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Call my name (13)2020.09.30.
매그놀리아 칼리지에 입학 예정인 여학생들을 위해 오늘 열린 강의만 열 개였지만, 그중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모두가 수강한 제임스 칼리에르 교수의 강의였다.
“교수님 너무 잘생겼어…….”
“그런데 말도 잘해…….”
“그리고 똑똑해…….”
쟤네 미친 거 아닌가? 소렐은 역사 공부를 하겠다고 눈에 불을 켜는 학생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래?”
눈이 마주친 사비나 로체가 웃었다.
“소렐은 칼리에르 교수님이 별로야?”
“그……, 넌 안 무서워?”
“교수님이 왜?”
“……그런가.”
무섭고, 엄청나게 강력한 뱀파이어라는 건 기척만 느껴도 알 수 있는데 아무도 무섭지 않나 보다.
“근데 왜 다들 좋아하지?”
“잘생기셨잖아. 그리고 강의도 엄청 잘하시고. 벨파이어 칼리지에만 있기는 좀 아깝다. 거긴 연구만 하는 곳인데.”
그런가. 그러고 보니 저번에 갑자기 집에 찾아왔던 그 언니도 교수라고 했는데. 소렐은 그녀의 아주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렸다. 그 후 펜싱하우스에서 잠깐 마주친 것뿐이지만, 그런 미인은 쉽게 잊어버리기가 힘들었다. 그럼 그 언니도 벨파이어 칼리지 소속이려나? 그래서 같이 일하는 건가?
“진짜 잘생기셨어…….”
하긴 모두가 다 미인을 좋아한다. 그럼 그런 예쁜 언니와 함께 일하는 라이킨은?
“뭐, 하긴 잘생겼지.”
“그렇지?”
“응. 잘생겼어.”
그건 틀림없는 진실이지만, 잘생긴 사람은 예쁜 사람 만나겠지, 뭐. 소렐은 괜히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뒤 걸어갔다. 왜 다들 잘생겼다고 난리람. 토끼는 발을 콩콩 굴러댔다. 어쩐지 짜증이 났다.
* 라이킨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음 수업을 들으러 간 소렐의 뒷모습을 떠올리다 픽 웃었다. 학생과 교수 사이에 충실해야 한다는 건가. 아니면 남편보다 수업이 더 중요하다는 건가. 어느 쪽이든 학교가 소렐의 마음을 단단히 빼앗아간 건 분명해 보였다.
‘아, 그건 좀 서운한데.’
게다가 그는 아직도 소렐이 어떻게 마법에 관심을 가질지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제 겨우 드러난 실은 단 한 가닥. 그걸 여러 가닥으로 늘려서 그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뱀파이어들에겐 이득이다. 그러니까, 이론상 말이다.
‘펠릭스 이드리스가 날 그렇게 잘 믿고 떠났을 리가 없는데…….’
걸리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국 그 역시 소렐을 이용하려고 하는 건데, 다른 이들은 다 되어도 그는 안 되는 제약이 분명히 걸렸을 거란 말이다. 라이킨은 생각에 잠긴 채 걸어 들어왔다가 멈칫거렸다.
“……아버지?”
그의 표정이 아주 환해졌다.
“아버지!”
벨파이어 칼리지,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교수의 방에 손님이 찾아왔다. 지팡이를 짚고, 코트를 걸친 전형적인 신사는 품위 있게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얼마 만입니까, 언제 나오셨어요?”
라이킨은 반갑게 달려가서 아버지와 포옹했다. 아주 키가 큰 두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넓은 연구실이 꽉 차는 느낌이다.
“얼마 안 됐다. 바로 오는 길이다.”
“어서 오세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넌 벌써부터 날 노인네 취급하는구나. 내가 너보다 다섯 배는 더 살았지만, 아직까지 멀쩡하다.”
로렌스 오블리앙 공은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가진, 정석대로 나이가 든 미남이었다. 그는 웃으면서 자신보다 조금 더 키가 큰 아들을 바라보았다.
“앉으세요, 어서. 샤를렌은 보셨습니까?”
“그 애야 항상 정해진 시간에 퇴근을 하니, 네가 좀 더 여유가 있을 것 같아 보러 왔다.”
“잘하셨어요. 오시는 길이 불편하진 않으셨습니까?”
로렌스는 자신에게는 이리 살가우면서, 남들에겐 가차 없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전혀. 너는 어떠니?”
“제가 문제가 있을 게 뭐가 있습니까? 커피 드시겠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문제는 없는 것 같다만,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일이 많이 생겼더구나.”
커피잔을 집어 들던 라이킨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 나 모르게 결혼을 했니?”
