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공주님의 남편 (4)2020.10.14.
소렐 이드리스의 인생에 점점 뱀파이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새로 사귄 친구들도 그랬고, 가끔 집에 방문하는 손님들도 그랬으며, 무엇보다 함께 사는 동거인도 뱀파이어였다. 동거인. 아니면 아는 사람? 혹은 친절한 아저씨. 도와주는 사람. 아빠의 친구. 소렐은 라이킨을 보며 감히 ‘남편’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오늘은 600년 전으로 가봅시다. 저번에 배웠던 국제외교의 태동은 기억하고 있습니까?”
라이킨은 오늘 흰 면바지와 푸른 셔츠를 입었다. 싱그러운 웃음과 눈부신 금발, 그리고 푸른 눈까지 아주 잘 어울렸다. 팔다리가 길고 균형 잡힌 몸매를 가진 신사가 부드럽고 다정한 말투로 쉬운 강의를 하니, 앉아 있는 여학생들은 당연히 무섭게 집중했다. 강의실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너무 멀어.’
저 강단 위에서 아주 분명한 태도로 교수라는 직업에 충실한 남자는 소렐에겐 너무 멀었다. 그녀는 괜히 공책 귀퉁이에 낙서를 끼적였다. 집에서 마주칠 때는 잊고 있다가, 학교에서 마주칠 때마다 깨닫는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대단히 매력적인 남자였다.
“오늘 칼리에르 교수님 강의지? 나 저번 강의 다 복습했어.”
“복습 안 한 애가 어디 있어? 다 했지.”
모두가 라이킨의 수업에는 특별히 열심이었다. 오늘 소렐의 목에 목걸이를 직접 걸어주며 잘 어울린다고 칭찬해준 남자는, 아마 언제나 이런 관심을 받았을 거다. 더구나 떡 벌어진 어깨며 탄탄한 흉곽과 긴 다리를 감싸는 옷차림은 교수라기보다는 젊고 싱그러운 청년으로 보였다.
“근데 칼리에르 교수님, 뱀파이어래.”
“……물리고 싶다…….”
“멋있어…….”
소렐은 수업 시작 전에 학생들이 중얼거리던 말을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다. 뱀파이어가 잘생기고 예쁜 건 인간을 홀려서 잡아먹기 위해서인데!
“……해서 헬레인 왕가가 이때 세워집니다.”
물론 라이킨은 그녀를 잡아먹지는 않았다. 소렐은 문득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맛없게 생겼나?’
라이킨은 슬쩍 소렐을 쳐다보았다.
‘수업이 재미없나?’
아니면 더 웃어야 하나? 다른 학생들은 이 수업을 통째로 소화해내고야 말겠다는 기세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 소렐의 호기심 많은 눈동자는 그에게 향하다가 말고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도대체 그가 아닌 무엇이 그녀의 관심을 더 끌어당기는 건가.
‘다른 사람은 그만 신경 쓰고 날 좀 봐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같은 학생들의 기세에 질린 모양인데, 그의 아내라는 표식이나 다름없는 목걸이를 걸고 그럴 필요는 없지 않나. 눈동자를 또로록 굴리는 토끼의 속이 빤히 보여서 라이킨은 웃음이 나오다가도 조금 섭섭했다. 그녀는 그에게 딱히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나 보다.
*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교수가 한번 휩쓸고 간 강의실은 이제 슬슬 비기 시작했다. 소렐도 소지품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부 다 듣는 라이킨의 수업이 끝났으니, 이젠 각자 시간표대로 움직여야 했다.
“다 챙겼어?”
엄마가 뱀파이어라는 사비나 로체는 그녀와 시간표가 거의 같았다.
“응. 가자.”
“근데 그 목걸이 예쁘다.”
소렐의 목에 길게 늘어져서 블라우스를 장식하고 있는 목걸이를 유심히 보던 사비나가 감탄했다.
“너랑 잘 어울려.”
“진짜? 고마워!”
작은 칭찬에도 소렐은 신이 나서 배시시 웃었다.
“어디서 난 거야? 그런 건 첫날 해야지.”
“오늘 아침에 받은 거야.”
“그래? 그럼, 뭐. 근데 오늘 야외수업이라는데 어딘지 알아?”
“무슨……, 벨파이어 칼리지 근처에 있는 서고인지 회랑이라던데.”
“어휴, 그게 무슨 야외수업이야. 나는 야외에서 피아노를 친다길래 꽤 기대했다고.”
