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Call my name (9)2020.09.16.
글래스턴 대학에 진학할 학생들을 위한 예비과정이 시작되었다. 신입생이라는 호칭을 다음 정식 입학 때 받을 어린 학생들이 모여서 몇주 간의 교육과정을 거친다. 이미 집안들끼리 친분이 있어서 비슷한 과정을 밟아 여기까지 온 상류층 출신 학생들이 꽤 있었고, 더러는 외국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다. 어쨌든 소렐에겐 이 모든 게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일 것이다.
“축하해요.”
라이킨은 오늘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러 가는 토끼 공주님에게 축하선물을 정중히 내밀었다. 하얀 블라우스와 리본, 그리고 각이 잡힌 치마를 멋스럽게 입은 소렐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 거예요?”
“뜯어봐요.”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호감만 필요하다고 노골적으로 말한 뱀파이어는 선물 공세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나 달고 가면 예쁠 것 같아서.”
리본 아래에 다는 펜던트였다. 분홍색 오팔과 다이아몬드, 그리고 가느다란 금이 섬세하게 엮여서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고 있었다.
“와…….”
“오늘 달고 가요.”
“이거 제가 해도 괜찮아요?”
“공주님 건데 괜찮지 않을 리가 있습니까.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많이 섭섭합니다.”
그래서 그녀가 오늘 맨 가느다랗고 귀여운 리본 아래에 펜던트가 달랑거리면서 달렸다.
“이런 건 처음 해봐요.”
“잘 어울리네요.”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하나 더 있습니다.”
라이킨은 상자를 하나 더 내밀었다.
“선물은 하나 아니에요?”
“그런 건 고정관념입니다, 공주님. 선물이 꼭 하나여야만 합니까?”
“하나라서 더 의미가 큰 거잖아요.”
소렐은 항상 엉뚱하고, 항상 저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물론 그 말에 진지하게 대답해주는 라이킨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의미가 큰 만큼 아주 많이 선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엔 예비과정이라서 조금만 준비한 겁니다만.”
그럼 대학에 정식으로 입학하면, 또 선물이 있다는 이야기인가? 소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가 내민 선물상자를 열었다. 그러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작은 토끼는 잠시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상자에서 풀었던 리본이 그녀의 손에서 흘러내리는데도 전혀 알지 못하고 뚫어져라 상자를 보기만 했다. 빙긋 웃은 라이킨은 근처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한참 걸리겠군.’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있었으니, 공주님이 충분히 감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라이킨은 턱을 괴고 그런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보석은 별로라는 건가?’
그리고 저런 걸 좋아한다는 거지. 알았다. 라이킨은 연한 연두색과 분홍색, 투명한 다이아몬드와 금이 얽힌 펜던트가 딱히 그녀의 마음에 쏙 들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매달려 있는 걸 보고 만족했다.
“……마음에 듭니까?”
화려함으로 따지자면 차라리 펜던트가 훨씬 더 화려할 것이다. 그러나 소렐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런 거 해도 되나요?”
눈이 아주 커져서 기껏 물어본다는 게 그런 질문이다.
“안 될 게 뭐가 있습니까? 숙녀들도 곧잘 애용하는 소지품인데요.”
“이런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중얼거리더니, 또 한참 들여다보다가 보스스 웃는다. 소렐 이드리스는 기쁘면 저렇게 웃는구나, 하고 라이킨은 자세히 기억해뒀다.
“저는 드릴 게 없어서 어쩌지요?”
“뭘 받고자 선물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웃었다.
“마음에 듭니까?”
“네!”
“그럼 그걸로 충분합니다. 아끼지 말고 자주 사용해줘요.”
자주 사용하라는 말에 소렐은 얼른 상자를 내려놓고 안에 있던 물건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갈색 가죽으로 엮인 손목시계였다.
“수업을 받을 테니 시간을 확인하는 게 가장 중요할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학생이 된 걸 축하해요, 공주님.”
라이킨은 직접 그녀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었다.
“고맙습니다.”
“고마우면 볼 때마다 내 생각도 좀 해주고.”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일상적인 일인 것처럼 중얼거렸다. 이 희고 가느다란 손목과 작은 손등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입술이 닿는다면 토끼는 도망가지 않을까?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에 뱀파이어의 목이 오히려 더 마르기 시작했다. 연약한 냄새가 코를 가득 채웠다. 라이킨은 빠르고 자연스럽게 손을 떼어냈다.
“그럼 갈까요?”
“직접 데려다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소렐은 다시 한번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 하지만 라이킨은 소파에 놓아두었던 외투를 이미 입고 있었다.
“그건 내가 안 된다니까요.”
라이킨도 즐겁게 다시 한번 거절했다. 맛보기는커녕 아직까지도 그를 멀찌감치 놓아두려고 안달인 소렐에게 그가 더 바싹 붙어 있어야지 별수 있나. 아쉬운 사람이 더 매달리는 법이다. 물론 라이킨은 종족마저 뛰어넘던 그의 매력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에 신선한 충격까지 받고 있었다.
“걱정되어서 안 됩니다.”