로렌스는 아주 점잖게 말했다.
“내가 좀 많이 섭섭하구나.”
“……언제 나오실지 몰라서…….”
“약혼은 제대로 하고 한 거냐?”
“그건 했습니다. ……신부 측 부모와…….”
오. 오블리앙 공은 숱이 많은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래서 몇 살이라고?”
“……스물입니다.”
“기분이 어떠니?”
라이킨은 마른세수를 했다.
“아주 쓰레기 같군요.”
“내가 아들을 제대로 키우긴 했군.”
그는 아들이 건네는 따뜻한 커피를 우아하게 받았다.
“그래서, 칼리에르 공비는 스무 살짜리가 될 예정인 거냐?”
“될 예정인 게 아니라 이미 됐습니다……만.”
“다만?”
라이킨은 입술을 말았다. 아버지가 직구를 던지면 그는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제게 작위가 있다는 걸 공주님이 모릅니다.”
“공주와 결혼했어?”
로렌스는 생전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되물었다. 그랬다. 라이킨의 아버지는 저렇게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이미 다 아시고 오신 거 아닙니까.”
젊은 칼리에르의 수장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블리앙 공은 다시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헬레인 공주라면 공비에 모자라지 않지. 곧 오블리앙 공작부인도 겸해야 하지 않겠어?”
라이킨은 순식간에 정색했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아버지. 앞으로도 살날이 한참 남으셨는데 왜 벌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언젠가는 올 일이니까.”
“그 ‘언젠가’는 최소 삼천 년 이후 아닙니까.”
로렌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가는 데는 순서가 없는 거야. 왕은 알고 있니?”
“아버지께 알려드리기 전에 왕에게 말을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또 뱀파이어들이 제멋대로 군다고 짜증을 내겠군.”
“아, 그 왕은 죽었습니다.”
로렌스가 고개를 들었다.
“죽었어?”
“예. 지금은 페르난데스 7세가 다스리고 있습니다.”
“언제 7세까지 갔어?”
라이킨은 그냥 웃었다. 뱀파이어들의 시간은 인간과는 전혀 다르다.
“펠릭스 이드리스가 죽었습니다, 아버지. 그러니 7세까지 가지요.”
“……그 강력한 마법사가 죽었다고.”
“예, 아버지.”
로렌스는 뒤늦게 애도했다.
“아주 거대한 인물이 갔군.”
뱀파이어들마저 두려워했던 대단한 마법사였다.
“……그런데 스물에, 헬레인 공주라면……. 이드리스의 딸이냐?”
“예, 아버지.”
“고대 마법을 계승했겠구나.”
“예.”
로렌스는 갈색 눈으로 아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라이킨은 무슨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황급히 말했다.
“이드리스가 먼저 부탁한 겁니다. 선택은 메리 공주가 했고요. 제가 하겠다고 먼저 나선 건 아닙니다.”
“아. 그러니까 스무 살짜리와 결혼해도 괜찮다? 나는 네가 폴리아나 그린과 결혼할 줄 알았다만.”
모두가 쉬쉬하는 일이지만, 로렌스는 이리저리 돌리지 않고 곧장 질러 말했다.
“적어도 나이는 맞지 않니. 그리고 그 애와 결혼했다면 이런 식으로 도둑결혼도 하지 않았을 것 같구나. 언제부터 칼리에르 공이 제대로 된 결혼식도 없이 아내를 맞았지?”
“아직 스무 살이고, 결혼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는 나이입니다. 공부밖에 관심이 없어서, 최대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너는 강의는 쳐다보지도 않더니 이젠 예비과정에까지 나서서 강의를 하는 중이고?”
로렌스는 픽 웃었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아들과 똑같았다. 마른 뺨과 강인한 턱, 그리고 분명하게 도드라진 눈썹뼈, 커다란 키와 너른 어깨가 그러했다.
“엘펜하임이 이미 냄새를 맡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밀착 경호를 하지 않으면…….”
“칼리에르 공이 직접 나서서 밀착 경호라고?”
“예, 뭐……. 헬레인 공주 아닙니까.”
“얘야, 너는 나이를 충분히 먹었는데도 애처럼 행동하는구나. 나한테 얼굴은 보여줄 거니?”
라이킨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소렐은 뱀파이어라고 하면 일단 겁부터 먹고 보는데, 오블리앙 공이라면 사시나무 떨듯이 떨 것이다.
“……뱀파이어를 무척 무서워합니다만.”
로렌스는 안경 너머로 아들을 기가 막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걱정 마라. 네가 지금 말과 행동이 따로 논다는 건 알겠으니까.”