두 소녀는 재잘거리면서도 처음 가는 길을 기웃거렸다. 늦지 않게 도착해야 할 텐데 말이다. 이번 수업만 들으면 끝이었다.
“사비나, 너는 계속 글래스턴 대학에 다닐 거야?”
“응, 당연하지. 그러려고 예비과정에 등록한 건데. 왜?”
“다른 애들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대학을 간다고 하니까……. 기껏 사귀었는데 섭섭해서.”
“하긴 그렇긴 하네. 이번에 다들 유달리 친한 느낌이야. 내가 아는 언니한테 물어봤는데 이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는 않았다고 하더라고.”
소렐에겐 또래 친구를 이렇게 많이 사귄 게 처음이었다. 소심하진 않지만 낯을 가리는 그녀는 몹시 아쉬웠다. 많이들 다른 도시로 가버릴까?
“그래도 어차피 다들 사교계에서 또 만날걸. 집안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
“그래?”
“응. 사교계가 열리는 계절이면 죄다 수도로 몰려갈 거야. 왕실에 가서 국왕 폐하도 알현하고, 요즘은 좀 덜해졌다지만 어쨌든 결혼은 해야 하니까 무도회에도 얼굴을 내밀어야 하고. 어차피 또래 애들이니까 다 비슷비슷하게 만나지.”
사비나는 경쾌한 걸음을 옮겼다. 여기로 가는 게 맞나, 하고 소녀들은 중얼거리며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지겹게 볼 얼굴들이야. 그걸 아니까 다들 웬만하면 서로 함부로 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고.”
“아, 그런가?”
“응. 게다가 다 아는 집안 출신이니까, 알게 모르게 얽힌 게 많거든. 서로 친척이거나, 아니면 부모님끼리 사업을 같이하거나……. 하다못해 바로 옆 영지에 사는 애도 있고. 아일라랑 젠이 사촌간이잖아. 걔네 엄마들이 자매래.”
“지인짜아?”
“하긴 둘이 엄청 안 닮긴 했지.”
사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여긴 왜 이렇게 넓은 거야? 벨파이어 칼리지가 여기가 맞나?”
소렐은 냄새를 가득 맡아보았다. 오래된 냄새와 그들이 지금 지나고 있는 작은 정원의 풀냄새뿐이다. 뱀파이어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하긴 건물 안에 있는 뱀파이어의 냄새를 어떻게 맡겠냐만.
“글래스턴 대학은 엄청 넓어. 도시 전체가 대학이라 그런가 봐.”
소렐은 회색빛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렇게 날이 좋지 않은데도 글래스턴 대학 교정에 가득한 꽃들은 활짝 피었고, 안간힘을 다해 열매를 맺었다.
“이러다 진짜 학기 시작하면 큰일 나는 거 아냐? 강의 시간에 늦으면 어떡해?”
“사비나, 근데 여기 아까 왔던 곳 아니야?”
사비나는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로같이 얽힌 정원은 전부 비슷한 꽃들이 심어져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어, 아까 분명히 이쪽이 벨파이어 칼리지로 가는 길이라고 표지판이…….”
“맞아, 이쪽이라고 쓰여 있었어.”
소렐도 분명히 보았다.
‘라이킨 말로는 그냥 쭉 걸어가면 바로 나온다고 했는데. 아니, 근데 우리가 쭉 걸어온 건 아니지 않나?’
아무래도 오른쪽에 보이는 저 높은 건물이 벨파이어 칼리지 같은데 말이다.
“사비나.”
소렐은 사비나의 손을 저도 모르게 잡아챘다. 두 학생은 걸음을 멈췄다.
“이상해.”
그녀는 무작정 친구를 끌어당겼다. 사비나는 놀라서 소렐을 감싸 안듯 바짝 붙어 섰다.
“왜 그래, 소렐……? 아무것도 없잖아.”
아무것도 없기는! 소렐은 대답도 하지 않고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소렐은 볼 수 있었다. 뭔가가, 절대로 걸려들면 안 될 것 같은 그물이 그녀를 향해 저 멀리서부터 슬금슬금 기어 오고 있었다. 사비나는 보지는 못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사비나.”
“으, 응?”
“뭐가 보이는 게 있어?”
