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공주님의 남편 (1)2020.10.03.
글래스턴은 언뜻 보기엔 음울한 회색으로 뒤덮인, 고루하고 재미없는 도시였지만 의외로 하루하루가 색달랐다.
“아는 친구가 많아진 모양이군요.”
라이킨은 집에 와서 방싯방싯 웃는 소렐의 말을 들어주었다.
“네, 제가 괜히 겁을 먹었던 것 같아요. 사비나는 남쪽에서 왔대요. 하긴 이름도 남부식이잖아요. 머리카락이 이렇게 몽실몽실하고 곱슬곱슬한데 빨간 리본이 좋대요. 저는 머리 리본을 그렇게 많이 가져본 적이 없어서 빨간 게 왜 중요한지는 모르겠어요.”
오늘 종일 우중충하더니, 결국 밤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벽난로에 불을 지폈고, 라이킨은 안락의자에 앉아 소렐이 하는 이야기를 잠자코 듣기만 했다. 갑자기 아버지가 들이닥쳐 다소 정신이 없는 하루이긴 했지만, 지금 그는 가장 편안하고 괜찮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많이 가져보면 알겠군요.”
그는 소렐에게 머리 리본을 상자 하나가 가득 차고도 남을 만큼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쯤은 되어야 사비나 로체의 말을 이해하지 않을까. 아직 소렐이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이 무척 많았다.
“그런가? 잘 모르겠어요. 아참, 오늘 수업 무척 재미있었어요.”
“누구 수업 말입니까?”
“라이킨 말하는 거잖아요……!”
모르는 척 놀리긴. 소렐은 고개를 팩 돌리고 투덜거렸다. 토끼는 언제나 그에게서 세 걸음 떨어져서 안전거리를 유지했지만, 그래도 제법 감정표현이 풍부해졌다.
“애들이 엄청 좋아하던데요. 재미있대요.”
“나는 공주님만 재미있었으면 됐습니다. 너무 어렵지는 않았습니까?”
“아주 알아듣기 쉬웠어요! 옛날이야기 듣는 것 같아요.”
소렐은 들썩거리면서 환하게 웃었다. 저도 모르게 몸을 라이킨 쪽으로 기울이고, 조잘거렸다. 이것 봐라. 라이킨은 굳이 그녀가 지금 안전거리를 좁히고 있다는 걸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저 즐겁게 토끼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볼 뿐이다. 완전히 가까이 오는 순간, 바로 채어다가 한입에 털어먹어야지. 뱀파이어는 여유롭게 입맛을 다셨다. 소렐 이드리스의 체취, 그리고 저 반짝이는 웃음은 오랫동안 묻혀서 있는지도 몰랐던 욕구를 자극했다.
“내가 직접 보았던 일들이니까요.”
아, 이 말은 하지 말걸 그랬나. 소렐이 시대를 가늠하고, 나이를 가늠하다가 히익, 하고 놀라는 걸 본 그는 조용히 후회했다.
“……몇 살이세요?”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다음부터는 곧 죽어도 나이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야겠다. 안 그래도 스무 살이 한참 연상과 결혼하는 것도 서러울 텐데, 굳이 나이를 더 선명하게 부각시킬 필요가 뭐가 있나. 라이킨은 반성하고 다짐하다 말고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쿵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밤중에 누구람?”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현관을 바라보았다.
“공주님, 이리 와요.”
라이킨은 소렐에게 손을 뻗었다. 에벌린이 막 현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고, 소렐은 조금 더 벽난로에 가까이 갔다.
“누구세요?”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문을 열었고, 동시에 바깥에 고여 있던 축축한 습기와 한기가 집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오블리앙 공께서 보내셨습니다.”
낮게 깔린 목소리를 듣는 순간, 소렐은 움찔거렸다. 현관에는 까맣고 키가 큰 존재가 서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벽난로에 가까이 다가가 붙었다. 라이킨은 그녀의 반응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하고 있었다.
“이것을 칼리에르 공께…….”
많이 겁에 질렸나,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니다. 소렐은 조금 놀랐다가, 이젠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현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끼는 점점 뱀파이어의 집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오밤중에 잠깐 방문했던 이는 두툼한 꾸러미만 전달한 채, 다시 빗속으로 사라졌다.
“제임스 교수님.”
“고마워요, 에벌린.”
