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Call my name (11)2020.09.23.
샤를렌부터 시작해 조슈아까지 모두 라이킨이 미친놈이라 하겠지만, 그의 의도를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이는 소렐은 아니었다. 그리고 라이킨은 소렐이 좋아하고 안심한다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작은 토끼가 학교 적응에 힘들어하는데, 보호자로서 마땅히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진짜네요. 진짜 강의하네요.”
집으로 돌아온 소렐은 강의안내서에서 라이킨의 이름을 찾아냈다.
“나도 교수니까요.”
라이킨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연구만 하는 벨파이어 칼리지 소속이면서 특권을 마구 남용하여 신입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열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물론 그렇다는 건 소렐만 몰랐다. 하긴 신입생이 그런 사정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구나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기뻐서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자, 내 강의계획서를 줄게요. 부디 공주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
라이킨은 특별히 미리 인쇄해놓았던 강의계획서를 소렐에게 주었다. 그걸 받으려던 그녀가 약간 멈칫거렸다.
“……근데 아는 사람이 학생이면, 나중에 성적 주는 거 문제 생기지 않아요?”
올바른 지적에 라이킨은 픽 웃었다.
“어차피 예비과정이라 성적을 매기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내가 공주님이라고 성적을 무조건 잘 줄 것 같습니까?”
“전혀요.”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네! 소렐은 가차 없어 보이는 뱀파이어에게서 시선을 떼고 강의계획서를 열심히 읽었다.
“……공주님.”
“네?”
“공주님이 좋아한다면 상관없지만, 음악이나 미술, 문학 같은 학문은 다른 여학생들이 많이 전공한다는 이유로 전공하려고 하지는 말아요.”
소렐은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치학도 배우고, 수사학도 배워요. 기초과학도 좋습니다.”
“네. 그럴 거예요.”
소렐은 아주 야무지게 대답했고, 라이킨은 만족했다.
“그런데, 라이킨.”
“예.”
“역사학과 교수님이었어요?”
“예, 뭐, 그 비슷한 겁니다. 오래 살았잖습니까.”
그렇구나. 소렐은 그의 강의계획서를 꼼꼼하게 읽어본 뒤, 평가를 내렸다.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전쟁 이야기인데도?”
잠자코 기다리고 있던 라이킨이 되물었다.
“네. 엄마의 나라가 어떻게 망했는지도 가르치시네요.”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소렐에게 강의계획서를 신중하게 읽어보고 결정하라고 한 라이킨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 부분은 집에서 따로 보충수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영원히 비공식으로 남아야 할 부분도 있으니까요.”
특히 헬레인 왕가의 마지막 후손인 소렐에겐 꼭 필요한 보충수업이기도 했다.
“그럼, 좋아요. 들을래요.”
소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공부할게요.”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요. 어차피 예비과정일 뿐이니까. 친구를 사귀고 학교에 적응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법에 조금 더 익숙해지는 것도 무척 중요한데 말이다. 라이킨은 마법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공부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공주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저 토끼 안에 잠들어 있는 고대 마법을, 그 거대하고 엄청난 힘을 일깨울 수 있을까? 적어도 엘펜하임이 손을 뻗어오기 전에 그가 먼저 고대 마법을 온전히 차지해야 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요.”
학교에서 겨우 찾아냈을 때 풀이 팍 죽었던 토끼는 이제야 겨우 웃고 있었다. 라이킨은 그녀를 따라 웃었다. 그래. 아직 어린 공주님은 저렇게 환하게 웃어야 했다. 어차피 고대 마법이야 이미 그의 곁에 있으니, 당분간 하고 싶은 걸 하게 놔두는 게 뭐가 잘못일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공주님은 잘해낼 겁니다. 그리고…….”
라이킨은 등받이에 기대서 소렐을 보며 중얼거렸다.
“딱히 잘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왜요?”
“부담감을 느낄 필요까지는 없다는 겁니다. 잘하면 좋지만, 굳이 못 한다고 해서 속상해하거나 무리하지는 말아요.”