소렐은 속이 바짝바짝 탔다. 이드리스의 딸을 노리고 접근하는 나쁜 인간들이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릴 때 한 번 잡혀가 보기도 했고, 가끔 이런 기분 나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그런 때마다 아빠가 불쑥 나타나서 뭘 하고 있었냐며 웃었다. 아빠와 한참 놀다 보면 기분 나쁜 느낌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근데 기분이 이상해…….”
“응. 아마 그럴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빠가 없다. 믿을 거라고는 위협을 받을 때마다 튀어나오던 마법과, 빠른 두 다리밖에 없었다. 소렐은 아마도, 뱀파이어 혼혈인 사비나도 이 느낌이 기분 나쁠 거라고 추측했다. 소렐을 위협하던 이들은 신성기사단 엘펜하임 소속이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친 그물이 점점 죄어들고 있었다.
“소렐?”
사비나가 약간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렐을 불렀지만, 소렐은 대답하지 못했다.
“물러나, 엎드려!”
대신 날카로운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내리쳐졌다. 소렐보다 조금 큰 사비나는 소렐을 안은 그대로 허리를 푹 숙였다. 쐐액, 하고 그들 위로 뭔가가 지나갔다. 언제나 어둡고 좁은 곳에 숨어 고개를 숙이고 바들바들 떨기만 했던 토끼는, 무슨 배짱인지 슬며시 고개를 들어보았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조금 용감해진 기분이었다.
‘빨간 머리, 아.’
폴리아나 그린이구나. 그, 라이킨을 좋아하는 예쁜 언니. 챙! 갑자기 들리는 뭔가 부딪치는 소리에 사비나가 기겁을 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저거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닌가. 저런 무서운 소리는 교정에서 나지 말아야 할 소리였다. 그러나 그 소름 끼치는 소리는 계속해서 연달아 났다. 검들이 빠르게 부딪치고 있었다. 소렐은 어떻게 해서든 도망치려고 하는 사비나를 꽉 붙잡았다.
“왜, 도망쳐야지……!”
“아니야. 뒤에도 있어.”
뒤에도 있다고? 사비나는 하얗게 질려서 소렐을 부둥켜안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이런 일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로체 집안의 아가씨는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소렐은 제발, 제발 마법이 다시 한번 나타나길 바랐다. 챙! 이번에 부딪치는 소리는 좀 더 컸다. 예쁜 꽃들이 사정없이 잘려서 바닥에 떨어졌다. 소렐은 다시 이쪽으로 휙 날아오는 붉은 머리카락을 보았다. 폴리아나 그린은 두 학생을 막고 섰다. 그녀의 손에는 긴 검이 들려 있었다. 폴리아나 그린은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토끼 하나,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다 아는 로체 집안의 딸내미 하나, 그리고 저 뒤에서 슬슬 그물을 조이기 시작하는 엘펜하임 놈들.
‘작정했네.’
폴리아나는 일단은 이 두 사람, 특히 토끼를 지켜야 하는 게 그녀의 의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엘펜하임 기사단의 글래스턴 책임자 카메론 셀레스트 교수는 어렵지 않게 소렐 이드리스의 예비과정 시간표를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거다. 물론 그는 이 일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은 척하기 위해 지금 이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있겠지. 나중에 만난다 해도, 폴리아나도 카메론도 이 일은 모른 척할 거다. 뱀파이어들과 엘펜하임은 늘 그래왔다.
“토끼 너, 아직도 마법 못 써?”
공격적인 어투에 소렐이 움찔 놀랐다. 폴리아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토끼의 눈빛에 미간을 좁혔다. 대답도 못 하고 쳐다만 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도움이 되지 않겠다. 폴리아나 그린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무력한 두 사람을 데리고 혼자 버텨야 했다.
“망할.”
언제나 자제력이 강한 폴리아나였지만, 그녀는 이 상황에서, 그것도 소렐 이드리스 앞에서 자제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사정없이 욕을 하며 슬금슬금 다가오는 엘펜하임 기사단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자 얼굴을 가리고,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에 들린 흉흉한 검이며 단도는 그들이 결코 평범한 이들이 아니라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어, 어어…….”
사비나는 놀라서 소렐을 더 단단히 껴안았다. 소렐은 눈물이 터지려는 걸 꾹꾹 참고 있었다.
‘토끼 너.’
방금 폴리아나 그린이 던진 말은 너무 노골적이고, 또 날카로웠다.
‘아직도.’
그래, 아직도. 소렐은 그 말에 하나도 반박할 수가 없어서 화가 나고 또 속상했다.