에벌린은 별말은 하지 않고 꾸러미를 라이킨 곁에 둔 채 떠났다. 저게 뭘까? 소렐은 아주 두툼한 꾸러미와, 그 위에 놓인 흰 봉투를 바라보았다. 밀랍으로 인을 찍어 봉한 봉투였는데, 찍힌 문장이 호기심을 끌었다.
“공주님이 뜯어보겠어요?”
“라이킨한테 온 거잖아요.”
소렐은 두 손을 들고 흔들었지만, 라이킨은 그녀의 손에 봉투를 내려놓았다.
“내 생각엔 공주님에게 온 것이기도 한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말이야? 소렐은 조심스럽게 붉은 밀랍을 뜯어냈다. 똑 떨어지는 봉투 안에는 초대장이 있었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공 귀하. 결혼을 축하하며, 부부가 함께 본가에도 한번 들르지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네 집 아니냐. 아버지가. 로렌스 오블리앙.”
“읽어줘서 고마워요.”
라이킨은 종이 포장을 북북 찢은 뒤, 안에서 나온 두꺼운 책을 툭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라이킨?”
“예, 공주님.”
“라이킨은 그냥 교수님이 아니에요?”
“그냥 교수 맞습니다. 책이나 파고 연구나 하는 학자 나부랭이지요.”
“그런데 공작이라잖아요. ‘경’을 잘못 쓴 것도 아닌데?”
라이킨은 쓴웃음을 지었다. 본가에 들르라는 말을 굳이 귀족연감과 함께 보내다니. 아버지다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온화한 사람이라 이게 최대한의 권유였지만, 어쨌든 소렐을 보이긴 해야 했다. 공작이라니. 라이킨은 그가 나타나면 질겁할 페르난데스 7세를 떠올렸다.
“그건 뭐예요?”
“해마다 나오는 귀족연감입니다. 귀족들의 명부나 다름없지요. 딱히 재미는 없는 책입니다.”
“엄청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소렐은 무겁고 커다란 책을 양손으로 답삭 가져다가 펼쳤다. 빽빽한 명단과 가족관계, 그리고 작위가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작위가 이렇게 많았나요?”
“딱히 많지는 않습니다. 그냥 아이를 많이 낳은 것뿐이지요. 어느 자작의 몇째 딸, 몇째 아들, 이런 식으로 다 기록하니까요. 사생아는 합법적인 계승자가 아니니 쳐주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지요.”
라이킨이 빈정거리는 표정을 본 소렐은 슬쩍 웃으며 책장을 넘겼다. 그가 빈정대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다.
“공작위는 정말 적네요. 그리고 변화가 거의 없……!”
여기 있었다. 로렌스 오블리앙, 발레시나스 공작의 아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글래스턴 공작. 글래스턴 공작? 소렐은 고개를 들었다. 라이킨은 난처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라이킨.”
“예, 공주님.”
“글래스턴이 라이킨 거예요? 전부 다?”
라이킨은 그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아니요. 공작이라고 해서 이 일대를 다 소유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에 재산이 많은 건 확실합니다.”
“우와…….”
“뭘 그렇게 놀랍니까. 공주님도 여기에 이름이 오를 텐데.”
“내가요?”
“예.”
“어떻게요?”
“나와 결혼했으니까요.”
간단한 대답이었다. 동시에 라이킨은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적어도 소렐이 평범하고 행복한 대학 생활은 해야 할 거 아닌가.
“공작, 공작님이랑 겨, 결혼하면…….”
더듬더듬 중얼거리던 소렐이 세모난 입을 조금 벌린 채 라이킨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결국 또 소리 내어 웃었다.
“공작의 부인?”
“공비입니다. 글래스턴 공작위는 다른 공작위보다 조금 대우가 달라서.”
“왜요?”
“이제 겨우 2대째거든요.”
라이킨은 우울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1대째인 오블리앙 공께서 초대를 하셨군요. 공주님은 어떻습니까, 가보고 싶습니까?”
소렐은 문득, 그 질문이 ‘함께 가자’라는 권유가 아니라 정말로 가고 싶은지, 가기 싫은지 묻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일 그녀가 가기 싫다고 한다면 그는 안 갈 거다. 소렐은 라이킨을 잘 몰랐지만, 그건 알 수 있었다.