“아버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또 그 타운하우스에 처박혀 있겠지? 내가 도시 밖으로 나가마. 집도 좀 손봐야겠다.”
“아버지.”
“데리고 와라.”
소렐을 뜻하는 말에 라이킨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로렌스는 분명하게 아들을 본 뒤 연구실을 나갔다. * 키가 아주 큰 신사가 벨파이어 칼리지에 들렀다면, 그건 십중팔구 라이킨이었다.
“……오블리앙 공작 합하?”
회색을 넘어 백발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넘긴 채 조용히 걸어가던 로렌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 그래. 너로구나.”
폴리아나 그린이 서둘러 걸어왔다.
“합하, 언제 오셨습니까? 건강하세요?”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로렌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웬만큼 오래 산 뱀파이어들은 서로 알음알음 알고 있기 마련이다. 항상 라이킨을 지근 거리에서 보좌했던 폴리아나도 당연히 라이킨의 가족을 알았다.
“오랜만이구나. 너는 어떠니?”
“저야 뭐…… 괜찮습니다.”
로렌스는 찬찬히 살피는 눈으로 붉은 머리카락을 아름답게 틀어 올린 폴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교수가 들고 있기엔 많이 위험한 내용을 담은 서류를 안고 있었다.
“늘 똑같지요.”
“……보안을 늘리나 보구나.”
로렌스는 그녀가 안은 서류를 가리켰다.
“네. 칼리에르 교수님이 지시해서…….”
“학교를?”
“아뇨, 이드리스의 딸이요.”
그 말을 할 때 폴리아나 그린의 표정에는 한 점의 그늘도 없었다. 그녀는 늘 그랬듯이 당당하고, 또 유능했다.
“그렇구나. 나도 갑자기 결혼했다길래 황당했는데, 이곳에 있는 모두가 다 황당했겠다.”
부드러운 신사의 말에 폴리아나는 똑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럴 수도 있지요.”
마치 자신은 당황하지 않았다는 말 같았다.
“하지만 고대 마법은 아주 중요한 힘이 아닙니까. 손에 넣었다면 지키려고 최선을 다해야지요.”
소렐 이드리스가 아니라 그저 고대 마법이라. 로렌스는 폴리아나의 당당한 얼굴에서 위화감을 읽었다.
“그래야지. 그래서 얼마나 보안이 강한가?”
“최고 보안단계를 실행 중입니다.”
“저런, 나도 조심해야겠군.”
“합하께서 조심하셔야 할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폴리아나는 재미있는 농담이라는 듯 웃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어디 하나 빠질 곳이 없는 매력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로렌스는 오랜 연륜과 경험을 통해 그녀 안에 제대로 맞물리지 않은 부분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아이가 아직 어리다고 하던데.”
“예, 덕분에 대학 전체를 지켜야 해서 좀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지요.”
“하고 싶어 하는 것도 많겠군.”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자네도 그런 때가 있었을 거 아닌가.”
“저는 그렇게 대책 없지는 않았습니다.”
폴리아나는 빙긋 웃었다. 로렌스는 파이프를 꺼내 물었다.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잠시 노신사는 침묵을 지켰다. 고민스러울 때 담배를 피우는 건 아주 자연스러워 보이는 핑계다.
“……결혼식도 안 할 줄은 몰랐는데.”
“갑작스러운 일인지라.”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래도 해야 하지는 않을까? 내가 옛날 사람이라서.”
“그거야 제가 간섭할 문제도 아니고, 제임스 교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겠지요.”
아주 매끄러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로렌스가 필요했던 건 대답이 아니라 폴리아나의 눈빛과 표정이었다. 마치 그런 게 왜 필요하냐는 그 당당한 표정 말이다.
“그렇지.”
로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뭐라 하지는 마세요. 요즘에는 결혼식이 꼭 필요한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렇게 굳이 만류하는 말까지.
“언제 세상이 그렇게 변했나?”
폴리아나 그린은 위험하다 싶을 때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은 결코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그녀의 의지를 아직까지도 꺾지 않았다. 하긴 아주 길고 진득하니 오래된 목표이긴 했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의 곁이라는 대단한 목표를 잘 알고 있던 로렌스는 담배 연기를 흘리며 돌아섰다.
“다음에 또 보지.”
“살펴 가십시오.”
로렌스는 오래 묵은 야망이자 어떤 질긴 마음 곁을 스쳐지나갔다.
“합하.”
그를 모시는 뱀파이어는 기다리고 있다가 목례를 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집으로.”
“예.”
로렌스는 마차를 타고 글래스턴 대학을 빠져나갔다.
“……어리석은 것들.”
혹은 아직 한참 어린 것들. 쯧, 하고 혀를 찬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