‘마법 못 써?’
한심했다. 너무 한심했다. 어떻게든 로렌스 오블리앙을 밀어냈던 것과 같은 감각을 찾아보려고 애쓰고 있는데 안 된다. 왜 그녀는 ‘아직도’ 고작 무력한 ‘토끼’에 불과할까.
“악!”
사비나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앞뒤, 양쪽에서 사람들이 결국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주 빠르고 능숙한 솜씨다. 그리고 폴리아나 역시 똑같이 빠르고 능숙하게 그들을 막아냈다. 인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속도마저 빠른 뱀파이어는 ‘일단’은 막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폴리아나 혼자서 힘들다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소렐과 사비나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사비나!”
자신보다 더 작은 친구를 어떻게든 보호하려던 사비나는 날아드는 검을 보고 하얗게 굳었다. 전문 암살자가 분명한 이들은 그녀는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왜? 도대체 왜? 머릿속에서 모든 사고가 멈췄다. 챙! 폴리아나가 검을 간신히 걷어내고, 소렐은 굳어버린 친구의 품에서 간신히 얼굴을 빼고 오히려 친구를 껴안았다. 누가 봐도 습격자들의 목표는 소렐 이드리스였다. 그녀를 데리고 가기 위해서라면 사비나쯤이야 그냥 죽여버려도 그만이다. 마법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못난 토끼인 거 맞다. 한심한 것도 맞다. 하지만 친구는 죽이고 그녀는 죽이지 않는다면, 친구를 위해 검 앞에서 조금이라도 버틸 수는 있었다.
“칫.”
소렐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녀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는 걸 알았다. 습격한 이들은 이제 폴리아나를 떼어내는 데 집중했다. 그렇다고 해서 소렐을 포기한 건 아니다. 어차피 그들은 훨씬 숫자가 많았다. 소렐에겐 검 대신 손이 날아들었다.
“소렐! 아아아악!”
소렐의 팔이 붙잡히기 무섭게 사비나는 소렐을 껴안고 되는대로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든 누가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겨우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혀가 굳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악을 쓰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소리가 나고, 시선을 끄는 건 습격자들이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이었기에 당연히 사비나에게 곧추세운 검이 날아들었다.
‘아.’
다행이다. 황금색 실이 다시 생겨났다. 검이 다시 밀려나자 소렐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붙잡고 끌고 가려는 억센 손도 미끄러졌다. 미끄러져서, 대신 걸치고 있던 목걸이를 세게 잡아당겼다. 소렐이 끌려가고 있었지만 그 정도야 괜찮았다. 사비나가 저 검에 찔리지만 않으면 된다. 소렐은 겨우 돌아온 익숙한 힘, 마법으로 검을 밀어냈다.
“……흐억!”
소리도 잘 내지 않게 훈련받은 습격자의 입에서 숨을 급히 들이마시는 소리가 나자 폴리아나 그린은 옆을 간신히 돌아보았다. 갑자기 공격을 막는 게 수월해졌다. 아, 저 토끼가 겨우 마법을 쓰기 시작했나 보다.
‘좀 더 일찍 썼으면 좀 좋…….’
손발이 안 맞는 동료를 위급한 상황에서 만나면 짜증이 치밀기 마련이다. 그것도 목숨이 오고 가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폴리아나 그린은, 목이 졸리고 있는 소렐을 보자마자 생각이 멈춰버렸다.
“끄윽…….”
목걸이가 잡아당겨져서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고 있는 소렐은 안간힘을 쓰며 버텼다. 폴리아나의 녹색 눈은 목걸이 끝에 매달린 커다란 사파이어에 고정되어 떠날 줄 몰랐다. 사파이어가 흔들흔들, 소렐 이드리스의 목 끝에 매달려 우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건 안 돼!’
소중한 거랬다. 가격을 매길 수도 없을 만큼 소중한 거니까 빼앗기면 안 된다. 소렐은 간신히 사파이어를 잡아채고 버텼지만, 곧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애초에 그 힘을 체구가 작은 소렐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하지? 밀어내나? 소렐은 공포로 딱 굳어버린 뇌를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애썼다. 그때 폴리나아 그린의 시퍼런 칼날이 그녀의 코앞에서 내리쳐졌다. 진주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와르르 쏟아졌고, 소렐을 끌고 가려던 습격자는 마법에 밀려 내동댕이쳐졌다. 이글대는 녹색 눈동자가 소렐 이드리스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