* 공작. 작위를 가진 이라면 누구나 덮어놓고 특권을 누리는 이 시대에, 고작 2대째 공작이란 건 어찌 보면 조금 격이 떨어지는 위치였다. 귀족들이 흔히 자랑하는 ‘전통 있고 유서 깊은 가문’과는 거리가 멀다는 증거니까. 그러나 그 작위를 뱀파이어가 가지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다른 가문이 17대, 18대까지 내려가는 동안 뱀파이어는 죽지 않고 1대를 유지할 뿐이니까.
“명함을 새로 파는 게 좋겠어요.”
라이킨은 새초롬하게 말하는 소렐을 재미있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귀족연감을 보며 정말 공작인 게 맞냐고 연신 확인했던 그녀의 동그란 머리통이 예뻤다.
“어째서요?”
“내가 명함만 믿었다가 당황했잖아요. 뱀파이어도 좀 그런데……, 공작이라니!”
그는 습관처럼 씩 웃었다. 그래. 습관이 되었다. 소렐 곁에 있다 보니 이젠 그녀가 종알거리는 말에 웃는 게 일상이었다.
“공주님은 공주님이면서 공작이 뭐 어때서요. 귀족이 아무리 애써봤자 어떻게 왕족을 따라갑니까?”
“공작은 공작, 음, 각하?”
“오블리앙 공의 경우는 ‘합하’입니다.”
“그래요. 그런 호칭도 붙고, 나라가 망한 것도 아니고……. 망한 왕가의 이름 없는 공주랑 비교할 바가 못 되죠.”
소렐은 흔들리는 마차 바깥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헬레인 왕가의 위세가 아무리 대단했다기로서니, 결국 사라진 왕가다. 그녀는 공주로 자란 것도 아니다.
“아니, 그래도 공주님은 공주님입니다.”
라이킨은 엄숙하게 말했다.
“법적으로 공주님이 그런 말을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 걸 배우고 살지도 않았는걸요.”
그저 피부에 느껴지는 신분의 차이만 알았을 뿐이다. 귀족연감을 뒤져보니, 예비과정에서 만나게 된 아이들의 성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서 당황했던 소렐은 시선을 돌렸다. 하긴 글래스턴 대학에 다닐 아가씨들이 보통 집안 아가씨들이겠는가. 전부 다 귀족, 아니면 귀족보다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집안 딸들이었다.
“제가 뭐……, 해야 하는 일이 있어요?”
“지금 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더 이상 이런 일도 없을 거고요.”
라이킨은 아주 단호하게 잘랐다. 마차는 우아하게 열리는 문을 통과해 또 한참을 달렸다.
“언제쯤 도착해요?”
“이미 도착했습니다. 여기가 글래스턴 공작이 대대로 사는 본가입니다. 아까 그 문이 정문이었습니다.”
어쩐지 라이킨의 말에 한숨이 섞인 것 같았다. 소렐은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고, 마차는 끝도 없이 달렸다. 거대하고 몸통도 두꺼운 나무들이 곳곳에 심어졌고, 잘 조성된 작은 호수도 있었다. 또 그만큼 드넓은 정원과 분수를 끼고 돌아 마침내 저택 앞에 마차가 섰다.
“나는 이 집이 많이 멀어서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공주님도 그럴 필요 없으니 그냥……, 그냥 구경하는 셈 쳐요.”
소렐은 고목들이 거인처럼 늘어진 땅 위에 당당하지만, 어쩐지 무섭게 선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저택은 아주 오래되었고, 관리가 잘되었지만 글래스턴의 모든 건물들이 그렇듯이 빛바랜 회색이었다.
“아름다운 곳이네요. 많이 오래됐고요.”
예의 바르게 말하는 소렐을 본 라이킨이 잠시 굳었던 얼굴을 풀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아무래도 이곳이 싫은 모양이다. 글래스턴 공작의 저택을 글래스턴 공작이 싫어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혹은, 그가 뭔가를 싫어한다는 걸 소렐이 알아차리다니, 이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언뜻 보면 항상 다정하게 웃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표정 변화가 그리 많지 않은 뱀파이어를 토끼가 어떻게 꿰뚫어 보게 된 걸까?
“우울하지요.”
라이킨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중얼거렸다.
“사람이 살 것 같지도 않고요.”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그녀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라이킨이 이곳을 싫어한다는 건 다 알겠다.