그가 열심히 의도를 가지고 던지는 말을 들어도 소렐은 열심히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또 안 좋은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지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아니, 그게 아니고……!
“저도 조심할게요.”
그것도 아니다.
“……예.”
그러나 뭐라 할 수 없었기에 라이킨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스스로 조심하는 건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내가 올 때도 데리러 올 겁니다.”
“네.”
“가서 기죽을 필요 없습니다.”
“저는 기죽지 않아요!”
소렐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도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박했다.
“그럼 겁먹지 말고요.”
“……네에.”
영 인정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는 투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내가 와서 수습할 테니 절대로 걱정하지 말아요. 시비 거는 놈이 있으면 그냥 때려요. 괜찮으니까.”
히익, 이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는 거람!
“사, 사람을 때리면 안 되죠…….”
“당하지는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겁먹지도 말고요.”
소렐의 얼굴이 뾰로통해졌다.
“……라이킨은 내가 애로 보이나 봐요.”
“전혀요.”
마땅히 그렇게 봐야 하는데,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문제지. 라이킨은 마차 좌석에 앉은 채 소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처음에 데리고 올 때만 해도 분명히 성인인 제 나이보다 훨씬 어린 소녀로 보았는데, 함께 산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변했지?
‘핏줄 탓인가?’
아니, 모든 토끼가 저렇게 귀엽지는 않았다. 그가 겪었던 사납고 커다란 헬레인 왕국의 호위병들, 혹은 성질 나쁜 왕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에겐 조금도 귀여운 구석이 없었다.
‘아니면 펠릭스 이드리스의 마법 탓인가?’
라이킨은 마법사는 아니지만, 마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대마법사가 이 위험한 뱀파이어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딸을 지킬 수 있고, 동시에 고대 마법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이 세상에 교활한 뱀파이어밖에 없다는 걸 알고 그가 얼마나 이를 갈았던가. 내 딸 눈에서 눈물이 났다간 네놈 눈에서는 피눈물이 날 줄 알아. 이건 진심이야. 마법사의 명예와 모든 지식을 걸고 진심이라고, 이 개자식아. 펠릭스가 보낸 편지 구절을 떠올리던 라이킨은 픽 웃었다. 그때 당시엔 펠릭스 이드리스의 자식에겐 정말 전혀 관심도 없었다.
‘피를 마시면 충족될까?’
소렐의 피를 마시면 이 갈증이 해소될까?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피를 원하는 갈증이 아니다.
“아, 다 왔다.”
소렐은 마차가 멈추기도 전에 내릴 준비를 했다. 대학 건물을 향해 수많은 마차들이 줄을 서서 가고 있었다.
“사람이 엄청 많아요!”
어디 보자. 라이킨은 줄줄이 내리는 학생들을 훑었다.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조용히 그를 붙잡고, ‘절대로 공주님의 차림새가 다른 학생들보다 못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안 그래도 힘없고 여린 토끼인데 차림새에서부터 얕보이면 안 된다나. 하긴, 모두가 다 외모를 보고 사람을 무의식중에 평가하곤 한다.
“예, 많군요. 그러면 우리도 내릴까요?”
라이킨은 아주 오래된 예법대로 먼저 마차에서 내린 뒤, 소렐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소렐은 이미 구르듯 마차 바깥으로 온몸을 던지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런.”
그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소렐을 곧바로 낚아채서 땅 위에 안전하게 내려주었다.
“다칩니다.”
“안 다쳐요, 제 운동신경은 제법 괜찮거든요!”
이럴 때보면 상당히 말괄량이 같기도 하다. 라이킨은 당장 안으로 뛰어가고 싶어 안달이 난 소렐의 가방을 잘 챙겨주었다.
“내가 데리러 올 겁니다.”
“네에, 알아요.”
그러니까 잔소리 그만 하고 얼른 가라는 표정이다. 며칠 같이 살았다고, 토끼도 제법 배짱이 늘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을 겁니다. 재미있게 잘 보내요.”
공주님께서 가라니 가야지.
“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 이따가 봐요. 환하게 웃은 소렐은 라이킨에게 손을 열심히 흔든 후에 휙 돌아섰다. 그러곤 아주 가벼운 걸음으로 나는 듯이 걸어갔다. 저리 좋을까? 하긴 그가 함께 글래스턴으로 가자고 했을 때도 쭈뼛대면서도 곧잘 따라왔던 소렐이다. 라이킨은 뒤돌아 몇 걸음 걸어가다 멈칫거렸다.
‘누가 어디 가자고 하면 어디든 잘 따라가는 거 아닌가?’
뱀파이어는 피가 식는 기분으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토끼가 팔랑팔랑, 춤을 추듯 걸어가고 있었다. 가서 적응은 잘 할까?
‘……애를 물가에 내놓은 기분이군.’
적당히 안전조치를 취해놓았지만, 그래도 어쩐지 신경이 쓰인다. 경계심은 많으면서도 순진한 구석이 있어서, 말 몇 마디로 꾀어내면 금방 좋다고 따라갈 텐데.
