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Call my name (7)2020.09.09.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라이킨은 다급히 소렐을 살폈다. 새파란 눈과 말간 검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같은 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동시에 말하지 않았다. 소렐은 뻗어오는 라이킨의 손에 붙들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몸에 닿진 않았어. 어떻게 된 거야?”
샤를렌이 폴리아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죄송해요. 우리가 일대일로 경기하다가 그만 실수를 크게 했네요. 죄송합니다.”
폴리아나는 소렐에게 즉시 깍듯하게 사과했다.
“괜찮아요, 다친 것도 없고 조금 놀랐을 뿐이니까요.”
소렐은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라이킨은 그대로 그녀를 감싸서 펜싱하우스 가장자리를 따라 준비된 자리로 갔다.
“잠깐 앉아 있어요. 물도 마시고.”
그가 너무 가까이 있었다. 인간이라고 하기엔 살짝 싸늘하면서도 아주 차갑지는 않은 체온과, 그녀를 집어삼킬 정도로 커다란 체격, 그리고 그녀를 감싸는 꽉 짜인 근육이 동시에 그녀를 옭아맸다. 소렐은 놀라서 그에게서 멀어지려 애썼다.
“괜찮은데……!”
그러나 라이킨은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용납하지도, 또 놓칠 정도로 둔하지도 않았다. 그는 기어이 그녀를 안다시피 해서 자리에 앉혔다. 라이킨의 커다랗고 힘줄이 돋은 손이 그녀에게 부드럽게 펼쳐졌다.
“놀랐잖습니까.”
소렐은 꼭 쥐고 있던 연습용 검도 라이킨이 휙 들고 가버리는 걸 보기만 해야 했다. 앉고 나서 보니 다리에 힘이 약간 풀리는 기분이었다. 놀라긴 놀란 건가? 하지만 그것보다, 아까 본 황금색 실은 뭐였을까?
‘사람들은 모르나?’
아무도 그녀와 그 사이에 이어진 가느다란 황금색 선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그 선인지 실인지 모를 것은 이젠 아주 희미해져서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라이킨이 걸어갈 때마다 쭉쭉 늘어났다.
“많이 놀랐어?”
라이킨과 비슷하게 푸른 눈과 금발을 지닌 키 큰 미인이 라이킨에 말을 걸었다. 그녀도 뱀파이어인 게 분명했다. 뱀파이어들끼리 한참 이야기하는 걸 멀리서 바라보던 소렐은 이젠 희미해진 황금색 실을 슬쩍 건드려보았다.
‘이게 뭐지?’
그때 라이킨이 반응이라도 하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 만지면 안 되나?’
소렐은 얼른 손을 떼고 가만히 앉았다. 라이킨이 다시 폴리아나와 샤를렌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소렐은 또 그 실을 발로 툭 건드렸다.
‘이게 대체 뭐야? 궁금해!’
혹시 결혼이란 걸 해서 이어진 건가? 소렐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실을 발로 톡톡 건드리다가 라이킨이 이쪽을 또 돌아보자, 얼른 다시 얌전하게 앉았다. 언제 실을 툭 건드렸냐는 듯, 아주 얌전하고 조용한 태도다.
“미안해요, 정말. 고의는 아니었어요.”
라이킨은 폴리아나와 그 일행의 사과를 귓등으로 흘리며 소렐을 보고 픽 웃었다.
“당연히 고의가 아니어야지.”
서릿발 같은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살벌하게 말을 하고서도 계속 슬쩍 다리를 동당거리는 소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신기했나 보다. 소렐은 그가 가져다준 물을 꼴깍꼴깍 마시면서도 그의 눈치를 살살 보다가, 기어코 또 실을 톡톡 건드리고, 잡아당겼다. 그러다 실이 휙 사라지자 그만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없어졌어!’
뭐지? 이거 뭐지? 어떻게 된 거지? 소렐은 사라진 실인지 끈인지가 어디로 갔는지 계속 찾아보았지만, 그건 공기 중에 녹아버린 것처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물은 다 마셨습니까?”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라이킨이 돌아왔다. 그의 뒤에는 그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함께했다. 양손으로 얼른 물컵을 붙잡은 소렐은 고개를 흔들었다.
“천천히 마셔요.”
라이킨은 그녀의 곁에 앉았다. 소렐의 눈은 저절로 그와 함께 온 금발머리 여자에게 가닿았다.
“한 사람을 더 소개해야겠군요.”
소렐은 천천히 물컵을 내렸다. 라이킨은 그걸 받아다 옆에 내려놓았다. 금발머리 뱀파이어는 라이킨이 그랬듯, 그녀를 보며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라이킨이 여자라면 아마 저렇게 생겼을 거다.
“공주님, 내 하나뿐인 여동생입니다. 제인 샤를렌 칼리에르지요.”
“안녕하세요, 공주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샤를렌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아주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소렐은 홀린 듯이 그녀를 바라보며 손을 마주 잡았다.
“안녕하세요…….”
남매가 똑같이 생겼어! 똑같이 반짝거려! 세상에! 뱀파이어들은 다 치명적일 정도로 예쁘고 멋있다더니, 이 남매는 정말 독보적이었다.