“아무튼, 나와 함께 오겠다고 해줘서 고맙습니다, 공주님.”
“아버지가 부르시는 거라면서요.”
라이킨은 쓴웃음을 지었다. 소렐 이드리스에게 ‘아빠’란 무척 특별했겠지. 물론 그에게도 그랬다. 소렐은 오래된 돌계단을 밟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온통 투박한 돌이라니, 뱀파이어의 저택다웠다.
“귀족연감에서 봐서 알겠지만, 칼리에르 공작위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겁니다. 내가 첫째였으니까요.”
그렇구나. 소렐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뱀파이어의 저택이라길래 예상은 했지만, 싸늘한 한기가 저택 안에서부터 점점 밀려오고 있었다. 뿌연 안개와 시커먼 어둠을 뚫고, 저택의 두꺼운 문이 천천히 열렸다.
“괜찮습니다.”
라이킨은 다정하게 말했지만, 소렐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힘이 그녀에게 엄습했다. 펜싱 하우스에서 그녀를 향해 날아들던 검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예리하고 묵직한 힘이었다. 저 멀리 차분히 선 뱀파이어는 아마 아주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졌을 것이다. 냉기가 그녀의 목을 휘감았다. 소렐은 질겁했다.
‘저리 가!’
소스라치게 놀라, 냉기를 떨쳐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토끼의 두 눈이 울상이 되어 일그러졌다.
‘나한테 손대지 마!’
토끼 귀가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또다시 펑 하고 솟아올랐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도망갈 수도 없었다. 소렐은 목에 감긴 차가운 뱀파이어의 손길을 사력을 다해 떼어냈다. 시간이 또다시 느리게 흘러갔다. 그녀가 의외로 쉽게 냉기를 떨쳐내는 순간, 놀란 라이킨의 푸른 눈이 보였다.
“공주님!”
딱히 존경까지는 담겨 있지 않은 그 호칭과 함께, 썩 어울리지 않는 부부 사이에 다시 한번 황금색 선이 이어졌다.
“이런.”
로렌스가 난감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안경을 벗었다. 그는 강력한 바람과도 같은 힘에 의해 뒤로 조금 밀려나 있었다.
“마법을 이런 식으로 다시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냉기가 싹 사라졌고, 소렐은 비틀거리면서 주저앉았다. 아니, 주저앉기 전에 라이킨의 팔이 그녀를 받쳤다. 희고 길쭉한 귀를 눌러 가릴 새도 없이 그녀는 뱀파이어의 품 안에 잠겼다. 소렐은 작은 손으로 라이킨의 강하고 단단한 팔뚝을 움켜쥐었다. 어딜 가나 차가운 뱀파이어뿐이다. 그녀는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면서도 선명하게 이어진 황금색 실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습니다. 해를 끼치려던 게 아닙니다.”
그냥 로렌스가 워낙 오래되고 강한 뱀파이어인지라, 평소에 훨씬 더 예민했던 소렐이 그의 존재 자체를 굉장한 위협으로 느껴버린 것뿐이다. 라이킨은 서늘한 손으로 헐떡거리는 소렐의 등을 쓸어주었다.
“……더 많아졌어요.”
분명히 펜싱 하우스에서는 단 한 올이었는데, 지금 그녀와 라이킨 사이에는 황금실이 다섯 올로 늘어나 있었다.
“예. 방금 사용한 마법은 아주 강력했습니다.”
거대한 뱀파이어를 물리적으로 밀어낼 수 있는 힘이라니. 라이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균형을 잃지 않고 기운을 갈무리해 다가오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소렐은 전혀 라이킨과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으면서도 닮은 구석이 많은 노신사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느껴졌던 냉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늙은이가 생각 없이 다니다 귀한 분을 놀라게 해드렸습니다. 송구합니다, 공주님.”
하얀 귀가 쫑긋 세워졌다. 소렐은 제 귀를 무의식중에 눌러 가리려다가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작게 속삭이는 라이킨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를 안정시켰다. 귀가 나와도 괜찮고, 다 괜찮았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어쩌면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을까. 소렐은 부드럽게 웃는 오블리앙 공을 보며 생각했다. 여전히 황금색 실은 그녀와 라이킨 사이에서 반짝거린 채 늘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