앞에서 흔들리던 엘리스 루이즈 칼리에르의 사파이어, 모든 게 폴리아나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폴리아나.”
불러주는 목소리가 항상 다정하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던 걸까.
“오늘 수고했고, 고맙고, 노력했다는 건 아는데.”
라이킨은 관자놀이를 긴 손가락으로 짚으며 폴리아나 그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도 칼리에르 공비 앞에서 검을 그런 식으로 내리치는 건 안 될 일이지.”
푸른 눈이 그녀를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봤구나. 봤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혹시나 싶어 폴리아나 그린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을 일부러 들춰내고 싶지는 않았다. 라이킨은 일부러라도 더 노골적으로 호칭을 골라냈다. 그의 성을 붙이고, ‘공비’라는 소렐의 현재 작위를 강조했다.
“그…….”
그건, 하고 폴리아나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 변명을 하려고 했으나 라이킨은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네가 얼마나 대단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제일 잘 알아.”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저래서 문제였다. 다정한 말로 선을 긋고, 무섭게 잘라낸다. 잘 알고 있다니, 폴리아나 그린에게 그보다 더 행복한 칭찬은 없는데.
“그 순간에 얼마든지 검을 다른 식으로 섬세하게 휘두를 수도 있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어.”
그래서 라이킨이 폴리아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냉철하고 엄격했다. 선이 목까지 들이대어졌다. 이걸 넘으면 끝이다. 들켰다는 수치심, 당혹감, 그 모든 게 폴리아나에게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칼리에르 공 앞에서는’ 언제나 완벽했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래야 공비가 될 수 있으니까!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지.”
라이킨의 눈이 가늘어졌다. 폴리아나는 필사적으로 떨리는 손을 주먹으로 꽉 쥐었다.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이럴 수는 없었다. 그들이 여태까지 함께해온 시간과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그가 그녀에게 이럴 수 있을까.
“내 아내는 헬레인 공주야. 위치가 어떤지 한 번만 말하면 다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폴리아나 네가 못 알아들을 줄은 몰랐어.”
언제나 똑똑하고, 바로 알아듣고, 모자란 뱀파이어들의 뒷수습까지 하던 유능한 폴리아나 그린. 그녀가 순식간에 ‘평범한 뱀파이어’로 떨어졌다. 아니,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되었다고 느꼈다. 아무리 망한 왕실의 공주라 해도 헬레인 공주는 무조건 공주다. 모든 왕실이 소렐 이드리스를 공주로 대우해줄 거다. 그걸 모르냐는 질책이기도 했다.
“……이해가 가지 않네요. 헬레인 공주인 건 인정하지만.”
폴리아나 그린은 곧 죽어도 ‘칼리에르 공비’인 건 인정하겠다고 할 수 없었다.
“제임스, 당신은 뱀파이어고, 고대 마법을 손에 넣어야 해요.”
그녀는 애써 침착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뭐가 목적이고 수단인지, 분명하게 해야지요.”
라이킨은 웃었다.
“분명하게 해야지.”
모든 건 분명하게, 그가 늘 긋던 선처럼 깨끗하고 군더더기 없게.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 결정하는 건 나다.”
라이킨이 앉아 있는 자리는 아주 공고했다. 이 오래된 뱀파이어는 세월을 날로 먹지 않았다.
“그리고 고대 마법 계승자는 내 아내고.”
가장 듣기 싫은 말이었다.
“그러니, 다시는 이런 일은 하지 마.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 정도면 아주 약한 경고였다. 여태까지 폴리아나가 해왔던 모든 일을 다 감안해서 최소한으로 끝내는 경고였다. 그러나 어떻게 경고가 부드럽고 친근할 수가 있을까. 라이킨이 하는 경고는 전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경고였고, 폴리아나는 여태까지 한 번도 그의 경고를 받은 적이 없었다. 순식간에 긴 시간을 공들여 쌓아온 마음이 무너졌다.
“……예.”
새파란 눈동자에 온기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라이킨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 이 유치하고 치졸한 질투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