“저도 만나 뵙게 되어 기뻐요.”
수줍게 말하는 소렐은 뱀파이어의 눈에 무척 말랑말랑하고 뽀얗게 보였다. 샤를렌은 다시 한번 제 하나밖에 없는 오빠를 쳐다보았다.
‘도둑놈.’
‘뭐.’
남매간의 소리 없는 대화를 알아차리기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소렐은 흰 펜싱복을 근사하게 차려입은 샤를렌에게 다시 한번 인사했다.
“방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펜싱하우스에서는 그런 사고가 하루에도 두어 번씩 나요. 항상 조심해야지요.”
“깜짝 놀랐어요.”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네. 감사합니다.”
라이킨은 다시 소렐에게 물컵을 내밀었다.
“잠깐 쉬는 게 좋겠습니다.”
“펜싱 재미있어요, 라이킨.”
“아, 재미있습니까? 다행이군요.”
그가 빙그레 웃는 걸 가증스럽다는 듯 보고 있던 샤를렌이 툭 끼어들었다.
“이름을 부르네요.”
소렐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이름이요?”
“샤를렌.”
라이킨이 경고조로 동생의 이름을 불렀지만, 샤를렌은 무릎을 접고 작은 공주와 눈을 마주쳐가며 웃었다.
“네, 뱀파이어의 진짜 이름이요. 제임스나 제인처럼 고리타분하고 성의 없는 이름 말고.”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제인 샤를렌 칼리에르.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모두 중간 이름이 훨씬 더 독특하고 흔하지 않았다. 그리고 약간, 앞의 이름과 영 조화롭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나도 샤를렌이라고 불러주세요, 공주님.”
샤를렌은 눈을 휘며 웃었다. 라이킨이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보든 말든, 그녀는 오빠를 짜증나게 할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자그마한 공주는 무척 귀여웠다. 어떤 의미에서 저 머저리 같은 혈육이 바람 빠진 고무처럼 피식피식 웃는지 대충 알겠다.
“저도 소렐이라고 불러주세요.”
수줍게 대답하는 거 봐라. 얼마나 순진하고 말가니 예쁜가. 샤를렌은 같이 웃어주다가도 제 오빠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저 도둑놈.
“라이킨에게 여동생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요. 결혼한 사이에 왜 말도 안 해줬을까요? 소개도 늦게 해주고 말이에요. 꼭 지 혼자 공주님이랑 놀려고 하는 것처럼.”
라이킨은 팔짱을 꼈다.
“공주님이 아직 여기가 많이 낯설고 뱀파이어는 어색하셔서.”
“그럼 남편도 어색하겠네. 저 뱀파이어가 잘해줘요?”
세 사람의 대화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소렐은 슬그머니 라이킨을 쳐다보았다. 잘해주냐고?
“네.”
여태까지 별문제는 없었다. 괜찮았다. 다만 상대가 뱀파이어라서 그렇지. 지나치게 아름답지만, 동시에 위험한 생물. 마치 독을 품은 가시를 지닌 화려한 장미 같다.
“해달라는 대로 해주고, 외박도 하라고 해줘야 할 텐데…….”
샤를렌은 말끝을 흐리며 제 오빠를 쳐다보았다. 마치 ‘네가 그런 걸 막는다면 진짜 양심을 상실한 거다, 이 개새끼야’라는 시선이다.
“저는 아직까지는 공부만 하면 괜찮아요.”
“그렇다면 시야를 더 많이 넓혀야겠네요. 그래야 뭘 바라든지 하지. 내가 도와줄까요?”
샤를렌이 화사하게 웃었다.
“잘 부탁드려요.”
소렐은 일단 인사를 했다. 그녀가 인사하는 사이, 남매간의 사나운 눈빛이 오고 갔다.
‘네가 왜 끼어들어?’
‘도와주겠다는데 뭐가 불만이야, 이 도둑놈아.’
오빠를 사정없이 비난하다 못해 미생물 정도로 쳐다보는 눈빛을 던져놓고, 샤를렌은 소렐과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나도 잘 부탁해요.”
“저, 음, 샤를렌?”
“네.”
“샤를렌도 교수님이세요?”
“아니요, 천만에요. 나는 공부를 하거나 오래된 학문을 연구하는 건 딱 질색이거든요.”
샤를렌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서 공부는 짧게 했어요. 지금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고요. 나중에 명함 줄게요. 저놈이랑 무슨 문제 생기면 나한테 와요.”
“그럴 일은 없어.”
“오빠한테 지나치게 깜찍하고 예쁜 공주님이야.”
깜찍하고 예쁘다고? 소렐은 그녀가 본받고 싶을 정도로 멋지고 당당한 샤를렌을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았다. 라이킨은 ‘그에게 지나치게 깜찍하고 예쁜’ 아내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양 뺨이 발그레해졌다.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렐을 칭찬하기보단 오빠를 공격하는 의도였던 샤를렌은 멈칫하고 말았다. 저 순진한 공주님은 아직까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 보다. 아니면 너무나 선하고 착하든가. 어느 쪽이든 교활한 오빠에게는 너무나 아까웠다. 아이구. 샤를렌은 오빠가 눈을 번뜩이고 있는 걸 싹 무시하고 소렐의 앞에 살짝 허리를 접었다.