‘따라가긴 어딜 따라가, 내가 있는데.’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져서 라이킨은 미간을 좁히며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하긴, 데리고 오는 게 쉬웠던 것만큼 잃어버리는 것도 쉬운 게 세상 이치다. * 글래스턴 대학의 고풍스러운 건물과 오랜 역사는 단숨에 소렐의 마음을 빼앗아갔다. 그녀의 아빠도 이곳에서 오래도록 공부했고, 소렐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자, 여학생들은 이쪽으로 오세요. 그래요, 이쪽이에요. 우리 대학은 오래된 건물이 너무 많아서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학생답게 블라우스와 치마를 차려입은 소녀들이 주변을 둘러보며 교수를 따라갔다. 그 와중에도 자신을 특별히 꾸미고 싶어 리본을 더 단다든가, 혹은 소렐처럼 예쁜 브로치며 펜던트를 단 학생들도 꽤 있었다. 소렐은 괜히 라이킨이 매달아준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여러분이 입학하면, 앞으로 1년간은 매그놀리아 칼리지에서 공부하게 될 겁니다. 여성 인재를 키우기 위해 특별히 설립된 유서 깊은 여성교육기관이지요.”
그래서 엄마도 이곳에서 공부하다가 아빠를 만났다고 했다. 아주 오래전에.
“소렐 이드리스?”
“네.”
감상을 비집고 들어온 교수가 출석을 부르는 소리에 소렐은 얼른 대답했다. 감상에 빠질 틈이 없었다. 순식간에 시간표가 나눠지고, 학교 지리를 잘 익혀두라는 충고가 들렸다.
“이번 과정의 취지는 여러분이 대학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미리 경험해보는 것입니다.”
나이가 든 교수는 안경너머로 예비 신입생들을 보며 말했다.
“여러분은 앞으로 기하와 수학, 철학, 역사와 여러 가지 언어, 문학을 배울 겁니다.”
그리고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까? 좁디좁던 소렐 이드리스의 세상이 순식간에 넓어졌다.
“그럼 들어가서 앉을까요? 원하는 곳에 앉아요.”
처음 앉아보는 대학강의실은 무척 넓었다. 소녀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자리를 잡았다. 그중에 서로 아는 사이인 게 분명한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팔짱을 끼고 냉큼 무리를 지었다. 혼자인 사람은 긴장이 된다. 소렐은 라이킨이 특히 이 순간을 걱정했다는 건 전혀 몰랐지만, 토끼답게 무척 빠르게 자리를 하나 잡았다. 그녀는 공부를 하고 싶은 욕심이 가득했기 때문에, 당연히 앞자리였다.
‘주변에 마법사라곤 공주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중요한 순간에 뜬금없이 라이킨의 말이 생각났다. ‘마법사’라니. 마법을 할 줄 몰라서 공부라도 열심히 하겠다고 한 건데, 몹시 곤란했다.
‘점점 복잡하네.’
아빠가 돌아가셨던 것도 간신히 이겨내고 있는 중인데, 해야 할 일은 너무 많고 생각해야 할 것은 더 많다.
‘라이킨을 따라오는 게 아니었나? 하지만 아빠가 따라가라고 했으니까 그래야 하는데…….’
아빠가 분명히 그녀를 위한 조치를 취해놓았으니 그녀는 라이킨을 따라오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공부가 아닌, 마법부터 맞닥뜨리게 될 줄은 예상도 못 했다. 아빠는 이렇게 될 걸 다 알고 있었을까?
“자, 어서 앉아요.”
소렐은 교수의 말에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학생들은 이제 대강 자리를 잡아서 앉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옆에서 약간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소렐은 움찔거리며 옆자리에 앉는 학생을 바라보았다. 갈색 머리카락을 예쁘게 하나로 올려 묶은 소녀가 차분하게 앉았다.
“오늘은 여러분이 대학에 입학해서 배울 기초과목부터 설명한 뒤, 가장 많이 사용할 강의실을 둘러보겠어요.”
교수는 얄팍한 종이책자를 나누어주었다.
“우리 과목에 대해 설명하는 책자예요. 옆 사람에게도 나누어주고, 뒤로 돌리도록 해요.”
하필이면 소렐은 옆에 앉은 여학생에게 책자를 건네야 할 위치였다.
‘왜 하필 뱀파이어야?’
약간 희미하긴 했지만, 어쨌든 옆에 앉은 여자애는 뱀파이어인 것 같았다. 소렐은 저도 모르게 토끼 귀가 튀어나올까 봐 무척 긴장했다.
“옆으로 돌려요.”
옆으로, 옆으로. 소렐은 침착하려고 애쓰며 책자를 옆에 앉은 갈색 머리 여학생에게 건넸다.
“고마워.”
뜻밖의 친절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렐은 종이책자가 부스럭대는 소리 사이에서 조금 안도했다.
“근데 너한테서 뱀파이어 냄새 나.”
소렐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배시시 웃는 옆자리 여학생을 다시 쳐다보았다.
“어, 어?”
“너한테서 뱀파이어 냄새 난다고.”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런 악의도 없었으나, 소렐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누가 할 소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