그는 뱀파이어를 무서워하면서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집에 와서 풀썩 주저앉아 있는 토끼에게 말했다.
“공주님은 이미 가진 것도 많고, 아쉬울 게 없는 입장입니다.”
“제가요?”
“예.”
“물론 유산은 많지만……, 그거 말고는 가지고 있는 게 하나도 없는걸요.”
공주라고 하기엔 다소 초라했다. 그러나 라이킨은 웃다 말고 정색했다.
“왜 하나도 없습니까, 내가 있는데.”
그는 손을 뻗어 소렐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뭐든 즐거운 일을 해요. 머리 아프게 혼자서 고민은 하지 말고. 내가 있잖습니까.”
실로 그랬다. 기댈 곳 하나 없는 토끼에겐 이제 못 믿을 뱀파이어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뱀파이어 중에서는 믿을 만한 뱀파이어가 아닌가? 소렐은 눈을 깜빡이면서 수려한 뱀파이어가 그녀의 뺨을 착하다며 어루만지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 마법사들은 마법을 거의 잃었다. 거의 잃었으니 다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녀들 역시 그랬다. 신성한 엘펜하임 기사단이 의지하던 신성력도 어차피 마법과 궤를 함께하고 있었기에 마찬가지였다. 결국 살아남은 건, 피를 갈구한다는 이유로 멸시받던 뱀파이어들과 수인들이었다. 그들에겐 타고난 근력과 굉장한 속도가 있었다. 사라지지 않고 타고나는 힘이다. 그러나 뱀파이어들은 저들끼리 똘똘 뭉쳤으나, 수인들은 헬레인 왕가가 멸망한 이후로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졌다.
“절대로 뱀파이어들이 득세하게 해선 안 됩니다. 절대 안 돼. 안 될 일이지요. 안 되고말고.”
느닷없이 엘펜하임 영사가 방문할 줄은 몰랐던 카메론 셀레스트 교수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이 나라에 있는 엘펜하임 영사관은 당연히 수도에 있다. 그런데 그 영사관을 책임지는 영사가 몰래 글래스턴까지 내려오다니, 엘펜하임 기사단이 카메론 교수의 보고에 완전히 뒤집히긴 한 모양이다.
“안 그래도 이기적이고, 무엇보다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해악이 되는 존재들입니다. 안 그렇게 생각합니까, 셀레스트 교수님?”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뱀파이어들의 흡혈 욕구는 이성으로 제어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위험했다. 피 한 방울 남지 않고 발견된 시체가 얼마더라. 셀레스트 교수는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런데 고대 마법이라니! 그것도 ‘그’ 칼리에르에게!”
“영사님.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누가 듣겠습니다.”
싸늘하게 영사의 입을 잠시나마 다물게 한 카메론은 자리에 앉았다. 영사 역시 어쩔 수 없이 원래 카메론이 내어줬던 자리에 앉았다.
“고대 마법이 확실합니까?”
“일단은 그렇다고 볼 수밖에 없지요. 결국 고대 마법을 가지고 있었던 건 단 한 사람, 대마법사 펠릭스 이드리스뿐 아닙니까.”
모두가 대마법사에게로 손을 뻗었으나, 대마법사는 대마법사답게 결코 잡히지 않았다. 그가 죽었다, 사라졌다, 무수한 소문들이 지난 수십 년간 무성하기만 했다. 엘펜하임은 그 소문들을 쳐내고 대마법사에게 몇 번이나 접근했으나 모든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고대 마법이란 그렇게 강력했다.
“결국엔 그 대마법사가 죽었다는 거지요?”
“그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대마법사는……, 영사님도 아시다시피 손에 잡히지도 않고, 우리조차 파악하지 못한 인물 아닙니까.”
끄응, 영사는 앓는 소리를 내며 두툼하게 나온 배 위에 손을 포갰다.
“……그래도 교수님, 우리가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지요. 대마법사는 뱀파이어와 가까웠습니다.”