“끝나고 나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요? 케이크를 아주 기가 막히게 잘하는 찻집을 알고 있는데.”
그때 소렐이 만일 라이킨의 눈치를 살피거나, 허락을 구했다면 샤를렌은 오빠에게 주저 없이 검을 내질렀을 거다.
“네!”
좋아. 일단은 다행이다.
“그럼 오늘 수업을 다 마치고 봐요. 나도 이제 막 왔거든.”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돌아서서 걸어갔다. 사실 그녀가 물러난 건, 라이킨이 ‘적당히 친한 척해라’라고 눈으로 경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혈육이라 해도 라이킨은 라이킨이다.
“멋있는 동생분을 두셨네요.”
소렐이 라이킨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예. 그렇지요.”
그런데 나는? 라이킨은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쓸데없이 그런 게 궁금했다.
“저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아까 황금실은 뭐예요? 혹시 라이킨도 봤어요? 궁금한 건 많았지만 소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해요.”
배우는 데 집중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창가에 선 라이킨이 웃는 순간 생각이 조금 흐트러졌다.
“그럴까요.”
그는 가만히 있어도 묘한 분위기와 은밀한 느낌을 자아내는 남자였다.
“그럼, 공주님. 하던 얘기를 마저 할까요. 펜싱은 운동이고, 공주님이 원하는 생존방식과는 조금 다릅니다. 적들이 전부 규칙을 준수해가며 싸우지는 않으니까요.”
그런 남자가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그녀를 가까이 이끌고, 직접 검을 쥐여 준다는 건 아무리 순진한 소렐이라도 야릇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힐끔대고 있었다.
“검을 맞대고.”
그들의 검이 얽혔다. 동시에 라이킨은 아주 빠르게 소렐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뱀파이어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드디어 다시 그녀의 시선 안에 그가 가득 찼다. 그만 꽉 들어찼다.
“이 거리까지 오는 순간 공주님은 진 겁니다.”
소렐은 열심히 그의 검을 밀어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는 당연히 꿈쩍도 하지 않았고, 두 사람의 시선과 검만 더 지독하게 얽혔다.
“그러니 누구든 이 거리까지 오는 건 절대로 허용하지 말아요.”
알려주는 말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소렐을 향한 그의 시선은 언제나 그렇듯 온화하기만 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피를 갈구하는 뱀파이어인데, 과연 저 시선이 오롯이 진심만을 담고 있을까?
“……라이킨은 여기까지 왔네요.”
소렐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고 말하는 말이다. 하지만 상당히 도발적인 말이기도 했다. 그래. 눈을 치뜨고, 그를 보고 살짝 웃기만 한다 해도 밤까지 내내 함께 있자는 신호로 보이겠다. 라이킨은 소렐은 절대 이유를 모를 쓴웃음을 지었다.
“예. 저는 그렇지요.”
어쩐지 ‘그’만은 그럴 수 있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절대로 이 거리는 허용하지 말아요. 닿기 전에 떼어내요.”
“어떻게요?”
“할 수 있잖습니까. 아까 했듯 말입니다.”
아까? 기억을 더듬던 소렐의 눈이 커졌다.
“예.”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고는 소렐을 놔주었다.
“그 힘 말입니다.”
소렐만이 가지고 있는 마법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눈치채셨어요?”
“나는 눈치챘습니다만, 다른 이는 어떨지 모르겠군요.”
라이킨은 손을 뻗어 약간 흐트러진 소렐의 보호구를 다시 반듯하게 해주었다. 소렐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마침 폴리아나 그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소렐과 라이킨이 어느 정도 적당한 거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본 뒤에 펜싱하우스를 나갔다.
“어딜 보고 있습니까?”
“아, 죄송해요.”
소렐은 퍼뜩 놀라 라이킨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녀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봤던 곳을 보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사라진다. 라이킨은 무표정한 얼굴을 돌렸다.
“나와 함께 있을 때는 나에게 집중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죄송하다고 사과할 건 없고요.”
그는 잡고 있던 소렐의 보호구에서 손을 뗐다.
“그냥 내 욕심입니다.”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이 순진한 공주님이 얼마나 알아들었으려나?
“열심히 할게요.”
역시나 알아듣지 못했다. 소렐은 검을 쥐고 아주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시간에는 선생님에게 집중해야지!
“예.”
그러나 그마저도 기특하고 귀여워서 라이킨은 또 웃어버렸다.
“근데, 라이킨, 아까 그……, 그거도 봤어요?”
“황금색 실 같은 것 말입니까. 예. 봤습니다.”
“뭔지 알아요?”
“여기에서는 사람이 많으니 나중에 단둘이 있을 때 말해주겠습니다.”
소곤소곤, 머리를 맞대고 서로 진지하게 말하는 부부를 멀리서 보던 샤를렌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옘병…….”
저 새끼가 순진한 토끼를 데리고 정말 염병을 떨고 앉았다.