영사의 지적은 정확했다.
“예. 사이가 어떻든 간에 가까웠던 건, 그것도 이 글래스턴 대학에서 무척 가까웠던 건 사실입니다.”
“기사단 본부에서는 그 문제의 여자에게 고대 마법이 깃들었는지 확실하게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가능하겠지요?”
카메론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영사님. 목표는 이미 칼리에르의 합법적인 아내입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칼리에르 경의 아내를 엘펜하임에서 어떻게 했다, 라는 기사라도 나면……?”
“그건 안 되지요. 비밀리에 진행해야 합니다.”
영사는 펄쩍 뛰었다.
“셀레스트 교수님, 교수님도 이런 일에 대비해 훈련을 받은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글래스턴 총 책임자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영사보다 카메론이 더 직급이 높았다. 영사는 대외적인 외교업무를 수행하지만, 카메론은 글래스턴에서 뱀파이어들을 직접 상대해야 했다. 카메론 셀레스트는 기사였다. 굳이 저 영사가 카메론의 직급을 들먹이는 이유가 뭐겠는가. 네가 할 일이니 핑계 대지 말고 하라는 이야기지. 남의 일이라 말하긴 참 쉽다. 빌어먹을. 카메론은 빌어먹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은 이 미묘하고 괴상한 긴장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교수님. 우리는 그 고대 마법이 필요합니다. 없으면……!”
“‘없다는 것을 들키면’ 기사단이 사라지지요.”
신성력도 없고, 딱히 신성하지 않은 지도 오래됐다. 엘펜하임은 약탈과 방화로 현재의 부를 쌓아 올리고 권력을 쥐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무서운 소리 하지 마십시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쇼, 영사님. 제가 할 일은 제가 해야지요. 다만…….”
카메론은 칼리에르라는 이름만 들어도 질색하는 영사를 바라보았다.
“저 혼자는 역부족인 일이니,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는 결코 혼자 모든 걸 책임질 생각은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엘펜하임은 딱히 신성하지 않은 신성기사단이었다. * 쯧. 라이킨은 혀를 찼고, 그의 집에 긴급 소집된 뱀파이어들은 몸을 떨었다.
“쥐새끼가 기어들어 왔다는데, 아무도 대책이 없어?”
쥐새끼라고 해봤자 엘펜하임 영사일 뿐인데 무슨 대책을 말하나. 갑자기 소집된 뱀파이어들이야말로 어이가 없었지만 여기에서 입을 함부로 뻥긋했다간 벼락이 떨어질 거다. 다른 건 몰라도, 칼리에르 수장의 더러운 성질머리는 아주 유명했다.
“지금 누굴 노리고 들어왔는지 몰라서 그러나?”
돌겠군. 라이킨은 천장을 보며 눈을 굴렸다. 엘펜하임 영사가 글래스턴에 직접 들어왔다는 건, 엘펜하임 본부에서 지시가 내려졌다는 거다. 그게 도대체 뭐겠는가! 오늘 뱀파이어 냄새가 난다는 말을 들었다며 침울해하고, 또래 사이에서 기가 죽었다가 겨우 달래놓은 자그마한 토끼 때문이지!
“왜 아무 말이 없어? 입들은 어디 팔아먹고 왔나? 평소에 이런 일에 한마디씩들 열심히 보태더니, 잘도 다물고 있군.”
라이킨은 화가 났다. 그 좋아하는 학교에 간다며 폴짝대며 좋아하던 애가 시무룩해져서 온 게 제일 화가 났다. 두 번째로 화가 나는 건 침묵하고 있는 뱀파이어들이다.
“그럼 둘 중 하나라는 거지. 전부 다 생각할 두뇌가 없는 놈들이거나.”
참고로 그는 멍청한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러니 소렐은 무척 예뻤다. 그녀는 그저 겁이 많은 것뿐, 아주 똑똑했으니까.
“아니면 내 아내라는 자리가 우스워서 이 일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거나.”
그리고 라이킨은 후자라고 이미 생각했기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상태였다. 아, 물론 그 결론은 꽤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에 근거해서 내려진 것이었다. 그는 헛다리를 짚는 일이 없었고, 고로 움찔거리는 부하들의 표정에서 그가 짚은 것이 정답이라는, 다소 불필요하고 불쾌하기만 한 확답을 얻었다. 라이킨은 픽 웃었다.
“그럼 나도 우스운 거군.”
“아니, 그건 아닙……!”
화들짝 놀란 변명이 완성되기도 전에 재떨이가 허공을 날아갔다. . . . 들리지 말아야 할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청각이 좋은 소렐은 흠칫 놀랐고, 마찬가지인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천장을 보며 잠시 신을 찾았다.
“저게 무슨 소리예요?”
“뭐, 가끔 나는 소리예요. 괜찮아요. 아무 일 아니야.”
“진짜요?”
“그럼요. 그런데 왜 내려왔어요?”
소렐은 공책을 들고 우물쭈물했다.
“라이킨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소렐을 물끄러미 보았다.
“나도 안 그래도 교수님한테 물어볼 게 있었는데 잘됐네요. 가서 저녁 식사는 공주님이랑 같이하실 거냐고 한번 물어봐요.”
“네? 들어가도 괜찮아요?”
방금 괴상한 소리가 들린 서재에 들어가도 괜찮은 건가? 소렐은 에벌린을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공주님이 이 집에서 들어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나요. 가서 얼른 물어봐줘요. 저녁은 거의 다 되었으니까.”
“아, 네.”
그렇다면 얼른 가야지. 소렐은 타박타박 걸어서 라이킨의 널따란 서재로 향했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문을 두드렸다.
“라이킨, 바빠요?”
걸어오는 발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무슨 일입니까, 공주님?”
다정하게 웃어주는 얼굴 뒤로 희뿌연 담배 연기가 밀려들었다. 그리고 이쪽을 쳐다보는 뱀파이어들의 시선이 보였다. 한둘이 아니었다. 싸늘한 시선 여러 개가 날카롭게 고정되자, 순식간에 소렐의 머리카락 사이로 흰 토끼귀가 펑 튀어나왔다.
“괜찮아요, 괜찮아…….”
라이킨은 그녀를 달래며 바깥으로 나간 뒤 문을 닫아버렸다.
“괜찮습니다. 방해한 거 아니니까 잘못한 거 아닙니다. 공주님은 들어와도 괜찮아요. 놀랐습니까?”
그는 무릎을 굽히고 놀란 토끼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가 죄송하다는 말을 하기 전에 막고 싶었다. 소렐은 잘못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소, 손님이 있을 줄 몰랐어요.”
“기척이 별로 없는 손님들이지요.”
소렐은 열심히 양손으로 귀를 가리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는 필사적으로 귀를 가렸다.
“가리지 말아요. 귀엽고 예쁜데.”
“에, 에벌린이 저녁 식사……, 물어보라고……. 귀만 튀어나온 건 이상해요.”
토끼의 시선이 힘없이 떨어졌다.
“아니, 전혀 이상하지 않고 귀엽기만 합니다. 저녁 식사는 공주님 먼저 해요. 배고플 텐데. 맛있게 먹어요.”
소렐에게 끝까지 웃어 보인 라이킨은 다시 혼자 서재로 들어왔다. 순식간에 돌아선 그의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
“내가 분명히 무섭게 쳐다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뱀파이어들은 억울했다. 절대 그렇게 쳐다본 건 아니었다! 라이킨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문질렀다. 겨우 달래놨는데 이 새끼들 때문에 애가 또 놀랐다. 커다랗고 잘생긴 손 사이로 비치는 안광이 무서울 정도로 흉흉하다. 뱀파이어들은 다시 고개를 처박았다. 제발 온전하게 두 다리로 이 방에서 나갈 수 있길 기원하면서. 사실 소렐 이드리스가 라이킨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들은 모든 게 다 뒤집혔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